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一心具萬行 品第七十六 卷八十七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6. 일심구만행품(一心具萬行品)을 풀이함 4
若無所有、空,菩薩、衆生、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皆空、無所有,云何起難?
若衆生、菩薩及阿耨多羅三藐三菩提離無所有、空者,可有是難。如先說:“畢竟空於諸法無所障㝵,何妨發心?”佛還以無所有、空破須菩提所問。亦復自說因緣:“須菩提!著心者難得解脫。”
만약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공(空)이라면, 보살이나 중생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모두도 공(空)하여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거늘 어찌 논란을 일으킨단 말인가!
만약 중생이나 보살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공(空)을 여읜다면 이러한 논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필경공이라면 제법에 장애가 없는 것이거늘, 무엇이 발심하는 것을 방해하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도리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공(空)으로써 수보리의 질문을 깨뜨렸으며, 친히 다시 그 인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마음으로 집착한다면 해탈을 얻기 어려우니라”고 하셨다.
是人從無始生死中來以一切煩惱故深著諸法,聞有亦著,聞空亦著,得失亦著;如是衆生難可勉出。是故菩薩發無上道心,自以相好嚴身,得梵音聲,有大威德。知衆生三世心根本,以種種神通力、因緣、譬喩,爲說無所有法、空解脫門,引導其心。衆生見如是希有事,卽時其心柔軟,信佛受法。是故經說:“著有者難得解脫;有所得者,無道、無果、無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런 사람은 시작도 알 수 없는 무시(無始)에서부터 나고 죽고 하면서 일체의 번뇌 때문에 제법에 깊이 집착하는 것이니, 있다고 들어도 집착하고, 공하다고 들어도 집착하며, 얻거나 잃어도 또한 집착 하느니라.
이와 같은 중생은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보살은 무상도심(無上道心)을 일으켜 스스로 상호(相好)로써 몸을 장엄하고, 범음(梵音)의 소리를 얻어서 큰 위덕이 있으며, 중생의 삼세(三世) 동안의 마음의 근본을 알아서, 갖가지 신통력과 인연과 비유로써 그들을 위하여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법(法)과 공(空)과 해탈문을 설해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인도하나니,
중생들은 이와 같이 희유한 일을 보고는 즉시 그 마음이 부드러워지면서 부처님을 믿고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서 말씀하기를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이는 해탈하기 어렵다.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면, 도(道)도 없고 과(果, 과위)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世尊!若有所得者,無道、無果、無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所得者有道、有果不?”
佛答:“無所有卽是道、卽是果、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세존께 여쭈기를 “만약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서 도(道)도 없고 과(果, 과위)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경우에는 도(道)도 있고 과(果, 과위)도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그것이 곧 도(道)요, 그것이 곧 과(果, 과위)이며, 그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고 하셨다.
若人不分別是有所得、是無所得,入諸法實相畢竟空中,是亦無所得,卽是道、卽是果、卽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破壞諸法實相故。法性卽是諸法實相。
만약 사람이 ‘이것은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다, 이것은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다’라고 분별하지 않고, 제법의 실상(實相)인 필경공 가운데에 들어간다면,
이 또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므로 그것이 곧 도(道)요, 그것이 곧 과(果, 과위)이며, 그것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으로, 이는 제법의 실상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니, 법성(法性)이 곧 제법의 실상인 것이다.
須菩提意謂:法性,正行、邪行常不可破壞,何以佛言“不壞法性是道、是果?”
佛答:“法性雖不可破壞,衆生邪行故名爲破壞。”
如虛空,雲霧土塵雖不能染,亦名不淨。如人實欲染污虛空,是人爲欲染污法性,無是事故。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법성(法性)은 바른 정행(正行)이거나 삿된 사행(邪行)이거나 간에 항상 파괴할 수 없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법성(法性)을 파괴하지 않는 그것이 곧 도(道)요, 그것이 곧 과(果, 과위)라고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법성(法性)은 비록 파괴할 수 없을지라도 중생들의 삿된 사행(邪行) 때문에 파괴한다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마치 허공은 구름이나 안개나 먼지가 비록 더럽힐 수 없을지라도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허공을 더럽히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법성(法性)을 더럽히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러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佛說譬喩:“若人欲壞法性,是人爲欲於無所有法中得道、得果、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만약 사람이 법성(法性)을 파괴하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의 법 가운데에서 도를 얻고 과위를 얻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白佛:“若無所有卽是道,云何有十地等諸菩薩法?”如經廣說。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 그것이 곧 도(道)라면, 어떻게 10지(地) 등의 모든 보살법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問曰:此事佛已先答,所謂:“若法空,菩薩見何事故發心?”今言:“若法空,云何有初地等?”
佛皆以空答,今須菩提何以更問?
