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三十七品義 第三十一卷第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1. 초품 중 삼십칠품(三十七品)의 뜻을 풀이함 4

 

得是身念處觀已 復思惟 衆生以何因緣故 貪著此身? 樂受故。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몸에 대하여 살펴보는 신념처(身念處)를 얻은 뒤에는 다시 사유하나니,

‘중생은 어떠한 인연으로  몸에 탐착하는 것인가? 이는  즐거움을 느끼는, 樂受(낙수)때문이라.

 

所以者何, 從內六情 外六塵和合故 生六種識。

六種識中 生三種受, 苦受 樂受 不苦不樂受。

왜냐하면 안의 6정(六情)과 밖의 6진(六塵)의 화합을 따르는 까닭에 6종(六種)의 스스로 헤아려 아는 식(識) 내고,

이 6식(六識) 가운데에서  가지의 느낌= 三受(삼수)을 내나니, 

이는  괴로운 느낌의 苦受(고수)ㆍ즐거운 느낌의 樂受(낙수)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不苦不樂受(불고불락수)이다.

 

是樂受 一切衆生所欲, 苦受 一切衆生所不欲, 不苦不樂受 不取不棄。如說;

이 樂受(낙수)는 일체 중생이 바라는 바이고, 苦受(고수)는 일체 중생이 바라지 않는 바이며, 不苦不樂受(불고불락수)는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이니, 설하는 바에 의하면, 

 

若作惡人及出家 諸天世人及蠕動, 一切十方五道中 無不好樂而惡苦。

狂惑顚倒無智故 不知涅槃常樂處。

만약 악을 짓는 악인이나 출가한 이나 하늘과 세간의 사람이나 벌레들에 이르기까지

일체 시방의 5도(五道) 가운데에서 모두가 즐거움을 좋아하고 괴로움을 싫어하지 않는 이 없으니,

미치도록 미혹되고 뒤바뀌고 어리석은 까닭에 열반의 항상한 즐거움 알지 못하는구나.

 

行者觀是樂受 以實知之 無有樂也 但有衆苦。何以故, 樂名實樂 無有顚倒。

一切世閒樂受 皆從顚倒生 無有實者。

수행자는 이 樂受(낙수)를 관찰하여 그것의 실체(실상)은 즐거움이 없으며, 오로지 온갖 고통이 있을 뿐임을 알게되나니,

왜냐하면 즐겁다고 느끼는 것이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뒤바뀌어 전도됨이 없어야 하거늘, 일체 세간에서의 樂受(낙수)는 모두 뒤바뀌어 전도된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진실됨이 없기 때문이며,

 

復次 是樂受 雖欲求樂 能得大苦。如說; 

또한 이 樂受(낙수)는 비록 즐거움을 누리고자 좋아하는 欲(욕)을 통하여 즐거움을 구할지라도 능히 큰 고통을 받기만 할 뿐이니, 마치 게송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니라.

 

若人入海遭惡風 海浪崛起如黑山, 若入大陣鬪戰中 經大險道惡山閒。

만약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폭풍을 만났다면, 파도가 솟구쳐 오름이 마치 흑산(黑山)과 같고,

만약 어떤 사람이 전쟁터에서 큰 싸움에 들어가면, 매우 험하고 거친 길을 지나는 것과 같으리라.

 

豪貴長者降屈身 親近小人爲色欲, 如是種種大苦事 皆爲著樂貪心故。

귀한 장자(長者)도 신분을 낮추어 소인들을 가까이함은 색욕 때문이니

이러한 갖가지의 큰 고통들은 모두가 쾌락에 집착하는 탐심 때문이네.

 

以是故 知樂受 能生種種苦。

이러한 까닭에 즐거운 느낌의 樂受(낙수)는 능히 갖가지 괴로움을 내는 것임을 알며, 

 

復次 雖佛說三種受 有樂受 樂少故名爲苦, 如一斗蜜 投之大河 則失氣味。

또한 부처님께서 세 가지의 느낌에서 비록 즐거운 느낌의 樂受(낙수)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즐거움이 적은 까닭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니, 마치 한 말= 一斗(일두)의 꿀을 강에 던져 넣으면 꿀의 단 맛과 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라.

 

問曰, 若世閒樂 顚倒因緣故苦 諸聖人 禪定生無漏樂 應是實樂。

何以故, 此樂不從 愚癡顚倒有故 此云何是苦?

