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大方便品 第六十九 卷八十二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9. 대방편품(大方便品) 풀이함 6

 

此中說因緣:“以衆生憶念故,生三界善、不善處;若無憶念則不著,不著則不生。”

이 가운데에서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중생은 기억하기 때문에 삼계(三界)의 좋은 곳과 나쁜 곳에 태어나나니,

만약 기억함이 없다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태어나지도 않는다”고 하셨다.

 

須菩提從佛聞是已,思惟籌量:“是法畢竟空、無所有;若行是法,亦應無所得、無住處。何以故?因果相似故。”是故問佛:“菩薩作是念行般若,何所住、何所得?”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씀을 듣고 나서는, ‘이 법이 필경공이라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라면, 이 법을 행할지라도 마땅히 얻는 것도 없어야 하고, 머무를 곳도 없어야 한다. 왜냐 하면, 원인과 결과는 서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라고 사유하고 헤아린 까닭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보살이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반야를 수행하면 머무르는 곳은 어디이며?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한 것이며, 

 

佛答:“色等一切法中不住,乃至不住中亦不住。”不取相故不著,不著故則不住。此中佛自說因緣:“是菩薩不見法有可著、可住、著者、住者。”此中法難破故,但說法,不說著者。

부처님께서는 “물질(色) 등의 일체법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고, 나아가 불주(不住) 가운데에도 또한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이며, 상(相)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 보살은 집착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집착한다는 착(著)ㆍ머무른다는 주(住)란, 여기에서는 깨뜨리기 어려운 법이기 때문에 다만 법만을 설하고 집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느니라.

 

須菩提!若菩薩住是衆生空、法空,作是念:“我能如是行”者,則是失、則是離。

何以故?般若波羅蜜是不著相。是菩薩以我心外著空、內著我,不如般若行,故言遠離般若。

何以故?般若波羅蜜是不著相,以性無故。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에 머물러서 생각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잘못된 실(失)이요, 그것은 곧 여의는 이(離)이니라.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집착할 상이 아닌, 불착상(不著相)이데도 이 보살은 '나'라는 아심(我心)으로 밖으로는 공에 집착하고 안으로는 나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반야와 같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를 멀리 여읜다고 말하나니,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상에 집착하지 않는  불착상(不著相)이며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上以著空故失,今以破空得般若,而著般若無性故失,失故不得受記。

若作是念“住般若中能生檀波羅蜜等”者,亦復是失。

위에서는 공에 집착하는 착공(著空)이었기 때문에 잘못되었고,

여기에서는 공을 깨뜨리는 파공(破空)하고 반야를 얻어서 반야의 성품이 없는 것에 집착한 때문에 잘못된 것이니, 잘못된 실(失)이기 때문에 수기(授記)를 얻지 못하나니,

만약 생각하기를 ‘반야 가운데에 머물러 단바라밀 등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잘못된 실(失)이다.

 

問曰:上二失因緣可爾,今以何爲失?

묻나니, 위의 두 가지의 과실은 그럴 수 있겠으나, 지금은 무엇 때문에 과실이 되는 것입니까?

 

答曰:上二失以著空、著無性法故,便不能修檀波羅蜜等功德,而生邪見故,作是念:“若法都空,復何所行?”是人以不著空、不著無性故行檀波羅蜜等,作是念:“能不著空、無性而能行是功德,是爲眞道。”是亦爲失,以其心有悕望故。

若失般若,則不能行檀波羅蜜乃至大悲。何以故?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眞實法,般若波羅蜜與此相似;檀等諸善法不相似,以其取相著故。

답하나니, 위의 두 가지 과실은 공에 집착하는 착공(著空)이고, 성품이 없는 법에 집착하는 착무성법(著無性法)이기 때문에 단바라밀 등의 공덕을 닦지 못하며, 게다가 삿된 사견을 내어 생각하기를 ‘만약 법이 전부 공하다면 다시 행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게 되나니,

이 사람이 공에 집착하지도 않는 불착공(不著空)이고 성품이 없음에도 집착하지도 않는 불착무성(不著無性)이기 때문에 단바라밀 등을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불착공(不著空)과 불착무성(不著無性)이기 때문에 이러한 공덕을 행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도의 진도(眞道)이다’라고 한다면, 이것 역시 과실이니, 그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며, 

