3. 大華嚴의 一乘法界圖 - 東土義湘述 -

我爲法王이라 於法에 自在하야 拈放이 在我하고 與奪이 臨時일새 將此一圖하야 作一法界로다 咄하다

내가 법왕이 되어 법에 자재하여 잡고 놓음이 내게 있고, 주고 빼앗음을 때에 맞추니 이 한 그림을 가져다가  

一法界= 하나의 진리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咄” 꾸짖도다     

[ 집을 , 꾸짖을 , 與奪여탈=주는 일과 빼앗는 , , 빼앗을 , 임할 ]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법의 왕인지라 법에 자유자재해서 그것들을 법이라 하든지, 법이 아니라 하든지 모든 결정은 각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이와 같은 그림 장을 그려놓고 법계라고 하였습니다.

어떤가요? 거기에 무슨 사량 분별을 붙이겠습니까? , 저는咄”입니다.

咄이란 앞에 있었던 어떤 고준한 법문도 부정하여 쓸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의미로 咄”을 남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1 法性圓融無二相

이제 본론인 법성게에 접어들었습니다. 法性이란 말은 법과 성으로 읽기도하고, 법의 본성으로 읽기도합니다. 설잠스님은 법과 성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동안에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했든지 모두 내려놓고 천하의 매월당 설잠스님의 해석을 의지하고 따라가 봅시다. 이런 설명을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法者는 即六根門頭에 森羅萬像인 情與無情也요

性者는 六根門頭에 常常受用하대 計較摸索不得底消息也()

법이란 곧 6근 문 앞의 삼라만상인 有情과 無情이요.

성이란 6근 문 앞에서 끊임없이 受用하되 計較하고 모색할 수 없는 바의 소식이니라.

“法”이란 우리들이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무정들의 차별현상을 모두 한꺼번에 일컫는 말입니다.

“性”이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무정들의 차별현상을 모두 수용하되 그 수용하는 당체며ㆍ본질이며ㆍ근본성품을 뜻합니다.

 

圓融者는 一切法이 即一切性이며 一切性이 即一切法이며

即今의 靑山綠水가 即是本來性이며 本來性이 即是靑山綠水也요

“圓融”이란 일체의 법이 곧 일체의 성이며, 일체의 성이란 곧 일체의 법이니, 곧 지금의 푸른 산ㆍ맑은 물이 바로 본래의 성품이며, 본래의 성품이 곧 푸른 산ㆍ맑은 물이니라.  

원융하다는 것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으로, 보고 듣고 인식하는 온갖 삼라만상과 산천초목과 유정무정들의 차별현상을 수용하는 본성과 차별현상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나누어 다른 것이라고 없다는 뜻입니다.

 

法性偈 禪解 - 法性圓融無二相 -

無二相者는 靑山綠水와 本來性이 元是一箇王太白일새

本來無二也로대 但以世人이 妄生分別로 遂有我人하도다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란 푸른 산ㆍ맑은 물과 본래의 성품이 원래 한 개의 王太白= 아주 깨끗한 바탕이라 본래 두 가지가 아니건만 다만 세상 사람들이 부질없이 분별을 냄으로써 드디어 나와 남이 있게 되었도다. [ 드디어 , 따를 수]

無二란 不二와도 같은 뜻입니다. 불이법문이라면 유마경에서 유마거사의 침묵을 가장 으뜸으로 칩니다.

청산녹수와 그 청산녹수의 본래의 근본성품이 원래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니라면 구태여 둘이 아니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묵묵히 있을 뿐입니다.

