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禪波羅蜜 第十七 第二十八卷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28. 초품 중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풀이함 11
非有想非無想處淨 次第生六心, 自地二 下地四。諸淨地亦如是 又皆益自地味。
初禪味 次第二種, 味 淨。乃至 非想非非想處味 亦如是。
비유상비무상처의 청정=淨(정)이 차례로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내나니, 스스로의 지위에서 둘이요, 그 아래 지위에서 넷이며, 다른 모든 청정한 지위=淨地(정지)에서도 역시 이와 같으며,
또한 모든 스스로의 지위에서의 맛=自地味(자지미)와 초선의 맛=初禪味(초선미)를 더하나니, 차례에 따른 두 가지란 味(미)와 淨(정)이며, 비상비비상처의 맛에 이르기까지도 그와 같으며,
淨 無漏禪 一切處緣。味禪緣自地中味 亦緣淨愛, 無無漏緣故 不緣無漏。
淨(정)의 무루의 선정은 일체에 반연하고, 미선(味禪)은 스스로의 지위의 맛을 반연하는 것이며, 또한 淨(정)도 반연하나,
사랑함=愛(애)는 무루의 반연이 없으므로 무루를 반연하지 않으며,
淨 無漏根本 無色定 不緣下地有漏。
淨(정)은 무루의 근본이기 때문에 형상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선정(禪定)인 무색정(無色定)은 아래 지위의 유루를 반연하지 않으며,
名因 增上緣, 通一切。
잠시 붙여인 이름의 명인(名因)과 간접적으로 돕는 일체의 연= 增上緣(증상연)은 일체에 통하며,
四無量心 三背捨 八勝處 八一切處 皆緣欲界。
4무량심(四無量心)ㆍ팔배사 중의 3배사(三背捨)ㆍ8해탈(解脫)을 닦은 뒤의 숙달된 관상법(觀想法)으로 자유롭게 정ㆍ부정의 경지를 관찰하는 8승처(八勝處)ㆍ청황적백의 색깔과 물질의 네 가지 특성인 지수화풍의 8일체처(八一切處)는 모두 욕계(欲界)를 반연하는 것이며,
五神通緣欲 色界, 餘各隨所緣。滅受想定無所緣。
5신통(五神通)은 욕계와 색계를 반연하고, 그 나머지는 제각각 대상으로 삼은 바, 스스로의 경지를 반연하며, 마음을 멸하여 무심의 상태인 멸수상정(滅受想定, 멸진정 또는 상수멸정)은 반연하는 곳이 없으며,
一切四禪中有練法 以無漏練有漏故 得四禪心自在。能以無漏第四禪 練有漏第四禪 然後第三 第二 第一禪 皆以自地 無漏練自地有漏。
일체의 4선(四禪)에는 수행하는 법=練法(연법)이 있나니, 무루로써 유루를 연마하기 때문이며,
4선을 얻어 마음이 자재한 이는 능히 무루의 제4선으로 유루의 제4선을 연마한 뒤에 차례로 제3선, 제2선, 제1선에서도 모두 자기 지위의 무루로써 자기 지위의 유루를 연마하느니라.
問曰, 何以名 '練禪'?
묻나니, 어찌하여 선을 수행하는 練禪(연선)이라 하는 것입니까?
答曰, 諸聖人樂無漏定 不樂有漏, 離欲時 淨有漏不樂而自得, 今欲除其滓穢故 以無漏練之。譬如煉金去其穢 無漏練有漏亦復如是, 從無漏禪起入淨禪 如是數數 是名爲 '練'。滓 찌끼 재
답하나니, 모든 성인들은 무루의 선정을 좋아하고 유루는 좋아하지 않으니, 욕망(오욕)을 여의게 되면 유루가 청정하여지고 좋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게 되는 것으로, 이제 그 찌꺼기(잡티)를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무루로써 유루를 연마(수련)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금을 연마하여 그 찌꺼기를 버리는 것과 같이, 무루로써 유루를 연마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무루선으로부터 일어나서 깨끗한 선으로 들어가나니, 이렇게 자주자주=數數(삭삭) 거듭하는 것을 연선(練禪)이라 하느니라.
