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布施隨喜心過上釋論 第四十四之餘 卷二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5. 초품 중 회향(廻向)의 뜻을 풀이함 8
問曰:若爾者,何以不說“不離聲聞,辟支佛?”聲聞、辟支佛亦能利益菩薩。
묻나니, 만약 보살이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것이라면, 성문이나 벽지불 역시도 보살을 이익되게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을 여의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 것입니까?
答曰:菩薩大心,聲聞、辟支佛雖有涅槃利益,無一切智故,不能教導菩薩;諸佛一切種智故,能教導菩薩。如象沒泥,非象不能出;菩薩亦如是,若入非道中,唯佛能救,同大道故。以是故說菩薩常欲不離諸佛。
답하나니, 보살은 대심(大心)을 지니신 분들이나, 성문이나 벽지불은 비록 열반의 이익은 있다 할지라도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없기 때문에 보살을 가르치거나 인도할 수는 없으니,
이는 마치 코끼리가 진창에 빠졌을 때에 다른 코끼리가 아니면 나오게 할 수 없듯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만일 도(道)가 아닌 가운데에 들게 되었다면 오직 부처님만이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도(大道)를 같이하는 때문이므로 “보살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자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復次,菩薩作是念:“我未得佛眼故,如盲無異,若不爲佛所引導,則無所趣,錯入餘道;設聞佛法,異處行者,未知教化時節、行法多少。”
또한 보살은, “나는 아직 불안(佛眼)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경과 다름이 없으니, 만약 부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면 나아감도 없을 것이고, 잘못되게 다른 길로 들게 될 것이며,
설령 부처님의 법을 듣는다 하여도, 다른 곳에서 행하는 이는 그 교화해야 할 마땅한 시절(時節, 시기)과 수행하는 법의 많고 적음을 아직 모르는 것이다" 고 생각하며,
復次,菩薩見佛得種種利益,或眼見心淸淨,若聞所說,心則樂法,得大智慧,隨法修行,而得解脫。如是等値佛無量利益,豈不一心求欲見佛!
또한 보살이 부처님을 뵙게 되면 갖가지의 이익을 얻게 되나니,
혹 눈으로 보면 마음이 청정해지기도 하고, 또는 말씀을 듣게 되면 마음으로 곧 법을 좋아하면서 큰 지혜를 얻게 되고, 그 법에 따라 수행하면서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라. 이와 같이 부처님을 만나면 한량없이 이익이 있으니, 어찌하여 일심으로 부처님을 뵙고자 하지 않겠는가.
譬如嬰兒不應離母,又如行道不離糧食,如大熱時不離涼風冷水,如大寒時不欲離火,如度深水不應離船。
비유하자면, 마치 젖 먹이 아기는 어머니를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으며,
또 길을 가는 이는 양식을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으며,
아주 더울 때에는 서늘한 바람과 찬물을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으며,
아주 추울 때에는 불을 여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깊은 물을 건널 때에는 배를 여의면 안 되는 것과 같으며,
譬如病人不離良醫;菩薩不離諸佛,過於上事。何以故?父母、親屬、知識、人、天王等皆不能如佛利益;佛利益諸菩薩,離諸苦處,住世尊之地。以是因緣故,菩薩常不離佛。
또한 비유하자면, 병든 사람이 용한 의사를 여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위의 일들을 모두 초과하나니,
왜냐하면 부모ㆍ친척ㆍ지인 이나 인간ㆍ천상의 왕들까지도 부처님만큼의 이익을 줄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이익이야말로 모든 보살들을 모든 고통스러운 곳에서 떠나 세존(世尊)의 지위에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이러한 인연 때문에 보살은 언제나 부처님을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問曰:有爲之法,欺誑不眞,皆不可信;云何得如願不離諸佛?
묻나니, 유위(有爲)의 법은 속임수요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믿을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원하는 대로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福德、智慧具足故,乃應得佛,何況不離諸佛!以衆生有無量劫罪因緣故,不得如願;雖行福德而智慧薄少,雖行智慧而福德薄少,故所願不成。
답하나니, 복덕과 지혜를 두루 갖춘 까닭에 부처님을 이루게 되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을 여의지 않겠는가!
중생은 한량없는 겁 동안 지은 죄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 비록 복덕을 행한다 하여도 지혜가 얕고 적으며, 비록 지혜를 행한다 하여도 복덕이 얕고 적기 때문에 소원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菩薩求佛道故,要行二忍:生忍、法忍。行生忍故,一切衆生中發慈悲心,滅無量劫罪,得無量福德;行法忍故,破諸法無明,得無量智慧。二行和合故,何願不得!以是故,菩薩世世常不離諸佛。
보살은 부처님의 불도(佛道)를 구하는 까닭에 반드시 두 가지의 인(忍)을 행해야 하나니, 생인(生忍, 중생인)과 법인(法忍)이 그것이다.
