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六度品第 六十八之餘卷八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8. 육도품(六度品)을 풀이함 4
過百千國土,或得一人可令行十善,不中入三乘;不以一人不得實相故,心懷輕悔。
復作是念:“我今竝使此人行十善道 漸以三乘而度脫之” 教十善已,復以財、法二施滿足衆生,
持是功德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身、心精進,過無數國,爲衆生說法。
곧, 백천의 국토를 지나가서 혹은 한 사람이라도 10선(善, 십선도)을 행하게 하여 삼승에 들지 못하게 하였고, 한 사람이라도 실상(實相)을 얻게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마음으로 경망한 생각이나 후회를 하지 않나니,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아울러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10선도(善道)를 행하게 하며, 점차 3승으로써 제도하여 벗어나게 하리라’고 하며,
십선도로 교화한 뒤에는 다시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의 두 가지 보시로써 중생을 만족시켜 주며,
이 공덕을 지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고,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면서 수없는 국토를 지나다니며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
問曰:一切布施皆以精進,何以但言此二施從精進生?
묻나니, 일체 보시는 모두 정진으로써 하는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이 두 가지의 재시와 법시만이 정진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雖一切施皆由精進生,此以多精進力生故。如經說:“過百千國土,以二施滿足衆生。”
답하나니, 비록 일체 보시 모두는 정진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대부분 정진하는 정진력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니, 경에서 “백천의 국토를 지나다니며 재시와 법시의 두 가지 보시로써 중생을 만족시킨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取尸羅波羅蜜”者,菩薩直行十善道,是名尸羅波羅蜜;或從忍辱等波羅蜜生。
若菩薩從初發心乃至坐道場,捨十不善道,行四十種善道,不休不息,是名精進波羅蜜力。
有人一種不能行,何況四種!亦以尸羅波羅蜜故,不生三界、不受二乘。
衆生以懈怠煩惱心故,生三界中;厭惡生死故,捨佛道、取小乘,此皆是懈怠相;
是故說是菩薩不貪三界、不證二乘。
‘시라바라밀을 취한다는 취시라(取尸羅, 지계) 바라밀”이란, 보살이 곧장 10선도만을 행하면 이것을 시라바라밀이라 하겠지만, 혹은 인욕 등의 바라밀로부터 생기거나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10불선도(不善道)를 버리고 40종(種)의 선도(善道)를 행하되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으니, 이것을 바로 정진바라밀의 힘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도 행할 수 없거늘 하물며 네 가지이겠는가!
또한 시라바라밀 때문에 삼계(三界)에 나지도 않고 2승을 받지도 않나니, 중생들은 게으름과 번뇌의 마음 때문에 삼계 안에 태어나서 생사(生死)를 싫어하고 미워하므로 부처님의 불도를 버리고 소승(小乘)을 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 모두는 게으름의 해태상(懈怠相)이니, 이러한 까닭에 “이 보살은 삼계를 탐내지도 않고 이승을 증득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取羼提波羅蜜”者,菩薩從初發心乃至坐道場,若人、若非人來割截身體持去;
爾時 菩薩破我顚倒,善集畢竟空故,作是念:“此中無有割者、截者,是事皆是凡夫虛誑所見;
我得大利,我知諸法實相時,能入涅槃,但爲憐愍衆生故受身;衆生自來取去,我不應惜。”
‘찬제(인욕)바라밀을 취한다’고 함이란, 보살이 처음 초발심에서부터 도량에 앉기까지 사람(人)이나 사람 아닌 비인(非人)이 와서 몸을 베고 끊어서 가지고 간다면, 그 때에 보살은 '나'라는 뒤바뀜의 아전도(我顚倒)를 깨뜨리고 필경공(畢竟空)을 잘 쌓았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에는 몸을 베는 이나 끊는 이가 없나니, 이러한 것 모두는 범부의 거짓된 소견일 뿐이다. 나야말로 커다란 이익을 얻는 것이니, 내가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았을 때 열반에 들 수 있었으나, 다만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짐짓 이 몸을 받았을 뿐이니, 중생들이 스스로 와서 가져감에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나니,
爾時,深入諸法實相 此中無有定相,衆生自生怖畏。
以此功德與衆生共之,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中若有罵詈、打害、能忍者,是爲“忍”;歡喜不退,是爲“精進”。
是二法,或從精進生忍辱,或從忍辱生精進,今從精進生忍辱。
그러한 때에 제법의 실상에 깊이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으나,
중생들 스스로 두려움을 내나니, 이러한 공덕을 중생들과 함께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만약 욕하고 꾸짖고 때리고 해치는 것을 능히 참으면 이것을 인욕이라 하고,
기뻐하며 물러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정진이니,
인욕과 정진 이 두 가지 법은 혹은 정진으로부터 인욕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인욕으로부터 정진이 생기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진으로부터 인욕이 생기는 것이다.