묻나니, 만약 세간의 즐거움이란 것이 전도된 (생각의) 인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면

무루(無漏)의 즐거움을 내는 성인들의 선정은 마땅히 진실한 즐거움이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의 무루의 즐거움은 우치로 인하여 뒤바뀜(전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을 어떻게 괴로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答曰, 非是苦也! 雖佛說 無常卽是苦 爲有漏法故說苦。

何以故, 凡夫人 於有漏法中心著 以有漏法 無常失壞故生苦。

無漏法心不著故 雖無常, 不能生憂悲苦惱等故 不名爲苦 亦諸使不使故。

답하나니, 이는 괴로움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비록 무상한 것이 곧 괴로움이라 하셨지만, 유루(有漏)의 법인 까닭에 괴로운 고(苦)라 말씀하신 것이니,

왜냐하면 범부들은 유루(有漏)의 법(法)에 마음이 집착하기 때문이니, 

유루(有漏)의 법(法)은 무상하여 잃게 되고 무너지게 되는 까닭에 괴로운 고(苦)를 내거니와

무루(無漏)의 법(法)은 마음으로 집착할 수 없는 까닭에 비록 무상하더라도 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고뇌 등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고(苦)라 하지 않으며,

또한 모든 번뇌= 諸結使(제결사)가 부리지 못하기 때문이며, 

 

復次 若無漏樂是苦者 佛不別說道諦 苦諦攝故。

또한 만약 무루(無漏)의 즐거움을 괴로움이라 한다면, 부처님께서는 도제(道諦)를 분별하여 따로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니, 고제(苦諦)에 속하기 때문이니라.

 

問曰, 有二種樂, 有漏樂 無漏樂。有漏樂下賤弊惡 無漏樂上妙。

何以故, 於下賤樂中生著 上妙樂中 而不生著?

上妙樂中 生著應多 如金銀寶物 貪著應重 豈同草木?

묻나니, 二種(이종)의 즐거움이 있으니, 유루(有漏)의 즐거움과 무루(無漏)의 즐거움입니다.

유루(有漏)의 즐거움은 하천하고 추악하며, 무루(無漏)의 즐거움이란 높고 묘하게 빼어난 上妙(상묘)한 것인데

어찌하여 하천한 즐거움에는 집착을 내면서 上妙(상묘)한 즐거움에 대해서는 집착을 내지 않는 것입니까?

上妙(상묘)한 즐거움에 더욱 많은 집착을 내야 하나니,

마치 금ㆍ은 등의 보물이 귀중한 것이므로 마땅히 탐착하는 것과 같은 것이거늘, 어찌하여 초목과 같이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答曰, 無漏樂 上妙而智慧多, 智慧多故能離此著。有漏樂中愛等結使多 愛爲著本,

實智慧能離 以是故不著。

답하나니, 무루(無漏)의 즐거움은 높고 묘하며 지혜도 많으니, 지혜가 많으므로 능히 그러한 집착을 여읠 수 있으며,

유루(有漏)의 즐거움에는 애욕 등의 번뇌= 結使(결사)가 많으니, 애욕은 집착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진실한 지혜로 능히 여읠 수 있는 것이므로 집착되지 않는 것이며, 

 

復次 無漏智慧常觀一切無常, 觀無常故 不生愛等諸結使。

譬如 羊近於虎 雖得好草美水 而不能肥, 如是諸聖人 雖受無漏樂 無常 空觀故 不生染著脂。

또한 무루의 지혜(無漏)로 항상 일체가 무상(無常)함을 관찰하나니,

무상(無常)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에 애욕 등의 모든 번뇌(결사)를 내지 않나니,

비유하자면 양이 호랑이 가까이에 있게 되면 비록 아무리 좋은 풀과 맛있는 물을 먹여도 살이 찌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 역시 비록 무루의 즐거움을 받으나 무상(無相)과 공(空)을  관찰하기 때문에 염착으로 살찌는= 染著脂(염착지)를 일으키지 않으며, 

 

復次 無漏樂 不離三三昧 十六聖行 常無衆生相, 若有衆生相 則生著心。

以是故 無漏樂 雖復上妙 而不生著。

또한 무루(無漏)의 즐거움은 세 가지의 삼매= 三三昧(삼삼매)와 열여섯 가지 행상(行相)으로 사성제(四聖諦)를 관찰하는= 十六聖行(십육성행, ṣodaṡa-ākāra. 16행상行相)을 여의지 않으며,

항상 중생상(衆生相)을 내지 않으니, 만약 중생상이 있다면 곧 집착하는 마음을 낼 것이라.