復次 諸禪中有頂禪 何以故名 '頂'? 有二種阿羅漢, 壞法 不壞法。
不壞法 阿羅漢 於一切深禪定 得自在 能起頂禪。得是頂禪 能轉壽爲富 轉富爲壽。
또한 모든 선 가운데는 정선(頂禪, 초월삼매超越三昧)가 있으니, 왜 정(頂)이라 하는 것인가? 정(頂)에는 두 종류의 아라한이 있으니, 곧 괴법(壞法)과 불괴법(不壞法)이니,
불괴법(不壞法)의 아라한은 일체의 깊은 선정에서 자재를 얻어서 능히 정선(頂禪)을 일으키나니, 이 정선(頂禪)을 얻으면 능히 목숨=壽(수)를 부(富)로 바꾸고, 부(富)를 수(수)로 바꿀 수 있으며,
괴법(壞法)이란 ‘백골을 태워 없애는 것’을 말하며, 불괴법(不壞法)이란 ‘백골을 태워 없앨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부정관을 성취한 수행자는 그 근기에 따라 두 종류가 있다. 곧 근기가 약한 자는 백골관을 성취해 아라한이 됐어도 다시 백골(白骨)에 집착할까 두려워하여 백골인(白骨人)을 태우는 관상법을 일으키는데, 이를 괴법아라한 이라 한다. 한편, 근기가 수승한 이는 백골인을 태워 부수지 않고 자신의 미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관상하는데, 이를 불괴법아라한이라 한다.
復有願智 四辯 無諍三昧。願智者 願欲知三世事 隨所願則知。
此願智二處攝, 欲界 第四禪。
四辯者 法辯 辭辯 二處攝, 欲界 初禪, 餘二辯 九地攝, 欲界 四禪 四無色定。
無諍三昧者 令他心不起諍 五處攝, 欲界及四禪。
또한 원지(願智), 4변(四辯, 사무애변四無礙辯), 무쟁삼매(無諍三味)가 있으니,
'원지(願智)'라 함은 3세의 일을 알기를 원하여, 그 원하는 바에 따라 알게 되는 것으로,
이 원지(願智)는 두 곳에 속하게 되나니, 욕계(欲界)와 제4선(四禪)이라.
'4변(四辯, 사무애변四無礙辯)'이라 하는 것은 일체법의 깊은 뜻을 잘 설하는= 法辯(법변, 법무애해法無礙解)과 그러한 뜻을 잘 설하는=辭辯(사변, 사무애해辭無礙解)은 두 곳에 속하니 욕계와 초선이요, 나머지 의변(義辯)과 응변(應辯)의 두 변(辯)은 9지(九地, 선혜지善彗地)에 속하니 욕계 4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이며,
'무쟁삼매(無諍三味)'라 함은 다른 이의 마음에 다툼이 일지 않게 하는 것으로서 다섯 곳에 속하나니, 욕계와 4선이니라.
問曰, 得諸禪 更有餘法耶?
묻나니, 모든 선정을 얻고서도 다시 얻어야 할 다른 법이 있습니까?
答曰 味定生亦得 退亦得。淨禪生時得 離欲時得。無漏離欲時得 退時得。
답하나니, 선정의 맛=味定(미정)이 생길 때에도 얻게 되고, 또한 물러날 때에도 얻게 되나니, 선(禪)을 통하여 청정한 선정이 생길 때에 얻고, 욕망(오욕)을 여읠 때에 얻으며, 무루(無漏)로 욕망(오욕)을 여읠 때에도 얻고, 무루에서 물러날 때에 얻는 것이며,
九地無漏定, 四禪 三無色定 未到地 禪中閒 能斷結使。
아홉 경지=九次第定(구차제정)의 무루정(無漏定)과 사선(四禪)과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의 3무색정(三無色定)에서 아직 초지에 이르지 못한=未到地(미도지)인 사선(四禪)의 중간에서도 능히 번뇌=結使(결사)를 끊을 수 있느니라.
