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大方便品 第六十九 卷八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9. 대방편품(大方便品)을 풀이함 ① 7
須菩提問佛:“如佛所教,菩薩當學般若?” 佛言:“我教令學般若。”
須菩提作是念:“一切法平等相,何以故但教學般若?”
佛答:“學是般若波羅蜜,於一切法得自在故,我教學般若波羅蜜。”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대로 보살도 마땅히 반야를 배워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은 반야를 배우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일체법은 평등한 평등상(平等相)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반야만을 배우도록 가르치시는 것일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일체법에 대하여 자재함을 얻기 때문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배우라고 가르치느니라”고 하셨으며,
般若波羅蜜於一切法中最大,如佛於一切衆生中最尊;又如萬川,大海爲大。
如經中說射師喩。若菩薩能如是一切法中行自在般若,魔、若魔人所不能勝,何況增上慢及邪見人!
반야바라밀은 일체법 가운데에서 가장 큰 최대(最大)이니,
마치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으신 최존(最尊)이신 것과 같고, 또 만 갈래의 냇물이 큰 바다를 크게 여기는 것과 같으니, 마치 경에서 활 쏘는 사람에게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일체법 가운데서 자재로이 반야를 행한다면, 악마나 악마의 백성으로서도 이길 수가 없거늘, 하물며 증상만(增上慢)이나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이겠는가?
是菩薩爲十方諸佛所念。諸佛念義,如先說。
此中佛說:“若菩薩行六波羅蜜,亦能觀六波羅蜜畢竟空;如是人有大功夫故,爲諸佛所念” 譬如勇士入陣,破賊而不被瘡,則爲主所念;菩薩亦如是,破諸煩惱賊,具足六波羅蜜,而不著六波羅蜜,則爲諸佛所念。
이러한 보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護念)하시나니,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만약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고 또한 6바라밀이 필경공이라는 것을 관찰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커다란 노력의 공부(功夫)가 있는 것이기에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느니라”고 하였으니,
비유하자면, 용감한 병사가 싸움터에서 원적을 격파하고도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곧 왕(主)의 호념이 있었기 때문이듯,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번뇌의 도둑을 깨뜨리고 6바라밀을 두루 갖추고서도 6바라밀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모든 부처님의 호념을 받게 되는 것이다.
諸佛不取是菩薩色故念,不取受想行識故念。何以故?色等諸法虛誑不實故,諸佛觀是菩薩身如實相故念。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이 물질(色)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호념하시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호념하시나니, 왜냐 하면, 물질(色) 등의 제법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이 몸을 실상(實相) 그대로 관찰하기 때문에 호념하시는 것이다.
須菩提歡喜言:“菩薩多有所學。”亦學俗法、亦學道法,亦學諸波羅蜜、亦學畢竟空,亦學起、亦學滅。
凡夫學起不能學滅;聲聞學滅不能學起;菩薩亦學起亦學滅,是故言多有所學。
是起滅如幻、如夢,畢竟空故,實無所學。佛可其言,自說因緣:“菩薩所學,皆無所得”
수보리 존자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보살은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세속법을 배우고, 도의 도법(道法)을 배우며, 모든 바라밀을 배우고, 필경공을 배우며, 일어나는 기(起)를 배우고, 소멸하는 멸(滅)을 배웁니다.
범부는 일어나는 기(起)를 배울 때에는 소멸하는 멸(滅)을 배울 수 없고,
성문은 소멸하는 멸(滅)을 배울 때에는 일어나는 기(起)를 배울 수 없으나,
보살은 일어나는 기(起)를 배우면서도 또한 소멸하는 것멸(滅)을 배우게 되나니, 이 때문에 배우는 것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어나고 소멸하는 기멸(起滅)은 마치 환과 같고 꿈과 같아서 필경공하기 때문에 실로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의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이 배우는 것 모두는 얻는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須菩提白佛言:“世尊!佛所說法,若略、若廣,菩薩所應學,何以故言所學皆無所得?”
