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布施隨喜心過上釋論 第四十四之餘 卷二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5. 초품 중 회향(廻向)의 뜻을 풀이함 6

 

問曰:是十力、四無所畏功德 亦各有別相,云何說“法身無相”?

묻나니, 이 십력(十力)과 사무소외(四無所畏) 공덕도 역시 각각 개별적인 별상(別相) 있는데, 어찌하여 법신(法身)은 무상(無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一切無漏法,十六行、三三昧相應故,皆名無相;佛欲令衆生解故,種種分別說。

답하나니, 일체의 무루법(無漏法) 16() 삼삼매(三三昧, 공 무상 무작삼매) 상응하는 까닭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나, 부처님께서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시고자 갖가지로 분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說一切諸佛法,以空、無相、無作印故,皆入如、法性、實際;而爲見色歡喜發道心者,現三十二相莊嚴身。

모든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은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인(印, 도장)이기 때문에 모두가 여여(如如)한 법성(法性) 실제(實際) 들어가는 것이다 말씀하시나,

색(色)을 보고 환희하면서 도의 마음을 내어 발도심(發道心)하는 이를 위하여 32상으로 장엄한 몸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復次,爲一切衆生中顯最勝故,現三十二相而不破無相法。

또한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수승하심 드러내기 위하여 32상호의 몸을 나타내시나, 한편 무상(無相)의 법을 파괴하지 않으시나니, 

 

如菩薩初生七日之中,裹以白㲲,示諸相師。相師以古聖相書占之,以答王曰:“我讖記法,若人有三十二相者,在家當爲轉輪聖王,出家當得作佛。唯此二處,無有三處"

㲲 모직물 첩, 올이 가는 모직물 첩

마치 보살이 처음 태어나신  7일째 되던 날, 희고 고운 면보에 싸서 여러 관상가에게 보이자, 

관상가들은  성인의 관상과 점을 치는 책인 상서(相書)로써 점을 치며 왕에게 대답하기를 “우리의 참기법(讖記法)에 만일 사람으로서 32상이 있는 이가 집에 있으면 당연히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당연히 부처님이 되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가지의 길 뿐이며, 세 번째의 것 없습니다”고 하였다.

 

諸相師出已,菩薩寢息。復有仙人名阿私陁,白淨飯王言:“我以天耳聞諸天鬼神說,淨飯王生子,有佛身相,故來請見!”

모든 관상가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보살이 드셨는데, 다시 아사타(阿私陀, Asita)라는 선인(仙人) 정반왕(淨飯王)에게로 와서 아뢰기를 나는 천이(天耳, 천이통)으로써 모든 하늘과 귀신들이 정반왕께서 낳으신 아들은 부처님  () 지녔다' 하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뵙기를 청하는 바 입니다라고 하였.

 

王大歡喜,此人仙聖,故從遠來,欲見我子;勅諸侍人:“將太子出!”侍人答王:“太子小睡"

왕은 몹시 기뻐하면서  사람은 선성(仙聖)이시거늘 멀리서 일부러 오셔서 나의 아들을 보고자 하는구나 하고는, 모든 시중들에게 태자를 데리고 나오라 명하였다. 그러자 시중드는 사람이 왕에게 대답하기를 태자께서는 잠시 잠이 드셨습니다 하였.

 

是時阿私陁言:“聖王常請一切,施以甘露,不應睡也!”卽從坐起,詣太子所,抱著臂上,上下相之;相已涕零,不能自勝!王大不悅,問相師曰:“有何不祥,涕泣如是?”

이때 아사타 선인이 말하기를 “성왕(聖王)께서는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하여 감로(甘露)를 베푸시므로 잠들지 않습니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태자에게로 가서 팔로 안고는 위 아래의 상을 살펴 보았다. 

상을  보고 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바를 몰라하였으므로 왕은  달가워하지 않아 하면서 그에게 묻기를,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우시는 것입니까?”

 

仙人答言:“假使天雨金剛大山,不能動其一毛,豈有不祥!太子必當作佛;我今年已晩暮,當生無色天上,不得見佛、不聞其法故,自悲傷耳!”

선인이 대답하기를, “가령 하늘에서 금강산(金剛山)같은  산이 비처럼 쏟아 내린다 하여도   터럭조차도 움직이지 못할 것인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습니까!

태자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것이나,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서 쇠하여 장차 무색계(無色界)의 천상에 태어날 것이므로 부처님을 뵈올 수도 없을 것이며, 그 법을 듣지도 못할 것이기에 스스로 슬퍼하여 다른 이의 귀(마음)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王言:“諸相師說,不定一事,若在家者當作轉輪聖王,若出家者當得作佛。”

왕이 말하기를, “관상가들은  가지라고 정하여 말하지 않고, 만약 집에 있게 되면 전륜성왕이  것이요, 집을 떠나게 되면 부처님이  것이라고 말하였을 뿐입니다.”

