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禪波羅蜜 第十七 第二十八卷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28. 초품  선바라밀(禪波羅蜜) 풀이함 12

 

問曰, 阿羅漢 辟支佛 俱不著味 何以不得 禪波羅蜜?

묻나니, 아라한과 벽지불도 모두 禪味(선미)에 집착하지 않거늘 어찌하여 선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答曰, 阿羅漢 辟支佛雖 不著味 無大悲心故 不名禪波羅蜜, 又復不能盡行諸禪。

菩薩盡行諸禪 麤細 大小 深淺 內緣 外緣 一切盡行。以是故 菩薩心中名禪波羅蜜 餘人但名禪。

답하나니, 아라한과 벽지불은 禪味(선미)에 집착되지는 않으나 중생에 대한 大悲心(대비심)이 없으므로 선바라밀이라 하지 못하며, 

또한 그들은 모든 선(禪)을 다 행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모든 선(禪)을 다 행하나니, 거칠음과 미세함= 麤細(추세), 큼과 작음= 大小(대소), 깊음과 얕음= 深淺(심천), 안의 대상= 內緣(내연)과 밖의 대상= 外緣(외연) 등 모두를 다 행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마음=心中(심중)은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 하거니와 그 밖의 다른 사람은 선(禪)이라고만 하며, 

 

復次 外道 聲聞 菩薩皆得禪定。而外道禪中 有三種患, 或味著, 或邪見, 或憍慢,

聲聞禪中 慈悲薄, 於諸法中 不以利智 貫達諸法實相 獨善其身 斷諸佛種,

菩薩禪中 無此事 欲集 一切諸佛法故 於諸禪中 不忘衆生 乃至昆虫 常加慈念。

또한 외도나 성문이나 보살 모두가 선정을 얻는다고 하지만 외도의 선에는  가지 우환=三種患(삼종환)이 있으니, 맛에 집착되거나, 삿된 소견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는 것이다.

성문의 선은 자비심이 얇아서 제법에 대하여, 날카로운 지혜로 제법의 실상을 꿰뚫어 통달하지 못하고, 홀로 스스로의 몸만을 좋게 하니 불종자를 끊게 되며,

보살의 선은 이러함이 없으니, 일체 부처님들의 법을 모으려는 까닭에 모든  가운데에서 중생을 잊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모든 昆虫(곤충)에 이르기까지 항상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나니, 

 

如釋迦文尼佛 本爲螺髻仙人 名闍利。常行第四禪 出入息斷 在一樹下坐 兀然不動。

鳥見如此 謂之爲木 卽於髻中生卵。是菩薩從禪覺 知頭上有鳥卵 卽自思惟,

'若我起動 鳥母必不復來, 鳥母不來 鳥卵必壞' 卽還入禪 至鳥子飛去 爾乃起。兀 우뚝할 올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생 중, 상투를 튼 선인=螺髻仙人(나계선인)이셨을 때 이름이 상사리(尙闍利, sancharya)였나니, 항상 제4선을 행하여 들고나는 호흡을 끊고, 어느 나무 밑에 앉으셔서 우뚝히 움직이지 않으니, 새들이 이를 보고는 나무로 여겨 곧 상투 가운데 알을 낳았으니, 이 보살이 선정에서 깨어나 머리에 새알이 있음을 알고는 즉시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일어나서 움직이면 반드시 어미 새가 오지 않을 것이요, 어미 새가 오지 않으면 알속의 새는 죽게 되리라.’ 하고는 곧 다시 선에 들어갔으니, 그로부터 알이 부화하고 자라나 날아가게 되자 선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으며, 

 

復次 除菩薩 餘人欲界心 不得次第入禪。菩薩 行禪波羅蜜 於欲界心 次第入禪。

何以故, 菩薩世世 修諸功德 結使心薄 心柔軟故。

또한 보살을 제외한 그 밖의 다른 사람은 욕계의 마음이기에 차례에 맞추어 선정(禪定)에 들지 못하나, 보살은 선바라밀을 행하여 욕계의 마음으로도 차례차례 선정(禪定)에 들어가나니, 

