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八念義第三十六之 餘卷二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6. 초품 중 팔념의 뜻을 풀이함② 8
問曰; 若持戒是禪定因緣 禪定是智慧因緣 八聖道中何以慧在前 戒在中 定在後?
묻나니, 만일 지계(持戒)가 선정의 인연이고, 선정(禪定)이 지혜의 인연이라면,
팔성도(八聖道)에서 무엇 때문에 지혜를 맨 앞에 두고 계율은 중간에 두었으며 선정은 뒤에 있는 것입니까?
答曰; 行路之法 應先以眼見道而後行 行時當精懃, 精懃行時 常念如導師所教, 念已 一心進路 不順非道。
답하나니, 길을 가는 방법으로는 마땅히 먼저 눈으로 그 길을 본 뒤에 가게 되며,
갈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조심히 가야 하며,
정성을 다하여 갈 때에는 항상 길잡이가 가르쳐 준 대로 가고자 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는 일심으로 길을 가되, 길이 아닌 곳은 따르지 않는 것이다.
正見亦如是 先以正智慧 觀五受衆皆苦 是名苦, 苦從愛等諸結使和合生 是名集, 愛等結使滅 是名涅槃, 如是等觀八分 名爲道 是名正見。行者是時心定 知世閒虛妄可捨 涅槃實法可取 決定是事 是名正見。
뒤 바뀌지 않는 바른 소견인 정견(正見) 역시도 그와 같아서,
먼저 바른 지혜로써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의 5수중(五受衆)은 모두가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관하나니 이를 괴로움의 고(苦)라 하고,
고(苦)란 애욕 등을 비롯한 모든 번뇌에 묶인 결(結)과 부림을 당하는 사(使)가 화합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이러함을 쌓임의 집(集)이라 하며,
애욕 등을 비롯한 번뇌에 묶인 결(結)과 부림을 당하는 사(使)가 사라지는 것을 열반(涅槃)이라 하고,
이러함과 같이 여덟으로 나눈 팔분(八分)을 관찰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이를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이라 하나니,
수행하는 이는 이 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안정시키어 '세간은 허망한 것이므로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고, 열반은 진실한 법이므로 취해야 한다” 는 것을 결정하는 것을 바른 소견의 정견(正見)이라 하며,
知見是事 心力未大, 未能發行 思惟籌量 發動正見令得力 是名正思惟。
知見지견= 배워서 얻은 지식과 보고 들어 쌓은 분별력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런 일을 지견(知見)하는 마음의 힘이 아직 크지 못하나, 아직 행하지 못한 채 생각하고 헤아려서 정견(正見)을 발동시켜 힘을 얻게 하는 것을 뒤 바뀌지 않은 바른 사유의 정사유(正思惟)라 하며,
智慧旣發 欲以言宣故 次正語正業正命戒。
지혜가 이미 일어났으며, 말로써 베풀어 펴고자 하기 때문에 순서대로 뒤바뀌지 않도록 바르게 말하는 정어(正語)이며,
바른 업을 지어 나가는 정업(正業)과 바르게 삶을 살아 가는 정명(正命)이라.
行時精進不懈 不令住色 無色定中 是名正方便。
계율을 행할 때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색정(色定, 색계)의 무색(色無, 무색계)의 정(定)에 머무르지 않는 것을 바른 방편의 정방편(正方便)이라 하며,
用是正見觀四諦 常念不忘, 念一切煩惱是賊 應當捨, 正見等是我眞伴 應當隨 是名正念。
이러한 정견(正見)으로써 사제(四諦)를 관찰하며, 항상 기억하고 잊지 않으면서 “일체의 번뇌는 바로 도적이니 마땅히 버려야 하며, 정견(正見) 등이 바로 나의 참된 반려이니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하는 것을 바른 기억의 정념(正念)이라 하며,
於四諦中攝心不散 不令向色 無色定中 一心向涅槃 是名正定。
사제(四諦) 안에서 마음을 가다듬어 흩어지지 않고 색정ㆍ무색정으로 향하지 않게 하면서 일심으로 열반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을 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이라 하며,
是初 得善有漏 名爲煖法 頂法 忍法中義, 次第增進 初中後心。入無漏心中 疾一心中具 無有前後分別次第。
처음에 착한 유루에 대하여 알게 되는 선유루(善有漏)를 얻게 되는 것을 난법(煖法, uṣmagata-dharma)ㆍ정법(頂法, mūrdhan-dharma)ㆍ인법(忍法, kṣānti-dharma) 중의 이치라 하나니,
차례대로 더욱 정진하여 나아가는 것을 처음=난법(煖法)과 중간=정법(頂法)과 나중=인법(忍法)의 마음이 무루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빨리 일심(一心) 속에서 갖추어지게 되면 앞뒤의 순서와 분별이 없게 되며,
正見相應 正思惟 正方便 正念 正定 三種戒隨是分分行。
정견(正見)은 정사유(正思惟)ㆍ정방편(正方便)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과 서로 상응하며
세 가지의 계율인 삼종계(三種戒)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방편(正方便)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다섯 갈래의 오분(五分)을 따라 행하여 지는 것이다.