이러한 까닭에 비록 무루의 가장 묘한 즐거움에 덮여 있을지라도 집착하고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如是種種因緣 觀世閒樂受是苦 觀苦受如箭 不苦不樂受 觀無常壞敗相,

如是則樂受中 不生欲著 苦受中不生恚 不苦不樂受中 不生愚癡。是名受念處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세간의 즐거운 느낌= 樂受(낙수)를 괴롭다고 관찰하고,

괴로운 느낌= 苦受(고수)는 화살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不苦不樂受(불고불락수)는 무상하여 무너지는 모습이라고 관찰하나니, 

이와 같이 樂受(낙수)에 대하여 욕심내어 집착을 내지 않고,

苦受(고수)에 대하여는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不苦不樂受(불고불락수)에 대하여는 우치를 일으키지 않게 되나니,

이러함을 일컬어 수념처(受念處)라고 하는 것이니라.

 

行者思惟, 以樂故貪身 誰受是樂? 思惟已 知從心受 衆生心狂顚倒故 而受此樂。

수행자는 사유(思惟)하기를 ‘즐거움(쾌락) 때문에 몸을 탐내는 것이라, 누가 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인가’ 하니,

이렇게 사유하고는 마음을 따라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나니,

중생들의 마음은 미친 것처럼 뒤바뀌어 전도된 까닭에 이러한 즐거움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라.

 

當觀是心 無常生滅相 一念不住 無可受樂, 人以顚倒故 謂得受樂。

마땅히  마음은 무상하게 생멸(生滅)하는 모습이어서, 잠시도 머물지 않는 것이니, 즐거움을 느끼는 자가 없다고 관찰해야 하나니, 

사람들은 뒤바뀐 顚倒(전도)된 까닭에 즐거움을 얻고자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何以故? 初欲受樂時心生異 樂生時心異 各各不相及 云何言心受樂?

過去心已滅故 不受樂, 未來心不生故 不受樂, 現在心一念住疾故 不覺受樂。

왜냐하면 처음에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때의 마음이 다르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을 때의 마음이 달라서 서로 각각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니, 어떻게 마음이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마음= 過去心(과거심)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미래의 마음= 未來心(미래심)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며,

현재의 마음= 現在心(현재심)은 잠깐 머물렀다가 바로 사라지는 것이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의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問曰, 過去 未來不應受樂 現在心一念住時應受樂, 云何言'不受'??

묻나니, 과거와 미래는 당연히 즐거움을 느낄 수 없겠지만, 현재의 마음이 잠시 머무를 때에는 당연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느끼지 않는, 不受(불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我已說 去疾故 不覺受樂。

답하나니, 내가 이미 말하기를 '급히 지나가기에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느니라.

 

復次 諸法無常相故 無住時, 若心一念住 第二念時亦應住 是爲常住 無有滅相。

如佛說, '一切有爲法三相' 住中亦有滅相 若無滅者 不應是有爲相。

또한 제법은 덧없는 모습= 無常相(무상상)이기 때문에 머무를 겨를이 없으니,

만약 마음 속의 한 생각을 실마리삼아 잠깐 머무를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두 번째의 생각 역시도 마땅히 머무를 수 있어야 할것이라.

그러하다면 항상 머무는 것이니 멸하여 사라지는 모습이란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일체 유위법(有爲法)은 머무는 순간에도 없어지는 모습이 담겨있는 생주멸(生住滅)의 세 가지 모습= 三相(삼상)이다' 고 하신 바와 같으니,

만약 멸하여 사라짐이 없다면 생주멸(生住滅)이라는 유위(有爲)의 법이라 할 수 없으며,

 

復次 若法後有滅 當知初已有滅。

譬如人著新衣 初著日若不故 第二日亦不應故 如是乃至十歲 應常新不應故 而實已故。

當知與新俱有 微故不覺, 故事已成 方乃覺知。

以是故 知諸法無有住時 云何心住 時得受樂? 若無住而受樂 是事不然!

또한 만약 어떤 법이 나중에 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이미 그 멸함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라.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새 옷을 입은 것과 같으니, 처음 입은 날은 오래지 않아 새 옷과 같고 둘째 날도 응당 아직  헐지 않았으나, 이와 같이 하여 십 년이 된다면 마땅히 항상 새 옷과 같아야 할 것이나 그렇지 않은 까닭은 실로 이미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새 것일 때에는 미세하게 헌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헌 것이 드러난 뒤 (헐어진 뒤에야) 비로소 깨닫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법은 그 어디에서도 한 순간도 머물지 않음을 알게 되나니 어찌 마음이 머무를 때에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가?

만약 머무름이 없음에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옳지 못한 것이니라.

 

以是故 知無有實受樂者, 但世俗法 以諸心相續故 謂爲一相受樂。

그러므로 알아야 하나니, 실제로 즐거움을 누리는 자가 있을 수 없건만, (즐거움을 누림이 없는 것이거니와) 세속의 법에 따라 온갖 마음으로 상속하기 때문에 (생각이 이어지는 까닭에) 한 모습= 一相(일상)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이르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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