왜냐하면 보살은 세세에 모든 공덕을 닦아 결사(번뇌)의 마음이 얇아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며, 

 

復次 餘人 得摠相智慧能離欲 如無常觀 苦觀 不淨觀, 菩薩於一切法中 能別相 分別離欲。

또한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무상관(無常觀)ㆍ고관(苦觀)ㆍ부정관(不淨觀)을 통하여 총상(摠相)의 지혜를 얻어서 능히 욕망을 여의었지만, 보살은 일체법(一切法) 가운데에서 능히 별상(別相)을 분별하여 욕망을 여의었나니,

 

육상원융(六相圓融)= 화엄의 3조 현수법장 스님은 화엄 법계의 연기하는 모습을 육상원융으로 설명하셨다. 육상은 서로 대립하는 세 쌍의 모습이고, 원융은 원만하게 서로 융통함을 의미하며,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모든 존재가 여섯 가지 모습, 즉 육상(六相)을 갖추고 있는데, 모든 존재 전체와 각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또한 각 부분과 각 부분도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교의이다. 이 세 쌍은 총상(總相)과 별상(別相), 동상(同相)과 이상(異相),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이다. 법장의 비유로는;  
집이 총상이고 서까래가 별상이다. 서까래, 기둥, 대들보, 기와 등 여러 가지의 별상이 있어야 집이라는 총상이 된다. 별상이 있어야 총상이 가능하므로 총상은 별상에 의지한다. 그런데 집을 이루는 서까래는 원래 나무토막이다. 이 나무토막이 서까래가 되는 것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집의 모든 것이 나무토막에 들어오면서 그 나무토막은 서까래가 된다. 집이라는 총상이 있어야 서까래, 기둥, 대들보, 기와 등 여러 가지의 별상이 가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총상이 있어야 별상이 가능하므로, 별상은 총상에 의지한다. 서까래가 집의 모든 것을 다 갖추어 원만하고 다른 모든 것과 융통하여 집을 이루므로, 원만 융통의 원융이 성립한다. 전체와 부분이 대립하지 않고 원융하면서 서로 의지한다. 기둥과 대들보와 기와와 집도 모두 그렇다.
서까래와 기둥과 대들보와 기와는 서로 다르므로 이상(異相)이다. 이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긋나지 않게 가지런히 인연을 맺어 집이라는 하나의 과(果)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으므로 동상(同相)이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화합해야 집을 이룰 수 있다. 동상(同相)이려면 이상(異相)이어야 한다. 서로 다르지만 이루는 집은 하나이므로, 이상(異相)이지만 동상(同相)이다. 이루는 집은 하나지만 서로 다르므로, 동상(同相)이지만 이상(異相)이다. 같음과 다름이 대립하지 않으면서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이 원융한다.
집이 이루어지므로 성상(成相)이다. 집을 이루지만 서까래는 서까래로 남아 있고 대들보는 대들보로 남아 있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집이 이루어진다. 집을 이루면서도 끌려가지 않고 자신을 지키므로 괴상(壞相)이라고 한다. 집을 이루지만 자신을 지키므로, 성상(成相)이지만 괴상(壞相)이다. 자신을 지키지만 집을 이루므로, 괴상(壞相)이지만 성상(成相)이다. 전체를 이루어냄과 자기 자신을 지켜냄이 서로 대립하지 않으면서 성상(成相)과 괴상(壞相)이 원융한다.-월간고경의 [과학과 불교]육상원융六相圓融하는 대립 이전의 무아無我

 

如五百仙人 飛行時 聞甄羅女歌聲 心著狂醉 皆失神足 一時墮地。

마치 5백 명의 선인들이 날아가다가 견타라(甄陀羅, Kiṃnarā) 여인의 노랫소리를 듣고, 마음이 집착되고 심히 도취되어 모두가 신통을 잃고 일시에 땅에 떨어진 것과 같으며, 