묻나니, 이러한 일은 부처님께서 이미 앞에서 대답하신 것으로, 이른바 ‘만약 법이 공하다면 보살은 어떠한 것을 보았기에 발심합니까?’라거나, 지금 ‘만약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초지(初地) 등이 있는 것입니까?’라는 등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그 모두에 대하여 공으로써 대답하셨거늘 지금 수보리존자는 무엇 때문에 다시 여쭈는 것입니까?
答曰:以衆生著心難解故更問。是衆中,有新發意菩薩,聞是諸法實相空,卽生著心,佛破其著,亦著所破法。須菩提爲是人故更問。
답하나니, 중생들이 마음으로 집착하고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시 여쭌 것이다.
이 대중 가운데에는 새로 뜻을 낸 신발의(新發意)의 보살도 있으므로, 그들은 이 제법의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들으면 곧 집착하는 마음을 내며, 부처님께서 그들의 집착을 깨뜨리면 또한 깨뜨리는 그 법에 집착하므로,
수보리 존자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하여 다시 여쭌 것이다.
佛答須菩提:“以無所得故有初地,乃至般涅槃後舍利得供養。”有所著中,不可說初地及諸功德。亦以無所得因緣故,從布施乃至諸神通無有差別,無有差別故不應難!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대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에 초지(初地)가 있고 나아가 완전한 열반에 든 뒤에는 사리(舍利)가 공양을 받나니, 집착이 있는 가운데에서는 초지나 모든 공덕을 설명할 수 없으며,
또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인연으로는 보시에서 모든 신통에 이르기까지에 차별이 없으며,
차별이 없기 때문에 힐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須菩提復問:“云何無所得布施乃至諸神通無有差別?”
佛答:“菩薩從初發心已來,似阿耨多羅三藐三菩提寂滅相,布施畢竟空,所謂不得施者、受者、財物而行布施,如是布施中無有分別;乃至不得菩提而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如是。是名菩薩行無所得般若波羅蜜。行是無所得般若波羅蜜,魔、若魔天不能破壞。”
수보리 존자가 또 여쭈기를 “어떻게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에는 보시에서 모든 신통에 이르기까지에 차별이 없는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처음 초발심에서부터 아뇩다라니삼먁삼보리를 닮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으로써 필경공에 보시하나니,
이른바 보시하는 시자(施者)와 받는 수자(受者)와 재물(財物)은 얻을 수 없는 것임에도 보시를 행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보시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느니라.
나아가 보리는 얻을 수 없는 것임에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를 이름 하여 보살은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니,
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면 악마나 악마의 하늘이 파괴하지 못하느리라”고 하셨다.
一念中行六波羅蜜者。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6바라밀을 행한다’고 함을 문답하리라!
問曰:須菩提何以故問“一念中行六波羅蜜等諸功德”?
묻나니, 수보리 존자는 무엇 때문에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6바라밀 등을 행하는 모든 공덕을 여쭌 것입니까?
答曰:須菩提從佛聞般若波羅蜜甚深無所有相,於諸法中無㝵相;若爾者,則無所不能、無事不作,云何菩薩一念中能攝六波羅蜜乃至八十隨形好?初發心時,以著有無心重故,漸漸次第行;今有無悉捨故,無所不能,是故問。
답하나니,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은 ‘있는 바 없는 무소유상(無所有相)’과 제법 가운데에서의 ‘걸림 없는 무애상(無礙相)’을 듣고는,
만약 그러하다면 곧 능통하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보살이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6바라밀 내지는 80수형호를 포섭할 수 있는가를 여쭌 것이다.
처음 초발심할 때에는 ‘있다ㆍ없다’ 고 하며 집착하는 마음이 무거운 까닭에 차례로 점점 행하였지만,
지금은 ‘있다ㆍ없다’ 는 것을 모두 다 버렸기 때문에 능통하지 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여쭌 것이다.
佛答:“菩薩不離般若波羅蜜行布施等諸功德,無障㝵故,能一念中行。”若遠離般若波羅蜜,則漸漸次第行。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보시 등 모든 공덕을 행하면, 장애가 없기 때문에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행할 수 있지만, 만약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게 되면, 차례대로 차츰차츰 행하여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須菩提問:“云何名不遠離?” 佛答:“菩薩不以二相行布施等。”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떠한 것을 멀리 여의지 않는 불원리(不遠離)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두 가지 모양의 이상(二相)으로써 보시 등을 행하지 않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復問:“云何不以二相?”
