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天主品 第二十七 卷五十四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7. 천주품(天主品)을 풀이함 4
但菩薩聞是讚歎佛法,發心愛樂:“我所有功德,皆迴向佛道” 從發心已來,
乃至佛道,修是功德,不休不息;用如幻、如夢無所得故,
是名“菩薩般若波羅蜜”;能知諸法因緣生果報而無有定相。
단지 보살은 이 부처님의 불법을 찬탄하는 것을 듣고 발심하여 좋아하면서,
“내가 가진 모든 공덕을 모두 부처님의 불도에 회향하리라.”고 하며,
발심한 때부터 부처님의 불도에 이르기까지의 공덕을 수행하면서 쉬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을 뿐이니,
마치 환과 같고 꿈과 같아서 얻을 바가 없음의 용무소득(用無所得)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제법의 인연은 과보(果報)를 내면서도
일정하게 정해진 정상(定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釋提桓因難:“何以故 迴向心 不在菩提心中 可得?菩提心 不在迴向心中 可得?”
須菩提不以世諦如幻、如夢說,但以第一義諦說:“是二心皆空,非心相。”
석제환인(釋提桓因, Śakra devā nāmindra, 천주)이 묻기를
“무엇 때문에 회향심(迴向心)은 보리심(菩提心) 가운데에서 얻을 수 없으며,
보리심(菩提心)도 회향심(迴向心) 가운데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하자,
수보리 존자는 세속의 이치인 속제(俗諦)인 환과 같고 꿈과 같은 것으로써 말하지 않고,
단지 제일의(第一義)로써 “보리심(菩提心) 회향심(迴向心), 두 마음은 모두가 공하여 마음의 심상(心相)이 아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何以故?諸法畢竟空中,無是心非心。如是法,云何可有迴向?若有二法,可有迴向;
譬如乘車西行,南有止宿處,故迴車趣向。車與迴向處異故,可有迴向;
不得但有車而言迴向 無異故。
왜냐하면 제법은 필경공(畢竟空) 가운데에서 “이것은 마음이고, 이것은 마음이 아니다.”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법이거늘 어떻게 회향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두 가지의 이법(二法)이 있다면 회향이 있을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수레에 올라 서쪽으로 가다가 머무를 곳이 남쪽에 있어서 수레를 돌려 회거(廻車)하여, 남쪽을 향해 나아가는 취향(趣向)을 한다면,
수레(車)와 남쪽을 향하는 회향(迴向)이 다르기 때문에 돌려서 향하는 회향(迴向)이 있을 수 있으니,
수레(車)와 회향(迴向)이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非心相常非心相”者,須菩提意謂:“是心相如常住,不生不滅,不垢不淨 以非心相故非心,
亦無是非心,是故說不可思議;不可思議亦常不可思議,不可籌量思惟取相。
“마음의 상이 아닌 비심상(非心相)이고, 항상한 마음의 심상이 아닌 상비심상(常非心相)이다.”고 함이란,
수보리 존자는 뜻으로 생각하기를 “이 마음의 심상(心相)은 여(如)요 상주(常住)하는 것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불구불정(不垢不淨)이며,
심상(心相)이 아닌 까닭에 마음이 아닌 비심(非心)이요, 또한 이것이 비심(非心)이라는 것 또한 없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며, 불가사의 또한 항상 불가사의하여 헤아리거나 생각으로 상(相)을 취할 수도 없는 것이라.
以是因緣故,阿耨多羅三藐三菩提所因心似果,不似則不能生。若初心不淨,後不能發淨心;如鍊鐵不能成金。
이러한 인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원인이 되는 마음은 결과와 비슷하며, 비슷하지 않으면 곧 낼 수가 없는 불능생(不能生)이니,
만약 처음의 초심(初心)이 깨끗하지 못하면 뒤에도 깨끗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으니,
마치 쇠를 단련하여도 금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佛以須菩提深入因緣般若波羅蜜中,此是般若波羅蜜名也;以能深得諸法因緣故,卽以爲名。無有違錯故,於大衆中讚言:“善哉!善哉!汝是小乘人,而能善說深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 존자가 바라밀의 인연 가운데에 깊이 들어가는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하셨으며,
제법의 깊은 인연을 얻었기 때문에 곧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으며,
어기거나 잘못이 없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서 찬탄하시기를,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그대는 바로 소승인(小乘人)이면서도 깊은 반야바라밀을 잘 설할 수 있구나” 하신 것이다.
