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覺林菩薩의 讚歎 [淨慧세계, 最上眼佛]
[[覺林보살은 善法行으로서 力바라밀을 주재한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명호가 不動優婆夷인 것은 제9 法師位인데, 어째서 여자 몸이 되었는가 하면 법사위에 처할 때 정결하고 자비롭고 유연함을 밝힌 것이기에 여인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 여인의 발심이 염부제의 微塵劫을 거치면서도 발심으로부터 오기에 마음에 일념도 없고 5욕의 상념도 없는 것은 정결과 자비와 유연함이 바로 법사의 덕임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의 명호를 각림이라하는 것이니 역바라밀을 주재한다. 각림보살은 행을 행하는 사람이며, 淨慧세계는 수행의 법이며, 最上眼佛은 수행하는 바의 果이니, 지혜가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가 최상안이다.]]
[[각림보살은 한마디로 마음에 대해 설했다고 할 수 있는데 화엄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唯心偈와 破地獄偈가 설해졌다. 특히 唯心偈에는 화엄경의 주요 사상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唯心思想과 一心思想을 잘 드러내어 마음을 내세우는 모든 종파의 所依經典이 되었다. 게송을 살펴보자.
"마음이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五蘊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네."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네."
이 가운데 첫 번째 게송에서 나타난 마음은 妄心이다. 즉 마음을 妄心으로 해석한 유식의 제8야뢰야식에 의한 뢰야연기의 所依處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화엄종에서는 화엄경의 一心을 여래장 자성청정심과 여래성기심으로 이해하여 법계연기를 체계화시켰으며, 이 一心을 一眞法界의 體로 보고, 萬德을 구족했으며 圓融하며 萬有를 다 포섭한다고 보았다.
두 번째 게송이 바로 이러한 화엄사상의 所依處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게송은 60화엄의 게송이 더 많이 알려졌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과 같아 부처도 그러하고 부처와 같아 중생도 그러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다음은 破地獄偈인데, 이것은 80화엄의 게송이 더 잘 알려졌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 부처님을 알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이 모든 것이 마음으로 된 줄을 보라"]]
(1) 就事相現法
爾時에 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遍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譬如工畵師가 分布諸彩色하고 虛妄取異相이나 大種無差別이니
大種中無色이며 色中無大種이로대 亦不離大種하고 而有色可得이로다
爾時에 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遍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이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譬如工畵師(비여공화사)가 비유컨대 마치 工畵師= 화가가 分布諸彩色(분포제채색)하고, 여러 채색을 펼쳐서
虛妄取異相(허망취이상)이나, 허망하게도 다른 모양들을 그리지만
大種無差別이니, 대종에는 차별함이 없듯이
[大種은 물질을 이루고 있는 큰 요소, 地水火風. 그림에는 차별이 있지만 지수화품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니까 현상을 보면 산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별별 모습이 다 있지만 그 땅 자체는 차별이 없다.]
大種中無色(대종중무색)이며, 대종 안에 색이 없고
[대종 가운데, 물질의 큰 요소에는 아무런 色 受 想 行 識도 없고, 또 화가가 그려놓은 여러 가지 모습도 없다.]
色中(색중)에 無大種(무대종)이로대, 색 안에 대종이 없으며, [그 그림 가운데 또한 地水火風도 없다.]
亦不離大種(역불리대종)하고, 또한 대종= 地水火風을 떠나서는
而有色可得(이유색가득)이로다. 가히 얻을 색도 있지 않도다.
[그러니까 사실 그것은 독립된 것도, 화합도, 불 화합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2) 就心現法
心中無彩畵하고 彩畵中無心이로대 然不離於心하고 有彩畵可得이로다
彼心恒不住하야 無量難思議라 示現一切色호대 各各不相知로다
譬如工畵師가 不能知自心호대 而由心故畵인달하야 諸法性如是로다
心中無彩畵(심중무채화)하고, 마음 안에 그림이 없고
彩畵中無心(채화중무심)이로대, 그림 안에 마음이 없지만
然不離於心(연부이어심)하고, 그러나 그 마음을 떠나서는
有彩畵可得(유채화가득)이로다. 얻을 그림도 있지 않도다. 채화를 가히 얻을 수 없도다. 마음 떠나서 그림 없다.
[사실 마음에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에 마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 떠나서 그림을 얻을 수가 없다.