청산은 청산대로 녹수는 녹수대로 그냥 그렇게 여여하게 있기 때문입니다.왜 굳이 설명하여 나누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法性圓融無二相 -

於淸淨無礙中에 瞥生異念()할새 作十法界하야 熾然作用하니라

또 청정하여 걸림이 없는 가운데서 별안간 다른 생각을 냄으로써 열 가지 법계를 날조하여 맹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 모을 열]

람들이 사량하고 분별하는 의식작용은 대단히 위대히 하기에 오늘날과 같은 놀라운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으나, 한편 그 분별하는 생각으로 인하여 각양각색의 차별상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를테면 十界 또는 十法界라고하여, 법화경에서는 여섯 가지의 범부의 세계인 지옥ㆍ아귀ㆍ축생ㆍ아수라ㆍ인간ㆍ천상을 두었고, 다시 성인들의 세계인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을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차별현상들이 세상을 온통 천태만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法性圓融無二相 - ⑤

要知不礙底消息麽아 微塵刹境에 自他가 不隔於毫釐(호리)하고 十世古今에 始終이 不離於當念이로다

걸림이 없는 바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가? “미진수 세계의 자타가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으며, 十世古今의 처음과 끝이

當念= 순간의 생각을 떠나지 않았도다.” [ , 이를 , 이를 저]

설사 그렇더라도 그와 같은 차별현상과 천태만상들이 서로서로 걸리지 않는 도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가요?

밝은 눈을 뜨고 보면, 미세먼지와 작은 세포들에서부터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70억 사람과 그 수천만 배나 되는 다른 생명체들과 우주공간에 떠 있는 무량무수한 별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공간적으로 털끝만큼의 간격이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수억만 과거와, 수억만 미래안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그 과거에서 다시 과거ㆍ현재ㆍ미래 등으로 무한히 나눠지고 세분화되는 일체시간들이 지금 이 순간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 諸法不動本來寂

이치는 묵묵히 스스로 계합할 뿐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느니 본래부터 고요하다느니 하는 표현들은 처음부터 모순을 뒤집어쓰고 하는 말입니다. 흙이 잔뜩 묻은 걸레로 깨끗한 방을 청소하려는 격이며, 건강한 피부를 긁어서 상처를 내는 일일 입니다.

諸法은 即前에 現前一切受用也요

不動者는 即前에 計較摸索不得也요

本來寂者는 即前에 無二相이니所謂不動絲毫하야 合本然也이어니와

道箇本然이 早是動也니 畢竟에 如何오 癡人面前에 不得說夢이로다

“모든 법”이란 곧 앞에 나타난 일체를 수용하는 것이지요,

“움직이지 아니함”이란 곧 앞에서의 헤아리고 찾아도 찾을 수 없음이요,

“본래부터 고요함”이란 곧 앞에서 말한 “두 모양이 없음”이니, 이른바 실 끝만큼도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그러한 자리에 합한 것이다.

“본래 그러한 자리”라고 부르면 벌써 움직인 것이니 필경에 어떠한 것인가.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말하지 말라.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방편을 쓰지 아니하면 그나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 꿈을 말하지 말라.”라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잘못하면 꿈이, 꿈이 아니고 사실인줄 알아듣고는 동네방네 퍼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밖에 호랑이가 왔다는 말을 듣고 울음을 그치는 아이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法性偈 禪解 - 無名無相絶一切 - ① 3

 無名無相絶一切

금강경 오가해 서문에 “여기에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고금을 관통하고, 작은 먼지 속에 있으나 동서남북과 상하를 에워싸고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6 스님은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명자도 없으나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며,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옻과 같아서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으나 움직이는 가운데서 거두어들이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法性偈 禪解 - 無名無相絶一切 - ②

到這裏하야는 非佛非菩薩이며 非二乘非凡夫며 非法非非法이며 非法性非非法性이며 非緣起非證分이니

可以名으로 目耶아

可以相으로 知見耶아

一切攀緣과 擬議가 都沒하니 奈何方信道리오 欲言하대 言不及하니 林下에 이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부처님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며, 이승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며, 연기도 아니고 연기 아님도 아니니, 이름으로 지목할 수 있겠는가?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일체의 반연과 헤아림이 모두 사라진 것이니 어찌하랴 바야흐로 사실인 것을. “말하고 싶지만 말이 미치지 않으니 숲속에 들어가서 잘 생각해보라.” [, , 어찌 내]

산속에 들어가서 참구하는 일도 이것을 참구하는 일이며, 선방에 앉아서 참구하는 일도 이것을 참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 모두 이것이 작동하는 것이며, 1 1초도 이것이 빠지면 존재할 없는 것이어서 자나 깨나ㆍ가나오나ㆍ앉으나 서나 시키지 않아도 너무나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달리 찾고 있으니 어쩌자는 말입니까?