만약 반야를 잃게 되면 단바라밀 내지는 대비(大悲)를 행할 수 없나니, 왜냐 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곧 진실한 실법(實法)이니 반야바라밀은 이것과 서로 비슷하지만, 단(檀) 등의 모든 착한 선법은 서로 비슷하지 않아서 그 상(相)을 취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若菩薩自憶想分別:“一切法不取相,諸佛知是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取相者,名畢竟空,

不可取,諸相滅故。亦爲他開示、演說,則失般若。是人以求空則失、無性亦失;

我是凡夫生死人,諸煩惱未盡,云何能得?但隨佛語,自不分別,而定心爲他人說:“不取一切相是佛法。”種種因緣,以此事開示、詔,是亦爲失。

何以故?諸佛於諸法無所得,取義亦如是;是不取相法,乃至假名字不可說,何況有所得!

諸佛法寂滅相,無諸戲論,一切語言道斷故。

만약 보살이 스스로 일체법을 기억하고 분별하며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 이러함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임을 아시는 것이며,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필경공(畢竟空)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상(相)의 소멸은 취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역시 다른 이를 위하여 열어 보이고 연설하면 곧 반야를 잃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공(空)을 구하고 있으므로 곧 과실이요,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을 구하고 있으므로 역시 과실이다.

“나는 곧 범부요 생사(生死)하는 사람이라서 모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다만 부처님 말씀만을 따르면서 스스로 분별하지 않고, 갈앉은 마음의 정심(定心)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며, 일체의 상(相)을 취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불법이다”고 하면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이러한 일을 열어 보이고 가르쳐 주는 것 역시도 과실이니,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제법에 대하여 얻거나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뜻을 취하는 취의(取義) 또한 이와 같아서 이것은 상을 취하지 않는 불취상법(不取相法)이며, 나아가 임시로 붙인 가명이라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거늘 하물며 얻을 것이 있겠는가?

모든 부처님의 불법은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요, 모든 희론이 없으며,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진 어언도단(語言道斷)이기 때문이다.

 

須菩提作是念:“若空有失,空空中亦有失,無取法中亦有失,然不可無道。”今當問佛:“云何行者無是過失?”

佛答:“若菩薩知諸法畢竟空、無所有、不可取,是法不可得知,如是行者則無失。”

菩薩著畢竟空、著無性、著菩薩所行道,佛說三種皆失。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만약 공(空)에도 과실이 있다면, 공한 것도 공하다는 공공(空空)에도 과실이 있고, 취할 것이 없는 법의 무취법(無取法)이라는 말에도 역시 과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道)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지금 마땅히 부처님께 물어야겠다’고 하고는, “어떻게 하면 수행하는 행자들에게 이러한 과실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제법은 필경공이라서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취할 수도 없는 불가취(不可取)이며 이 법은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다’ 하고서, 이와 같이 알고 수행한다면 곧 과실이 없다”라고 하셨으며,

보살이 필경공에 집착하고, 성품이 없는 무성(無性)에 집착하며, 보살이 행한 소행도(所行道)에 집착하는 이 세 가지를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다 과실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菩薩聞是已,則捨著心,今猶著佛所行未息:“如佛所行,必是眞道,我但當隨佛行。”一切法無所有、不取相,是故爲失。

今能如佛心中所得法,如是法相,佛亦無所得;無所得故不貪貴佛、不輕賤餘人,於一切衆生其心平等。

보살이 이러한 말씀을 들은 뒤에 곧 집착하는 착심(著心)을 버렸으나, 지금은 오히려 부처님께서 하신 불소행(佛所行)에 집착하여 쉬지 못하면서 “부처님께서 하신 행은 반드시 진실한 진도(眞道)이다. 나는 부처님만을 따라서 행해야하리라”고 하나니, 일체법은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라서 상을 취하지 못하므로 이것도 과실이 되며, 

이제 부처님의 마음 속에서 얻은 법과 같은 이러한 법의 법상(法相)은 부처님 또한 얻는 바가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득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탐내거나 귀히 여기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업신여기거나 천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그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는 것이다.

 

此中更問:“如是,是淸淨般若,無有過失,離自相不著。不離自相是卽有相著法;若離自相,云何可行?”

佛答:“若菩薩於一切法不生,是名能行般若。是菩薩不說是色若常若無常等、是色、誰色。”是色,破色;誰色,破人。色乃至一切種智,亦如是。

여기에서 다시 여쭈기를 “이와 같은 것이 바로 청정한 반야이라서, 과실이 없고, 자상(自相)을 여읜지라 집착하지 않지만, 자상(自相)을 여의지 못하면 이것은 곧 상이 있는 유상법(有相法)에 집착하는 것이니, 만약 자상(自相)을 여의고자 한다면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일체법에 대하여 불생(不生)이라면, 이것을 일컬어 능히 반야를 행한다고 한다.