“安慰諸菩薩心”者,以般若波羅蜜敎諸菩薩,汝莫自以煩惱未盡,未成佛道故而自懈廢!諸法無礙,初心後心無有異相,但勤精進,則成佛道。
“모든 보살의 마음을 편안히 위로한다는 안위제보살심(安慰諸菩薩心)”이란,
반야바라밀로써 모든 보살들을 가르치되 “그대는 스스로의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하였고, 아직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게으르거나 그만두지 말라. 제법은 장애가 없나니, 처음의 초심(初心)이나 뒤의 후심(後心)이 달라지지 않으면서, 단지 부지런히 정진하기만 하면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게 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我應報恩”者,須菩提作是念:‘我行此諸法實相,得脫老病死苦,我云何不念是法大恩。’以是故常樂說法。
“나는 은혜를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아응보은(我應報恩)”이라는 것은,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나는 이 제법의 실상(實相)을 행하여 늙고 병들고 죽는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에서 해탈하게 되었거늘 내가 어떻게 이 법의 큰 은혜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좋아하면서 법을 설하는 것이며,
復次,佛有大悲心,樂說法度衆生;我以佛恩故得道,我亦助佛說法度衆生,是爲報恩。
또한 부처님께서는 대비(大悲)의 마음이 있으므로 즐겨 법을 설하는 낙설(樂說)로서 중생을 제도하셨으므로
“나 또한 부처님의 은혜로 도를 얻었으므로, 나 또한 부처님을 도와서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은혜를 갚는 보은(報恩)이며,
又知今世尊因過去諸佛得成佛道,是故我亦愛敬過去佛;如子愛敬父故,亦愛重於祖。又亦愛敬過去諸菩薩及弟子,能說法敎示故,今世尊亦因此得成。
또한 지금의 세존께서도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불도를 이루게 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또한 과거의 부처님을 사랑하고 공경함이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듯 하며, 또한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같이 하리라. 또한 과거의 모든 보살과 제자들을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설법하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지금의 세존 또한 그로 인하여 이루게 되셨다.”고 하며,
須菩提深心信三寶故說:“我知今世尊及法,過去諸佛及弟子恩。”法卽是法寶,今佛、過佛卽是佛寶,諸菩薩及弟子卽是僧寶。六波羅蜜,如先說。
수보리 존자는 마음 속 깊이 불법승, 3보(三寶)를 믿기 때문에 말하기를 “지금의 세존(佛)과 법(法)과 그리고 과거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僧伽)의 은혜를 알고 있다.”고 하였으니,
법(法)은 곧 법보(法寶)요, 지금의 부처님과 과거의 부처님은 곧 불보(佛寶)이며,
모든 보살과 제자들은 곧 승보(僧寶)이라.
육바라밀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示”者,示人好醜、善不善、應行不應行;生死爲醜,涅槃安隱爲好。分別三乘,分別六波羅蜜,如是等名示。
“敎”者,敎言汝捨惡行善,是名敎。
“보여 주는 시(示)”라 함이란, 사람들에게 좋고 추한 호추(好醜)와 착하거나 착하지 않은 선불선(善不善)과 행하여야 할 응행(應行)과 행하지 않아야 할 불응행(不應行)을 보여 주는 것으로,
나고 죽는 것은 추(醜)한 것이고, 열반의 안온함은 좋은 호(好)이니, 3승(三乘)을 분별하고 육바라밀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보여 주는 시(示)라 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교(敎)”라 함이란, 가르치기를, “그대들은 악(惡)을 버리고 선(善)을 행하라.”고 말하여 주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치는 교(敎)라 하는 것이다.
“利”者,未得善法味故,心則退沒;爲說法引導令出:“汝莫於因時求果!汝今雖勤苦,果報出時,大得利益!”令其心利,故名利。
“이롭게 하는 이(利)”라 함은, 아직 착한 선법의 맛, 선법미(善法味)를 얻지 못한 까닭에 마음이 물러나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고 인도하여서 벗어나게 하면서 “그대들은 원인을 닦을 때에 과보를 구하지 말라. 그대들이 비록 애쓰면서 괴로울지라도, 그 과보를 얻을 때에는 큰 이익을 얻게 되리라.”고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이롭게 하는 이(利)라 하는 것이다.