 

阿私陁言:“諸相師者以世俗比知,非天眼知;諸聖相書,又不具足遍知,於相摠觀,不能明審 是故或言:‘在家當爲轉輪聖王,出家當爲佛' 

그러자 아사타 선인이 말하기를, “여러 관상가들은 세속의 것에 견주어서 알 뿐이요, 천안(天眼)을 지니지 못하였으며, 모든 성인들의 상서(相書, 관상을 보는 책)도 두루  이해하여 알지 못하였으므로, 상을 보면서도 전체를 잘 살피지 못하여, 분명하게 밝혀 알지를 못한 때문에 혹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집을 떠나면 마땅히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今太子三十二相,正滿明徹,甚深淨潔具足,必當作佛,非轉輪王也!”

지금 태자의 32상호는 바르고 원만하고 밝게 사무쳐서, 심히 깊고 정결함을 모두 갖추셨으므로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것이요 전륜성왕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以是故知,三十二相 於一切衆生中 最爲殊勝。言無相法者,爲破常、淨、樂相、我相、男女、生死等相,故如是說。

그러므로 32상은 일체 중생들 가운데에서 가장 수승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며,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무상법(無相法)이라는 것은 항상한 상(常)이요, 깨끗한 정(淨)이요, 즐거운 낙(樂)이요, '나'를 내세우는 아상(我相)이요, 남자(男)요, 여자(女)요, 나고 죽음의 생사(生死) 등의 상(相) 깨뜨리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以是故,佛法雖無相相,而現三十二相引導衆生,令知佛第一,生淨信故,說三十二相無咎。

이러한 까닭 부처님의 법에서 비록 무상상(無相相) 말한다 하여도, 32상호를 나타내시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제일이심을 알게 하고 깨끗한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때문인 것이니, 32상호를 말한다 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問曰:何以故說三十二相,不多不少?

무엇 때문에 32상호 만을 말씀하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것입니까?

 

答曰:若說多、若說少,俱當有難。復次,佛身丈六,若說少相,則不周遍,不具莊嚴;若過三十二相,則復雜亂。

답하나니, 만약  많은 것을 말씀 하셨거나  적게 말씀하셨다면, 양 쪽 모두 힐난이 있게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키는   여섯 자 장육(丈六, 1장 6척, 약 4.8미터)이시니, 만약  적은 몸매라고 말한다면 두루하지도 않고 장엄을 갖추지도 못한 것이라 할 것이요.

만약 32상을  넘게 된다면 곧 겹치고 뒤섞여 어지럽게 될 것이라. 

 

譬如 嚴身之具 雖復富有珠璣,不可重著瓔珞;是故三十二相不多不少,正得其中。復次,若少不端嚴,則留八十隨形好處;過則雜亂。

비유하자면, 마치 몸을 장엄하게 꾸미는 장신구에 비록 구슬들이 풍부하게 있다 하여도 영락(瓔珞)에 겹쳐서 장식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이, 32상호는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그 중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32상호보다 적다면 단정하고 엄숙하지 못할 것이며,

80수형호(隨形好)가 있으니, 이보다  지나치게 되면 뒤섞여서 어지럽게 될 것이다.

 

問曰:若須八十隨形好,何不皆名爲“相”而別爲“好”?

묻나니, 만약 80수형호(隨形好)가  필요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이라 이름붙이지 않고 따로 ()라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相大嚴身,若說大者,則已攝小。

답하나니, (相)이란 크게 몸을 장엄하는 것이므로 만약  것을 말하게 되면 작은 것은 이미 그에 포섭되는 것이며,

 

復次,相麤而好細,衆生見佛則見其相,好則難見故。

또한 상(相)은 거친 것이고 호(好)는 세밀한 이므로, 중생들이 부처님을 뵙게 되면  상은   있지만 호는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又相者,餘人共得;好者,或共、或不共。以是故,“相”、“好”別說。

또한 상(相)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호(好)는 혹은 얻기도 하고 혹은 얻지 못하기 때문에 상(相)과 호(好)를 따로 따로 설명하는 것이다.

 

問曰:佛畢竟斷衆生相、吾我相,具足空法相,何以故以相莊嚴,如取相者法?

묻나니, 부처님께서는 필경에는 중생이라는 중생상(衆生相) '나'를 고집하는 오아상(吾我相) 끊고, 법이 공한 공법상(空法相) 두루 갖추게 되셨는데,

무엇 때문에 상(相)으로써 장엄하신 것입니까? 

