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行林菩薩의 讚歎 [일혜세계, 明相眼佛]
[[行林보살은 難得行으로서 願바라밀을 주재한다. 얻기 어려운 것을 능히 얻기 때문에 그 명칭이 행림이 되고, 이 지혜의 지위에 오르기 어렵기 때문에 그 명칭이 난득행인 것이다. 가령 선재동자의 이 지위중 선지식인 왕의 이름이 大光인 것은 이 제8의 지혜가 대원을 따라 중생의 뜻을 만족시켜 大饒益을 행하는데, 널리 중생에게 세간 樂具를 베풀어 주고 이체의 智寶를 모두 베풀어 주는 것이다. 행림보살은 능히 행하는 사람이며, 日慧세계는 닦는 바의 법이니, 이 지위의 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세계의 명칭이 일혜인 것이며, 明相眼佛은 이 지위의 果이니, 이 지위의 智體가 더욱 밝아지기에 불과의 명호가 명상안인 것이다.]]
[[행림보살은 '부처님의 體相이 널이 두루함을 觀하는 德(이익)'에 대해 밝혔다. 즉, 부처님의 몸은 헤아릴 수 없으니, 갖가지의 色相으로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지만, 온 곳도 없고 머문 곳도 없다. 또한 몸은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몸이 아니다. 부처는 法으로 몸을 삼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여 法性과 같다. 부처님의 몸이 이와 같음을 분명하게 觀하면 법왕자라 할 수 있다.]]
(1) 地의 種性과 佛身 땅의 종성= 성품= 本性=지수화풍과 불신.
爾時에 行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譬如十方界에 一切諸地種이 自性無所有로대 無處不周遍인달하야
佛身亦如是하야 普遍諸世界하사대 種種諸色相이 無住無來處로다
爾時에 行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이때에 행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살피고 게송으로 말했다.
譬如十方界(비여시방계)에, 비유컨대 마치 시방세계에 一切諸地種(일체제지종)이, 일체의 모든 땅의 씨앗은
[일체 모든 땅의 종자= 씨앗= 지수화풍 또는 땅]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로대, 자성이 없는데도 無處不周遍(徧)(무처불주변)인달하야, 모든 곳에 두루하듯이
[자성은 없지만 세계 곳곳에 땅 없는 곳이 없다.= 그 실체가 없으면서도 그렇게 펼쳐져 있다.]
佛身亦如是(불신역여시)하야, 부처님 몸 역시 이와 같아서
普遍諸世界(보편제세계)하사대, 널리 모든 세계에 두루하시되
種種諸色相(종종제색상)이, 갖가지 모든 색상들이
無住無來處(무주무래처)로다. 머물지도 않고 온 곳도 없도다. 주함도 없고 온 곳도 없더라.
[일체존재가 역시 佛身이고, 佛身이 땅과 같이 세계에 펼쳐져 있다. 거기까지 안목이 열리면 그것을 불신으로 보는 것이지요. 소동파의 溪聲便是廣長舌인데 山色豈非淨身가? 이 게송이 화엄경을 여는 열쇠라고 제가 표현을 했습니다]
(2) 業의 無依支와 佛身
但以諸業故로 說名爲衆生이나 亦不離衆生하고 而有業可得이로다
業性本空寂이나 衆生所依止요 普作衆色相이나 亦復無來處로다
如是諸色相과 業力難思議니 了達其根本이면 於中無所見이로다
佛身亦如是하야 不可得思議니 種種諸色相으로 普現十方刹이로다
身亦非是佛이며 佛亦非是身이니 但以法爲身하면 通達一切法이로다
但以諸業故(단이제업고)로, 다만 모든 업 때문에 說名爲衆生(설명위중생)이나, 중생이라 이름하여 말하지만
[중생 업을 지었으니까 “중생이다.” 하는 것이지요. 또 중생 중에서도 이런 중생ㆍ저런 중생ㆍ사람중생ㆍ짐승중생ㆍ축생중생ㆍ날것중생ㆍ곤충중생. 온갖 중생들이 많은 것은 다 업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業力難思議라고 업력 참 중요합니다. 우리 현상계에서 전부 인연소치로 지어지는 업같이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亦不離衆生(역불리중생)하고, 중생을 떠나서도
[다만 모든 업을 쓴 고로, 모든 업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설명이 중생이라 하지만 또한 중생을 떠나고]
而有業可得(이유업가득)이로다. 가히 얻을 업이 있지 않도다. 가히 얻을 업이 있지 않다.