 

法性偈 禪解 - 證智所知非餘境 - ①4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 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

화엄경에서 밝히고 있는 이치는 모두가 쉽게 납득이 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화엄경 구절부터 살펴봅시다.

“세존이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나니, 땅들이 모두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더라.”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요? 물건의 실체를 깨달았습니다.

물건의 실체를 깨닫고 나니, 순간 세상이 온통 금은보화와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졌으며, 차디찬 바위위에 앉아 있었으나 바위는 매우 화려하고 크고 높으며 역시 금은보화로 꾸며진 사자좌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화엄경의 宗旨를 이렇게 읊었습니다. “아름다워라 세상이여, 환희로워라 인생이여, ! 이대로가 화장장엄세계요,이대로가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인 것을.

이러한 경지를 어찌 아무나 알겠습니까?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있는 도리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이러한 이치를 반드시 깨달아야만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과제입니다.

 

法性偈 禪解 - 證智所知非餘境 - ②

三世諸佛之所證이 證此者也요

歷代禪師之所悟도 悟此者也요  

自靈峰少室已後로 代代相承하야 連芳續焰者가 不知其幾何로대 但契此而已라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바가 이것을 깨달은 것이요, 역대선사가 깨달은 바도 이것을 깨달은 것이니,

영축산 봉우리와 少林窟소림굴로부터 이후에 대대로 이어받아서 향기를 이어가고 불꽃을 이은 사람의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되, 다만 이것에 계합하였을 따름이다.

불교의 역사란 다름이 아닙니다. 오직 이러한 이치 하나를 깨달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1000ㆍ수만 년을 이어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평생 호의호식할 있도록 물질을 제공하는 일에 우선하여, 이와 같은 이치와 인과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값지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法性偈 禪解 - 證智所知非餘境 - ③

境者는 如上所云의 絶一切者니 有分之境也라

伊麽인댄 則這 與世間境으로 同耶아 異耶아

“경계”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일체를 떠난 것이니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경계가 아니다. 이러한즉 이 경계와 세간의 경계가 같은가, 다른가?

불교의 가르침 모두가 인생 교과서입니다. 더구나 화엄경은 방대한 8만대장경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인생 교과서입니다. 그렇다면 경계가 아무리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도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5욕과 6근을 가진 세속적 삶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이르러 없는 경계와, 세상 사람들의 망상분별의 경계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필자가 스스로 대답합니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습니다. 결국은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둘이 아닙니다.

 

法性偈 禪解 - 證智所知非餘境 - ④

良久云 大丈夫가 秉慧(병혜인)하니 般若鋒兮여 金剛焰이라 非但能摧外道心이요 早曾落却天魔膽이로다

, 再犯不容이로다

잠자코 있다가 이르되,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았으니 반야의 칼날에 금강의 불꽃이구나. 다만 능히 외도의 마음만을 꺾은 것이 아니라 벌써 天魔의 간담을 떨어뜨렸다네.”

“咄,   재차 범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리라.” [ 어조사 혜]

설잠스님은 길지 않은 글인데도 선문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글은 영가스님의 證道歌의 구절입니다.

앞에서 밝힌 고준한 경계,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바요,   밖의 경계가 아닌... (證智所知非餘境) 세계는 불교의 정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서 지혜의 칼을 지닌 사람들의 경계입니다.