 

如聲聞 聞緊羅王 屯崙摩彈琴歌聲 以諸法實相讚佛。是時 須彌山及 諸樹木皆動,

大迦葉等諸大弟子 皆於座上 不能自安。

또한 성문들이 긴나라왕인 돈륜마(屯崙摩, Druma) 거문고(또는 비파)를 타면서, 제법의 실상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 소리를 들었을 때, 수미산과 나무들이 모두 진동하였고, 마하가섭 존자를 비롯한 대제자들 모두도 자리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었.

 

天須菩薩問 大迦葉, '汝最耆年 行頭第一 今何故不能制心自安?'

大迦葉答曰, '我於人天諸欲 心不傾動 是菩薩無量功德報聲, 又復 以智慧變化作聲 所不能忍。若八方風起 不能令須彌山動, 劫盡時毘藍風至 吹須彌山令如腐草'

以是故 知菩薩 於一切法中 別相觀得離諸欲。諸餘人等 但得禪之名字 不得波羅蜜。

耆年기년= 예순 살이 넘은 나이

이에 천수보살(天須菩薩)이 마하가섭 존자에게 물었으니, '그대는 나이도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두타행도 으뜸이나니, 어찌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조절하여 편안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마하가섭 존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인간이나 하늘의 모든 욕망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나, 이 노래는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으로 내는 소리이며 또한 지혜에서 변화되어 나온 소리인 까닭에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여덟 방향에서 바람=八方風(팔방풍)이 불어도 수미산을 움직일 수는 없지만, 겁(却)이 다할 때 일어나는 비람풍(毘藍風, Vairambhaka, 비람바毘藍婆)이 불어오면 수미산은 마치 썩은 풀잎같이 흔들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알 수 있으니, 보살은 일체법(一切法)의 별상(別相)을 관찰하여 모든 욕망을 여의었지만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단지 선(禪)이란 이름만 얻었을 뿐 바라밀은 얻지 못한 것이다.

 

復次 餘人 知菩薩入出禪心 不能知住禪心 所緣所到 知諸法深淺。阿羅漢 辟支佛 不能知, 何況餘人?

또한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보살의 들고 나는 선의 마음=入出禪心(입출선심)은 알 수는 있지만, 선(禪)에 머무르는 마음이 반연하는 바와 그 이르는 곳과 제법(諸法) 깊고 얕음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도 알기 어렵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겠는가? 

 

譬如象王渡水 入時出時 足迹可見, 在水中時 不可得知。

若得初禪 同得初禪人能知 而不能知 菩薩入初禪。

이는 마치 큰 코끼리가 물을 건너고자 물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발자취는   있지만,  가운데 있을 때의 발자취는 알  없는 것과 같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초선(初禪)을 통하여 유각유관(有覺有觀)을 얻게 되었을 때, 함께 초선을 얻은 사람이라면 능히 이를   있겠지만, 보살의 초선에  경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며, 

 

有人得二禪 觀知得初禪心 了了知 不能知 菩薩入初禪心, 乃至 非有想非無想處亦如是。

어떤 사람이 유각유관(有覺有觀)을 터득한 마음으로 각관(覺觀)에 대해 살펴보는 2선(二禪)을 통하여 무각유관(無覺有觀)을 얻었다면 초선(初禪)의 마음을 관찰하여 분명하게 알 수는 있지만, 보살이 초선(初禪)에 든 마음은 알지 못하나니,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으니라.