未到地 禪中閒 捨根相應。
아직 초지에 이르지 못한=未到地(미도지)와 사선의 중간에서 감관(육근)과 서로 응하는 경계(욕欲)를 버리게 되나니,
若人成就禪 下地變化心亦成就。如初禪成就
有二種變化心, 一者 初禪, 二者 欲界。二禪三種。三禪四種。四禪五種。
만약 어떤 사람이 선(禪)을 성취하게 되면 그 아래 지위(경지)의 변화심(變化心)도 역시 성취할 수 있으니, 이는 초선의 경우와 같으며,
두 가지 변화심(變化心)이 있으니, 첫째는 초선(初禪)이요, 둘째는 욕계(欲界)이며,
2선(二禪)에서는 세 종류의 변화심(變化心)ㆍ3선의 네 종류의 변화심(變化心)ㆍ4선의 다섯 종류의 변화심(變化心)이라.
이렇게 14변화심(十四變化心: 十四不相應法)을 말하였으며, 십사불상응법(十四不相應法)은 '구사론'에서 물(物)·심(心)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또한 법으로써 인정해야 할 불상응법(不相應法)의 14종류를 말하며, 득(得)·비득(非得)·동분(同分)·무상과(無想果)·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명근(命根)·생(生)·주(住)·이(異)·멸(滅)·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입니다.
若二禪 三禪 四禪中 欲聞見觸時 皆用梵世識 識滅時則止。
만약 이선(二禪)과 삼선(三禪) 사선(四禪)에서 듣고 보고 감촉하고자 할 때에는 모두 범중천(梵衆天) 범보천(梵輔天) 대범천(大梵天)의 梵世識(범세식)을 사용하나니, 의식이 멸할 때에는 그러함도 그치게 되는 것이다.
四無量意 五神通 八背捨 八勝處 十一切入 九次第定 九相 十想 三三昧 三解脫門 三無漏根 三十七品, 如是等 諸功德 皆禪波羅蜜中生 是中應廣說。
4무량의(無量意, 사무량심)ㆍ오신통(五神通)ㆍ8배사(八背捨)ㆍ8승처(八勝處)ㆍ10일체입(十一切入)ㆍ9차제정(九次第定)ㆍ9상(九相)ㆍ10상(十相)ㆍ공(空)삼매 무상(無相)삼매 무작(無作)삼매의 3삼매(三三味)ㆍ공해탈문(空解脫門)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의 3해탈문(三解脫門)ㆍ3무루근(三無漏根)ㆍ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의 이와 같은 공덕들은 모두가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통하여 생기나니, 마땅히 여기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니라.
십상(十想) =1. 무상상(無常想) : 일체의 유위법은 무상하다는 생각.
2. 고상(苦想) : 일체의 유위법이 고(苦)라는 생각.
3. 무아상(無我想) : 일체의 현상과 작용 속에 “나”라는 실체(實體)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
4. 식부정상(食不淨想) : 세간의 음식은 다 부정한 인연으로 생긴 부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
5. 일체세간불가락상(一切世間不可樂想) : 일체 세간에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기는 생각.
6. 사상(死想) : 죽음의 모습을 살펴보는 생각.
7. 부정상(不淨想) : 육신(肉身)의 부정함을 생각.
8. 단상(斷想) : 열반을 얻고자 번뇌를 끊어내고자 하는 생각.
9. 이욕상(離欲想) : 열반을 얻고자 안팎의 미혹(迷惑)을 여의자는 생각.
10. 진상(盡想) : 열반을 얻고자 번뇌와 생사를 다하고자 하는 생각.- asky6973
3무루근(三無漏根)=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구경의 지혜의 기능(知根),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향림
問曰,應說禪波羅蜜 何以但說禪?
