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習相應品 第三之餘 卷三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③ 2
▶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檀波羅蜜不與薩婆若合,檀波羅蜜不可見故;
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四念處不與薩婆若合,四念處不可見故;乃至八聖道分亦如是。”
▷경.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檀, 보시)바라밀은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하지 않으니(짝을 이루지 않으니), 단바라밀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 반야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사념처(四念處)도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지 않으니, 사념처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며, 팔성도분(八聖道分)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 論. 問曰:五衆等是世閒法,可不與薩婆若合,六波羅蜜云何不與合?
▷논. 묻나니, 오중(五衆) 등은 바로 세간의 법이어서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여 질 수 없겠지만, 육바라밀은 어찌하여 합하여 질 수 없는 것입니까?
答曰:六波羅蜜有二種:一者、世閒。二者、出世閒。爲世閒檀波羅蜜故,說不與合;出世閒檀波羅蜜,應與合。復次,菩薩行六波羅蜜,漏結未盡,不得與佛薩婆若合。復次,佛說六波羅蜜空,尚不可見,何況與薩婆若合!三十七品亦如是。
답하나니, 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世閒)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이다.
세간(世閒)을 위한 단바라밀이면 합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될 것이지만, 출세간(出世間)의 단바라밀이라면 당연히 합하는 것이며,
또한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면 부처님의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 육바라밀조차도 공(空)한 것이라 오히려 볼 수가 없다고 하셨거늘, 하물며 살바야(薩婆若)와 합하는 것이 겠는가? 37조도품(助道品)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問曰:是六波羅蜜,雜有道、俗故;三十七品趣涅槃道,云何不合?
묻나니, 이 육바라밀은 도인이나 속인에게 섞여 있기 때문이지만, 37조도품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어떻게 합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三十七品是二乘法,但爲涅槃;菩薩爲佛道,是故不合。
답하나니, 37조도품은 바로 이승(二乘)의 법이어서 단지 열반만을 위할 뿐이나, 보살은 부처님의 불도(佛道)를 위하고 있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 것이다.
問曰:「摩訶衍品」中,有三十七品,亦是菩薩道,云何不與薩婆若合?
묻나니, 마하연품(摩訶衍品)에서도 37조도품(助道品)이 있으며, 이 역시 보살의 도(道)인데 어떻게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有菩薩以著心故,行三十七品,多迴向涅槃,是故佛說不合。
답하나니, 어떤 보살은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37조도품을 행하면서 거의 모두를 열반에 회향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經. “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不與薩婆若合,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不可見故。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 “부처님의 십력(十力) 내지 18불공법(十八不共法)은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지 않나니, 부처님의 십력(十力)과 18불공법(十八不共法)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혀서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 論. 釋曰:是十力乃至十八不共法,雖是妙法,爲薩婆若故行;以菩薩漏結未盡,故不應與薩婆若合。
▷논. 해석한다; 이 십력(十力) 내지 18불공법(十八不共法)이 비록 미묘한 법이라 할지라도 살바야(薩婆若) 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이라. 보살은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한지라 당연히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復次,佛十力等法有三種:一者、菩薩所行,雖未得佛道,漸漸修習;二者、佛所得,而菩薩憶想分別求之;三者、佛心所得。上二種不應與合;下一種雖可合,而菩薩未得,是故不合。復次,空故不可見,不可見故不合。是以皆言“不可見故”。
또한 부처님의 십력(十力) 등의 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이 행하는 바이니, 비록 아직 부처님의 불도(佛道)를 얻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점점 닦아 익히는 것이요.
둘째는 부처님께서 얻으신 바이니, 보살은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얻으신 바이다.
위의 첫째와 두 번째는 합하지 않는 것이고, 아래의 세 번째는 합할 수는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보살이 아직은 얻지 못 것이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공(空)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것이니, 이 때문에 모두 “볼 수 없는 불가견(不可見)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佛不與薩婆若合,薩婆若不與佛合;菩提不與薩婆若合,薩婆若不與菩提合。”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부처님은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하지 않고,
살바야(薩婆若)는 부처님과 더불어 합하지 않으며,
보리(菩提)는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하지 않고,
살바야(薩婆若)는 보리(菩提)와 더불어 합하지 않느니라.
▶ 論. 問曰:菩薩及菩薩法可不與薩婆若合,云何佛及菩提復不與合?
▷논. 묻나니, 보살 및 보살의 법은 살바야(薩婆若)와 더불어 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부처님과 보리(菩提)가 합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佛是人,薩婆若是法;人是假名,法是因緣。衆生乃至知者、見者無故,佛亦無衆生中尊上第一,是名爲佛,是故不合。
답하나니, 부처님은 바로 사람(人)이고 살바야(薩婆若)는 곧 법(法)이요. 사람이란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이고, 법(法)은 곧 인연(因緣)이니,
중생(衆生) 과 아는 지자(知者)와 보는 견자(見者)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 또한 없는 것이며, 중생들 가운데서 존귀하기가 가장 으뜸가시는 분이기에 부처님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 것이다.
