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三惠品 第七十 卷八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① 3
問曰:何以不以如喩實際,而以實際喩如?實際有何易解故譬喩?
묻나니, 무엇 때문에 여(如)를 실제(實際)에 비유하지 않으시고, 실제(實際)만 여(如)에 비유하신 것입니까?
어떠한 알기 쉬운 것이 있기 때문에 실제(實際)에 비유하신 것입니까?
答曰:如、實際雖是一物,觀時異;如是諸法體性,實際是行者心取證。佛以須菩提得是實際爲證,故以爲譬喩。
답하나니, 여(如)와 실제(實際)는 비록 동일한 것일지라도 관찰할 때에는 다른 것이니, 이와 같이 제법의 체성(體性)이 곧 실제이라서 수행하는 행자는 마음으로 증득을 위하는 것이며,
부처님께서도 수보리 존자도 이 실제를 증득하였으므로 그것으로써 비유하신 것이다.
問曰:常說“法性”次“如”,“實際”次“法性”,今“法性”何以在後?
묻나니, 항상 법성(法性)은 여(如)의 다음에 말씀하셨고, 실제(實際)는 법성 다음에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법성을 나중에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今欲以我性、衆生性說畢竟空故,轉次在後。復次,從見諦道、學道中能觀諸法如。無學道中煩惱盡故,定心作證;定心作證故,於一切摠相、別相中通達,名爲法性。諸法本生處名爲性,是故以法性喩實際。
답하나니, 여기에서는 나의 성품인 아성(我性)과 중생의 성품인 중생성(衆生性)으로써 필경공(畢竟空)을 말씀하시고자 차례를 바꾸어서 나중에 두신 것이다.
또 진리를 보게 되는 견제도(見諦道)와 배울 것이 있는 학도(學道) 가운데에서 능히 제법을 여(如)라 관찰하고,
배움이 끝난 무학도(無學道) 가운데에서는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선정의 정심(定心)을 증득하며,
선정의 정심(定心)을 증득한 까닭에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 가운데 통달하나니,
이를 일컬어 법성(法性)을 증득한 것이라 하며,
제법이 본래 생기는 본생처(本生處)를 이름하여 성(性)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성(法性)으로써 실제(實際)에 비유한 것이다.
法性有聲聞分、有大乘分;須菩提於聲聞分中不疑,大乘分中有疑故問。
佛欲以凡人所可解事爲證,故言:“如我性、衆生性、壽命性。”
법성(法性)에는 성문의 몫인 성문분(聲聞分)이 있고, 대승의 몫인 대승분(大乘分)이 있으니,
수보리 존자가 성문분(聲聞分)에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대승분(大乘分)에서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고,
부처님께서는 범부가 이해할 수 있는 일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如)와 나의 성품인 아성(我性)ㆍ중생의 성품인 중생성(衆生性)ㆍ수명의 성품인 수명성(壽命性)을 말씀하신 것이다.
須菩提更無所問,佛欲結句故,反問須菩提:“於汝意云何?我法相實有不?”須菩提得道,故言無。
須陁洹尚不見我,何況阿羅漢!
佛言:“汝以小乘鈍智尚不得我,何況佛!”佛以智慧求我不可得,云何可說?
如我不可說有,一切法亦如是。菩薩能行是不可說法故,當得薩婆若。不可說者,不可分別若有、若無。
수보리 존자가 다시 더 물을 것이 없자, 부처님께서 그 구절을 매듭지으시고자 짐짓 반문하시면서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我)라는 아법(我法)이 실제로 있는 것인가?”라 하셨고,
수보리 존자는 도(道)를 얻었기 때문에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수다원도 오히려 나(我)를 보지 않거늘 하물며 아라한이겠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소승의 둔한 지혜의 둔지(鈍智)로도 오히려 나(我)를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부처님이겠는가!”라고 하셨으니,
부처님께서 지혜로써 나(我)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치 나(我)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체법 역시 그와 같으니,
보살은 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법(不可說法)’을 행하기 때문에 살바야를 얻게 되는 것이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不可說)’이라 함은 있다(有)ㆍ없다(無)를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須菩提問:“世尊!諸法若不可分別,云何分別說有地獄等五道、須陁洹等諸聖道?”