묻나니, 응당 선바라밀(禪波羅蜜)을 설명하셔야 하거늘 어찌하여 선(禪)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禪是波羅蜜之本。得是禪已 憐愍衆生 內心中 有種種禪定 妙樂而不知求 乃在外法不淨苦中求樂。如是觀已 生大悲心 立弘誓願, '我當令衆生 皆得禪定內樂 離不淨樂, 依此禪樂已 次令得佛道樂' 是時 禪定得名波羅蜜。
답하나니, 선(禪)이란 바라밀의 근본이 되나니, 이 선(禪)을 얻은 뒤에 연민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관찰하기를 '중생은 그 마음 속에 갖가지 선정의 묘한 즐거움이 있건만 구할 줄 모르고, 도리어 바깥의 법(육경)의 부정하고 괴로운 가운데에서 쾌락을 찾는구나' 하며,
이렇게 관찰하고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드넓은 서원= 弘誓願(홍서원)을 세우되 '나는 마땅히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선정의 내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고, 부정한 쾌락을 여의게 하며, 이어서 이러한 선정의 즐거움에 의지해서 불도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 하나니, 이때의 이러한 선정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復次 於此禪中不受味 不求報 不隨報生 爲調心故入禪, 以智慧方便 還生欲界 度脫一切衆生 是時禪名爲波羅蜜。
또한 이러한 선정의 맛을 받아들이지 않고 (빠져들지 않고) 그 갚음을 구하지 않으며, 과보를 따라 태어나지도 않고, 오직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까닭에 선(禪)에 들어가서 지혜의 방편으로 다시 욕계에 태어나 모든 중생을 제도하나니, 이때의 선(禪)을 (혜명(慧命)으로 된 법신으로 사는 것) 바라밀(波羅蜜)이라 하는 것이며,
復次 菩薩入深禪定 一切天人不能知 其心所依 所緣 見聞覺知 法中心不動。
如'毘摩羅鞊經'中 爲舍利弗 說宴坐法, '不依身 不依心 不依三界 於三界中 不得身心 是爲宴坐'
또한 보살이 깊은 선정(禪定)에 들면, 모든 하늘이나 인간이 그 마음이 의지하고 반연하는 대상을 알 수가 없으니, 보고 듣고 지각하는 법= 見聞覺知(견문각지) 가운데에서 마음이 요동하지 않개 때문이라.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 사리불에게 조용히 참선하는=宴坐(연좌) 법을 설명한 것과 같으니, '몸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 의지하지 않으며, 삼계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삼계 안에서 신심(身心)을 얻지 않으니, 이것이 연좌(宴坐)이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라.
復次 若人 聞禪定樂 勝於人天樂 便捨欲樂求禪定 是爲自求樂利 不足奇也。
菩薩則不然 但爲衆生 欲令慈悲心淨 不捨衆生。菩薩禪, 禪中皆發大悲心。
禪有極妙內樂 而衆生捨之而求外樂。譬如 大富盲人 多有伏藏 不知不見 而行乞求。
智者愍其 自有妙物 不能知見 而從他乞。
衆生亦如是 心中自有種種禪定樂 而不知發 反求外樂。
또한 어떤 사람이 선정의 쾌락이 인천(人天)의 쾌락보다 수승하다는 말을 듣고는 곧 욕망의 쾌락을 버리고 선정을 구한다면, 이는 스스로의 쾌락과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니 기특한 것이 못 되나,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다만 중생을 위한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의 선이라.
보살의 선(禪)이란, 선정 가운데에서 모두를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선(禪)에는 지극히 묘한 내적인 즐거움이 있건만 중생들은 이를 버리고서 밖의 쾌락을 구하는 것을 비유하자면 마치, 큰 부자인 소경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건만 그 있음을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구걸을 다니는 것과도 같으니,
지혜로운 이는 그가 묘한 물건(보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여 구걸 다니는 것을 가엾이 여기나니,
중생들도 그와 같아서 마음속에 원래부터 갖가지 선정(禪定)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밖의 쾌락을 구하느니라.
復次 菩薩 知諸法實相故 入禪中心安隱 不著味, 諸餘外道 雖入禪定 心不安隱 不知 諸法實故 著禪味。
또한 보살은 제법의 실상(實相)을 알기 때문에 선정에 들면 마음이 안온하여져서 선정(禪定)의 맛에 집착하지 않으나, 그 밖의 모든 외도들은 비록 선정에 들게 되어도 그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제법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선의 맛=禪味(선미)에 집착하게 되는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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