[업 때문에 중생이 있으니까 중생 떠나서 업이 없다. 중생=업이다. 불가불리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뭐가 업이냐?
그 알맹이를 찾아 보면 찾을 길은 없습니다. 중생도 못 찾지만 부처도 못 찾습니다.]
業性(업성)은 本空寂(본공적)이나, 업의 성품은 본시 공적한데
[예를 들어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자기와 식구가 끊으려 하고, 자꾸 끊으려고 하는데도 왜 못 끊는 것이 업입니다.
그런데 ‘뭐가 들어서 그렇게 담배를 못 끊는가?’ 그 근본을 찾아보면 아무도 찾을 길이 없는, 業性本空寂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업력이 또 보통 센 것이 아닙니다. 어마어마해서 아무도 못 말립니다. 담배 안 끊으면 이혼한다하니까 이혼해도 좋다고 담배피우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정도로 업력이 센 겁니다.
어떤 사람은 노름 때문에 자기 스스로 손을 끊는 겁니다. 스스로 손을 끊고 나니까 나중에는 발로 하더래요. 그런데 그 센 업력을 어디서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업의 본성은 공적한 겁니다. 그러나 안 보이는 가운데서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또 업입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업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도 하지만, 우리 현실에 있어서 이 업 이야기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업에 대해서 불교는 소상히 파악하고 밝혔습니다.]
衆生所依止(중생소의지)요, 중생들이 의지하는 것이라 [본래 공적하지만 중생이 그 업을 의지하고 있다.]
普作衆色相(보작중색상)이나, 온갖 색상을 널리 짓지만亦復無來處(역부무래처)로다. 역시 온 곳이 없도다.
[널리 여러 가지 색상= 여러 가지 형상을 짓고 모양을 내지만, 그 업이 어디서 온 곳이 없다.]
如是諸色相(여시제색상)과, 이와 같은 모든 색상과
業力難思議(업력난사의)니, 업력은 헤아리기 어려우나
了達其根本(요달기근본)이면, 그 근본에 요달해 보면
於中無所見(어중무소견)이로다. 그 안에는 볼 바가 없으리라.
[이와 같은 모든 색상과 업력이 또한 가히 생각하기 어려우나 그 근본을 요달 하면 空性= 본성은 공합니다.
모든 현상도 공하고, 그 힘이 너무너무 센 업도 찾아보면 공한 그것이 근본인 것을 알 것 같으면
그 가운데 보는 바가 없더라. 볼 것이 없더라.]
佛身亦如是(불신역여시)하야, 부처님 몸도 역시 그러하여
不可得思議(불가득사의)니, 생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種種諸色相(종종제색상)으로, 갖가지 모든 색상으로
普現十方刹(보현시방찰)이로다. 시방세계에 널리 나타나심이로다.
[부처님의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사의 할 수가 없음이니 가지가지 여러 가지 색상으로써 시방찰에 널리 나타났더라.]
身亦非是佛(신역비시불)이며, 몸 또한 부처님이 아니요 佛亦非是身(불역비시신)이니, 부처님 또한 몸이 아니니
但以法爲身(단이법위신)하면, 다만 법으로써 몸을 삼으면 通達一切法(통달일체법)이로다. 일체법에 통달하리라.
[다만 법으로써 몸을 삼는다. 여기에서는 화엄경이 바로 佛身이고 法身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 가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부처님 살아 생전에 우리가 모시고 살았다면, 눈에 보이는 부처님을 부정하고 법으로써 부처님 몸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상당한 수준의 제자이겠지만, 지금은 법으로써 부처님 몸 삼기가 더 쉽습니다.
부처님이 있을 때는 부처님이 장애가 되지만, 부처님이 없으니까 더 쉽지요. 그렇게 알면 일체 법을 통달하는 것이 된다]
(3) 見佛身得益 불신을 보고 이익을 얻다.
若能見佛身이 淸淨如法性하면 此人於佛法에 一切無疑惑이로다
若見一切法이 本性如涅槃하면 是則見如來가 究竟無所住로다
若修習正念하야 明了見正覺이 無相無分別하면 是名法王子로다
若能見佛身(약능견불신)이, 만약 부처님 몸 淸淨如法性(청정여법성)하면, 청정하기가 법의 성품 같음을 본다면
此人於佛法(차인어불법)에, 이 사람은 부처님 법에
一切無疑惑(일체무의혹)이로다. 아무런 의혹이 없으리라. 아무 의혹이 없는 경지에 이름이로다.