須菩提意:如佛所說八萬四千法聚、十二部經,若廣、若略,諸三乘人所學;此中說菩薩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應學六波羅蜜若略、若廣;
學者應當受持、親近是法,讀、誦、思惟、正觀;乃至入無相三昧,心、心數法不行。
菩薩能如是學,則能知諸法略、廣相。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보살은 간략하게 또는 폭넓게 배워야 합니다. 왜냐 하면, 배우는 것 모두는 얻는 것이 아닌 무소득(無所得)이라고 말씀하신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수보리 존자의 뜻으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8만4천의 법취(法聚)인 12부경(部經) 가운데에서 자세하게 또는 간략하게 모든 삼승(三乘)의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 법이므로, 이 가운데에서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6바라밀을 간략하게 또는 자세하게 배워야 하며,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이 법을 받아 지녀서 친근하고 독송하고 사유하고 바르게 관찰하며, 나아가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들어가고 마음(心)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이 작용하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야 하나니,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게 되면 곧 제법의 간략한 약상(略相)과 자세한 광상(廣相)을 알게 된다’고 여긴 것이다.
12부경(部經, dvādaśāńga-dharmapravacana)=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용과 형식에 따라 12부류로 분류한 것으로, 12분교(分敎) 혹은 12분성교(分聖敎)라고도 한다. 내용은 전승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본 책 제33권 〈51. 초품 중 모든 부처님 세계를 보다[見一切佛世界]의 뜻을 풀이함 ①〉에서는 대승의 입장에서 12부경을 설명하고 있다.
廣者,從八萬四千法聚已來無量佛法;略者,乃至小品,小品中一品,一品中一段。
復次,略者,知諸法一切空、無相、無作、無生無滅等, 廣者,諸法種種別相分別,如後“善知識”中說。
須菩提問:“云何菩薩知一切法略廣相?”佛答:“若知諸法如如相者,所謂不生不滅不住異”
‘자세하다는 광(廣)’이라 함이란, 8만 4천의 법취(法聚)에서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에 이르기까지를 말함이요,
‘간략하다는 약(略)’이라 함이란, 작은 소품(小品)에 이르기까지를 말하는 것이니, 작은 중에서도 하나의 일품(一品)이며, 하나의 일품(一品) 중에서도 하나의 단락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간략하다는 약(略)’이라고 함은 제법이 일체공(一切空)이라서 무상(無相)이고, 무작(無作)이며, 무생(無生)이며, 무멸(無滅)이라는 것 등을 아는 것이며,
‘자세하다는 광(廣)’고 함이란, 제법을 각각의 별상(別相)으로 분별하는 것이니, 뒤의 ‘선지식(善知識)’ 가운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어떻게 보살이 제법의 간략한 약상(略相)과 자세한 광상(廣相)을 아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제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을 아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不生)이고, 불멸(不滅)이며, 머무르거나 달라지지 않는 불주이(不住異)를 말하느니라”고 대답하셨다.
問曰:若如一相、無生相,云何菩薩知是如故,知諸法摠相、別相?摠相、別相,卽是略、廣相。
묻나니, 만약 여(如)가 하나의 일상(一相)이요 생함이 없는 무생상(無生相)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여상(如相)모양을 알며, 제법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아는 것입니까?
총상과 별상의 그 자체가 바로 간략한 약상(略相)과 자세한 광상(廣相)입니까?