佛答:“衆生無有定法,但有假名字,云何當分別說有地獄等?”衆生及諸聖人,從分別衆生等故有諸道名,衆生實不可得。“如是,須菩提!菩薩應如是學不可說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제법을 분별할 수 없다면, 지옥 등의 다섯 갈래와 수다원 등의 모든 성인의 성도(聖道)가 있다고 어떻게 분별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중생은 정해진 어떠한 정법(定法)도 없이, 다만 임시로 붙인 가명이 있을 뿐이거늘 어떻게 분별하여서 ‘지옥 등 중생과 모든 성인이 있다’고 하겠는가?
중생들을 분별하면서부터 모든 도(道)에 대한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지만 중생은 실로 얻을 수 없는 중생불가득(衆生不可得)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법(不可說)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世尊!菩薩應學色等諸法,今何以言學一切法不可說?”
佛答:“菩薩雖應學色等法,但應作不增不減故學。”
不增不減義,如先說。此中佛自說得不增不減因緣:“若菩薩學不生不滅法,卽是學不增不減。”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마땅히 물질(色) 등의 제법을 배워야 하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일체법에 대하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설법(不可說法)’을 배우라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이 비록 물질(色) 등의 법을 배워야 하나, 다만 증가하지도 않는 부증(不增), 줄어들지도 않는 불감(不滅)이기 때문에 배워야 할 뿐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증가하지도 않는 부증(不增), 줄어들지도 않는 불감(不滅)’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부증(不增), 불감(不滅)하는 인연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니, “만약 보살이 나지도 않는 불생(不生) 없어지지도 않는 불멸(不滅)의 법을 배우면, 그것이 곧 부증(不增) 불감(不滅)을 배우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問:“云何學不生不滅?”佛答:“不起不作諸行業若有、若無故。”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해서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을 배우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모든 행업(行業)에서 있다(有)ㆍ없다(無)를 일으키지도 않고 짓지도 않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有名三有:欲有、色有、無色有。無名斷滅邊,離八聖道强欲求滅。
以是二事,凡夫人起諸行業若善、若不善。是菩薩知諸法實相,所謂不生不滅,是故不作三種業,不起業相應諸法,是名“無作解脫門”。不生不滅,是“無相解脫門”。
있다는 유(有)에는 삼유(三有)가 있으니, 욕유(欲有)와 색유(色有)와 무색유(無色有)이다.
없다는 무(無)에는 아주 없다는 단멸(斷滅)의 치우친 소견을 말하며, 팔성도(八聖道)를 여의고 억지로 소멸하기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이사(二事) 때문에 범부인은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모든 행업을 일으키나,
보살은 제법의 실상, 즉 불생(不生)과 불멸(不滅)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에 세 가지의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을 짓지도 않고 업(業)과 상응하는 제법을 일으키지도 않나니, 이를 이름하여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이라 하고,
불생(不生)과 불멸(不滅)은 곧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라 하는 것이다.
復問世尊:“何等方便故,能不作不起諸行業?”
佛答:“若菩薩能觀諸法自相空,所謂色、色相空,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空,菩薩爾時能作二事:一、能不作不起諸行業,二、能於一切法中行自相空。”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방편 때문에 모든 행업(行業)을 짓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제법 자체의 상(相)이 공한 자상공(自相空), 이를테면 물질(色)은 색상(色相)이 공(空)하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은 아뇩다라삼보리의 상(相)이 공(空)하다고 관찰하면,
보살은 그 때에 두 가지의 이사(二事)를 능히 할 수 있나니,
첫째는 모든 행업을 짓지도 않고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요,
둘째는 일체법 가운데에서 자체가 자상공(自相空)인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復問世尊:“若色等法自相空,云何菩薩應般若波羅蜜中行?”
佛答:“不行是名菩薩般若中行。”
또한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물질 등의 법이 자체가 공한 자상공(自相空)이라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행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을 이름하여 보살이 반야 가운데서 행(行)하는 것이라 하느니라”고 하셨다.