若見一切法(약견일체법)이 本性如涅槃(본성여열반)하면, 일체법의 근본 성품=본성이 열반과 같음을 본다면
[사라진 것이 열반입니다. 유여열반은 번뇌가 사라진 것이고, 무여열반은 몸뚱이마저 사라져서 없는 것으로 보면,]
是則見如來(시즉견여래)가 究竟無所住(구경무소주)로다. 이것은 곧 여래는 구경에 머무는 바가 없음을 본 것이로다.
[여래가 끝내 머무는 바가 없음을 보는 도다.]
若修習正念(약수습정념)하야, 만약 정념= 바른 생각을 닦아 익혀서
[8정도의 正念, 또 正念 “마음 챙김”이라 해서 비파사나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낱말로 사실 그대로 본다.]
明了見正覺(명료견정각)이, 정각이 모양도 없고 無相無分別(무상무분별)하면, 분별도 없음을 분명히 본다면
是名法王子(시명법왕자)로다. 이야말로 법왕자라 하리라.
[만약에 정념을 수습해서, 명료하게 정각이 무상무분별= 형상도 없고 분별도 없는 것을 보면, 正覺이라는 자체도 형상 있는 것도 아니고, 분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법왕자다.]
[[열반 Nirvana ,涅槃; 열반은 생사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소승의 부파불교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며, 여기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2가지가 있다.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 열반은 상·락·아·정의 4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적(寂)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더욱이 불교 내에서도 소승과 대승의 여러 학파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소승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고 여기에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의 2가지가 있다고 한다.
'유여'란 의존해야 할 것, 즉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완전한 열반, 즉 반열반(parinirvāṇa)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法身)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열반이란 다만 번뇌를 멸한 상태를 기리키는 명칭으로서 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4덕(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상(常)은 상주(常住)함으로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변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이라 하며, 낙(樂)은 안락의 뜻으로 열반은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떠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낙이라 하며, 아(我)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것으로 열반은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한 세계이므로 아라 하며, 정(淨)은 청정의 뜻으로 염오(染汚)에 덮힌 생사의 세계를 여읜 열반의 세계는 청정한 세계이므로 정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열반에는 상(常)·항(恒)·안(安)·청정(淸淨)·불로(不老)·불사(不死)·무구(無垢)·쾌락(快樂) 등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4덕과 관련하여 상·항은 상에, 안·쾌락은 낙에, 불로·불사는 아에, 청정·무구는 정에 대응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근거한 법상종에서는 열반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의 4종열반으로 나누었다. 이중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설명한 유여열반·무여열반과 같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존재가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異體)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열반을 말한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지론종과 섭론종에서는 성정열반과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의 2종열반설을 세웠는데, 이것은 후에 천태종(天台宗)에서 성정열반·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의 3종열반설로 전개되었다. 성정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과 같고, 원정열반은 지혜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고 증득(證得)한 열반을 말한다.
방편정열반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인연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응화열반(應化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寂靜)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인 중도(中道)를 깨달아 모든 존재의 여실한 모습을 보게 되면,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 번뇌가 곧 깨달음이므로(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 생사와 열반은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다음백과]]
*열반과 해탈의 차이
[[불교에서는 열반과 해탈을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열반과 해탈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근본경전에 의하면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열반과 해탈은 말의 뜻에 차이가 있습니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는 ‘nibbāna, nirvāṇa(sk.)’를 번역한 것이고,
해탈은 ‘벗어났다’는 의미의 ‘vimokkha, vimokṣa(sk.)’를 번역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은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불길에 휩싸여 있다고 하셨습니다. 열반은 세상을 불태우는 삼독의 불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러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구속이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해탈은 구속이나 속박의 수만큼 많지만, 크게는 욕탐에서 비롯된 번뇌(煩惱)로부터의 해탈과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이 있습니다.