復次,得薩婆若故名爲佛。若佛得薩婆若,先以是佛,不須薩婆若;若非佛得薩婆若者,何以言“佛得薩婆若”?以是故,和合因緣生,不得言先後。
또한 살바야(薩婆若)를 얻으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살바야(薩婆若)를 얻은 이라면, 그로써 먼저 부처를 이루셨으므로 살바야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만약 부처님이 살바야(薩婆若)를 얻지 못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살바야를 얻으셨다.”고 말하겠는가?
이러한 때문에 화합은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선후(先後)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復次,離佛無薩婆若,離薩婆若無佛;得薩婆若故名佛,佛所有故名薩婆若。
또 부처님을 떠나서는 살바야(薩婆若)가 없으며, 살바야(薩婆若)를 떠나서는 부처님이 없는 것이니,
살바야(薩婆若)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고,
부처님이 소유(所有)하신 바이기 때문에 살바야(薩婆若)라 하는 것이다.
問曰:佛是人故可不與合,菩提是無上道,云何不合?
묻나니, 부처님도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살바야와 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보리(菩提)는 바로 위없는 무상도(無上道)이거늘, 어찌하여 합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菩提名爲佛智慧,薩婆若名爲佛一切智慧;十力智爲菩提,第十一如實智名爲薩婆若 二智不得一心中生。
답하나니, 보리는 부처님의 지혜인 불지혜(佛智慧)라 하고,
살바야는 부처님의 일체지혜(一切智慧)라 하며,
십력(十力)의 지혜(知慧)를 보리(菩提)라 하고
열한 번째의 지혜인 여실지(如實智, yathābhūtajñāna)를 살바야(薩婆若)라 하나니,
불지혜(佛智慧)와 일체지혜(一切智慧)의 두 지혜는 일심(一心)에서 생기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십일지(十一智)란 법지(法智) 비지(比智) 타심지(他心智) 세지(世智) 고지(苦智) 집지(集智) 멸지(滅智) 도지(道智) 진지(盡智) 무생지(無生智) 여실지(如實智)를 이른 것이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3권 7
復次,是十力等諸佛法及佛菩提,皆是菩薩憶想分別非實,唯佛所得薩婆若是實。今此菩提,是菩薩菩提,是心中虛妄未實,云何與薩婆若合?復次,此經中,佛自說不合因緣:
또한 이 십력(十力) 등의 모든 부처님의 불법(佛法)과 부처님의 보리(菩提)는 모두 보살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지라 진실한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께서 얻으신 살바야(薩婆若)만이 진실한 것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보리(菩提)는 바로 보살의 보리(菩提)이며, 그 마음 속은 허망하고 아직 진실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살바야(薩婆若)와 합할수 있겠는가?
또한 이 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살바야(薩婆若)와 합하지 못하는 인연을 말씀하셨다.
▶經. “何以故?佛卽是薩婆若,薩婆若卽是佛:菩提卽是薩婆若,薩婆若卽是菩提。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 왜냐하면 부처가 곧 살바야(薩婆若)이고, 살바야(薩婆若)가 곧 부처이며,
보리(菩提)가 살바야(薩婆若)이고, 살바야(薩婆若)가 곧 보리(菩提)이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익혀서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習色有、不習色無,受、想、行、識亦如是;不習色有常、不習色無常,受、想、行、識亦如是。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색(色, 물질)은 있는 유(有)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없는무(無)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색(色, 물질)은 항상한 유상(有常)이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무상(無常)한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不習色苦、不習色樂,受、想、行、識亦如是;不習色我、不習色非我,受、想、行、識亦如是;不習色寂滅、不習色非寂滅,受、想、行、識亦如是。
색(色, 물질)은 괴로운 고(苦)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즐거운 낙(樂)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색(色, 물질)은 나(我)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나가 아닌 비아(非我)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색(色,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 적멸(寂滅)의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비적멸(非寂滅)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不習色空、不習色非空,受、想、行、識亦如是;不習色有相、不習色無相,受、想、行、識亦如是;不習色有作、不習色無作,受、想、行、識亦如是。
색(色, 물질)은 공(空)한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공한 것이 아닌 비공(非空)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색(色, 물질)은 모양이 있는 유상(有相)이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색(色, 물질)은 조작이 있는 유작(有作)이라고 익히지 않고 색(色, 물질)은 조작이 없는 무작(無作)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我行般若波羅蜜、不行般若波羅蜜、非行非不行般若波羅蜜' 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行)한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이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닌 비행비불행(非行非不行)이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혀서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대지도론(大智度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7권 4 (1) | 2024.05.27 |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7권 3 (0) | 2024.05.26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7권 1 (1) | 2024.05.25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6권 9 (0) | 2024.05.25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6권 8 (1) | 2024.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