이 보살은 ‘이 물질(色)이 항상 있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으로 말하지 않으며, ‘이 물질(色)은 누구의 물질(色)인가?’ ‘이 물질(色)이 물질(色)을 파괴하는가?’ ‘어느 물질(色)이 남의 물질(色)을 파괴하는가?’라고 말하지 않으니,

나아가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셨다.

 

若法如是畢竟空,推求不可得,是不可生。所以者何?性不能生性,無性不能生無性。如是等破顚倒,得實論議,皆是般若波羅蜜力,餘波羅蜜皆隨從;

譬如轉輪聖王有所至處,四種兵常隨從。聖王福故,四種兵皆能飛;般若力故,諸餘法皆是實性,同至佛道。

復次,譬如善御駕駟,不失平道。馬雖有致車之力,若無御者,則不能有所至;布施等亦如是,雖有功德果報力,無般若調御,不能至佛道。

만약 법이 이와 같이 마침내 공(空)하다면, 추구(推求)하여도 얻을 수 없고, 이것은 낼 수도 없는 불가생(不可生)이나니,

왜냐하면, 성(性, 성품)이 성(性, 성품)을 낼 수 없고, 성품 없는 무성(無性)이 무성(無性)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뒤바뀌어 전도된 것을 파괴하고 진실한 논의(論議)를 얻는 것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의 힘이요, 그 밖의 다른 바라밀 모두는 그 뒤를 따르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전륜성왕이 행차를 할 때에는 4종의 병사들이 항상 뒤를 따르나니, 성왕의 복 때문에 4종의 병사들도 모두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반야력(般若力) 때문에 그 밖의 모든 다른 법은 모두가 진실한 성품으로 똑같이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비유하자면, 마치 노련한 마부인 선어(善御)가 부리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 사마(駟馬)를 타고 가면 평평한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말이 비록 수레를 끄는 힘이 있을지라도, 만약 마부가 없으면 목적한 곳에 이를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시 등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덕과 과보력(果報力)이 있을지라도 반야의 조복과 제어의 조어(調御)가 없다면 부처님의 불도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如是種種譬喩,五波羅蜜入般若中雖無差別,以是事故而般若波羅蜜最尊、最妙。

須菩提聞佛種種因緣說般若最大,又聞不行是行般若波羅蜜,是故問佛:“世尊!何等是菩薩道?何等非菩薩道?”

佛答:“二乘非菩薩道。”

이러한 갖가지의 비유에서와 같이, 비록 다섯 바라밀이 반야바라밀 가운데로 들어가면 비록 차별이 없게 될지라도, 이런 일들로 반야바라밀이 가장 높은 최존(最尊)이고 가장 미묘한 최묘(最妙)인 것이니,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갖가지 인연으로 ‘반야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또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이 바로 반야를 행하는 것’이라 함을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곧 보살도이며, 어떠한 것이 보살도가 아닌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이승은 보살도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다.

 

雖有凡夫及諸煩惱非菩薩道,麤故不說;二乘同行空、同求涅槃故,說非菩薩道。麤事人不疑,細事人疑故。

薩婆若是菩薩道,因中說果故。

須菩提歡喜讚歎般若,作是言:“世尊!般若波羅蜜爲大事故起。”如經中廣說,乃至“諸法常住故”。

비록 범부와 모든 번뇌가 보살도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알만한 거친 추(麤)이기 때문에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승도 똑 같이 공(空)을 행하고, 똑같이 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보살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니,

누구나 다 알만한 거친 추사(麤事)의 일들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지만, 미세한 세사(細事)들은 사람들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살바야는 바로 보살도이니, 그것은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 존자가 기뻐하면서 반야를 찬탄하여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큰 대사(大事)를 위하여 일어나나니, 마치 경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이, 제법은 항상 머무르는 제법상주(諸法常住故)이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須菩提難:“若般若無所生無所滅,云何行布施、持戒等?”