“取禪波羅蜜”者,有人自然得禪定,如劫盡時;或有退得、生得;或上地生下地得。
如是雖得禪定,不從精進生。有因大布施,破慳貪等五蓋,卽得禪定;
或有人持戒淸淨、修集忍辱故,因小厭心,便得禪定;
或有人大智慧力故,知欲界無常、虛誑、不淨,卽得禪定;禪定雖亦虛誑,猶勝欲界。
如是雖有精進,更因餘法得禪故,不名從精進生。
‘선바라밀을 취한다’고 함이란, 어떤 사람은 저절로 선정을 얻으나, 마치 겁(劫)이 다할 때에 혹 물러나다가 얻기도 하고, 태어나다가 얻기도 하며, 혹은 상지(上地)에서 태어나서 하지(下地)에서 얻기도 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경우는 비록 선정을 얻었다 할지라도 정진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한편 어떤 이는 큰 보시로 인하여 간탐(慳貪) 등의 오개(五蓋)를 부수면서 곧 선정을 얻는 이도 있으며,
혹 어떤 사람은 지계(持戒)가 청정하면서 인욕을 닦고 쌓기 때문에 작은 염심(厭心)으로 인하여 곧 선정을 얻기도 하며,
혹 어떤 사람은 큰 대지혜의 힘으로 인하여 욕계(欲界)는 덧없고 거짓이며 청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곧 선정을 얻기도 하나니,
비록 선정이 거짓의 허광(虛誑)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욕계보다는 나은 것이며,
이와 같은 경우는 비록 정진함이 있을지라도 다시 그 밖의 다른 법으로 인하여 선정을 얻기 때문에 정진으로부터 생긴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有人不因五法爲主,但日夜精進,經行坐禪,常與心鬪;以信等五力,深御五蓋
若心馳散,便攝令還,如與賊鬪,乃至流汗。如是等人得禪定,從精進生。
어떤 사람은 다섯 가지의 오법(五法)으로 인하여 주(主)를 삼지 않고, 다만 낮이나 밤이나 정진하면서 경행(經行)하고 좌선을 하며, 항상 마음과 싸우면서 신력(信力) · 정진력(精進力) · 염력(念力) · 정력(定力) · 혜력(慧力)의 오력(五力)으로써 오개(五蓋)를 깊이 제어하나니,
만약 마음이 흩어져 내달으면, 곧 가다듬어 돌아오게 하는 것이 마치 도적과 싸우며 땀을 흘리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이들은 선정을 얻은 것은 정진으로부터 일으킨 것이다.
或有菩薩鈍根,宿罪所覆,深著世樂,馳逸難制;如是人深加精進,爾乃得定。
譬如有福德之人,安坐無事,福祿自至;薄福之人,勤設方便,鬪戰乃得。
有福之人自然得者,名爲“福德自至”方便戰鬪得者,名爲“精進而得”。
如是一切處雖有精進,多處受名。
혹은 어떤 보살은 근기가 둔하고 전생의 숙죄(宿罪)에 가리어서 세간의 즐거움에 깊이 집착하고 멋대로 내달아서 제어하기 어렵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사람은 깊이 정진을 더하여야 비로소 선정을 얻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복덕이 있는 사람은 편히 앉아 무사(無事)함에도 복록(福祿)이 저절로 이르지만, 박복한 사람은 부지런히 방편을 베풀고 싸워야 얻는 것과 같이,
복이 있는 사람이 저절로 얻는 것을 복덕(福德)이 저절로 이른 것이라 하고,
방편을 써서 싸워 얻는 것을 정진(精進)하여 얻은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곳에 정진이 있어서 많은 다처(多處)에서 이름을 얻는 것이다.
“取般若波羅蜜”者,菩薩精進力故,得禪波羅蜜;得禪波羅蜜故,生菩薩神通力。
二事因緣故,以神通力遍至十方,未具足功德欲令具足,又欲教化一切衆生。
除四波羅蜜所生般若,餘智慧多從精進生故,住精進爲主,取智慧。
般若波羅蜜者,有二種:一者、觀諸法實相,於一切法中不見法相、不見非法相;
二者、如所說行 人有懈怠心故,不能行二事;精進力故,能具足行二事。
‘반야바라밀을 취한다’고 함이란, 보살이 정진력(薩精進力) 때문에 선바라밀을 얻고, 선바라밀을 얻은 까닭에 신통력이 생기나니, 정진력과 선바라밀의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신통력으로써 시방을 두루 다니되 아직 공덕을 충분하게 갖추지 못한 이라면 충분히 갖추고자 하고 또한 일체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나니,
네 가지 바라밀에서 생기는 반야를 제외하고 그 밖의 다른 지혜는 거의 모두 정진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정진에 머무르는 것을 주로 삼아 지혜를 취하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의 실상을 관하면서도 일체법 가운데서 법상(法相)을 보지 않고, 법이 아닌 비법상(非法相)도 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말씀하신 바대로 행할 뿐인 사람은 게으름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를 행할 수 없으나, 정진력이 있는 사람은 정진력 때문에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다.
