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十想釋論第三十七 卷二十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7. 초품 중 십상(十想)의 뜻을 풀이함 2

 

問曰; 若無無常 佛何以苦諦中說無常?

묻나니, 만약 무상(無常)함이 없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고제(苦諦) 가운데서 무상(無常)함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 凡夫人生邪見故 謂世閒是常, 爲滅除是常見故說無常 不爲無常是實故說。

답하나니, 범부는 사견(邪見)을 내기 때문에 세간은 곧 항상한 것이라고 여기나니, 이 항상하다는 소견의 상견(常見, śāśvatadṛṣṭi)을 없애 주기 위하여 무상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무상함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에 말씀한 것은 아니다.

 

復次 佛未出世 凡夫人 但用世俗道遮諸煩惱, 今欲拔諸煩惱根本故 說是無常。

또한 부처님께서 아직 세간에 출현하시기 전의 범부들은 다만 세속의 도(道)로써 모든 번뇌를 막고자 하였으나, 이제는 모든 번뇌의 근본을 뽑아내어 주려는 까닭에 이 무상을 말씀하신 것이며,

 

復次 諸外道法 但以形離五欲 謂是解脫, 佛說邪相因緣故縛 觀無常正相故解脫。

또한 모든 외도의 법(가르침)에서는 다만 오욕(五欲)을 여읜 형상만으로, 이를 해탈이라 여기지만

부처님께서는 “삿된 형상(견해)의 인연으로 박(縛, bandhana), 즉 속박되는 것이고, 무상의 바른 모습(실상)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할 수 있는것이다” 말씀하셨으며, 

 

박(縛, bandhana)은 결박(結縛) · 계박(繫縛) · 구속(拘束) · 속박(束縛) · 전박(纏縛) · 묶음의 뜻으로, 번뇌의 여러 다른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번뇌가 마음을 결박하여 생사의 감옥에 가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번뇌가 마음을 묶어서 선법(善法)을 자유로이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염(離染)을 가로막아 그 결과 생사의 감옥에 가두어진 상태에 계속 처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박(縛)은 번뇌가 유정의 마음을 3계에 계박하고 열반을 증득하지 못하게 한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표현 또는 명칭이다.
박(縛)은 종종 계(繫, grantha) 또는 전(纏, paryavasthāna)과 동의어로도 사용된다. 예를 들어, 탐 · 진 · 치의 3박(三縛)을 3전(三纏)이라고 부르는 논서도 있다. 이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계박(繫縛) · 전박(纏縛)이라는 낱말도 이들의 동의어로도 사용된다.
2박(二縛) · 3박(三縛) · 4박(四縛) 등으로 구분하며, 이들 가운데 탐박(貪縛) · 진박(瞋縛) · 치박(癡縛)의 3박이 가장 널리 쓰인다. 3박은 성문4과(聲聞四果) 가운데 제2과와 제3과인 일래과(一來果) · 불환과(不還果)의 증득과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위키

 

復有二種觀無常相, 一者 有餘, 二者 無餘。

如佛說, “一切人 物滅盡 唯有名在 是名有餘, 若人 物滅盡 名亦滅 是名無餘"

또 두 가지의 무상상(無常相)을 관함이 있으니,

첫째는 남음이 있는 유여(有餘)이고, 둘째는 남음이 없는 무여(無餘)이다.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일체의 사람이나 물건이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지고 오직 이름만이 남음을 바로 남음이 있는 유여(有餘)라 하고,

만약 사람이나 물건이 다하여 사라져 없어지고 이름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것을 남음이 없는 무여(無餘)라 하는 것이다.

 

復有二種 觀無常相, 一者 身死盡滅, 二者 新新生滅。

또 무상상(無常相)을 관하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이 죽어서 다하여 멸하는 것이고 둘째는 새록새록 자꾸 나고 또한 그렇게 없어지는 것이다.

 

復次 有言, 持戒爲重。所以者何?依戒因緣故 次第得漏盡。

또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계율을 지지는 지계(持戒)이 중요하니, 왜냐하면, 계를 받아지닌 인연 때문에 차례로 번뇌가 다하는 누진(漏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有言, 多聞爲重。所以者何?依智慧故 能有所得。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많이 듣고 배우는 다문(多聞)이 중요하니, 왜냐하면, 지혜에 의거하는 까닭에 능히 얻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有言:禪定爲重。如佛所說 定能得道。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정(禪定)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한 것과 같아서 선정은 도를 얻게 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며, 

 

有言, 以十二頭爲重。所以者何?能淨戒行故。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12두타(頭陀)의 행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능히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12두타(頭陀)의 행;

① 고요한 곳에 머무르면서 세속을 멀리하는 재아란야처(在阿蘭若處).

② 상행걸식(常行乞食).