答曰:如名諸法實相,常住不壞,不隨諸觀。菩薩得是如,卽破無明邪見等諸顚倒;是人得實法故,一切世閒法摠相、別相,了了知。先凡夫時智慧眼病,以無明顚倒覆故,不能實知。
답하나니,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란 제법의 실상(實相)이라서 항상 머물러 파괴되지 않으며, 모든 관(觀)을 따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 여(如)를 얻으면 곧 무명(無明)과 삿된 사견 등 모든 뒤바뀌어 전도된 것을 파괴하나니, 이 사람은 진실한 실법(實法)을 얻기 때문에 일체 세간법의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분명히 알게 되나니,
범부이었을 때에는 지혜의 눈에 병이 들어서 무명과 뒤바뀜에 가려진 때문에 진실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問曰:實法相者,所謂空、無相、無作,諸智滅;云何言“得如實相故,了了知諸法摠相、別相”?
묻나니, 진실한 법의 실법상(實法相)이란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라서 모든 지혜가 소멸하거늘,
어떻게 “여(如)의 실상을 얻기 때문에 제법의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분명히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我已先答,而汝於如中取相故,復作是難;汝若知如,不應作是難。
是如畢竟無相故,不妨知諸法摠相、別相,以智慧明了了故。
復次,譬如人年旣長大,乃知小時所行皆愚癡可笑。菩薩亦如是,入諸法實相,起已,還在顚倒果報六情中,念寂滅解脫樂,乃知世閒六情所著皆是虛誑可捨法 是名“摠相”。於此中分別不淨有上、中、下,無常、苦、空、無我等亦如是,乃至八萬四千種諸錯謬。
답하나니, 내가 이미 앞에서 대답하였거늘, 그대는 이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 가운데서 상(相)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니, 먄약 그대가 여(如)를 안다면 이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여(如)는 필경무상(畢竟無相)이므로 제법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아는 데 방해되지 않나니, 지혜의 눈으로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어른이 된 뒤에야 비로소 어릴 때에 하였던 일들이 모두 어리석어서 웃음거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제법의 실상에 들었다가 일어난 뒤에 다시 뒤바뀜의 과보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육근의 육정(六情) 속에서 고요히 사라진 적멸(寂滅) 해탈의 즐거움을 생각한다면, 그제야 세간에서 육정으로 집착했던 모두가 거짓이라서 버려야 할 법임을 알게 되나니, 이를 이름하여 전체의 총상(總相)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청정하지 못한 것을 분별한다면 상ㆍ중ㆍ하가 있으며,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 등도 역시 이와 같으며, 나아가 8만 4천 가지의 모든 착오(錯誤)가 있는 것이다.
復次,知如、法性、實際故,亦知諸法略、廣相。如、法性、實際差別義,如初品中說。此中,佛說:“非際是實際。”非際者,無相可取,無定法可著。
또한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알기 때문에, 역시 제법의 간략한 약상(略相)과 자세한 광상(廣相)을 알게 되나니, 여ㆍ법성ㆍ실제의 차별의 뜻에 대해서는 초품(初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제 아닌 비제(非際)가 바로 실제이다”라고 하셨는데,
‘실제가 아닌 비제(非際)’란 취할 수 있는 어떤 상(相)도 없고, 집착할 수 있는 일정한 법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得法性故,知色等十八性皆是法性。法性相者,佛說:“無分、無非分。”
無分者,不可示此示彼,無分別、無相、無量;無非分者,不著是無相、無量等破量相法性,
二事妨故不見:一、有相、有量,二、無相、無量。有相、有量爲麤,無相、無量爲細,
是故說“法性相無分、無非分”。
법성(法性)을 얻기 때문에 물질(色) 등의 십팔성(十八性, 십팔계)이 모두 법성(法性)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니,
‘법성상(法性相)’이라 함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분한도 없는 무분(無分)이고 분한이 아닌 것도 없는 무비분(無非分)이다”고 하신 것이다.
‘분한이 없는 무분(無分)’이란, 이것이라 보일 수도 없고, 저것이라고 보일 수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분별도 없고 상도 없고, 무량하기 때문이다.