正見 分別好醜利益爲事, 正思惟 發動正見爲事, 正語等 持是智慧諸功德 不令散失, 正方便 驅策令速進不息, 正念 七事所應行者 憶而不忘, 正定 令心淸淨 不濁 不亂 令正見七分得成, 如無風房中燈 則照明了了。
정견(正見)은 좋고 추함의 호추(好醜)를 분별하여 이익하게 하는 것을 일(事)로 삼고,
정사유(正思惟)는 정견(正見)이 발동하는 것을 일로 삼으며,
정어(正語)를 비롯한 나머지는 이 지혜와 모든 공덕을 지니면서 흩어지거나 잃지 않게 하고,
정방편(正方便)은 쉬지 않고 빨리 나가가게 채찍질하는 것이며,
정념(正念)은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정(正定)의 일곱 가지의 칠사(七事)를 행하여야 할 때 기억하면서 잊지 않게 하는 것이며,
정정(正定)은 마음이 청정하여 흐려지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면서 정견(正見)으로 하여금 칠사(七事)를 이룰 수 있게 하나니,
마치 바람이 없는 방안에 등불을 켜면 곧 그 광명이 환히 밝게 비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是無漏戒 在八聖道中 亦爲智者所讚。
이와 같이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의 무루계(無漏戒)는 팔성도(八聖道) 안에 있으며 또한 지혜 있는 이들이 찬탄하는 바이다.
問曰; 無漏戒應爲智者所讚 有漏戒何以讚?
묻나니, 무루계(無漏戒)는 마땅히 지혜 있는 이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유루계(有漏戒)은 무엇으로써 칭찬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漏戒似無漏 隨無漏同行因緣 是故智者合讚。如賊中有人叛來歸我 彼雖是賊 今來向我 我當內之 可以破賊 何可不念!諸煩惱賊在三界城中住 有漏戒善根 若煖法頂法忍法 世閒第一法 與餘有漏法異故 行者受用。以是因緣故 破諸結使賊 得苦法忍無漏法財 以是故智者所讚。
답하나니, 유루계(有漏戒)는 무루계(無漏戒)와 비슷하며, 무루를 따라 함께 인연을 행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 있는 이는 이 둘을 합쳐서 칭찬하는 것이다.
마치 도적 중의 한 사람이 그 무리를 배반하고 나에게로 돌아와 귀순하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가 도적이었다 하여도 지금은 나와 함께 나의 길을 가는 것이므로 나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고 그로 말미암아 가히 적을 깨뜨릴 것이거늘 어찌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번뇌의 도적들이 삼계(三界)의 성(城) 안에 머물러 있으므로 유루계(有漏戒)의 선근(善根)이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 laukikāgradharma)은 다른 유루의 법과 다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받아 들여서 쓰는 수용(受用)을 하며,
이러한 인연으로 모든 번뇌의 도적을 물리치게 되고 고법인(苦法忍)인 무루의 법재(法財)를 얻게 되나니,
이러함 때문에 지혜 있는 이가 찬탄하는 바가 되는 것이니,
是名念戒。
이러함을 염계(念戒, śīlānusmṛti)라 하느니라.
“念捨”者 有二種捨, 一者 施, 二者 捨諸煩惱。
施捨有二種, 一者 財施, 二者 法施。三種捨和合 名爲捨。
염사(念捨, tyāgānusmṛti)라 함에는, 두 가지의 버림인 사(捨)가 있나니,
첫째는 기꺼이 버리듯이 보시하는 시사(施捨)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를 버리는 사제번뇌(捨諸煩惱)가 그것이다.
보시의 버림의 시사(施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요, 둘째는 법의 베푸는 법시(法施)라.
세 가지의 버림이 화합하는 것을 일컬어 버림인 사(捨)라 하는 것이다.
