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八念義第三十六之 餘卷二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6. 초품 중 팔념의 뜻을 풀이함② 5

 

問曰; 如佛告給孤獨居士, “世閒福田應供養者有二種, 若學人 若無學人, 學人十八 無學人有九" 今此中何以故但說八?

묻나니, 부처님께서 급고독(給孤獨, Anātapindika) 거사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면, 세간의 복전으로서 공양을 받을 만한 이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배울 것이 있는 학인(學人, 유학, śaikṣa)과

배울 것 없는 무학인(無學人, aśaikṣa, 무학)이라.

학인(學人)에게는 18계위가 있고, 배움을 마친 무학인(無學人)에게는 9계위가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여덟 가지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유학(有學, śaikṣa)=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상태로 아직 아라한과를 얻지 못한 사람을 가리킨다. 고인(苦忍)에서 아라한과에 이르기 직전의 3과(果) 4향(向)의 7종의 학인을 말한다.

무학(無學, aśaikṣa)= 아라한과에 도달한 자로써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성자의 경지.

 

答曰; 彼廣說故十八及九 今此略說故八, 彼二十七聖人 此八皆攝。

信行法行 或向須洹攝 或向斯含攝 或向阿那含攝, 家家 向斯含攝,

一種 向阿那含攝, 五種阿那含向阿羅漢攝,

信行法行入思惟道 名信解脫見得 是信解脫 見得 十五學人攝。九種福田 阿羅漢攝。

답하나니, 거기에서는 자세히 설명하여 18계위 및 9계위라 하였으나, 이제 여기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8계위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8계위와 9계위를 합한 27계위의 성인은 모두 여기의 8계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믿음의 신행(信行)과 가르침을 따르는 법행(法行)은 혹 향수다원(向須陀洹)에 포함되기도 하고

혹 향사다함(向斯陀含)에 포함되기도 하며 혹 향아나함(向阿那含)에 포합되기도 하나니,

가가(家家, Kulaṁkula, 일래과一來果인 사다함을 증득한 성인聖人)는 사다함를 향하는 행에 포함되고

일종(一種, Ekavīcika)은 아나함을 향하는 행에 포함되며,

5종의 아나함은 아라한을 향하는 행에 포함되는 것으로,

신행과 법행으로써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신해탈 통한 견득(見得, 사지四地 아비발치지阿鞞跋致地 수다원須陀洹)이라 하며,

이렇게 신해탈(信解脫)을 통하여 견도(見道, 견득見得)를 터득하게 되면 15계위의 배울 것 있는 학인(學人)에 포함되며

9종의 복전(福田)은 아라한에 포함되는 것이다.

 

復次 行者應念僧 僧是我趣涅槃之眞伴 一戒 一見 如是應歡喜 一心恭敬 順從無違。

我先伴種種衆惡 妻子奴婢人民等 是入三惡道伴, 今得聖人伴 安隱至涅槃。

佛如醫王 法如良藥 僧如瞻病人。我當淸淨持戒 正憶念 如佛所說法藥 我當順從。

僧是我斷諸結病中一因緣 所謂瞻病人 是故當念僧。

또 수행하는 이는 마땅히 승가(僧伽)를 염해야 하나니, 승가(僧伽)는 바로 나를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참된 반려이니, 하나의 계율과 하나의 바른 소견이라도 이와 같이 마땅히 기뻐하여 일심으로 공경하고 순종해서 어긋남이 없어야 하는 것이라.

나는 앞에서 갖가지의 악(惡)과 처자와 노비며 사람들을 반려로 삼고 있었으니, 이들은 3악도(三惡道)에 들게 하는 반려들이었지만, 이제는 성인(聖人)의 반려를 얻었으므로 편안하고 고요히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마치 의왕(醫王)과 같고 부처님의 법(가르침)은 마치 좋은 약과 같으며,

승가(僧伽)는 마치 병든 이를 돌보는 간병인과 같나니,

나는 마땅히 청정하게 계를 받아 지니고 억념(憶念)=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의 법약(法藥)대로 마땅히 순종하리라.