佛答:以般若無所生無所滅,卽是畢竟空;畢竟空故,不妨行六波羅蜜。菩薩聞種種因緣讚一切智;爲一切智故,行布施等法;是法爲度一切衆生故,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六波羅蜜功德安立諸法實相中,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是菩薩具足六波羅蜜、慈等諸功德,不顚倒,正行善根故。

수보리 존자가 다시 여쭈기를 “만약 반야가 생겨날 것도 없는 무소생(無所生)이고 소멸할 것도 없는 무소멸(無所滅)이라면, 어떻게 보시와 지계 등을 행하는지요?”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반야는 생겨나는 것도 없는 무소생(無所生)이고 소멸할 것도 없는 무소멸(無所滅)이기 때문에 곧 그것은 필경공이며, 필경공이기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하는데 방해되지 않느니라.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을 듣고 일체지(一切智)를 찬탄하며, 일체지를 위하여 보시 등의 법을 행하느니라.

이 법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며,

이 6바라밀의 공덕은 제법의 실상 가운데에 안립(安立)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나니,

이와 같이 보살은 6바라밀과 자(慈) 등의 모든 공덕을 두루 갖추어 뒤바뀜이 없이 바르게 선근을 행하기 때문이니라.”

 

須菩提問:“菩薩云何應習六波羅蜜?”

佛答:“若菩薩觀色等諸法不合不散。”色等諸法顚倒煩惱和合故合,以正智慧觀故散。

菩薩以利智慧深觀,則無法合;顚倒煩惱皆虛誑,故非合。如先破染、染者事中說。

是故菩薩知諸法本不合故亦無散,則不生高心。

수보리 존자가 “보살이 어떻게 6바라밀을 익혀야 합니까?”라고 묻자,

부처님께서 “보살은 물질(色) 등의 제법은 합하지도 않는 불합(不合)이고, 흩어지지도 않는 불산(不散)이라고 관찰해야 한다”고 대답하셨으니,

물질(色) 등의 제법은 뒤바뀜과 번뇌가 화합한 까닭에 합(合)하지만, 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흩어지는 산(散)이다.

보살이 예리한 지혜의 이지혜(利智慧)로써 깊이 관찰한다면 어떠한 법도 합하는 것이 없나니, 뒤바뀜과 번뇌가 모두 거짓이기 때문에 합하는 것이 아닌 비합(非合)이니,

마치 앞에서 물듦의 염(染)과 물든 염자(染者)를 타파한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니, 

따라서 보살은 제법은 본래 합하지도 않는 본불합(本不合)이기 때문에 흩어짐도 없는 줄 알아 곧 높은 체 하는 마음의 고심(高心)을 내지 않는 것이다.

 

復次,菩薩不應作是念:“我以眞智慧,令色等諸法淸淨而住其中。何以故?色等法無住處。”如地住於水,水住於風,風住於空,空無所住;以本無住處故,一切都無住。菩薩應如是住無住法中,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또 보살은 ‘나는 진실한 진지혜(眞智慧)로써 물질(色) 등의 제법으로 하여금 청정하게 하여 그 안에 머무르게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니, 왜냐 하면, 물질(色) 등의 법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기 때문이다.

마치 땅(地)은 물(水)에 머무르고, 물은 바람(風)에 머무르고, 바람은 허공(空)에 머무르지만, 허공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이, 본래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것이 도무지 머무르는 데가 없는 무주(無住)인 것과 같이,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를 데 없는 무주법(無住法) 가운데에 머물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此中說譬喩:樹是般若波羅蜜,菓是阿耨多羅三藐三菩提。若人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應當種般若波羅蜜子。人是行者,水是五波羅蜜。如人漑灌樹時,雖未見果實,時至則得時節和合,是具足諸法。

如經中說讚歎般若:“若菩薩欲不隨他行,得諸法實相;若有邪見人來破壞,覺而不隨;若欲淨佛國土、坐道場、轉法輪,當學般若。”

여기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나무는 바로 반야바라밀이고, 열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만약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씨를 심어야 하며,

사람은 바로 수행하는 행자요 물은 다섯 바라밀이니, 사람이 나무에 물을 줄 때, 비록 아직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때가 되면 열매를 얻게 되는 것과 같이, 시절(時節)이 화합하면 그 모든 제법을 두루 갖추게 되는 것이니, 

마치 경 가운데서 반야를 말씀하시면서 찬탄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다른 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제법의 실상을 얻고자 하거나, 어떤 삿된 사견을 지닌 사람이 와서 파괴하고자 한다면, 깨달아 알고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부처님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도량(道場)에 앉아 법륜을 굴리고자 한다면, 반야를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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