이러함은 마치 상(相) 취하는 이들의 법과 같지 않습니까?

 

答曰:若佛但以妙法莊嚴其心,身無相好者,或有可度衆生,心生輕慢,謂佛身相不具,不能一心樂受佛法。譬如以不淨器盛諸美食,人所不喜;如臭皮囊盛諸寶物,取者不樂。以是故,佛以三十二相莊嚴其身。

답하나니, 만약 부처님께서 다만 묘한 법(法)으로써만 장엄하시고 상호(相好)가 없으시다면 

 어떤 제도되어야  중생이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을 내어서 부처님은 상(相) 갖추지 못하셨으므로 부처님의 법(法)을 일심으로 즐거이 들을 수가 없구나라고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깨끗하지 못한 그릇에 맛있는 음식이 담겨 있으면, 그것을 먹는 사람이 기뻐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고, 

 악취가 나는 가죽 주머니에 여러 보물들을 담아 놓으면 그것을 취하는 이가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32상호(相好)로써  몸을 장엄하신 것이다.

 

復次,佛常於大衆中作師子吼言:“我於衆生中,一切功德最爲第一!”若佛生身不以相好莊嚴,或有人言:“身形醜陋,何所能知!”佛以三十二相、八十隨形好莊嚴其身,衆生猶有不信,何況不以相好莊嚴!

또한 부처님께서는 항상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師子吼)를 하시면서 나는 중생들 가운데서 온갖 공덕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셨으니,

만약 부처님의 육신이 상호(相好)로써 장엄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몸의 형상도 누추한데 무엇을 능히 안다고 하는 것인가”라 하기도  것이니,

부처님께서 32상호(相好)와 80수형호(隨形好)로써  몸을 장엄하고 계심에도 오히려 믿지 않는 중생이 있거늘, 하물며 상호로써 장엄하지 않는 몸이겠는가!

 

復次,佛法甚深,常寂滅相故,狂愚衆生不信不受,謂身滅盡,無所一取。以是故,佛以廣長舌、梵音聲、身放大光,爲種種因緣、譬喩說上妙法;衆生見佛身相威德,又聞音聲,皆歡喜信樂。

또한 부처님 법은 심히 깊어서 항상 고요히 사라진 적멸상(寂滅相)이기 때문에,

미친 듯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은 믿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면서 몸이란 사라져 다하는 것이므로 취할 것이란 하나도 없다 하나니,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넓고  혀의 광장설(廣長舌)과 맑은 음성의 범음성(梵音聲) 몸에서 솟아나는  광명으로써 갖가지 인연과 비유를 들어서 으뜸가는 묘한 법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중생들은 부처님의 상호(相好) 거룩한 덕을 보고,   음성을 듣고는 모두가 기뻐하면서 믿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며,

 

復次,莊嚴物有內外,禪定、智慧諸功德等,是內莊嚴;身相威德、持戒具足,是外莊嚴;佛內外具足。

또한 장엄하는 것에는 안과 바깥이 있으니,

선정과 지혜와 모든 공덕 등은 바로 안의 장엄이고, 

몸의 상호 거룩한 덕과 계율을 구족하게 지니는  등은 바로 바깥의 장엄이니, 

부처님께서는 안과 밖의 것을 모두 두루 갖추셨으며, 

 

復次,佛愍念一切衆生,出興於世,以智慧等諸功德,饒益利根衆生;身相莊嚴,饒益鈍根衆生。心莊嚴,開涅槃門;身莊嚴,開天、人樂門。

또한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세간에 출현하셔서 지혜 등의 모든 공덕으로는 근기가 영리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고, 

몸의 상호(相好)의 장엄으로써는 근기가 둔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셨으며, 

마음의 장엄으로써는 열반의 문을 여시며,  

몸의 장엄으로써는 인간ㆍ천상의 복락의 문을 열어 주시니, 

 

身莊嚴故,置衆生於三福處;心莊嚴故,置衆生入三解脫門。身莊嚴故,拔衆生於三惡道;心莊嚴故,拔衆生於三界獄。如是等無量利益因緣故,以相好莊嚴生身。

몸의 장엄으로 중생을 열반, 인간, 천상의 세 가지의 복(福)의 처소에 이르게 하시고,

마음의 장엄으로 중생을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의 삼해탈(三解脫)의 문에 들게 하시며,

몸의 장엄으로 중생을 지옥도, 축생도, 아귀도의 삼악도(三惡道)에서 건져내시고

마음의 장엄으로에 중생을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三界)의 감옥에서 구제하시나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이익의 인연으로 상호(相好)로써 육신을 장엄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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