승가(僧伽)는 바로 나의 모든 번뇌에 묶인 결(結)의 병(病)을 끊어 줄 수 있는 하나의 인연이니, 이른바 병든 이를 돌보는 간병인과 같으므로 나는 마땅히 승가를 염해야 하리라 하여야 하며, 

復次 僧有無量戒禪定智慧等具足 其德不可測量。

또 승가(僧伽)에는 한량없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두루 갖춘 이들이 있으므로 그 덕은 측량할 수 없으니, 

 

如一富貴長者信樂僧 白僧執事, “我次第請僧於舍食"

日日次請 乃至沙彌 執事不聽沙彌受請。

어떤 부귀한 장자(長者)와 같은 이는 승가를 믿고 좋아했는데, 집사(執事)를 통하여 승가에게 알리기를, “저는 차례로 스님들을 청하여 저의 집에서 공양토록 하겠습니다”고 하고는,

날마다 차례로 청(請)하여 이윽고 사미(沙彌, śrāmaṇera)에까지 이르렀으나 집사가 사미들을 청하지 않았기에

사미(沙彌)= 산스크리트어 스라마네라(sramanera)의 음역으로서, 식자(息慈) · 근책남(勤策男) 등으로 번역되며, 사미니(沙彌尼)는 산스크리트어 스라마네리카(sramanerika)의 음역으로 근책녀(勤策女)라고 번역한다. 모두 출가하여 10계(十戒)를 지키고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될 때까지의 남녀 소승(小僧)을 가리킨다.
사미니의 경우, 18세에서 20세까지의 2년간, 특히 불음 · 불도(不盜) · 불살(不殺) · 불허광어 · 불음주(不飮酒) · 불비시식(不非時食)의 6법(六法)을 행하는 것을 식차마나(式叉摩那 · siksamana)라고 하며, 학법녀(學法女) · 학계녀(學戒女)로도 번역한다.- 위키

 

諸沙彌言, “以何意故不聽沙彌?”

答言, “以檀越不喜請年少故" 便說偈言;

사미들이 묻기를 “무슨 뜻이 있기에 사미들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단월(檀越, dānapati, 시주施主)이 젊은이 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고는 게송으로 말하였으니, 

 

鬚髮白如雪 齒落皮肉皺, 僂步形體羸 樂請如是輩。

鬚 수염 수, 모름지기 수. 髮 터럭 발, 皺 주름 추, 羸 여윌 리

수염과 머리가 눈과 같이 희고, 이는 빠지고 피부는 쭈그러지고

구부정하게 걸으며 형체가 파리한, 이와 같은 분들을 청하기 좋아하네.

 

諸沙彌等皆是大阿羅漢 如打師子頭 欻然從坐起而說偈言:

여러 사미들 모두는 큰 아라한들이었는데, 마치 사자(師子)의 머리를 때리는 것과 같은지라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檀越無智人 見形不取德, 捨是少年相 但取老瘦黑。

단월(시주)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겉 모습만 보고 덕(德)은 취하지 않기에

이러한 젊은이들의 모습은 저버리고, 늙어 야위고 검은 이들만 취하는구나.

 

上尊耆年相者 如佛說偈;

웃어른으로써 존경 받을 늙은이의 모습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으로 말씀하셨으니, 

 

所謂長老相 不必以年耆, 形瘦鬚髮白 空老內無德。

이른바 장로(長老)의 모습이란, 반드시 나이가 들어서 늙은 이도 아니요

야위고 수염과 머리칼이 희게 헛되이 늙은 그 속에는 덕이 없을 수 있으나,  

 

能捨罪福果 精進行梵行, 已離一切法 是名爲長老。

죄와 복의 과보를 능히 버리고, 정진하여 범행(梵行)을 수행하여

이미 일체법을 여읜 이러한 이를 장로(長老)라 한다네.

