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三惠品 第七十 卷八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 풀이함 2

 

“世尊!若色、色相空,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空,云何菩薩摩訶薩應行般若波羅蜜?”

佛言:“不行,是名行般若波羅蜜。”

“세존이시여, 만약 물질(色)은 물질의 색상공(色相空)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 공(空)하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 이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行)한다 하느니라.”


“世尊!云何不行是行般若波羅蜜?”佛言:“般若波羅蜜不可得故,菩薩不可得,行亦不可得,行者、行法、行處亦不可得故,是名菩薩摩訶薩行不行般若波羅蜜,一切諸戲論不可得故。”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行)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에 보살도 불가득이고, 행(行) 또한 얻을  없는 불가득이며, 행하는 행자(行者)와 행할 행법(行法)과 행하는 처소의 행처(行處) 또한 얻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이를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 행한다고 하나니, 일체의 희론은 얻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니라.”


“世尊!若不行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從初發意菩薩,云何行般若波羅蜜?”

“須菩提!菩薩從初發意已來,應學空無所得法。是菩薩用無所得法故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以無所得法故修智慧,乃至一切種智亦如是。”

“세존이시여, 만약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 바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行)하는 것이라면, 처음에 초발의(初發意)한 보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지요?”

“수보리야, 보살이 초발의하여서부터 공하여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법(無所得法)을 배워야 하느니라. 

 보살은 얻을 것이 없는 불가득법으로써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을 닦기 때문이며, 얻을 것이 없는 불가득법으로써 지혜를 닦기 때문이니, 나아가 일체종지 또한 이와 같으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云何名有所得?云何名無所得?”

佛告須菩提:“諸有二者,是有所得;無有二者,是無所得。”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 하고, 

어떠한 것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고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둘이 있는 유이자(有二者)는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라 하고, 

둘이 없는 무유이자(無有二者)는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 하느니라.”

 

“世尊!何等是二有所得?何等是不二無所得?”佛言:“眼、色爲二,乃至意、法爲二,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佛爲二,是名爲二。”

“세존이시여, 무엇이 둘이 있는 유이자(有二者)으로서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이며, 

무엇이 둘이 없는 무유이자(無有二者)로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眼)과 빛깔(色)이 둘이 되고 나아가 뜻(意)과 법(法)이 둘이 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부처님까지도 둘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둘이 된다고 하느니라.”

[눈(眼)/빛깔(色)ㆍ귀(耳)/소리(聲)ㆍ코(鼻)냄새(香)ㆍ혀(舌)/맛(味)ㆍ몸(身)/ 닿임(觸)ㆍ뜻(意)/법(法)의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世尊!從有所得中無所得?從無所得中無所得?”

佛言:“不從有所得中無所得,不從無所得中無所得。須菩提!有所得、無所得平等,是名無所得。

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於有所得、無所得平等法中應學!

須菩提!菩薩摩訶薩如是學般若波羅蜜,是名無所得者,無有過失。”

“세존이시여,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가운데에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인지요, 

아니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가운데에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것이 있는 가운데에서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도, 

아니고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가운데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아니니라. 

수보리야,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평등하니, 

이를 일컬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유소득(有所得)과 무소득(無所得)의 평등한  가운데서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을 일컬어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자(無所得者)라 한다면, 허물이 없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菩薩行般若波羅蜜,不行有所得、不行無所得,云何從一地至一地,得一切種智?”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住有所得中,從一地至一地。

何以故?有所得中住,不能從一地至一地。

何以故?須菩提!無所得是般若波羅蜜相,無所得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相,無所得亦是行般若波羅蜜者相。

須菩提!菩薩摩訶薩應如是行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행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地)로부터 다른 지(地) 이르며, 일체종지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고도 한 지(地)로부터 다른 지(地) 이르나니, 왜냐 하면 얻을 것이 있는 유소득(有所得) 가운데 머무르면 한 지(地)로부터 다른 지(地)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바로 반야바라밀의 상(相)이요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상(相)이며,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행자 상(相)이기 때문이니,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若般若波羅蜜不可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可得,行般若波羅蜜者亦不可得,云何菩薩摩訶薩分別諸法相,是色、是受、想、行、識,乃至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得色,不得受、想、行、識,乃至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반야바라밀이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행자 또한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제법의 상(相) 분별하여 ‘이것은 물질(色)이다, 이것은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이다’ 

내지는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물질(色)을 얻지 않고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 얻지 않으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않느니라.”


“世尊!若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色不可得,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可得,云何具足檀波羅蜜乃至具足般若波羅蜜,入菩薩法位中;入已,淨佛國土、成就衆生,得一切種智;得一切種智已,轉法輪、作佛事,度衆生生死?”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色)을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라면, 

어떻게 단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며? 

보살의 법위(法位) 안에 들어가며?

법위에 들어가서는 부처님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일체종지를 얻으며? 

일체종지를 얻은 뒤에는 법륜(法輪)을 굴리고 불사(佛事)를 하면서 중생들을 생사(生死)로부터 제도하는지요?”


佛告須菩提:“菩薩摩訶薩不爲色故行般若波羅蜜,乃至不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行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물질(色)을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行)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行)하느니라.”


須菩提白佛言:“世尊!菩薩爲何事故行般若波羅蜜?”

佛言:“無所爲故行般若波羅蜜。何以故?一切諸法無所爲、無所作,般若波羅蜜亦無所爲、無所作,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無所爲、無所作,菩薩亦無所爲、無所作。如是,須菩提!菩薩摩訶薩應行般若波羅蜜無所爲、無所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보살은 어떠한 일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行)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느니라. 