이미 우리가 그림을 보면, 그림하고 마음하고는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내 마음속에 그림이 포착되었으면 그것은 이미 마음하고 그림하고 두 개가 아니다.
그 그림은 내 마음이 인식하는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만든 것, 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겁니다. 내 마음 범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져야 됩니다.
나하고 이 현상하고의 관계는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현상=세상이 아무리 거꾸로 돌아가도, 아무리 험하게 돌아가도 내 마음 안에 이미 포착되어 있고, 내 마음의 영역 속에 이미 들어온 엉터리 세상이라면 그 엉터리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세상에 여러 분야가 있지만 자기가 관심 없는 분야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일부터 코리안 야구 시리즈가 시작하는데,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은 전혀 관계없지만, 관심 있는 사람은 그것만 벼르고 있어요. ‘내일 날씨 좋아야 할 텐데...’하고, 그래서 불교의 一切唯心造라는 말이 기가 막힌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그 사람과는 관계없고 책임도 없지만, 관심 있는 사람이 흥분하여 웃고 울고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겁니다. 그 사람 마음의 세계는 야구라고 하는 것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내 인식 속에 들어온 세계는 내가 일조를 한 것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됩니다.
一切唯心造라는 말은 내가 다 만들었다는 뜻이지만, 내가 다 만든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속에 포착된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의 것이기 때문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 관리를 잘해야 됩니다. 奉行佛敎常攝心(봉행불교상섭심). ‘내가 만든 자식이지만, 내 새끼지만 내가 그 마음을 얼마나 빼앗기느냐? 빼앗기지 않느냐?’ 하는 것은 또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彼心恒不住(피심항불주)하야, 마음이란 항상 머물지 않고
無量難思議(무량난사의)라. 한량없어 헤아리기 어렵고, [한량없는 불가사의다.]
示現一切色(시현일체색)호대, 온갖 색깔을 나타내 보이되
各各不相知(각각불상지)로다. 각각 서로를 알지 못하도다.
[일체 색을 시현하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 색과 색이 서로 알지 못한다.
地=땅은 水를 알지 못하고, 水는 火를 알지 못하고, 火는 風을 알지 못한다]
譬如工畵師(비여공화사)가, 비유컨대 마치 화가가
不能知自心(불능지자심)호대, 자기 마음을 능히 알지 못하되
而由心故畵(이유심고화)인달하야,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을 그리듯이
諸法性如是(제법성여시)로다. 모든 법의 성품도 이러하도다.
[비유하자면 화가가 능히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마음을 말미암은 고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마음은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기주인공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참 탄복할 일이지요.
모든 법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아서, 봄이 와서 잎이 피고 새가 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지만, 그 당체는 모르면서 그렇게 엮어가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3) 譬喩와 法合
心如工畵師하야 能畵諸世間하나니 五蘊悉從生이라 無法而不造로다
如心佛亦爾하며 如佛衆生然하니 應知佛與心이 體性皆無盡이로다
若人知心行이 普造諸世間하면 是人則見佛하야 了佛眞實性이로다
心不住於身하며 身亦不住心호대 而能作佛事하니 自在未曾有로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인댄 應觀法界性에 一切唯心造니라
心如工畵師(심여공화사)하야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能畵諸世間(능화제세간)하나니, 능히 온 세간을 그리나니
五蘊悉從生(오온실종생)이라. 오온= 色受想行識이 다 여기=마음에서 생겨나고
無法而不造(무법이불조)로다. 짓지 못할 법이 아무 것도 없도다.
[법마다 내가 짓지 아니함이 없다. 내가 다 지은 겁니다.]
如心佛亦爾(여심불역이)하며, 마음과 같이 부처도 역시 그러하고
如佛衆生然(여불중생연)하니,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그래서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하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서 중생들에게 말을 하자니 그런저란 용어를 지어서 이리저리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라고 하지 왜 말을 만들어서 골치 아프게 하느냐? 그렇지만 그런 가설이라도 해놓고 중생들을 깨우치는 것이니까 그 가설이 중요한 겁니다. 종교와 철학에도 가설이 필요하고, 과학에도 가설이 필요합니다. 일단 가설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맞춰가는 것이지요.]
應知佛與心(은지불여심)이, 마땅히 알라. 부처와 마음이
體性皆無盡(체성개무진)이로다. 그 체성은 다함이 없도다.