③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일곱 집을 걸식하며, 일곱 집에서 밥을 얻지 못하면 그날은 먹지 않는 차제걸식(次第乞食). ④ 하루에 한 차례를 한자리에서 먹는 수일식법(受一食法).

⑤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발우의 든 음식만으로 만족하는 절양식(節量食).

⑥ 정오가 지나면 먹고 마시지 않는 중후불득음장(中後不得飮漿).

⑦ 좋은 옷을 입지 않고 헌옷을 빨아 기워 입는 착폐납의(著弊衲衣).

⑧ 내의 · 상의 · 중의 세 가지만을 가지는 단삼의(但三衣).

⑨ 무덤 곁에서 무상관(無常觀)을 닦는 총간주(塚間住).

⑩ 쉴 때에는 정자나 집을 택하지 않고 나무 밑에서 쉬는 수하지(樹下止).

⑪ 나무 아래에서 자면 습기 · 독충 · 새똥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한 데에 앉는 노지좌(露止坐).

⑫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 단좌불와(但坐不臥)

 

如是各各以所行爲貴 更不復懃求涅槃。

佛言:“是諸功德皆是趣涅槃分, 若觀諸法無常 是爲眞涅槃道"

如是等種種因緣故 諸法雖空而說是無常想。

이와 같이 저마다 각각 스스로가 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면서 다시 부지런히 열반을 구하지 않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공덕은 바로 모두가 열반에 나아가는 갈래이며, 만일 제법의 무상함을 관하면 이것이 바로 참된 열반의 도(道)이다” 하셨으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 때문에 비록 제법은 공(空)한 것이라 하나, 이렇게 무상상(無常想)을 말씀하신 것이다.

 

復次 無常想 卽是聖道別名。

佛種種異名說“道” 或言“四念處” 或言“四諦” 或言“無常想”。

如經中說, “善修無常想 能斷一切欲愛 色愛 無色愛 掉慢 無明盡 能除三界結使"

以是故 卽名爲“道”。

또한 무상상은 바로 성인의 길인 성도(聖道, 사성제)에 대한 다른 이름=별명(別名)이니,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다른 이름으로 도를 말씀하신 것으로,

혹은 사념처(四念處)라 말씀하기도 하시고, 혹은 사제(四諦)라고도 하셨으며,

혹은 무상상(無常想)이라 말씀하기도 하신 것이다.

마치 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무상상(無常想)을 잘 닦으면 일체 욕계의 애착인 욕애(欲愛, kāmarāga)와 색계의 애착인 색애(色愛, rūparāga), 무색계의 애착인 무색애(無色愛, ārūpyarāga)와

마음이 들뜨는 도(悼)와 교만의 만(慢) 등을 끊고 무명(無明)이 다하여 삼계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나니,

이러한  때문에 곧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하셨다.

 

是無常想 或有漏 或無漏正得無常是無漏 初學無常是有漏。

이 무상상(無常想)은 혹은 유루(有漏)이기도 하고 혹은 무루(無漏)이기도 하나니,

바르게 무상(無常)함을 터득하게 되는, 이것은 바로 무루(無漏)요

처음 무상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은 바로 유루(有漏)이다.

 

摩訶衍中 諸菩薩心廣大 種種化一切衆生故 是無常想亦有漏 亦無漏若無漏 在九地, 若有漏 在十一地。

緣三界五受衆。四根相應 除苦根。凡夫 聖人得。如是等種種因緣 說無常想功德。

마하연(摩訶衍, 대승)에서는 모든 보살의 마음이 광대하여져서 갖가지로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이 무상상은 역시 유루이기도 하고 역시 무루이기도 한 것이라 하나니,

만약 무루이라면 구지(九地)에 있는 것이고,

만약 유루이라면 11지(地)에 있는 것이니,

삼계(三界)의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의 오수중(五受衆)을 대상으로 삼고,

낙희우사(樂喜憂捨)의 사근(四根)과 상응하나, 고근(苦根)은 제외되는 것으로 범부와 성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을 들어서 무상상(無常想)의 공덕을 설명하였다.

 

苦想”者 行者作是念, “一切有爲法無常故苦"

고상(苦想, duḥkhasaṁjñā)이라 함은, 수행하는 이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問曰; 若有爲法無常故苦者 諸賢聖人 有爲無漏法亦應當苦!

묻나니, 만약 유위법(有爲法)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 한다면 모든 성현에게도 유위(有爲)에 대한 무루(無漏)법은 응당 괴로운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答曰, 諸法雖無常 愛著者生苦 無所著者無苦!

답하나니, 제법이 비록 무상하다 하나, 애착하게 되면 고통이 생기고 애착함이 없으면 고통이 없는 것이다.

