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習相應品 第三之餘 卷三十六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② 9
問曰:但一處說“不見與般若波羅蜜相應不相應”便足,何以故復更種種說“相應不相應因緣”?若一處應,餘則皆應;若一處不應,餘亦不應。譬如一盲無見,千盲俱爾。
묻나니, 단지 한 곳에서만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거나 상응하지 않음을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셔도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갖가지로 상응함과 상응하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만약 한 곳에서 상응한다면 그 외의 곳에서도 모두 상응할 것이고,
만약 한 곳에서 상응하지 않는다면 그 외 다른 곳에서도 역시 상응하지 않을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한 사람의 소경이 볼 수 없다면 천 사람의 소경도 다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答曰:不然!若欲以戲論求勝,應如是難。諸法相雖不可說,佛以大慈大悲故種種方便說。又佛說法,爲一種衆生得度,爲未悟者重說。
답하나니, 그렇지 않다. 만약 희론(戲論)으로써 이기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힐난이 있을 수 있을 것이나, 비록 모든 법상(法相)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로써 갖가지의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설하심으로 일부의 중생은 득도(得度)를 얻었지만, 아직 깨치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거듭 말씀하신 것이며,
又復一說爲斷見諦結使,二說爲斷思惟結使,復更說爲諸餘結使分分皆斷。
거듭 다시 말씀하시어 견제(見諦)에서의 번뇌에 얽힌 결(結)과 번뇌에 부림을 당하는 사(使)를 끊게 하시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시어 사유(思惟)에서의 번뇌를 끊게 하시며, 다시금 재차 말씀하시어 모든 남아 있는 번뇌의 결사를 따로 따로 나누어서 모두 다 끊게 하신 것이며,
又一說有人得聲聞道,一說種辟支佛道因緣,更一說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更一說行六波羅蜜,更一說行方便、得無生忍。更一說得初住地,更一說乃至十住地。更一說爲人故,更一說爲天故。
또한 다시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사람은 성문의 도를 얻기도 하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벽지불도의 인연을 심게 하기도 하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게 하시며,
더욱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게 하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방편을 행하여 무생인(無生忍)을 얻게 하시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초주(初住)의 지위에 머무르게 하시며,
다시 한 번 말씀하심으로써 십주(十住)의 지위까지 이르게 되나니,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심은 사람을 위해서이고,
다시 한 번 더 말씀하심은 하늘을 위해서인 것이며,
復次,是般若波羅蜜相甚深,難解難知,佛知衆生心根有利鈍:鈍根者,少智爲其重說;若利根者,一說二說便悟,不須種種重說。譬如駛馬,下一鞭便走;駑馬,多鞭乃去。如是等種種因緣故,經中重說無咎。
또한 이 반야바라밀의 상(相)은 심히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이라,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마음과 근기의 영리함과 둔함이 있음을 아셔서, 근기가 둔하여 지혜가 적은 이에게는 거듭하여 말씀하여 주시며,
만일 근기가 영리한 이라면 한 번 또는 두 번의 말씀으로도 이내 깨치게 되므로 갖가지를 거듭하여 말씀하실 필요조차 없으셨으니, 마치 빨리 달리는 좋은 말은 한 번의 채찍질로 이내 달리지만, 느린 말은 여러 번 채찍을 맞은 뒤에야 가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인하여 경(經)에서 거듭 말씀하셨어도 허물이 없는 것이다.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入諸法自相空。入已,色不作合,不作不合;受、想、行、識不作合,不作不合。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제법의 자상공(自相空)에 들어가며, 들어간 뒤에는 색(色, 물질)과 합하고자 하지도 않고, 합하지 않고자 하지도 않으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도 합하거나 합하지 않고자 하지도 않느니라.
色不與前際合。何以故?不見前際故。色不與後際合。何以故?不見後際故。色不與現在合。何以故?不見現在故。受、想、行、識亦如是。”
색(色, 물질)은 전제(前際, 과거)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전제(과거)를 볼 수 없기 때문이라.
색(色, 물질)은 후제(後際, 미래)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후제(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요.
색(色, 물질)은 현재(現在)와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현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러하느니라.”
▶論. 釋曰:先說“空、無相、無作,無合無不合”,今更說因緣:入自相空故,五衆不作合、不作不合。若一切法自相空,是中無有合、不合。
▷논. 해석한다; 앞에서는 “공(空)하고, 무상(無相)이고, 무작(無作)이고, 무합(無合)이고 무불합(無不合)이다.” 함을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다시 인연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자상공(自相空)에 들기 때문에 오중(五衆)과 합하려 하지 않고, 합하지 않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니, 만약 일체법의 자상(自相)이 공한 것이라면, 그 중에서는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合”者,諸法如其相。如地堅相,識知相,如是等自相不在異法,是名爲“合”。“不合”者,自相不在自法中。略說諸法相,不增不減。
합(合, 짝을 이룸)이라 함이란, 제법이 그 상(相) 그대로인 것이니, 마치 땅은 단단한 견상(堅相)이요, 식(識)은 아는 지상(知相)인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등의 자상(自相)이 다른 법에 있지 않으니, 이러함을 합(合)한다고 하는 것이며,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이라 함이란, 자상(自相)이 법 가운데에 있지 않는 것이니, 요약하여 말하면 제법의 상(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인 것이다.