此中自說因緣:“般若波羅蜜體不可得,行者、行法、行處不可得。”法空故,般若波羅蜜不可得,行處亦不可得;衆生空故,行者不可得。一切戲論不可得故,菩薩不行,名爲般若波羅蜜行。須菩提問:“若不行是般若行者,初發心菩薩云何應行般若?”須菩提意:若“不行爲行”者,初發心菩薩心則迷悶;若“以行爲行”者,是則顚倒。是故問。
이 가운데에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반야바라밀의 체(體, 체성)을 얻을 수 없나니, 행하는 행자(行者)와 행하는 법행(行法)과 행하는 행처(行處)도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니라.
법이 공한 법공(法空)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고, 행할 곳의 행처(行處)또한 얻을 수 없으며, 중생공(衆生空)이기 때문에 행하는 행자(行者)도 얻을 수 없으며, 일체의 희론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살이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만약 행하지 않는 것이 곧 반야를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처음 초발심한 보살은 어떻게 반야를 행하여야 합니까?”라고 하였으니,
수보리 존자의 뜻으로는 ‘만약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이 행하는 것이 된다면 처음 초발심한 보살은 마음이 혼미할 것이며, 만약 행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곧 뒤바뀐 전도(顚倒)인 것이다’라고 생각한 때문에 여쭌 것이다.
佛答:“初發心菩薩應學無所得法。”無所得法卽是無行。學名以方便力漸漸行,所謂布施時,以無所得法故應布施。諸法實相畢竟空,畢竟空中無有可得若有、若無;菩薩住如是智慧心中,應若多若少布施;布施物、與者、受者平等觀故,所謂皆不可得。乃至薩婆若亦如是。
이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처음 초발심한 보살은 마땅히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법(無所得法)을 배워야 하나니, 무소득법(無所得法)이란 곧 행함이 없음을 배우는 무행학(無行學)이라는 말이니라.
방편력으로써 점차로 행하나니, 이른바 보시할 때에 무소득법(無所得法)으로써 제법의 실상과 필경공에 보시해야 하는 것이니라.
필경공 가운데에서는 있다ㆍ없다는 유무(有無)를 얻을 수 없으니, 보살도 이와 같은 지혜심(智慧心)에 머물러, 많거나 적거나 간에 보시해야 하는 것은, 보시하는 시물(施物)과 주는 여자(與者)와 받는 수자(受者)를 평등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니,
모두가 얻을 수 없는 불가득이며, 살바야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須菩提作是念:“有所得故則是世閒顚倒,無所得故卽是涅槃。”是故問佛:“云何有所得?云何無所得?”佛略答:“二相是有所得,無二相是無所得。”
二相者,眼一、色一,兩一和合名爲二。以眼故知是色,以色故知是眼,眼、色是相待法。
수보리 존자가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기 때문에 이 세간은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며,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에 그것이 곧 열반이다’라 생각한 때문에 부처님께서 여쭈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간략하게 말씀하시기를 “둘이 있는 이상(二相)은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요,
둘이 없는무이상(無二相)은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니라”고 하신 것이며,
‘둘이 있는 이상(二相)’이란 눈(眼)이 하나요 물질(色)도 하나이라서, 이 양쪽의 하나가 화합하는 것을 둘이라 하며,
눈(眼) 때문에 저것이 빛깔(色)임을 알고, 빛깔(色) 때문에 이것이 눈(眼)임을 아는 것이니,
눈(眼)과 빛깔(色)은 상대하는 상대법(相待法)이다.
問曰:若不見色時亦有眼,云何眼不離色?