정법과 거리가 있는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기타 다른 종교나 다른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엿볼 없는 경지입니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 이것이 咄의 의미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①5

眞性甚深極微妙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니 

진실로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면 이렇게 말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수많은 중생들이 의상스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설사 허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자비심 많은 보살은 그냥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므로 (無名無相絶一切)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바요,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 (證智所知非餘境)라고만 하고 보살성인이 조용히 침묵만을 지키고 자신의 인기 관리만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보살입니까? 그것이 무슨 화엄행자입니까? 설사 똥칠을 하고 흙칠을 당하더라도 지극히 미묘한 이치를 헐어서 중생들에게 맛을 보여야할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②

若論大華嚴의 重重無盡法界ㄴ댄 不涉唇吻하야 早是說了也며 不干敎乘하야 早已演了也라

만약 대화엄의 중중하여 다함이 없는 법계를 논할진댄 입술을 거치지 않고서 벌써 설하여 마친 것이며, 교승에 관계치 않고서 벌써 연설하여 마친 것이다. [ 입술 , 입술 순]

중중ㆍ중중ㆍ중중하고, 무진ㆍ무진ㆍ무진한 우주법계란 실로 불가사의합니다.  사람의 신체를 중심으로 작은 쪽으로 무한히 작게 세분하여도 끝이 없으며, 쪽으로 무한히 확대해 나아가도 또한 끝이 없습니다.

경전에서 2600 전에 일찍이 방울의 물속에 84000 충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즘의 과학으로 우리들 몸속에 100조의 세포가 있고 낱낱 세포 속에 다시 100조의 세포가 있어서 무한히 분화되고 복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과학이 발달하여 얼마나 멀리까지 위성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지를 압니까? 허블망원경으로 100 광년 멀리까지 무한히 우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지구와 같은 자연환경을 지닌 별을 찾기에 과학자들은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화엄경에서 말하고 있는 화장장엄세계 그대로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③

直饒溪聲으로 爲舌相하고 山色으로 爲身器하고 盡山河大地로 爲寂場하고

惣情非情으로 爲衆會라도 言說을 不着이요

讚揚 難盡이어늘  湘師가 入無綘罅處(하)하야 强生穿鑿(천착)하니 所謂彼旣無瘡이어든 勿傷之也라

설사 시냇물소리로 혀를 삼고, 산색으로 몸을 삼으며, 온 산하대지로 寂滅道場을 삼고, 모든 유정과 비정으로 대중들의 모임을 삼는다고 하여도, 말을 붙일 수 없고 찬양을 다하기 어렵거늘, 의상법사가 구멍을 꿰맨 데가 없는 곳에 들어가 억지로 천착을 내었으니, 이른바 “그에게 이미 상처가 없다면 더 이상 상처를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 바쁠 , 모두 , 황홀할 / 부스럼 창]

당송 8대가 蘇東坡소동파거사가 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 흔히 그의 오도송이라고도 합니다.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부처님의 크고 설법이거늘산천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어찌 청정법신 부처님이 아니랴. 밤이 되니 팔만사천의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겠는가.

눈을 사람들의 안목에서 보면 그대로 아무런 탈이 없는 존재이거늘 달리 무슨 입을 놀려 왈가왈부하겠습니까?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④

雖然이나 敎海波瀾(란)이 不礙黙味ㄹ새 湘師가 坐寬하사 蕩蕩地하야 任他道하대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요 無名無相絶一切하니證智所知非餘境이라

四句가 道盡了也니 不搽紅粉(차)에 便有風流의 氣象이로다

비록 그러나 가르침의 바다가 넓고 깊음이 침묵의 맛에 방해되지 아니하기에 의상법사가 坐寬좌관= 포용하여 걸림 없이 탕탕하게 이르되  “법과 성이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니,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 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라고 한 이 네 구절에서 모두 다 말해버린 것이니, 붉은 분을 바르지 않고도 풍류가 있는 氣象이다.[坐 않을 좌, 寬 너그러울 관]