色不與前際合。何以故?前際空無所有,但有名字;若色入過去,則滅無所有,云何與前際合?後際者,未有未生,色不應與後際合。現在色,生滅不住故,不可取相,色不應與現在合。
색(色, 물질)은 전제(前際, 과거)와 합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전제(과거)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니, 만약 색(色, 물질)이 과거에 들게 되면 소멸되어 아무것도 없거늘, 어떻게 전제와 합하겠는가?
후제(後際,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므로 있지도 않는 것이니, 색(色, 물질)은 후제(미래)와도 합할 수 없으며,
현재의 색(色, 물질)은 생멸(生滅)하기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상(相)을 취할 수도 없으므로 색(色, 물질)은 현재와도 합하지 않는 것이다.
復次,佛自說因緣:“色不與前際合,非不合。何以故?前際不可見故。色不與後際合,非不合。何以故?後際不可見故。色不與現在合,非不合。何以故?現在不可見故。受、想、行、識亦如是。”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색(色, 물질)은 전제(前際, 과거)와 합하거나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전제(과거)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색(色, 물질)은 후제(미래)와 합하거나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후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색(色, 물질)은 현재와 합하거나 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왜냐하면 현재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역시도 그와 같으니라.” 하신 것이다.
▶經. “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前際不與後際合,後際不與前際合,現在不與前際、後際合,前際、後際亦不與現在合,三際名空故。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者,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 “또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전제(前際, 과거)는 후제(後際, 미래)와 합하지 않고,
후제는 전제와 합하지 않으며, 현재는 전제와 후제와 합하지 않고,
전제ㆍ후제도 또한 현재와 합하지 않나니, 삼제(三際)의 이름이 공한 까닭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혀서 응한다면 이를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論. 問曰:云何前際、後際合?
▷논. 묻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전제와 후제가 합하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說:“三世諸法皆是有,未來法轉爲現在,現在轉爲過去。如泥揣現在,甁爲未來,土爲過去;若成甁時,甁爲現在,泥揣爲過去,甁破爲未來。如是者是爲合。”
답하나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삼세(三世)의 제법은 모두 존재하는 것이니, 미래의 법이 바뀌어져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바뀌어져서 과거가 되는 것이라.
만약 진흙덩이가 현재라면, 병은 미래가 되고 흙은 과거가 되는 것과 같으니, 만약 병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병은 현재가 되고 진흙덩이는 과거가 되는 것이며, 병이 깨어지는 것은 미래가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이 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若有三世相,是事不然,以多過故,是爲不合。復次,三世合者,如過去法與過去、未來、現在世作因,現在法與現在、未來世作因,未來世法與未來世作因。
만약 삼세(三世)의 상(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일은 옳지 못하나니, 허물이 많기 때문에 이는 합하지 않는 것이요.
또한 삼세(三世)가 합한다고 한다면 마치 과거의 법은 과거ㆍ미래ㆍ현재 세의 인(因)이 되어 주고,
현재의 법은 현재와 미래세의 인이 되어 주며, 미래의 법은 미래세의 인이 되어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又過去心、心數法緣三世法,未來、現在心心數法亦如是。斷心心數法能緣不斷法,不斷心心數法能緣可斷法。如是等三世諸法因緣果報共相和合,是名爲合。
또한 과거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은 삼세(三世)의 법을 반연하고,
미래와 현재의 마음(心)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心數法) 또한 그와 같으며,
끊는 마음의 단심(斷心)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은 끊지 않는 불단법(不斷法)을 능히 반연하고,
끊지 않는 불단심(不斷心)과 마음에 속하는 심수법은 끊을 수 있는 단법(斷法)을 능히 반연하나니,
이와 같은 등으로 삼세(三世)의 제법의 인연과 과보는 서로 함께 화합하는 공상화합(共相和合)이니, 이러함을 합(合)한다고 하는 것이다.
菩薩不作是合。何以故?如先說:“過去已滅,云何能爲因、能爲緣?未來未有,云何爲因緣?現在乃至一念中不住,云何爲因緣?”是名不合。
보살은 이러한 합(合)함을 짓지 않으니,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하심과 같이,
과거는 이미 소멸했는데 어떻게 인(因)이 될 수 있고 연(緣)이 될 수 있겠으며!
미래는 아직 있지 않은 것이니 어떻게 인연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함이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이라고 하는 이유인 것이다.
復次,佛自說因緣:“三世及名字空故,云何言合?”
또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삼세와 그 이름조차도 공(空)한 것이거늘 어떻게 합한다고 말하겠느냐”고 하셨다.
大智度論卷第三十六 終 대지도론 제 36 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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