전자를 심해탈(心解脫)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혜해탈(慧解脫)이라고 부릅니다. 오분법신(五分法身) 가운데 계정혜 삼학을 수행하여 성취하는 해탈신(解脫身)은 심해탈을 의미하고,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혜해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다 갖춘 해탈을 구해탈(俱解脫)이라고 하며 이들을 삼해탈(三解脫)이라고 부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열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해탈을 성취한 것을 말하고, 해탈은 수행을 통해 번뇌가 소멸될 때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해탈은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란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을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사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죽을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은 죽을 생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못할 것이 없습니다.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Steve Jobs, 1955~2011)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무덤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일 따윈 중요하지 않다. 매일 밤 자기 전 우리는 정말 놀랄 만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
해탈한 사람에게 죽음은 고통과 좌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세요. 그건 다른 사람이 생각한 대로 사는 겁니다.”
이와 같이 생사에서의 해탈이란 죽음을 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선택의 가능성이 단절된 죽음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닌,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생사해탈입니다.
이러한 해탈은 우리가 자신의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오온이나 육입처가 허망한 망상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자각에서 비롯됩니다.
생사는 허망한 망념을 자신의 존재로 착각하는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 욕탐을 버리면 우리의 마음은 욕탐에서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 결박되지 않으면 마음이 자신의 존재를 취착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이렇게 허망한 존재를 취하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편 열반의 세계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세계가 아닙니다.
허무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견(無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사의 세계를 떠나 모든 존재가 생멸하지 않고 변함 없이 존재하고 있는 열반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유견(有見)에 빠진 사람입니다.
열반은 허망하게 조작된 유무(有無)의 모순 대립을 떠난 중도(中道)의 세계이며 연기하는 법계(法界)입니다.
이러한 법계에서 우리는 법계와 함께 연기하는 법신(法身)입니다.
허망한 생각을 그치고 연기하는 법계를 여실하게 관조하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원(願)으로 충만한 삶, 이것이 열반을 성취한 법신의 삶입니다. from 'PHOTO-TO-PHOTO (P-TO-P)']]
*正覺(정각)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것은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부처님과 같은 특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이룰 수 있다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그러면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정각(正覺)의 내용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기에 부처님이 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선언적(宣言的)으로 무엇이라고 밝혀 놓은 경전(經典)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전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진리의 내용은 연기(緣起)의 법리(法理)로 요약할 수 있다.
연기란 모든 존재는 고정 불변하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며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임을 밝힌 법리다. 연기의 법리가 고정 불변하는 독립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관계 위에서 파악해야 함을 뜻한다. 일체의 존재는 사회와 역사의 규정을 받으며 다시 사회와의 역사를 규정해 가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이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부처님은 미망(迷妄)중생의 가치관인 아집과 탐욕을 부정했다. 협조와 조화만이 인간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부처님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깨달음이 진리라는 것을 실천을 통해 실증해 보인 것이다. -백과
불교;
석가모니는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여 도와주는 존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후에 이상화(理想化)되고 확대되어 절대(絶對) ·무한(無限) 및 그 밖의 성격이 부여되고, 각성과 구제의 근거가 되고 있으나 정복자와 같은 자세는 취하지 않는다.
역사, 문화적으로 유일신교적 관념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는 서양인들이 처음에 가장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이해못할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숭배하는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전통적인 서양에서의 Religion의 개념이기 때문에 불교를 공부한 뒤 자국에 불교를 설명하는 서양인들이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는 종교다'라는 말은 맞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불교를 지칭하기 위해 나왔고 의미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영어의 Religion과 한자어의 종교가 서로 정확하게 대응하는 의미의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돈이다.
[다만 대승불교에서 부처가 반신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은 맞는다.참고로 같은 책에서는, 불교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고 현대화하여 읽는 독법이 서구에서의 인기를 얻을 수는 있어도 불교의 '인기 없는 요소'를 훼손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 중도의 진리를 받아들인다. 이에 따라 힌두교의 일부 종파나 형제 뻘인 자이나교와 달리, 불교는 고행을 권하지 않는다. 일단 개조인 석가모니부터가 극단적인 단식과 걸행 등의 고행을 그만둔 다음 심신의 지나친 이완과 긴장 모두를 물리친 뒤 보리수 아래 앉아 깨달음을 이뤘다. 불교는 몸을 해치는 절식(絕食)이나 각종 무모한 고행을 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행동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로 대표되며, 특히 자비는 무한이며 증오(憎惡)나 원한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광신(狂信)을 배척하고 관용(寬容)인 동시에 일체의 평등을 관철하고자 하며,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시를 강조한다. 지혜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발전하는데, 일체를 종(縱)으로 절단하는 시간적 원리인 '무상(無常)'과, 일체를 횡(橫)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원리인 '연기(緣起)'가 중심에 있어, 이것은 후에 '공'으로 표현된다.