‘분한 아닌 것이 없도 없는 무비분(無非分) ’이란, 곧 무상(無相)이고, 무량하다는 등에 집착하지 않음이니, 양(量)과 상(相)이 있는 법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가 방해되어서 때문에 보지 못하나니, 첫째는 상이 있는 유상(有相)이고, 한량이 있는 유량(有量)이요,
둘째는 무상(無相)이고, 무량하다는 것이다.
유상(有相)이고, 유량(有量)이라면 거친 추(麤)요, 무상(無相)이고, 무량하다면 세밀한 세(細)이니,
이 때문에 “법성상(法性相)은 분한도 없는 무분(無分)이고 분한이 아닌 것도 없는 무비분(無非分)이다고”고 하는 것이다.
菩薩入三解脫門,住如等三實法,則能籌量知一切法摠相、別相。須菩提聞佛答已,欲更問無量佛法異門事。佛答:“知一切法無合無散故,則知諸法摠相、別相。”
보살이 공 무상 무작의 삼해탈문에 들어가서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 등의 세 가지 진실한 실법(實法)에 머무른다면, 곧 잘 헤아려서 제법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알게 되나니,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무량한 부처님의 불법과 다른 이문(異門)의 일을 여쭈고자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체법이 합하는 것도 없는 무합(無合)과 흩어짐이 없는 무산(無散)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곧 제법의 총상(總相)과 별상(別相)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眼見二指有合散,云何言“無合散”?
묻나니, 눈으로 두 개의 손가락을 보아도 합하고 흩어짐이 있거늘, 어떻게 합하고 흩어지는 것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我先言:“肉眼所見,與牛羊無異,不可信。”復次,三節皮肉具足爲指,指無定法。復次,設有指法,亦不盡合,一分合,多分不合;多分不合故,不得言指合。
답하나니, 내가 앞에서 말하기를 “육안으로 보는 것은 소나 양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세 개의 마디에 피부와 살이 갖추어져서 만들어진 것이 손가락이며, 그 손가락에는 일정한 정법(定法)도 없으며, 또한 가령 손가락이라는 지법(指法)이 있다 하여도 역시 모두가 합쳐지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일부분은 합쳐지고 많은 부분은 합쳐지지 않나니, 많은 부분이 합쳐지지 않기 때문에 손가락은 합쳐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問曰:以少合故名爲合?
묻나니, 적은 부분이라도 합쳐지기 때문에 합쳐진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答曰:指少分不名爲指,云何言指合?若多分不合不名爲不合,何以少分合故名爲合?是故不得言二指合。
復次,指與分不異不一故,卽是無指;無指故,無合;入破一異門中,則都無合。
如佛此中說:“一切法自性無,性無故卽是無法,無法云何有合散?”
답하나니, 손가락의 적은 부분만을 가리켜서 손가락이라 하지 않거늘, 어떻게 손가락이 합쳐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많은 부분이 합쳐진다면 합쳐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찌하여 적은 부분이 합쳐지기 때문에 다 합쳐진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두 개의 손가락은 합쳐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손가락과 부분이 다른 것도 아니요 동일한 것도 아니므로 곧 손가락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고, 손가락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합하는 것도 없는 것이니,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것을 파괴하는 문에 들어가면, 도무지 합한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일체법에는 자성(自性)이 없으며 성(性,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곧 없는 무법(無法)이니, 무법이 어떻게 합하거나 흩어지는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과 같다.
須菩提聞佛說如、法性、實際,不合不散四門,知略、廣相,
是故須菩提言:“世尊!是名略攝般若波羅蜜。略攝門是安隱道故,一切菩薩所應學”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는 합해지는 것도 아니요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네 개의 사문(四門)에 대한 말씀을 듣고 간략한 약상(略相)과 자세한 광상(廣相)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수보리 조자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것을 바로 간략하게 섭취하는 약섭(略攝)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간략하게 섭취하는 약섭(略攝) 문은 바로 안은(安隱道)이기 때문에 일체 보살들이 마땅히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大智度論卷第八十二 終 대지도론 82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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