佛答:“菩薩行般若波羅蜜時,欲具足檀波羅蜜,於布施一念中攝一切善法。”如先說。
다시 여쭈기를 “어떻게 두 가지 모양의 이상(二相)으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고자 하여 보시하는 한 생각의 일념(一念) 동안에 모든 착한 선법을 포섭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앞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何等是一念?所謂菩薩得無生法忍,斷一切煩惱,除諸憶想分別,安住無漏心中,布施一切。
無漏心是無相相。菩薩住是心中,不見誰施、誰受、誰物,離一切相心布施;不見有一法,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尚不見,何況餘法!是名不二相。乃至八十隨形好,亦如是。
어떤 것이 ‘한 생각의 일념(一念)’인가? 이른바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서 일체의 번뇌를 끊고,
모든 기억과 분별을 없애어서 번뇌 없는 마음의 무루심(無漏心) 속에 편히 머무르면서 일체를 보시하는 동안을 말하는 것이다.
‘번뇌 없는 마음의 무루심(無漏心)’이란, 곧 무상상(無相相)을 말하며, 보살은 이 무상상(無相相)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그 누가 보시하고 그 누가 받으며 그 누구의 물건인가’ 를 보지도 않고,
일체의 상(相)을 여읜 마음으로 보시하면서, 어떠한 하나의 법도 있다고 보지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보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법이겠는가!
이를 이름하여 둘이 아닌 불이상(不二相)이라 하며, 나아가 80수형호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다.
須菩提更以異事問此義:“世尊!諸法無相、無作、無起,云何能具足檀波羅蜜等,乃至八十隨形好?”
佛答:“菩薩無相、無作法中不取相故,無障㝵心布施,須食與食等。”經中已委悉。又先品中亦廣說,是故更不解。
수보리 존자는 또 다른 것으로써 이 이치(義)를 여쭈었으니, “세존이시여, 제법은 무상(無相), 무작(無作), 무득(無得)이며, 일어남이 없는 무기(無起)이거늘, 어떻게 단바라밀 등에서 80수형호까지를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무상(無相)이고 무작(無作)의 법 가운데에서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장애되는 마음없이 보시하나니, 먹을 것을 구하면 먹을 것을 주느니라”고 하셨으니, 경에서 이미 자세히 말씀하셨으며, 또한 앞의 품(品)에서도 자세히 말씀하신 것이므로 더 이상 해설하지 않겠다.
無漏、無相六波羅蜜有二種:一者、得無生法忍菩薩所行,二者、未得無生法忍菩薩所行。得無生法忍菩薩所行,如此中所說。何以故?住無相、無漏心中,行布施等諸法故。
번뇌도 없는 무루(無漏)이고 모양도 없는 무상(無相)의 6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이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이 행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무상(無相)이고 번뇌도 없는 무루(無漏)의 마음에 머무르면서 보시 등의 제법을 행하기 때문이다.
問曰:生身菩薩貪惜未除故,割截甚痛,是則爲難;得無生法忍菩薩,如化人所作,割截無痛,有何恩分?
묻나니, 생(生)・로(老) · 병(病) ·사(死)를 가진 육신의 생신(生身)보살은 탐내고 아끼는 것이 아직 제거되지 못한 까닭에 몸을 베고 끊으면 심한 고통을 느끼므로 이것은 어려운 일이라 여기지만,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은 마치 변화한 화인(化人)과 같아서 몸을 베고 끊어도 고통이 없거늘 무슨 은분(恩分)이 있는 것입니까?
答曰:得無生法忍菩薩,行是六波羅蜜爲難!所以者何?得無生法忍寂滅心,應受涅槃樂,而捨此寂滅樂,入衆生中受種種身,或爲賤人、或爲畜生等,是則爲難!生身菩薩,貪愛未除,著佛身故,以身布施;是爲悕望,非淸淨施,是故不如。復次,行無漏、無相六波羅蜜,是時能具足;有漏、有相則不能具足。是故能具足者有大恩分。
답하나니,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은 이 6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어렵다고 여기나니, 왜냐하면, 무생법인의 고요히 사라진 마음의 적멸심(寂滅心)을 얻으면 마땅히 열반락(涅槃樂)을 받아야 하거늘, 이 고요히 사라진 적멸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들 가운데에 들어가 갖가지의 몸을 받으니, 혹은 하천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혹은 축생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을 곧 어렵다고 여기는 것이며,
생신(生身)보살은 탐애(貪愛)가 아직 제거되지 못하였으며, 부처님의 불신에 집착하기 때문에 몸으로써 보시를 할지라도, 그것은 바라는 바가 있는 것이므로 깨끗한 보시가 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무생법인을 얻은 보살의 행 보다는 못한 것이다.
또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이고 무상(無相)의 6바라밀을 행하는 때에는 완전하게 갖출 수 있지만,
번뇌가 있는 유루(有漏)이고 모양이 있는 유상(有相)이라면 완전하게 갖출 수가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완전하게 갖출 수 있으면 큰 은분(恩分)이 있는 것이다.
大智度論卷第八十七 終 대지도론 87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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