財施是一切善法根本故 行者作是念, “上四念因緣故得差煩惱病 今以何因緣故得是四念?則是先世 今世於三寶中少有布施因緣故" 所以者何, 衆生於無始世界中 不知於三寶中布施故 福皆盡滅。是三寶有無量法 是故施亦不盡 必得涅槃。
재물을 베푸는 재시(財施)는 바로 온갖 착한 법의 근본이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가 생각하기를 “위의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네 가지 사념(四念)의 인연 때문에 번뇌의 병이 낫게 되나니,
이제 어떠한 인연으로 이 사념(四念)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나니,
이는 바로 전생이나 현세에서 삼보(三寶)에 조금이라도 보시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왜냐하면, 중생은 비롯함이 없는 세계에서 삼보에 보시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복이 모두 다하여 없어졌지만, 이 삼보에는 무량한 법(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보시를 하게 되면 복덕 역시도 다하지 않고 반드시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復次 過去諸佛初發心時 皆以少多布施爲因緣, 如佛說, “是布施是初助道因緣"
또한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할 때에 모두가 적건 많건 간에 보시로써 인연을 삼으셨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보시는 바로 처음에 도를 돕는 조도(助道)의 인연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으며,
復次 人命無常 財物如電 若人不乞 猶尚應與 何況乞而不施?以是應施 作助道因緣。
또한 사람의 목숨은 무상하고 재물은 마치 번개와 같으니, 설령 사람이 구걸하지 않을지라도 오히려 먼저 주어야 마땅 하거늘 하물며 구걸하는데도 주지 않는 것인가!
그러므로 마땅히 보시를 하는 것이 도(道)를 돕는 인연을 짓는 것이니라.
復次 財物是種種煩惱罪業因緣, 若持戒禪定 智慧種種善法 是涅槃因緣。
以是故 財物尚應自棄 何況好福田中而不布施?
또한 재물은 갖가지 번뇌와 죄업(罪業)의 인연을 만드는 것이고,
지계와 선정과 지혜와 갖가지 착한 선법(善法)은 바로 열반의 인연이라.
이러한 까닭에 재물은 마땅히 스스로 버려야 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좋은 복전에 어찌 보시하지 않겠는가!
譬如有兄弟二人 各擔十斤金行道中 更無餘伴。兄作是念, “我何以不殺弟取金?此曠路中人無知者" 弟復生念 欲殺兄取金。兄弟各有惡心 語言視瞻皆異。兄弟卽自悟 還生悔心, “我等非人 與禽獸何異?同生兄弟 而爲少金故而生惡心" 兄弟共至深水邊 兄以金投著水中。弟言, “善哉善哉" 弟尋復棄金水中。
兄復言, “善哉善哉" 兄弟更互相問 何以故言善哉?各相答言, “我以此金故 生不善心 欲相危害, 今得棄之 故言善哉" 二辭各爾。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두 형제의 이야기와 같으니,
그들은 각각 10근(斤)씩의 금을 가지고 다른 일행이 없는 길을 가고 있었다.
형이 생각하기를 “내가 왜 아우를 죽이고 금을 다 빼앗아 가지지 않는 것인가? 이 넓은 길에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란 없으니”라고 하였다.
아우 역시도 형을 죽이고 금을 다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제가 저마다 나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보는 눈짓이 달랐으므로 형과 아우는 이내 스스로 깨닫고서 도리어 뉘우치는 마음을 내어서 “우리들은 사람이 아니다. 금수와 무엇이 다른가! 형제로 태어났으면서 조그마한 금 때문에 악심을 일으키고 있다니”라고 하였다.
형제가 깊은 물가에 이르러 형이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리자 아우가 말하기를 “참으로 잘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아우도 이내 금을 물속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자 형도 말하기를 “참으로 잘했도다” 하였다.
그리고는 형제가 서로 “무엇 때문에 잘했다고 했는가?”라고 서로 묻게 되었고, 저마다 대답하기를 “나는 이 금 때문에 착하지 않은 마음을 내어 한 사람을 죽이려 했었는데 이제 그것을 다 버렸기에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으니, 두 사람의 말이 같았던 것이다.
以是故 知財爲惡心因緣 常應自捨! 何況施得大福而不施?
이러한 까닭으로 재물은 악한 마음의 인연이 됨을 아나니, 언제나 마땅히 스스로 버려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보시를 하면 큰 복을 얻게 되거늘 어찌 보시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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