생인(生忍, 중생인)을 행하는 때문에 일체 중생 가운데서 자비심을 일으키고, 한량없는 겁의 죄를 소멸시키며, 한량없는 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며,
법인(法忍)을 행하기 때문에 제법에 대한 무명을 깨뜨리고 한량없는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행을 화합한다면 무슨 소원인들 얻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때문에 보살은 세세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생인(生忍)이라 함은 중생들 가운데서 묵묵히 참는 것을 말하니,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 동안에 중생들이 갖가지로 괴롭힌다고 하여도 성내지 않고, 갖가지로 공경하고 공양하여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라.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이를 법인(法忍)이라 하느니라.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6권 9
復次,菩薩常愛樂念佛故,捨身受身,恒得値佛。譬如衆生習欲心重,受婬鳥身,所謂孔雀、鴛鴦等;習瞋恚偏多,生毒虫中,所謂惡龍、羅剎、蜈蚣、毒蛇等。是菩薩心,不貴轉輪聖王、人天福樂,但念諸佛,是故隨心所重而受身形。
또한 보살은 항상 부처님을 염(念)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몸을 버리거나 몸을 받거나 간에 항상 부처님을 마주 대하게 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중생으로서 음욕에 대한 버릇이 마음 속 깊이 무거우면, 이른바 공작이나 원앙새 등의 음탕한 새의 몸을 받게 되고,
성냄의 버릇이 한편으로 많으면 이른바 삿된 용이나 나찰이나 지네나 독사 등의 독충으로 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 보살은 마음으로 전륜성왕이나 인간ㆍ천상의 복락을 귀히 여기지 않고 다만 모든 부처님만을 염할 뿐이니, 이러한 까닭에 그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따라 몸의 형상을 받게 되는 것이며,
復次,菩薩常善修念佛三昧因緣故,所生常値諸佛。如『般舟三昧』中說:“菩薩入是三昧,卽見阿彌陁佛;便問其佛:‘何業因緣故,得生彼國?’佛卽答言:‘善男子!以常修念佛三昧,憶念不廢故,得生我國。’”
또한 보살은 항상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잘 닦은 인연으로,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에 태어나게 되나니, 마치 반주삼매(般舟三昧)삼매에 들어가서 곧 아마타불(阿彌陀佛)을 뵙고 그 부처님께 묻기를, “무슨 업의 인연 때문에 그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아미타 부처님께서 대답하시되 “선남자야, 항상 염불삼매를 닦으면서 염불을 그만두지 않으면 나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반주삼매(般舟三昧)’= ‘반주(般舟)’는 프라퓨트판나(pratyutpanna)를 음사한 말에 지나지 않으며, "…에 대해 가까이 서다" ‘…를 항상 행한다[상행(常行)].’ ‘(지금)현재에 앞에 나타나 있다’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반주(般舟)’는 부처를 세운다는 불립(佛立)의 뜻이며, 반주삼매(般舟三昧)는 관불삼매(觀佛三昧)의 하나로서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도 한다.
삼매를 통해 내 마음 속에 부처님을 세움으로써 부처님이 앞에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즉, 부처님을 마음에 떠올리고 삼매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수행자 앞에 현전(現前)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이 성립될 당시는 불상(佛像)이 조성되기 이전이라, 이러한 반주삼매(般舟三昧) 수행법이 주로 불탑 앞에서 행해졌었다.
쿠샨왕조(Kushan Dynasty)시대인 기원 전후해서 간다라미술이 성립되면서 비로소 불상(佛像) 조각이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불상이나 불탑 앞에서 반주삼매가 행해지게 됐다.
염불삼매도 일종의 반주삼매로서 염불을 통해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부처님을 보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반주삼매는 부처님이 눈앞에 현전하는 삼매를 말하는데, 이것은 마음속으로 부처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관상(觀想)한다는 점에서, 불수념(佛隨念)의 한 종류라고도 볼 수 있다. ‘수념(隨念)’이란 늘 기억함, 생각함, 숙고(熟考), 상념(想念), 마음챙김 등의 뜻이다.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나 깨나 항상 기억한다는 말이다. 부처님을 늘 기억하면 불수념(佛隨念)이 되고, 가르침을 늘 기억하면 법수념(法隨念)이 된다. 그리고 불수념(佛隨念)은 부처님 덕에 대한 반복적 마음챙김, 부처님 생애를 상념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귀의해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 등의 뜻도 있다. 그래서 반주삼매(般舟三昧)와 관련이 깊고, 반주삼매가 불수념의 하나이다.- 아미산
問曰:何者是念佛三昧 得生彼國?
