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想釋論第三十七 卷二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7. 초품 중 십상(十想)의 뜻을 풀이함 6

 

復次 世閒衆生 善好者少 弊惡者多。或時雖有善行 貧賤鄙陋, 或雖富貴端政 而所行不善。或雖好布施 而貧乏無財, 或雖富有財寶 而慳惜貪著 不肯布施。

또 세간의 중생들에서 착하거나 좋은 이는 적으나, 못되거나 나쁜 이는 많으니,

때로는 비록 선행(善行)을 행하나, 빈천하고 비루하기도 하며,

혹은 비록 부귀하고 단정하다 하여도 그 행하는 바가 착하지 않으며

혹은 비록 보시하기를 좋아한다 하여도 가난하여 재물이 없기도 하고

혹은 비록 부자이어서 재보(財寶)가 있다 하여도 인색하고 탐착하여 보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或見人有所思 嘿無所說 便謂憍高自畜 不下接物。

或見好下接物 恩惠普潤 便謂欺誑諂飾。或見能語善論 便謂恃是小智 以爲憍慢。

或見質直好人 便共欺誑調捉 引挽陵易。或見善心柔濡 便共輕陵蹴 不以理遇。

若見持戒淸淨者 便謂所行矯異 輕賤不數。

혹은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잠자코 말이 없는 이를 보면, 뽐내고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하고

혹은 좋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대하면서 은혜를 두루 베푸는 사람을 보면 곧 속임수를 쓰면서 아첨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하며

혹은 좋은 말로써 이론을 잘 펼치는 사람을 보면 곧 그는 조그마한 지혜를 믿고 교만을 부린다고 여기기도 하며, 

혹은 질박하고 정직한 좋은 사람을 보면 문득 여럿이 함께 속이고 조롱하고 끌어와서 업신여기기도 하고

혹은 착한 마음을 쓰면서 부드러운 사람을 보면 곧 업신여기어 여럿이서 함께 밟고 차는 등, 도리로써 대우하지 않기도 하며

혹은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는 이를 보면 곧 행하는 것이 거짓이요 이상하다고 하면서 가벼이 여기는 일 등이 헤아릴 수조차 없으니, 

 

如是等 衆生弊惡 無一可樂。

이와 같이 중생들이 못되고 나쁜 탓에 하나도 즐거울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土地惡者 一切土地多衰無吉 寒熱飢渴 疾病惡疫 毒氣侵害 老病死畏 無處不有。

惡疫악역= 악성 유행성 전염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

토지가 나쁘다 함이란, 일체의 토지는 쇠함이 많고 길함이 없으며,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고 질병과 유행병과 독기의 침해가 있으며

늙고 병들고 죽는 두려움이 있음으로, 어느 곳마다 이러함이 가득하지 않음이 없으며, 

 

身所去處 衆苦隨之 無處得免!雖有好國樂安隱 多爲諸煩惱所惱 則不名樂土。

一切皆有二種苦, 身苦心苦 無國不有。如說; 

몸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고통이 따라 다니니, 면할 수 있는 곳이 없으며

비록 좋은 나라에서 풍요함과 안온함이 있다 하여도 거의 모두가 여러 번뇌에 시달리게 되므로 즐거운 땅이라 이름하지 않으며, 

일체의 모두에 몸의 괴로움인 신고(身苦)와 마음의 괴로움인 심고(心苦)라는 두 가지의 괴로움이 있나니,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함이 없을 수 없으니, 마치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라.

 

有國土多寒 或有國多熱, 有國無救護 或有國多惡,

有國常飢餓 或有國多病, 有國不修福 如是無樂處。

어떤 국토에는 추위가 많고, 혹 어떤 국토에는 더위가 많으며

어떤 국토에는 구호함이 없고, 혹 어떤 국토에는 악(惡)이 많기도 하네.

어떤 국토는 항상 굶주리며, 혹 어떤 국토는 병이 많으며

어떤 국토에서는 복을 닦지 않는 것과 같으니 즐거운 곳이란 없네.

 

衆生 土地有如是惡 思惟世閒無一可樂。

중생과 토지에는 이와 같은 악이 있으므로 세간이란 하나도 즐거운 만한 곳이 없음을 사유하여야 하나니

 

欲界惡事如是。

욕계(欲界)의 악한 일은 이와 같은 것이다.

 

上二界死時 退時 大生懊惱 甚於下界, 譬如極高處墮 摧碎爛壞。

위의 색계와 무색계의 두 세계에서 죽게 되어 물러날 때에는 크게 한탄하고 슬퍼하는 오뇌(懊惱)를 겪음이 아래 세계인 욕계보다 더욱 심하니, 비유하자면 마치 더욱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되면 더욱 부서지고 무너짐이 심한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 無常想 苦想 無我想 一切世閒不可樂想 有何等異而別說?

묻나니, 무상상(無常想)과 고상(苦想)과 무아상(無我想)과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기에 따로 설명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二種觀, 摠觀別觀。前爲摠觀 此中別觀。

復有二種觀, 法觀衆生觀。前爲呵一切法觀 此中觀衆生罪惡不同。

답하나니, 두 가지의 관(觀)이 있으니, 전체적인 것을 관찰하는 총관(總觀, samastānupaśyanā)과

전체 속의 개별적인 것을 관찰하는 별관(別觀, bhinnānupaśyanā)이 그것이라.

앞에서는 총관이었지만 여기서는 별관이 되는 것이다.

또한 다시 두 가지의 관함이 있으니,

일체법의 실상을 관찰하는 법관(法觀, dharmānupaśyanā)과

중생을 관찰하는 중생관(衆生觀, sattvānupaśyanā)이 그것이라.