“喜”者,隨其所行而讚歎之,令其心喜;若樂布施者,讚布施則喜,故名喜。以此四事,莊嚴說法。
“기쁜 희(喜)”라고 함은, 그 행하는 바에 따라 칭찬하여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니,
만약 보시를 좋아하는 이에게 보시를 칭찬하면 기뻐하기 때문에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하나니,
시(示) 교(敎) 이(利) 희(喜)이 네 가지의 사사(四事)로써 설법을 장엄하는 것이다.
▶經. 爾時,須菩提語釋提桓因言:“憍尸迦!汝今當聽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如所應住、所不應住。
憍尸迦!色、色空,受、想、行,識、識空,菩薩、菩薩空。是色空、菩薩空,不二不別;受、想、行,識空、菩薩空,不二不別。憍尸迦!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住。
▷경. 그 때에 수보리 존자가 석제환인에게 말하였으니,
“교시가여, 그대는 이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 머물러야 할 바를 들어야 합니다.
교시가여, 색(色)은 색공(色空)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역시도 수공(受空) 상공(想空) 행공(行空) 식공(識空)이며, 보살도 공한 보살공(菩薩空)이나니,
이 색공(色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이니,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공(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입니다.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무르는 응여시주(應如是住)하여야 합니다.
復次,眼、眼空,乃至意、意空,菩薩、菩薩空;眼空乃至菩薩空不二不別。六塵亦如是。
地種、地種空,乃至識種、識種空,菩薩、菩薩空。
憍尸迦!地種空乃至識種空、菩薩空,不二不別。憍尸迦!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住。
다시 눈(眼)이 공한 안공(眼空)이고, 나아가 성공(聲空)ㆍ향공(香空)ㆍ미공(味空)ㆍ촉공(觸空)ㆍ법공(法空)이며
보살도 공한 보살공(菩薩空)이니, 안공(眼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이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의 그 나머지의 육진(六塵) 또한 그와 같습니다.
땅의 요소인 지종(地種)도 공한 지종공(地種空)이고, 나아가 의식의 요소인 식종(識種)도 공한 식종공(識種空)이며, 보살도 공한 보살공(菩薩空)이니,
교시가여, 지종공(地種空) 내지 식종공(識種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이니,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머무르는 응여시주(應如是住)하여야 합니다.
無明、無明空,乃至老死、老死空;無明滅、無明滅空,乃至老死滅、老死滅空;菩薩、菩薩空。憍尸迦!無明空乃至老死空,無明滅空乃至老死滅空,菩薩空,不二不別。憍尸迦!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住。
무명(無明)은 무명공(無明空)이고 나아가 늙어 죽음의 노사(老死) 또한 노사공(老死空)이며,
무명의 사라짐인 무명별(無明滅)은 무명멸공(無明滅空)이고, 나아가 노사멸(老死滅)은 노사멸공(老死滅空)이며, 보살은 보살공(菩薩空)이니,
교시가여, 무명공(無明空) 내지 노사공(老死空)과 무명멸공(無明滅空) 내지 노사멸공(老死滅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이니,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머무르는 응여시주(應如是住)하여야 합니다.
檀波羅蜜乃至般若波羅蜜,內空乃至無法有法空,四念處乃至十八不共法,一切三昧門、一切陁羅尼門,聲聞乘、辟支佛乘、佛乘,聲聞、辟支佛、菩薩、佛,亦如是。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와 내공에서 무법유법공까지와 사념처에서 18불공법까지와 일체삼매문ㆍ일체다라니문과 성문승ㆍ벽지불승ㆍ보살승과 성문ㆍ벽지불ㆍ보살 및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一切種智、一切種智空,菩薩、菩薩空;一切種智空、菩薩空,不二不別。憍尸迦!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中應如是住。”
일체지는 일체종지공(一切種智空)이고, 보살은 보살공(菩薩空)이니,
일체종지공(一切種智空)과 보살공(菩薩空)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고 다르지 않은 불별(不別)이니,
교시가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머무르는 응여시주(應如是住)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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