 

問曰; 有諸聖人雖無所著 亦皆有苦 如舍利弗風熱病苦 畢陵伽婆蹉眼痛苦

羅婆那跋提音聲第一也痔病苦 云何言“無苦”?

묻나니, 어떠한 성현들에게도 비록 아무런 애착함이 없다 하여도 역시 그 모두에게도 괴로움은 있는 것이니,

마치 사리불(私利佛) 존자에게는 풍열병(風熱病)의 고통이 있었던 것과 같고,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 Pilinda-vatsa) 존자에게는 눈병의 고통이 있었던 것과 같으며,

라바나발제(羅婆那跋提, Lavaṇabhadrika 음성제일音聲第一) 존자에게는 치질병(痔疾病)의 고통이 있었던 것과 같은데,

어찌하여 괴로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二種苦, 一者 身苦, 二者 心苦。

是諸聖人以智慧力故 無復憂愁 嫉妒 瞋恚等心苦, 已受先世業因緣四大造身 有老病 飢渴 寒熱等身苦 於身苦中亦復薄少。

如人了了知負他債 償之不以爲苦, 若人不憶負債 債主强奪 瞋惱生苦。

답하나니, 두 가지의 괴로움이 있으니, 첫째는 몸의 괴로움인 신고(身苦)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인 심고(心苦)이다.

이 모든 성인들은 지혜의 힘 때문에 다시는 근심 걱정이나 질투나 성을 내는 등의 마음의 괴로움은 없었으나, 이미 전생에 지은 업(業)의 인연으로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몸을 받았으니, 늙고 병들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등의 신고(身苦)가 있는 것이라. 그러한 신고(身苦)의 고통은 역시 얇고 적는 것이었다.

사람이 분명히 다른 이에게 빚진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빚을 갚음으로써 고통이라 여기지 않게 되지만, 

만약 빚을 졌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데 빚쟁이가 강제로 빼앗아 가게 되면 성을 내면서 괴로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 苦受是心心數法 身如草木 離心則無所覺, 云何言“聖人但受身苦”?

묻나니, 괴로운 느낌의 고수(苦受)는 바로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입니다.

몸은 마치 풀이나 나무와 같아서 마음을 여의게 되면 깨닫는 감각이 없게 되거늘 어떻게 성인은 다만 몸의 괴로움만을 받는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凡夫人受苦時 心生愁惱 爲瞋使所使 心但向五欲。

如佛所說, “凡夫人除五欲 不知更有出苦法。於樂受中 貪欲使所使, 不苦不樂受中 無明使所使。凡夫人受苦時 內受三毒苦 外受寒熱 鞭杖等。如人內熱盛 外熱亦盛"

如經說, “凡夫人失所愛物 身心俱受苦 如二箭雙射, 諸賢聖人無憂愁苦 但有身苦 更無餘苦"

답하나니, 범부는 고통을 받을 때에 마음으로 근심하고 괴로워하면서 성냄의 번뇌인 진사(瞋使)에 부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마음은 다만 오욕(五欲)만을 향하는 것이라.

마치 범부는 오욕(五欲)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법을 알지 못하므로 즐거운 느낌의 낙수(樂受)에서는 탐욕의 번뇌에 부림을 당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에서는 무명(無明)의 번뇌에 부림을 당한다.

범부는 고통을 받을 때에는 안의 육입(六入)은 삼독(三毒)으로 인한 고통을 받고

밖으로는 추위와 더위와 매를 맞는 따위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속의 열(熱)이 성하면 바깥의 열도 역시 성하는 것으로 느끼는 것과 같다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과 같으며,

마치 경(Śalyatvena sūtra)에서, '범부는 사랑하던 물건을 잃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함께 고통을 받게 되나니, 마치 두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나란히 맞는 것과 같다. 모든 성현들은 근심하는 괴로움이 없고 다만 몸의 고통이 있을 뿐이며 다시 그 밖의 고통은 없다.'고 하신 말씀과 같으니

 

復次 五識相應苦 及外因緣杖楚 寒熱等苦 是名身苦, 餘殘名心苦。

또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오식(五識)이 상응하는 괴로움 및 바깥의 인연으로서 매를 맞거나 춥거나 더운 등의 괴로움이 있을 뿐이니, 이를 신고(身苦)라 하고 그 밖의 나머지를 심고(心苦)라 한다.

 

復次 我言, “有爲無漏法 不著故非苦" 聖人身是有漏 有漏法則苦 有何咎?是末後身所受苦亦微少。

또한 내가 말하건대 유위의 무루법은 애착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다.

성인의 몸이란 것은 유루이기에 유루의 법(法, 현상과 작용)에 의하여 괴로움이 있는 것이니, 무슨 허물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마지막 몸인 말후신(末後身)이 받는 괴로움은 역시 미미하고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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