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十七品義 第三十一卷第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5
問曰, 云何當知 一切有爲法無常?
묻나니, 어떻게 일체의 유위법이 응당 무상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까?
答曰, 我先已說 今當更答。是有爲法 一切屬因緣故 無常, 先無今有故 今有後無故 無常。
답하나니, 내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이거니와 이제 다시 대답하리라.
이 유위법(有爲法)은 일체가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며,
전에는 없었으나 지금은 있게 된 것이며,
지금은 있는 것이나 나중에 없어지는 것이기에 무상(無常)한 것이며,
復次 無常相 常隨逐有爲法故, 有爲法無有增損故, 一切有爲法相 侵剋故無常。
侵 침범할 침, 剋 이길 극,
또한 무상한 모습의 無常相(무상상)은 항상 유위법(有爲法)을 따르는 것이며,
유위법(有爲法)은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며,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서로를 침범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며,
復次 有爲法有二種 老常隨逐故, 一者將老 二者壞老。
또한 유위법(有爲法)에는 二種(이종)의 늙음이 항상 뒤따르나니,
첫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차 늙어 감이요,
둘째는 오온(五蘊)이 무르익어 무너져 감에 늙는 것이며,
有二種死 常隨逐故, 一者自死 二者他殺。以是故 知一切有爲法 皆無常。
二種(이종)의 죽음이 항상 뒤따르나니,
첫째는 스스로 죽는 것이요, 둘째는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
이러한 까닭에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한 것임을 알게 되느니라.
於有爲法中 心無常最易得。
如佛說, '凡夫人 或時知身無常 而不能知心無常。若凡夫言 身有常猶差 以心爲常是大惑. 何以故, 身住或十歲 二十歲, 是心日月時頃 須臾過去生 滅各異 念念不停 欲生異生 欲滅異滅。如幻事 實相不可得'
유위법(有爲法) 가운데서 마음의 무상(無常)함이 가장 알기 쉬우니,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범부들은 몸이 무상한 것임을 간혹 알기는 하나, 마음이 무상한 것은 알지 못하나니,
만약 어떤 범부가 ‘오히려 몸은 조금씩 달라지는 차이가 항상 있는 것이지만 마음은 항상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이는 크게 미혹된 것이니라.
왜냐하면 몸은 혹 10년이나 20년 동안 머무를 수 있지만,
이 마음은 달과 날 시간(時頃시경)과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몹시 짧은 시간인 須臾(수유)사이에 각각 달라지며,
생각 생각이 잠시를 멈추지 않으며, 欲(욕)으로 生(생)하는 것이나, 그로 인하여 生(생)한 것은 또한 다르며,
欲(욕)으로 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나, 그로 인하여 滅(멸)하는 것은 이미 다른 것이니,
마치 환술과 같아서 그 실상(實相)을 얻을 수 없다.' 고 하셨느니라.
如是無量因緣故 知心無常 是名心念處。
이와 같은 무량한 인연 때문에 마음이 무상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러함을 심념처(心念處)라 하는 것이니라.
行者思惟, '是心屬誰? 誰使是心?'
수행자는 사유(思惟)하기를 ‘이 마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며? 누가 이 마음을 부리는 것인가?’ 하나니,
觀已 不見有主, 一切法因緣和合故 不自在, 不自在故 無自性, 無自性故 無我。
若無我, 誰當使是心?
이렇게 관찰한다면, 그 마음을 주재하는 자가 있다고 보지 않으니,
일체법(一切法)은 인연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자재(自在)하지 못한 것이고,
자재하지 못하기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며,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라.
만약 무아(無我)이라면 누가 이 마음을 부리고 있는 것인가?
問曰, 應有我。何以故, 心能使身 亦應有我能使心。
譬如 國主使將 將使兵, 如是應有我使心 有心使身 爲受五欲樂故。
묻나니, 당연히 '나'가 있는 유아(有我)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능히 몸을 부리는 것이니, 응당 '나'가 있는 유아(有我)이므로 능히 마음을 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국왕이 장수를 부리고, 장수는 병사를 부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응당 '나'라는 주인이 있어 마음을 부리고, 마음은 몸을 부리며, 오욕을 통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復次 各各有我心故 知實有我。若但有身 心顚倒故 計我者,
何以故, 不他身中起我? 以是相故 知各各有我。
또한 제각각의 사람마다 '나'라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 실제로 '나'가 있는 것임을 아나니,
만약 단지 몸이 있을 뿐인데 마음이 전도되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남의 몸에 대하여서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제각각의 '나'가 있는 유아(有我)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答曰, 답하나니,
若心使身 有我使心 應更有使我者!