앞에서는 일체법의 실상을 관찰하여 잘못된 애착을 꾸짖는 법관(法觀)이었으나,

여기에서는 중생들의 죄악이 같지 않음을 관찰하는 중생관(衆生觀)이다. 

 

復次 前者無漏道 此中有漏道。前見諦道 今思惟道。

또한 앞의 것은 무루도(無漏道)이고 여기에서는 유루도(有漏道)이며,

앞에서의 무상상(無常想) 고상(苦想) 무아상(無我想)은 견제도(見諦道)이고

여기에서의 식염상(食厭想)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은 사유도(思惟道)이라.

 

如是等種種差別。

이와 같은 갖가지 차별이 있으니, 

 

一切地中攝 緣三界法。是名 “一切世閒不可樂想”。

이는 일체의 경지와 과위의 일체지(一切地, 십지十地)에 속하는 것이라 삼계의 법(현상과 작용)을 반연하는 것이며, 이를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이라 하는 것이다.

 

“死想”者 如死念中說。

죽음을 관하는 사상(死想, maraṇasaṁjñā)이라 함은 죽음을 명상의 대상으로 하는 사념(死念, maraṇānusmṛti, 사수념死隨念) 가운데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不淨想”者 如身念處中說。斷想 離想 盡想者 緣涅槃相。

육신의 부정함을 관하는 부정상(不淨想)이라 함은 마치 몸을 관찰하는 지혜의 신념처(身念處)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번뇌가 끊어져서 적멸(寂滅)한 단상(斷想, prahāṇasaṁjñā)과

번뇌를 끊고 벗어나는 이상(離想, virāgasaṁjñā)과

그러한 벗어남 조차도 다 끊어진 진상(盡想, nirodhasaṁjñā)이라 함은 열반의 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斷諸結使故 名“斷想”, 離結使故 名“離想”, 盡諸結使故 名“盡想”。

모든 번뇌에 묶인 결(結)과 번뇌의 습기에 부림을 당하는 사(使)를 끊어 내는 까닭에 단상(斷想)이라 하고,

번뇌에 묶인 결(結)과 번뇌의 습기에 부림을 당하는 사(使)를 여의기 때문에 이상(離想, 이욕상離欲想)이라 하며,

번뇌에 묶인 결(結)과 번뇌의 습기에 부림을 당하는 사(使)를 다하였기에 진상(盡想)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 若爾者 一想便足 何以說三?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한 가지 생각인 일상(一想)만으로도 족할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단상(斷想) 이욕상(離欲想) 진상(盡想)의 세 가지로 설명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如前一法三種, 說無常卽是苦 苦卽是無我, 此亦如是 一切世閒罪惡深重故三種呵。

如伐大樹 不可以一下斷。涅槃微妙法 昔所未得 是故種種讚 名爲“斷想” “離想” “盡想”。

답하나니, 마치 앞에서 하나의 법을 세 가지로 설명하면서 “무상(無常)함이 곧 괴로움의 고(苦)요, 괴로움의 고(苦)가 무아(無我)이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역시 그와 같이 온갖 세간의 죄악이 깊고 중하기 때문에 단상(斷想) 이욕상(離欲想) 진상(盡想)의 세 가지로 꾸짖는 것이다.

마치 큰 나무를 벨 때에는 한 번만에 베어낼 수 없는 것과 같이, 

열반의 미묘한 법은 예부터 아직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갖가지로 칭찬하는 것이니,

이를 일컬어 단상(斷想)과 이상(離想)과 진상(盡想)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 斷三毒故名爲“斷”, 離愛故名爲“離”, 滅一切苦更不生故名爲“盡”。

또한 삼독(三毒)을 끊었기 때문에 단(斷)이라 하고,

애욕을 여의었기 때문에 이(離)라 하며,

온갖 괴로움을 멸하여 다시는 나지 않기 때문에 진(盡)이라 하며, 

 

復次 行者於 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 正智慧觀 遠諸煩惱 是名“離想”,

得無漏道 斷諸結使 是名“斷想”, 入涅槃時 滅五受衆不復相續 是名“盡想”。

또 수행하는 이가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바른 지혜를 관찰하여서 모든 번뇌를 멀리하므로 이를 이상(離想)이라 하고,

무루의 도를 얻어서 모든 번뇌를 끊어 내었으므로 이를 단상(斷想)이라 하며,

열반에 들 때에 오수중(五受衆)을 멸하여 다시 상속시키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를 진상(盡想)이라 하며, 

 

“斷想”有餘涅槃, “盡想” 無餘涅槃, “離想” 二涅槃方便門。

단상(斷想)은 번뇌는 소멸하였으나 육신이 남아 있는 유여열반(有餘涅槃, sopadhiśeṣanirvāṇa)이고,

진상(盡想)은 오온(五薀)이 화합한 몸까지 소멸하여 완전히 몸과 마음이 없어진 무여열반(無餘涅槃, nirupadhiśeṣanirvāṇa)이며,

이상(離想)은 방편으로 이러한 두 가지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是三想 有漏。無漏故 一切地中攝 十想竟

이 단상(斷想) 이상(離想) 진상(盡想)의 삼상(三想)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체 과지의 경지인 일체지(一切地, 십지)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함으로 ① 무상상(無常想), ② 고상(苦想), ③ 무아상(無我想), ④식부정상(食不淨想), ⑤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 ⑥사상(死想), ⑦부정상(不淨想), ⑧단상(斷想), ⑨이욕상(離欲想), ⑩진상(盡想)의 10상(想)에 대한 설명을 마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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