고인이 승찬대사의 신심명을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는 구절에서 모두 말해버렸으며 이하는 모두가 구절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법성게를 공부하는 이들은 말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⑤

且道하라 四句에 還有思量計較 分別意識也無아

自寂場으로 至于今日히 便是一條鐵이라 接觜處()로대 

湘師가 慈悲之故로 不惜眉毛하고 有落草之談하야 便하대 眞性이 甚深하야 極微妙라하니  

早是十分帶泥帶水去也어든 山僧이 今日에 重爲注脚하니 葛藤이 不少로다  

또한 일러 보아라. 이 네 구절에 또한 그대의 사량계교와 분별의식이 있는가?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덩이라서 그대의 주둥이를 댈 곳이 없는데, 의상법사가 자비한 까닭에 눈썹을 아끼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말을 하여 곧바로 이르되,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라고 한 것이니, 벌써 충분할 만큼 진흙과 물을 뒤집어쓴 것인데, 산승이 오늘 거듭 注脚을 내니 葛藤= 허물이 적지 않도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寂場= 적멸도량이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도량을 말합니다.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덩이라서 그대의 주둥이를 곳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이 이미 입을 다물었거늘 누가 무엇을 안다고 부처님이 깨달은 것에 대해서 횡설수설할 수가 있겠는가? 모두가 허물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잘못을 감수하면서 왈가왈부해 보는 일입니다.

그래도 깨달은 사람들의 자비심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말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천하의 제일가는 명언을 우레처럼 진동시켜 세상에 큰비를 내려 흠뻑 적시게 것입니다.어찌 “진흙과 물을 뒤집어쓴 것”이라고만 것입니까?

설잠스님도 “주각을 내어 허물이 적지 않다.”라고는 하였으나 또한 기존의 교리적 해석에서 선사의 안목으로 禪理로 거량하였으니 또한 기쁘지 않습니까?

만약 설잠스님의 말씀대로라면 필자는 어쩌란 말입니까?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⑦

前에 云한 法性者는 融淨穢하고 通眞俗하야 所謂不可取不可捨니 若除一切ㄴ댄 不得全法界之智하고

若添一事ㄴ댄 不得名淸淨之界者也어니와

앞에서 말한 “法性이란 淨과 穢를 융화하고 眞과 俗에 통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함이니, 만약 일체를 제한다면 法界의 지혜를 온전히 얻지 못하고, 만약 하나의 일이라도 덧붙이면 청정법계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것이다.

眞性의 의미가 法性의 의미와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다시 법성의 뜻을 거론하였습니다. 

“法性이란 淨과 穢를 융화하고 眞과 俗에 통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본래 그대로입니다. 달리 무슨 취할 것이 있고, 버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과 우주가 본래로 청정법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분해서 말하면 진성과는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점이 있습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⑧

此云 眞性者는 別取有情門中에 證入分하니 退身一步하야 假作眞性之名이요

非指法性外에 別有一段眞性也라

여기에서 말한 眞性이란 따로 有情門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로 진리를 증득하는 것= 證入分을 취한 것이니, 몸을 한 발 물리어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요, 법성밖에 따로 일단의 진성이 있다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크게 보면 진성도 모두 법성에 포함되지만 굳이 진성이라고 했을 때는 사람으로서 참다운 지혜로 진리를 증득하는 성품을 임시로 가설하여 진성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법성밖에 따로 진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사람의 성품도 모두가 법성 안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⑨

若是藏人이 竪看에 有分커나 若是圓頓機中에 橫看인댄 早是錯了也니 不竪不橫하고 且道하라

是什麽消息고 橫竪는 且置一邊하고 作麽生是甚深底道里오

만약 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次第를 밟아 보게 되어 있다거나 = 竪看有分  만약 圓頓의 근기에 속한  사람 중에서는 橫看= 일거에 보기 마련이라고 하면 벌써 틀려버린 것이니, 차제도 말고 일거도 말고서 어쨌든 말해보라.  이것이 어떠한 소식인가 [ 더벅머리 , 세울 , 흐릴 ]

橫竪= 차제니 일거니 함은 우선 치워두고 무엇이 “매우 깊다.”는 바의 도리인가.  