若人知心行(약인지샘행)이, 만약 어떤 이가 심행이 [심행= 마음을 행함, 行은 의지작용.]
普造諸世間(보조제세간)하면, 온 세간을 널리 짓는 줄을 안다면
是人則見佛(시인즉견불)하야, 이 사람은 곧 부처를 보아
了佛眞實性(료불진실성)이로다. 부처의 진실한 성품을 안 것이로다.
[어떤 사람이 마음의 의지를 알아서 마음의 의지가 능히 모든 세간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면]
心不住於身(심불주어신)하며, 마음은 몸에 머물지 않고
身亦不住心(신역불주심)호대, 몸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는데도
而能作佛事(이능작불사)하니, 능히 불사를 지으니, 능히 불사를 짓나니,
自在未曾有(자재미증유)로다. 그 자재함이 미증유로다.
[몸과 마음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면서 또한 서로 다르고, 그러면서 불사를 지어서 自在未曾有. 일찍이 있지 않던 신기하고, 참으로 신통방통한 일이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인댄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에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一切唯心造(일체유심죠)니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짓는 것이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삼세 일체 불을 알고자 할진댄, 응당히 이 법계성품을 관하라. 일체가 다 마음으로 지은바다.]
10. 智林菩薩의 讚歎 [梵慧세계, 紺靑眼佛]
[[智林보살은 진실한 슬기의 행이기 때문에 智바라밀을 주재하는 것이니, 여기서 명칭의 지위가 서로 같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선재 동자의 이 지위 중 선지식의 號가 出家外道이고, 이름이 遍行인 것은 지혜를 얻어 자재함으로써 능히 邪見을 같이 하면서도 모든 邪見을 거두어들임을 밝힌 것이니, 3천 가지 경계와 아흔여섯 가지 외도를 내가 모두 다하는 것을 말한다. 자림보살은 수행하는 사람이며, 梵慧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며, 紺靑眼佛은 이 지위의 果이니 감청은 10행의 지혜가 한번 종결되어 원만해지면서 밝고 청정함의 비춤[明淨照燭]이 지극한 것이다.]]
[[지림보살은 부처님의 三業의 수승함을 드러냈다. 즉, 부처님의 묘한 色身과(身業) 한량없는 지혜광명과(意業) 과 音聲(口業)은 위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思議할 수도 없음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法을 설함에 있어서도 부처는 法을 설함이 없지만 중생들이 다만 자기의 마음을 따라 法을 설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1) 執着
爾時에 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所取不可取며 所見不可見이며 所聞不可聞이니 一心不思議로다
爾時에 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이때에 지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所取不可取(소취불가취)며, 취할 바도 취할 수 없고 所聞不可聞(소문불가문)이니 들을 바도 들을 수 없으니
[취할 바= 대상들, 책ㆍ책상ㆍ절ㆍ온갖 소유 품들도 가히 취 할 수가 없다]
所見(소견)을 不可見(불가견)이며, 볼 바도 볼 수 없으며
[보는 것을 가히 볼 수가 없다. 그대로 있어지지 않으니까. 나도 그대로 있어지지 않고, 대상도 그대로 있어지지가 않는, 늘 변화무쌍하니까 所聞도 不可聞 듣는 바도 가히 듣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아이고, 그 강의 참 그럴듯하다.’ 하지만 어느 날, ‘아이고, 그 강의 별 것 아니다.’ 영~ 달라져 있고 또 달라져야 옳습니다]
一心不思議(일심불사의)로다. 한 마음이 부사의하도다.
[不思議=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다. 대상도 그렇고, 내 마음도 그렇고, 전부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취하는 것ㆍ보는 것ㆍ듣는 것이 전부 마음의 장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2) 不可執着 가히 집착할 수 없다.
有量及無量을 二俱不可取니 若有人欲取인댄 畢竟無所得이로다
不應說而說이 是爲自欺誑이니 已事不成就요 不令衆歡喜로다
有量及無量(유량급무량)을, 양이 있거나 양이 없거나 [한량이 있는 것이거나 한량이 없는 것을]
二俱不可取(이구불가취)니, 둘 다 취할 수 없으니
若有人欲取(약유인욕취)인댄 →약유인욕췬댄, 만약 어느 누가 취하고자 해도
畢竟無所得(필경무소득)이로다. 결국 취할 수 없으리라.