묻나니, 어떠한 것이 염불삼매(念佛三昧)이며, 그 나라에 태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答曰:念佛者,念佛三十二相、八十隨形好、金色身,身出光明遍滿十方,如融閻浮檀金,其色明淨;又如須彌山王在大海中,日光照時,其色發明。
답하나니, 부처님을 생각하는 염불(念佛)이라 함이란, 부처님의 32상(相好)와 80수형호(隨形好)와, 부처님의 금빛 나는 몸과 그 몸에서 광명을 내어 시방에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마치 염부단금(閻浮檀金)을 녹이는 것 같아서 그 빛이 밝고 청정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니,
마치 수미산이 큰 바다에 있을 때에 햇빛이 비치면,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行者是時 都無餘色想,所謂山、地、樹木等;但見虛空中諸佛身相,如眞琉璃中赤金外現。
수행하는 이는 이 때에 일체의 산이나 땅이나 수목 등의 다른 것에 대한 색상(色想)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만 허공 가운데에서 모든 부처님의 몸매만을 볼 뿐이니, 마치 참 유리(琉璃) 속에서 적색의 금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과 같으며,
亦如比丘入不淨觀,但見身體胮脹爛壞,乃至但見骨人;是骨人無有作者,亦無來去,以憶想故見。
또한 비구가 부정관(不淨觀)을 통하여 다만 신체가 탱탱하게 부어서 문드러지는 것만을 볼 뿐이며, 나아가 뼈만 남은 골인(骨人)만을 볼 뿐이니, 이 골인(骨人)은 짓는 작자(作者)도 없고, 또한 오고 가는 래거(來去)도 없는 것이나, 기억하고 생각하는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니,
菩薩摩訶薩入念佛三昧,悉見諸佛,亦復如是;以攝心故,心淸淨故。譬如有人莊嚴其身,照淨水鏡,無不悉見;此水鏡中亦無形相,以明淨故,見其身像。
보살마하살이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가서 모든 부처님을 뵙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니, 마음을 거두어들여 가다듬었기 때문이요,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이라.
비유하자면, 사람이 그의 몸을 단장하고서 깨끗한 물에나 거울에 비추어 보면 모두를 볼 수 있지만, 이 물이나 거울 속에는 형상이 없으나, 단지 맑고 깨끗하기 때문에 그 몸의 형상을 반영하여 나타내 보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諸法從本以來,常自淸淨,菩薩以善修淨心,隨意悉見諸佛,問其所疑,佛答所問。聞佛所說,心大歡喜;從三昧起,作是念言:“佛從何所來?我身亦不去。”卽時便知:“諸佛無所從來,我亦無所去。”
제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청정한 것이기에, 보살이 청정한 마음을 잘 닦기 때문에 뜻을 따라 모든 부처님이 모두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을 물으면 부처님께서 그 질문에 대답하시므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어디로부터 오신 것인가! 나 역시도 가서 뵌 것이 아니었는데”라고 하다가, 즉시 모든 부처님은 오신 곳이 없고, 나 또한 간 바가 없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며,
復作是念:“三界所有,皆心所作" 何以故?隨心所念,悉皆得見。以心見佛,以心作佛;心卽是佛,心卽我身;心不自知,亦不自見。
또한 다시 생각하기를 “삼계(三界)에 있는 것 모두는 마음이 짓는 심소작(心所作)이구나!
왜냐하면 마음으로 염(念, 생각)하는 바에 따라 모두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니,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고, 마음으로 부처님을 지었으니, 마음이 곧 부처님이요 마음이 곧 나의 몸이구나”라고 하나,
이 마음은 스스로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若取心相,悉皆無智,心亦虛誑,皆從無明出。因是心相,卽入諸法實相,所謂常空。
만약 마음의 상(相)을 취하고자 한다면 이는 지혜가 없는 일이요, 마음 또한 거짓된 것이어서 모두가 무명(無明)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마음으로 인하여 제법의 실상(實相)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실상과 함께하여 항상 공한 상공(常空)인 것이다.
得如是三昧、智慧已,二行力故,隨意所願,不離諸佛;如金翅鳥王,二翅具足故,於虛空中自在所至。
이와 같은 삼매와 지혜를 얻게 되면, 이러한 삼매와 지혜, 두 가지 행의 힘 때문에 소원하는 바에 따라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게 되나니, 마치 금시조(金翅鳥)의 두 날개가 완전하기 때문에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得是三昧、智慧力故,或今身隨意供養諸佛,命終亦復値遇諸佛。以是故說:“菩薩常不離諸佛者,當學般若波羅蜜。”
보살이 이렇게 삼매와 지혜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혹은 이 몸으로 뜻에 따라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도 하며, 목숨이 다하였을 때에도 역시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되나니,
이러한 때문에 “보살이 항상 모든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二十九 終 대지도론 제 29 권을 마침
'대지도론(大智度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0권 2 (0) | 2024.03.29 |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30권 1 (1) | 2024.03.28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9권 7 (1) | 2024.03.27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9권 6 (1) | 2024.03.27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29권 5 (1) | 2024.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