“住禪波羅蜜爲主,取五波羅蜜”者,菩薩住禪波羅蜜中,心調柔不動,能觀察諸法實相;
譬如密室然燈,光照明了。是名“住禪波羅蜜生智慧”。
爾時,不惱一切衆生,又加憐愍,是名“甚深淸淨持戒、忍辱”。神通力變化財物,具足布施;
又遣化人爲一切說法。又菩薩從禪起,以淸淨柔軟心爲衆生說法,是名“布施”。
因禪定力起神通,周至十方,導利一切而不懈息,是名“精進”。
又因禪定令四波羅蜜增益,是名“禪定生精進”。餘義,如經廣說。
“住般若波羅蜜爲主,取五波羅蜜”者,如經中佛自廣說。
“선바라밀에 머무름을 주로 삼아 다섯 가지 바라밀을 취한다” 함이란, 보살이 선바라밀 가운데에 머무르면 마음이 조복되고 유연하여 동요하지 않고 제법의 실상을 관찰할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밀실에 등불을 켜면 광명이 비치어 환히 알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을 바로 선바라밀에 머무르면 지혜가 생긴다고 하는 것이며,
그 때에는 일체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고 또 더욱 가엾이 여기게 되나니, 이를 바로 매우 깊고 청정한 지계(持戒)와 인욕(忍辱)이라 하며, 신통력으로써 재물을 변화하여 보시를 두루 갖추고 또한 변화로 된 화인(化人)을 보내어 일체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고,
또 보살은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청정하고 유연한 마음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니, 이를 바로 보시라 하는 것이며,
선정력으로 인하여 신통을 일으키고 시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체를 인도하고 이롭게 하되 게으르지 않는 것을 바로 정진이라 하며,
또 선정으로 인하여 네 가지 바라밀을 더욱 늘리면, 이것을 바로 선정에서 정진을 내는 것이라 하며,
나머지의 뜻은 경에서 자세히 설하신 것과 같으며,
‘반야바라밀에 머무름을 주로 삼아 다섯 가지 바라밀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 가운데서 부처님이 친히 자세하게 말씀하신 바와 같다.
問曰:佛雖廣說,其中猶有不解者,今當問:十八空中,何以不說四空?
묻나니, 부처님께서 비록 자세하게 말씀하셨을지라도 그 가운데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지금 묻겠습니다. 18공(空)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ㆍ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의 네 가지의 공은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答曰:第十四名一切法空;言一切者,法無不盡,是故不說。
답하나니, 제14 공의 이름이 일체법공(一切法空)이다. 일체(一切)라 하면, 법으로써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다.
問曰:若爾者,但應說十四,何以有十八?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마땅히 처음부터 14 가지만을 말씀하셔야 되거늘 무엇 때문에 18 가지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彼中分別一切法相空,一切空皆摠入十八空;此中爲行者說。行者或行一空、二空乃至十四空,隨本所著多少故。有深著邪見者,以餘四空。所以者何?有法、無法等是外道邪見;是菩薩修慈悲,心柔軟故,不生如是有無見。
復次,菩薩以十四空熏心故,於有無中了了不錯,是故不說後四空。
답하나니, 십팔공(十八公)에서는 일체법의 상(相)이 공(空)한 것을 분별하였으므로 십팔공에는 일체공(一切空) 모두 통틀어 들어가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수행하는 행자를 위하여 설명하신 것이니, 수행하는 행자는 하나의 일공(一空), 둘의 이공(二空) 또는 14공(十四空)까지를 행하게 되나니, 그것은 본래 집착하는 바가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다.
삿된 사견에 깊이 집착하는 이는 그 밖의 4공(空)을 이용하여야 하나니, 왜냐 하면, 법이 있다는 유법(有法)ㆍ법이 없다는 무법(無法) 등은 바로 외도(外道)의 삿된 사견이지만, 이 보살은 자비를 닦아서 마음이 유연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법ㆍ무법이라는 소견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살은 십사공(十四空)으로 마음을 훈수(熏修)한 까닭에 유(有)ㆍ무(無)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착오가 없는 까닭에 뒤의 네 가지 공은 설명하지 않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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