묻나니, 빛깔(色)을 보지 않을 때에도 눈(眼)은 있거늘 어찌하여 눈(眼)은 빛깔(色)을 떠나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以曾見色故名爲眼,今雖不觀色,以本爲名。是故一切有爲法皆屬因緣,因屬果,果屬緣,無有定自在者。乃至意、法,菩薩、佛,亦如是。凡夫無智,各各分別,作善、不善業;智者,知是二法皆虛誑、屬因緣,不以是二爲二。
답하나니, 일찍이 빛깔(色)을 보았기 때문에 눈(眼)이라 하나니, 비록 빛깔(色)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본래의 것으로써 부르는 것이니, 그러한 까닭에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속하며, 인(因)은 과(果)에 속하고, 과(果)는 연(緣)에 속하여 정해진 것이나 자재함이 없나니, 나아가 뜻의 의법(意法)과 보살ㆍ부처님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범부인은 지혜가 없으므로 저마다 분별하여 착한 선업(善業)과 착하지 못한 불선업(不善業)을 짓고 있지만, 지혜 있는 이는 이 두 가지의 이법(二法) 모두는 거짓의 허광(虛誑)된 것이라서 인연에 속하는 것임을 알고 있으므로, 이 둘을 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須菩提問:“是二法卽是有所得,不二法卽是無所得。世尊!從有所得法中無所得?從無所得法中無所得?”爲緣諸法取相行道故,得是畢竟空無所得?爲不作緣不取相不行道故,得是畢竟空無所得?若有所得中無所得者,有所得卽是顚倒,行顚倒云何得實?若無所得中得無所得者,無所得卽是無所有,無所有云何能生無所有?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이 둘의 이법(二法)은 곧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요,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은 곧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입니다.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법(有所得法) 가운데에서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고,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의 법 가운데서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면,
제법을 반연하여 상(相)을 취하면서 도를 행하므로, 이는 필경공이라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이며,
반연하지 않고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서 도를 행하지 않으므로, 이 또한 필경공이라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됩니다.
만약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가운데에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이라면, 이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은 곧 뒤바뀌어 전도된 것이라서 뒤바뀜의 전도를 행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진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가운데에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이라면, 무소득은 곧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인데,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를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佛以二俱過故皆不聽。有所得、無所得二事皆能平等觀。平等卽是畢竟空、無所得。因無所得破有所得,事旣辦亦捨無所得。如是菩薩於有所得、無所得平等般若中應學。若菩薩能如是學,是名眞無所得者,無有過失。從一地至一地義,亦如是。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두 가지가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에 모두 인정하지 않으셨으니,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과 얻을 것이 없는 무소유(無所得)의 이 두 가지 모두를 평등하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평등하다면 그것은 곧 필경공이라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요,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으로 인하여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을 파괴하는 것이다.
일이 이러하다면 역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된다는 것 또한 버려야 하나니,
이와 같이 보살은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과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의 평등한 반야 가운데서 마땅히 배워야 하나니,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면, 이를 이름하여 참으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 하여, 과실이 없나니,
한 지위의 일지(一地)로부터 다른 일지(一地)에 이르는 이치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須菩提問:“世尊!若般若不可得、菩提不可得、菩薩不可得,云何菩薩學般若,分別諸法相 所謂惱相是色,苦樂相是受等?若菩薩行般若波羅蜜,色等法不可得,云何能具足檀波羅蜜等諸善法?云何能入菩薩位中?”如經中廣說。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도 얻을 수 없고, 보리(菩提)도 얻을 수 없고, 보살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를 배워서 제법의 법상(法相) 즉 ‘괴롭히는 뇌상(惱相)은 곧 색(色)이요, 괴롭고 즐겁다는 고락상(苦樂相)은 곧 느낌의 수(受)이다’라고 분별하게 되며,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물질 등의 색법(色法)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단(檀)바라밀 등 모든 착한 선법을 두루 갖출 수 있으며? 어떻게 보살의 지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경 가운데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佛語須菩提:“菩薩不以得色等諸法相故行般若。”復問:“爲何等事故行般若?”佛答:“以無所得故行般若。何以故?一切法空、無相、無作、無起,般若波羅蜜、菩薩、菩提亦無相、無作、無起。
菩薩爲一切法實相故行般若,非以顚倒故。須菩提!菩薩應如是無作般若中行無作、無起故。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물질(色) 등의 모든 색법상(色法相)을 얻기 때문에 반야를 행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다.
그러자 또 여쭈기를 “무슨 일 때문에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기 때문에 반야를 행하느니라. 왜냐하면, 일체법은 공(空)하고 무상(無相)이고, 무작(無作)이고, 일으킴이 없는 무기(無起)이며,
반야바라밀과 보살과 보리도 또한 무상(無相)이고, 무작(無作)이고, 일으킴이 없는 무기(無起)이기 때문이니라.
보살은 일체법의 실상을 위하여 반야를 행하면서도 뒤바뀐 전도(顚倒)됨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무작()無作 반야 가운데에서 무작(無作)이고, 일으킴이 없는 무기(無起)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卷第八十三 終 대지도론 83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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