- 항상 변하고 실체가 없는 허상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모든 번뇌를 야기한다고 본다. 이를 없애기 위한 수행, 참선이 강조되며 허상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서 직시란 '단견'과 '상견'의 관점을 모두 버려 대상을 치우침없이 적관하는 것을 말한다.
- 대승불교에서는 바라밀이라는 방법의 수행을 권한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paramita'. 직역하자면, '저쪽 언덕(피안)에 도달한 상태'. 초기불교에서부터 인간의 '감정'을 강물에다가 비유했는데, '감정'이라는 급류를 인간이 건널 때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강물에 빠져 평생을 고통속에서 허우적댄다고 보았다. 바라밀이란 이 '감정'이라는 강물을 안전하게 건너,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분하게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바라밀이란 해탈하는 방법이다. 6가지의 바라밀이 있는데, 이 6바라밀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가 있다. 보시는 베푸는 것, 지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 인욕은 고난을 참고 이겨 나가는 것, 정진은 노력하는 것,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집중하는 것, 반야바라밀은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로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선정 바라밀은 반야 바라밀이 발현되게 하는 원인이다.
- 조용하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 각성(覺性:解脫)을 통해 열반(涅槃)’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 교의(敎義)는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오랜 역사 동안, 교의(敎義)의 내용은 여러 형태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 '내 것'이 없다는 무아의 개념은, 부처님 유언에 '스스로에 의지하라'는 말과 상충되지 않는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삶의 주체인 나'와 '나라고 생각하는 환상'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는 '나'라는 개념을 버린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전자와 후자는 다른 것. 따라서 '삶의 주체인 나'는 신뢰하되,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내 것이라는 환상'(이 환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긴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현재의 '나'를 믿기 때문에, 굳이 (변해버렸거나 변해버릴) 과거와 미래의 '내 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
현실의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실의 삶'에 집중한 불교의 개념은 실존주의 보다 훨씬 이전부터 만들어져 왔으며 실존주의와는 다른 미묘하고도 독특한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실존은 고독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거나, 또는 이러한 인간 삶을 방해하는 권위에 대해 반항을 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신의 제대로된 삶을 살지 못한다고 보아 긍정과 부정을 포함한 '감정'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아라는 점, 그리고 '자아'마저도 또다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아 '내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불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철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때문에 종종 이를 연관시켜 설명하는 현대철학자들도 많다. 삶을 방해하는 절대적 권위-'언어', '고정 관념'-에 대한 탈권위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교가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승 불교 한정, 여타 종교에 비해 저승과 하늘이 다양하다. 천국과 지옥만 언급하는 개신교나 거기에 더해 연옥의 개념이 있는 카톨릭과는 다르게 대승 불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및 그 외의 장소들까지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대승 불교에는 욕계 6천, 색계 18천, 무색계 4천까지 수많은 하늘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있다. 지옥은 불지옥 8종류와 얼음지옥 8종류에, 재판받는 길목마다 지옥들이 존재한다. 때문에 가장 지옥의 종류가 많은 종교이기도 하다. 또한 동물로 태어나는 환생을 지옥에 가긴 애매한 죄를 가진 영혼이 가는 형벌로 분류해 놓았다. 그리고 축생계보다 죄가 무겁지만, 지옥을 갈 정도는 아닌 정도의 죄를 지은 영혼은, 불교 고유의 세계인 아귀도나 아수라 등을 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석가모니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따위를 고민치 말고,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집중하여 현실을 살라.'며 저승에 대해 비중을 두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말라고 가르쳤다. 이는 현실을 직시하는 경향이 강한 불교의 색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가모니의 행적을 살펴봐도 충분히 현실적인 색채를 느낄 수 있는데, 고행을 포기한 후에 깨달음을 얻거나 타인을 믿지 않고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렇다. - 해탈에 도움이 안되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석가모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무기(無記)'란,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답도 찾을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불교에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많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란 '형이상학을 위한 형이상학'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형이상학 질문은 오로지 '현실의 삶 - 그 괴로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 원칙이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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