만약 마음이 몸을 부리고, '나'라는 것이 있어서 마음을 부리는 것이라면, 응당 그 '나'를 부리는 이가 다시 있어야 할 것이니라.
若更有使我者 是則無窮,
만약 그 '나'를 부리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끝없이 전개될 것이요
(몸을 부리는 내가 있고 다시 그 나를 부리는 나가 있다면, 바로 이 나를 부리는 제 삼의 나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끝없이 주재자로서의 나가 필요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又更有使我者 則有兩神。
또한 다시 '나'를 부리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두 개체의 정신이 있을 것이요,
若更無我 但我能使心 亦應但心能使身。
만약 재차의 '나'가 없는 것으로, 단지 '나'가 마음을 부리고 있을 뿐이라면 이러함 역시 마음만이 능히 몸을 부리는 것이며,
若汝以心屬神 除心則神無所知。
만약 그대가 마음이 정신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음을 없애버리면 정신은 아무것도 모를 것이며,
若無所知 云何能使心?
만약 아무것도 모른다면 어떻게 능히 마음을 부릴 수 있겠는가?
若神有知相 復何用心爲?
만약 정신에 앎의 모습= 知相(지상)이 있다면 (만약 정신이 아는 것을 모습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무엇을 위하고자 마음이 필요한 것인가?
以是故知 但心是識相故 自能使身 不待神也, 如火性能燒物 不假於人。
이러한 까닭에 오로지 마음만이 의식의 모습= 識相(식상)이어서 스스로 능히 몸을 부리는 것이요, 정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마치 불의 성질이란 능히 물건을 태우는 것일 뿐, (그 태움에 있어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 火雖有燒力 非人不用, 心雖有識相 非神不使。
묻나니, 불에는 비록 (사물을) 태우는 힘이 있기는 하나 사람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에 비록 의식의 모습= 識相(식상)이 있으나 정신이 아니면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答曰, 諸法有相故有 是神無相故無。汝雖欲以氣息出入 苦樂等爲神相 是事不然!
何以故, 出入息等是身相 受苦樂等是心相, 云何以身心爲神相?
답하나니, 제법(諸法)은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 하나, 이 정신은 모습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 하나니,
그대가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이나, 고통과 즐거움 등을 느끼는 것으로 정신의 모습이라 여기려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니라!
왜냐하면, 숨이 들고 나는 것 등은 몸의 모습= 身相(신상)이요,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마음의 모습= 心相(심상)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身相(신상)과 心相(심상) 모두를 정신의 모습이라 하는 것인가?
復次 或時火自能燒 不待於人。但以名故 名爲人燒。汝論墮負處。
何以故, 神則是人 不應以人喩人。
또한 때로는 불 자체가 스스로 일어나서 능히 태우니,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거늘
다만 이름붙여 말하기를 사람이 태운다고 하는 것이니, 그대의 논리는 틀린 것이니라.
왜냐하면 정신이 곧 사람이라 한다면, 사람으로 사람을 비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又復汝言, '各各有我心故 知實有我 若但有身心 顚倒故計我者 何以不他身中起我?'
汝於有我 無我未了 而問何以不他 身中起我?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저마다 각가 '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실제로 '나'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다만 몸과 마음이 있을 뿐이나 전도되어서 '나'라고 계교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인가?' 하였거늘,
그대는 유아(有我)와 무아(無我)의 이치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에 '어찌하여 남의 몸에 대하여서는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지 않는가?' 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自身他身 皆從我有 我亦不可得。若色相 若無色相 若常 無常 有邊 無邊 有去者 不去者 有知者 不知者 有作者 無作者 有自在者 不自在者, 如是等我相 皆不可得 如上 '我聞品'中說。
스스로의 몸이건 남의 몸이건 모두가 유아(有我)라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이니, '나'라는 것은 얻을래야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물질적 모습= 색온(色蘊)의 모습이거나 혹은 비물질적 모습= 색온(色蘊)이 없는 모습이거나,
항상 하거나 무상하거나, 끝이 있거나 없거나, 사라지는 것이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거나, 알 수 있는 것이거나 알 수 없는 것이거나, 짓는 자가 있는 것이거나 짓는 자가 없는 것이거나, 자재로운 것이거나 자재롭지 못한 것이거나,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에서 '나'라고 할 수 있는 모습= 我相(아상)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앞의 '아문품(我聞品)'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라.
如是等 種種因緣 觀諸法和合因緣生 無有實法有我 是名法念處。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제법이 인연의 화합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관하여,
'나'라는 것이 있다고 할만한 실법이 없음을 관찰하나니, 이러함을 법념처(法念處)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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