[그야말로 손에 모래를 한 주먹 쥐고, 힘껏 쥐면 쥘수록 모래는 또 더 잘 빠져나가듯이 이 세상에 내가 취할 것ㆍ볼 것ㆍ들을 것ㆍ한량이 있는 것ㆍ한량이 없는 것 모두가 畢竟에 無所得이다. 필경에는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不應說而說(불응설이설)이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면
是爲自欺誑(시위자기광)이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
[응당히 설하지 못할 것을 설하는 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已事不成就(이사불성취)요, 자기의 일을 그르친 것이요
不令衆歡喜(불령중환희)로다. 대중을 기쁘게 하지도 못하리라.
[앞에서 취할 것ㆍ볼 것ㆍ들을 것 등이 어떤 대상이라면 내 자신에게 돌아와서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는 것까지도 쓸어버리고 부정해버리는 것입니다. 절 마당 쓸 때 뒷걸음질하면서 쓸어서 그 쓸어버린 발자취마저 쓰는 불교의 이치입니다.]
(3) 不可見
有欲讚如來의 無邊妙色身인댄 盡於無數劫이라도 無能盡稱述이로다
譬如隨意珠가 能現一切色호대 無色而現色인달하야 諸佛亦如是로다
又如淨虛空이 非色不可見이라 雖現一切色이나 無能見空者인달하야
諸佛亦如是하사 普現無量色이나 非心所行處라 一切莫能覩로다
不有欲讚如來(불유욕찬여래)의, 어떤 이가 여래의,
無邊妙色身(무변묘색신)인댄, 가이없으신 묘색신을 찬탄하고자 하여
盡於無數劫(진어무수겁)이라도, 무수한 겁 동안 다하더라도
無能盡稱述(무능진칭술)이로다.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능히 다 이야기할 수가 없다.
譬如隨意珠(비여수의주)가, 비유컨대 隨意珠= 여의주가
能現一切色(능현일체색)호대, 온갖 색을 나타낼 수 있고
無色而現色(무색이현색)인달하야, 색이 없지만 색을 나타내듯이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로다. 부처님들도 그러하시며,
[본인= 여의주에는 아무 색이 없으면서도 주변에 있는 색을 전부 받아들여서 자기 색으로 삼아서 색을 나타내듯이, 모든 부처님의 그와 같은 무변묘색신을 아무리 오랜 세월 찬탄하여도 찬탄할 수 없는 것이 여의주와 같다.
비유하자면 여의주와 같다고 했지만 어디 여의주하고 비교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又如淨虛空(우여정허공)이, 또 마치 깨끗한 허공이
非色(비색)이면 不可見(불가견)이라. 색이 아니니 볼 수 없고, 다른 색이 없으면 볼 수가 없고
[맑은 허공에 색이 없으면 볼 수가 없어요. 태양이 넘어가면서 비추든지, 뜨면서 비추든지, 구름이 끼어서 비추든지 해야 불 수 있고, 저 하늘이 땅과 바다의 푸른색을 받아서 푸르게 보이는 겁니다. 무슨 색을 띠고 있더라도 전부 이 지구에 있는 구름, 수증기, 바람, 호수, 푸른 나무, 눈의 작용이 햇빛에 의하여 저 하늘의 색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雖現一切色(수현일체색)이나, 비록 온갖 색을 나타낸다 해도
無能見空者인달하야 → 무능견공잔달하야, 공(空)을 볼 수 있는 이가 없듯이
[비록 일체 색을 나타내긴 내지만 능히 그 허공을 보는 사람이 없듯이, 색을 보는 것이지 허공을 본 것은 아닙니다.
툭 터진 푸른 하늘의 푸른색도 땅의 색을 반사해서 나타내는 것이지요.]