 

是時 諸沙彌復作是念, “我等不應坐觀 此檀越品量僧好惡" 卽復說偈;

이 때에 모든 사미들은 다시 생각하기를 “이 단월(시주)은 승가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고 있으니, 우리들은 앉아서 볼 수만 없구나.” 하며 다시 게송으로 말하기를, 

 

讚歎呵罵中 我等心雖一, 是人佛法 不應不誨。

찬탄하거나 헐뜯으며 꾸짖거나 간에, 우리들의 마음은 한결같지만

이 사람은 부처님의 법(가르침)을 훼손시키고 있으니, 가르치지 않으면 뉘우치지 않으리라.  

 

當疾到其舍 以法語之, 我等不度者 是則爲棄物。

마땅히 서둘러 그의 집으로 가서, 법으로써 그를 가르치리니

우리들이 그를 제도하지 않으면, 이야말로 중생들을 버리는 것이 되리라.

 

卽時諸沙彌ㅍ自變其身皆成老年 鬚髮白如雪 秀眉垂覆眼 皮皺如波浪 其脊曲如弓 兩手負杖行 次第而受請, 擧身皆振掉 行止不自安 譬如白楊樹 隨風而動搖。

즉시 모든 사미들은 스스로의 몸들을 변화하여 모두 늙은이가 되었으니,

수염과 머리칼은 눈과 같이 희고, 긴 눈썹은 드리워져 눈을 가렸으며, 주름살은 마치 물결과 같았으며, 등은 활과 같이 굽었으며,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가서 차례대로 청을 받았으니, 온몸을 모두 벌벌 떨면서 걷고 멈추는 것이 마치 사시나무가 바람따라 흔들리는 것과 같이 불안하였다. 

 

檀越見此輩 歡喜迎入坐, 坐已須臾頃 還復年少形。檀越驚怖言;

단월은 이들을 보고 기뻐하면서 반갑게 맞아들여 앉게 하였다.

그런데 앉자마자 도로 다시 젊은이의 몸으로 되돌아 가니, 

그 단월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如是耆老相 還變成少身 如服還年藥 是事何由然。

이렇게 나이 많은 늙은 모습이 도로 변하여 젊은 몸이 되셨으니, 

마치 젊어지는 약을 먹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까.

 

諸沙彌言, “汝莫生疑畏 我等非非人。汝欲平量僧 是事甚可傷!

모든 사미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사람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스님들을 헤아리려 저울질하시니, 이런 일이야말로 몹시 언짢은 일입니다.

 

我等相憐愍 故現如是化 汝當深識之 聖衆不可量 

우리들은 당신의 그러함을 가엾이 여기어 일부러 그렇게 변화했던 것이니, 당신은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아셔야 합니다”  

 

如說; 譬如以蚊嘴 猶可測海底, 一切天與人 無能量僧者。

마치 이런 말씀과 같으니,

비유하자면 모기의 부리로써 오히려 바다 밑을 측량할 수 있어도

온갖 하늘과 사람으로서, 승가(僧伽)를 헤아릴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僧以功德貴 猶不分別, 而汝以年歲 稱量諸大德。

승가는 그 공덕이 귀하여 오히려 분별할 수 없는 것이거늘,

당신은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써, 모든 대덕(大德)을 헤아렸습니다.

 

大小生於智 不在於老少。

대인(大人)과 소인(小人)은 지혜에서 나오는 것으로, 늙고 젊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有智懃精進 雖少而是老, 懈怠無智慧 雖老而是少。

지혜 있는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면, 비록 젊다 하여도 이는 늙은이요

게으르며 지혜가 없다면, 비록 늙었다 하여도 이는 젊은이입니다.

 

汝今平量僧 是則爲大失!如欲以一指測知大海底 爲智者之所笑!

“당신은 지금 승가를 헤아리고 있었으니, 곧 이야말로 커다란 실수입니다.

마치 한 손가락으로 큰 바다 밑을 측량하여 알고자 하는 것과 같았으니, 이는 지혜로운 이가 웃을 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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