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란 三藏敎인 修多羅藏과 毘尼藏과 阿毘曇藏을 배우는 사람을 말하며, 대승과 소승에 통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특히 소승교를 달리 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승교의 사람들은 범부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3아승지겁 등의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차제를 밟아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대로 화엄경과 같은 圓頓敎의 이치에 속한 사람은 처음 발심할 때에 곧바로 정각을 이루어서 시간을 요하지 않고, 일거에 모든 수행을 마쳐버립니다.

아무튼 가지를 제쳐두고 “매우 깊다.”라는 도리란 무엇일까요?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⑩

以謂眞也에 全是夢幻이요 以謂假也에 純是實相이니 非性非相이며 非眞非假로대

而性而相하며 而眞而假일새 故로 云하대 甚深也라하니라

眞이라고 말함에 전부가 夢幻이요. 假라고 말함에 순전히 실상이니, 성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진도 아니고 가도 아니지만, 성품이면서 형상이고 진이면서 가이기 때문에 “매우 깊다.”고 한 것이다.

“참다운 성품은 매우 깊다.”라는 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참다운 성품을 누가 알겠습니까?  참다운 성품이라고 하니 어느새 낱낱이 꿈이요 환영이며, 거짓 성품이라고 하니 어느새 낱낱이 순전히 진실한 모습입니다.

물건은 참도 되고 거짓도 되며, 성품도 되고 형상도 되는지라 진실로 종잡을 없습니다.

화엄의 안목으로 보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양면을 부정하면서 양면을 수용하는 중도적 견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매우 깊다.”고 것입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⑪

契文殊之妙智하대 宛是初心이니 則深也를 不可得이요

入普賢之玄門하대 曾無別體니 則淺也를 不可得이라

文殊의 妙智에 계합하되 완연히 初心이니 “깊다.”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普賢의 玄門에 들어갔으되 일찍이 別體인 적이 없으니 “얕다.”고 함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불법을 만나 수행하고 수행을 해서 궁극에 이르러 있는 경지가 문수보살이 터득한 미묘한 지혜라고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마음 그대로입니다. 그런 것을 달리 “깊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설사 보현보살의 현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특별한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람ㆍ사람이 본래로 갖춘 것이어서 “얕다. 것은 아닙니다.

 

法性偈 禪解 - 眞性甚深極微妙 - ⑫

妙有는 得之而不有ㄹ새 眞也를 不可得이며 眞空은 得之而不空일새 假也를 불가득이라

理絶名言이 謂智斷修證일새 故로 云하대 極微妙也라하니 還會麽아

莫謂如來가 成斷滅하라 一聲이 還續一聲來로다

妙有는 이것을 얻되 있지 아니한 까닭에 眞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眞空은 이것을 얻되 공하지 아니한 까닭에 假라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치가 이름과 언어를 여읜다 함은 지혜를 닦아 증득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도대체 알기나 하는가? “여래가 斷滅을 이룬다고 하지 말라. 한 소리가 또한 한 소리를 잇대어 오도다.”

묘하게 있음도 眞性을 얻어서 있으므로 있으나 있지 아니하여 참됨을 얻을 없으며, 참으로 비었음도 진성을 얻어서 비었으므로 비지 아니하여 거짓을 얻을 없습니다.

이름이나 말로는 표현할 없고, 지혜는 닦아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다.”고 것입니다.

흔히 진공이라고 하면 진공을 터득한 여래는 斷滅=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알지 마세요. 실체가 없는 소리도 다시 소리가 이어져서 계속됩니다. 그것이 妙有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묘유에 집착하지 마세요. 妙有인 眞空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