[[하늘이 푸른 이유가 빛의 산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분명한 형태로 밝혀졌다. 1871년 영국의 존 윌리엄 스트럿>, 즉 제 3대 레일리 경(John William Strutt, 1881년부터 제 3대 Lord Rayleigh, 1842-1919)은 빛의 산란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레일리의 산란이론에 의하면, 하늘이 푸른 이유는 대기 중에서 빛이 빛의 파장의 약 1/10 이하의 미립자를 통과할 때 생기는 산란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즉 태양빛이 대기 중을 통과할 때 짧은 파장의 빛일수록 더 많이 산란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른빛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푸른빛(파장의 길이 400nm)의 산란율은 붉은빛(파장의 길이 640nm)에 비해 약 6배가량 크기 때문에 푸른빛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 하늘이 붉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에 태양빛은 더욱 먼 거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푸른빛은 거의 다 산란되고, 지구에 직접 도달하는 빛은 붉은색이나 주황색을 띠게 된다. 출처: https://sepaktakraw.life/140 [세팍타크로 라이프]
*하늘이 푸른 이유
빛이 원자에 입사되면 원자에 속박되어 있는 전자가 진동하면서 여러 방향으로 빛을 재 방출한다. 이를 산란이라 한다. 산란은 입자가 작을수록, 빛의 진동수는 높을수록 잘 일어난다. (작은 종이 고음을 낸다.) 태양광 중 자외선은 대부분 오존층에 의해 흡수되고 일부는 대기 입자나 분자들에 의해 산란된다. 자외선이 가장 많이 산란되고 그 다음 가시 광선 중 푸른색.... 빨강색순이다. 그러나 자외선은 보이지 않음으로 상대적으로 푸른색이 많이 산란되어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푸른 하늘은 공기가 건조할수록 더 푸르고, 수증기가 많으면 하늘은 회색을 띠게 된다.]]
諸佛亦如是(제불역여시)하사, 부처님들도 그러하시어
普現無量色(보현무량색)이나, 널리 한량없는 색을 나타내시나
非心所行處(비심소행처)라. 마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서
一切莫能覩(일체막능도)로다.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이로다.
[허공의 색은 전부 다른 것을 반사해서= 빌려서 나타낸 것이고, 그것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모든 사람ㆍ 모든 위치에서 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와 같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다. 한량없는 색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거기에 우리 마음이 쫓아갈 바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4) 不可聽 들을 수 없다.
雖聞如來聲이나 音聲非如來며 亦不離於聲하고 能知正等覺이로다
菩提無來去라 離一切分別이어니 云何於是中에 自言能得見이리오
諸佛無有法이시니 佛於何有說가 但隨其自心하야 謂說如是法이로다
雖聞如來聲(수문여래성)이나, 비록 여래의 음성을 듣더라도
音聲非如來(음성비여래)며, 음성은 여래가 아니며
亦不離於聲(역불리어성)하고, 또한 음성을 떠나서
能知正等覺(능지정등각)이로다. 정등각을 알 수도 없도다.
[금강경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여기는 그러한 뜻을 바탕으로 해서 그 소리를 떠나지 않고, 능히 정등각을 안다. 그 속에 또한 여래가 있다.
금강경은 철저히 부정만 했고, 여기는 부정에서 다시 긍정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菩提無來去(보리무래거)라. 보리는 오고 감이 없고
離一切分別(리일체분별)이어니, 일체의 분별을 떠난 것인데
云何於是中(운하어시중)에, 어찌 그 안에서
自言能得見(자언능득견)이리오? 스스로 보았다 말할 수 있으리오
[깨달음은 來去가 없음이라. 일체 분별을 떠났거니, 어찌 그 가운데서 스스로 능히 얻어 보았다고 말하겠는가?]
諸佛無有法(제불무유법)이시니, 모든 부처님은 법이 없으신데
佛於何有說(불어하유설)가? 부처님은 어디에 설이 있겠는가? 바꾸어 표현하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모든 부처님은 법이 없는데 무슨 설법이 있겠습니까? 이 구절을 평생 49년간 설했지만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는 그 명문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但隨其自心하야 다만 그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 다만 사람 그 자신이 그들의 마음을 따라서
謂說如是法이로다. 그런 법을 설하셨다 하는 것이로다.
[말하기를= 謂. 자기 마음을 따라서 말하기를, 8만 대장경이다. 화엄경이다. 법화경이다. 금강경이라고 하는 겁니다.
謂→자기 마음 따라서 “이와 같은 법을 설했다.”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또 자기 고집까지 넣어서 “아함부 경전이라야 부처님의 경전이다.ㆍ이것이 부처님의 진짜 말씀이다.”고 설명하는 그것은 아주 소승적입니다.
뭘 주장 하든지 그것은 자기의 성격ㆍ자기의 감정에 따른 것입니다.
사실 한 구절도 넘어가기가 너무 아까울 정도로 주옥같은 夜摩宮中偈讚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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