왜냐 하면,법은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며, 

반야바라밀 또한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며, 

보살 또한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되 위하는 것이 없는 무소위(無所爲)이고 짓는 것도 없는 무소작(無所作)이어야 하느니라.”


▶論. 釋曰:聽者聞種種讚般若功德,得善知一切事,而貴愛是般若波羅蜜,方便欲得。

須菩提知衆人意,是故問佛:“世尊!云何行般若?云何生?云何修?”

▷논. 해석한다. 청중은 갖가지로 반야의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듣고는 일체의 일을  알게 되었으며, 게다가 반야바라밀의 방편을 귀히 여기고 좋아하며 얻고 싶어 하므로, 

수보리 존자가 사람들의 뜻을 알아차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반야를 행(行)하고 어떻게 내며(生) 어떻게 닦(修)습니까”라고  것이다.


有人言:行者,在乾慧地;生者,得無生忍法;修者,得無生忍法後,以禪波羅蜜熏修般若。

어떤 분은 말하기를 “행한다(行) 함이란, 지혜는 깊지만 아직 법성을 깨닫지 못한 간혜지(乾慧地)에 있는 것이요, 

내는 생(生)이라 함은 무생인(無生忍)의 법을 얻은 것이며, 

닦는 수(修)라 함은 무생인의 법을 얻은 뒤에 선(禪)바라밀로써 반야를 훈수(熏修)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서, 첫 단계가 간혜지(乾慧地), 두 번째 단계는 수다원(須陀洹), 세 번째 단계는 사다함(斯陀含), 네 번째 단계는 아나함(阿那含), 다섯 번째 단계는 아라한(阿羅漢)이라 하며, 그 위는 보살, 부처의 경지이다. - 아미산


佛答:五衆是一切世閒心所行結縛處,涅槃是寂滅相。菩薩以般若波羅蜜利智慧力故,能破五衆,通達令空,卽是涅槃寂滅相。從寂滅出,住六情中,還念寂滅相,知世閒諸法皆是空、虛誑、不堅實,是名般若。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오중(五衆)은 바로 일체 세간에서 마음으로 하는 심소행(心所行)을 결박하는 곳이요, 

열반은  적멸상(寂滅相)이니, 보살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예리한 지혜의 힘으로써 능히중을 파괴하고 통달하여 공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반적멸상(涅槃寂滅相)이다. 

적멸(寂滅)에서 벗어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정(六情) 가운데에 머무르되 도리어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 생각하면서 ‘세간의법은 모두가 공(空)하고 거짓의 허광(虛誑)이며 견실(堅實)하지 못한 것’이라고 아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반야라 한다.


行般若,無定相故,不可得說若有、若無,言語道斷故。空如虛空,是故說“如虛空生”。

又如虛空,虛空中無有法生,虛空亦不能有所生,

所以者何?無法、無形、無觸,無作相故;般若波羅蜜亦如是。

반야를 행하면서도 일정한 정상(定相) 없기 때문에 ‘있다(有)ㆍ없다(無)’라고 말할   없으며, 

언어(言語)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이기 때문에 공(空)이니, 마치 허공과 같은 여허공(如虛空)인 것이다.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이 내는 여허공생(如虛空生)’이라 하며,

 허공과 같은 여허공(如虛空)  가운데에서 나오는 어떤 법도 없으며, 허공은 또한 내는 것이 있을 수가 없으니, 왜냐하면, 법도 없는 무법(無法)이고, 형상도 없는 무형(無形)이며, 접촉도 없는 무촉(無觸)이고, 작용도 없는 무작상(無作相)이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이다.


復有人言:有是虛空,但以常法無作故不能生,是爲定相。摩訶衍中,虛空名無法,不得說常、不得說無常,不得言有、不得言無,非有非無亦不可得;滅諸戲論,無染無著,亦無文字。

般若波羅蜜亦如是,能觀世閒似如虛空。是名“生般若波羅蜜”。

 어떤 말하기를 “이 허공이 있기는 하나 다만 항상하는 상법(常法)이라서 작용함이 없는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수가 없는 불능생(不能生)이나니, 이것이  일정한 모양의 정상(定相)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마하연(摩訶衍) 가운데에는 허공은 없는 무법(無法)이라 하여 항상 있는 상(常)이라고도 말할  없고, 무상(無常)하다고도 말할  없으며, 있다고도 말할  없고, 없다고도 말할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이고, 모든 희론이 소멸되었으며, 물듦이 없는 무염(無染)이고, 집착도 없는 무착(無著)이며, 또한 문자도 없는 무문자(無文字)이다.

반야바라밀 또한 이와 같아서, 세간은 마치 허공과 같다고 능히 관찰하나니, 이를 일컬어 ‘반야바라밀을 내는 생반야바라밀(生般若波羅蜜)이라 한다’고 하였다.


菩薩得般若已,入甚深禪定,以般若力故,觀禪定及禪定緣皆破壞。

何以故?般若波羅蜜捨一切法,不著相故。是名“修般若波羅蜜”。

聽者作是念:“一切法皆有時節。”是故須菩提問:“般若波羅蜜應幾時行?”

佛答:“從初發心乃至坐道場應行。”

보살이 반야를 얻은 뒤에 매우 깊은 선정에 들어가 반야의 힘으로써 선정과 선정의 대상인 선정연(禪定緣)을 관찰하여 모두 파괴하나니,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일체법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는 불착상(不著相)이기 때문이니,

이를 일컬어 ‘반야바라밀을 닦는 수반야바라밀(修般若波羅蜜)이다’고 한다.

듣는 청자(聽者)들이 생각하기를 “일체법 모두는 시절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반야바라밀은 얼마 동안이나 행해야 합니까”라고 하였고,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처음 초발의하여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행하여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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