 

구차제정(九次第定)=① 초선정(初禪定, 初禪天) → ②이선정(二禪定, 二禪天)→ ③삼선정(三禪定, 三禪天)→ ④사선정(四禪定, 四禪天)→ ⑤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⑥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⑦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⑧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⑨멸진정(滅盡定)에 드는 수행법(修行法)

 

復次 超越三昧中 從初禪起 入第三禪, 第三禪中起 入虛空處, 虛空處起入 無所有處。

二乘唯能超一 不能超二, 菩薩自在超 從初禪起, 或入三禪如常法, 或時入第四禪, 或入空處 識處 無所有處, 或非有想非無想處, 或入滅受想定,

또한 초월삼매(超越三昧, 정선頂禪 또는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통하여  초선(初禪)에서 일어나 (제이선을 뛰어넘어서) 제3선(第三禪)에 들어가고, 제3선(第三禪)에서 일어나서 (사선을 뛰어 넘어서) 허공처(虛空處,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 들어가고, 허공처에서 일어나서 (식무변처정·식처정識處定을 뛰어넘어서) 무소유처(無所有處,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들어갈 수 있으나, 

성문과 벽지불, 이승(二乘)은 오직 하나만을 뛰어넘을 수 있을 뿐, 두 단계의 선정을 뛰어넘지 못하나, 

보살은 자유롭게 뛰어넘어서 초선에서 일어나 3선에 들기를 예사롭게 할 수 있으며, 혹은 제4선(四禪)에 들기도 하고, 공처(空無邊處)ㆍ식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기도 하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들기도 하며, 혹은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기도 하며, 

 

허공처(虛空處,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공·무상(無常·無相)함이 끝없음을 관찰하여 머무는 고요한 마음, 물질적인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관념에 머무는 고요한 마음

무소유처(無所有處,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영원절대불변의  존재는 없음을 관찰하여 머무는 고요한 마음

 

滅受想定起 或入無所有處 或識處 空處 四禪乃至初禪, 或時超一 或時超二 乃至超九。

聲聞不能超二, 何以故, 智慧 功德 禪定力薄故。

멸수상정(滅受想定)에서 일어나 혹은 무소유처(無所有處) 혹은 식처(識無邊處식무변처)ㆍ공처(空無邊處공무변처)ㆍ4선(四禪)에 들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초선(初禪)으로 들어가기도 하나니, 때로는 하나를 뛰어넘기도 하고, 혹은 둘이나 , 나아가서는 아홉(구차제정九次第定)을 뛰어넘기도 하나, 성문은  지위를 뛰어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지혜ㆍ공덕ㆍ선정의 힘이 얇기 때문이니라.

 

譬如 二種師子, 一 黃師子, 二 白髮師子。黃師子 雖亦能超 不如白髮師子王。

如是等 種種因緣 分別禪波羅蜜。

비유하자면, 두 종류의 사자가 있으니, 곧 백사자와 황사자라. 황사자도 비록 잘 뛰어넘을 수 있지만 백사자에 미치지는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갖가지 인연에 의해 선바라밀(禪波羅蜜)을 분별할 수 있으며,

 

復次 爾時 菩薩常入禪定 攝心不動 不生覺觀 亦能爲 十方一切衆生 以無量音聲 說法而度脫之 是名禪波羅蜜。

또한, 이때 보살은 항상 선정(禪定)에 들어가서 마음을 거두어 들이어 움직이지 않으며, 각(覺)과 관(觀)의 거친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능히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무량한 음성으로 법을 설하여 주어 그들을 제도하나니, 이를 선바라밀(禪波羅蜜)이라 하느니라.

 

問曰, 如'經'中說, '先有覺觀思惟 然後能說法' 入禪定中 無語 覺觀 不應得說法, 汝今云何言 '常在禪定中 不生覺觀 而爲衆生說法'??

묻나니,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먼저 각관(覺觀)의 사유가 있어야 하며, 그 뒤에야 능히 법을 설한다' 하였으며, 선정(禪定) 가운데 있을 때에는 언어의 생각=覺觀(각관)이 없으니 설법도 하지 못할 것이거늘, 지금 그대는 어찌하여 '항상 선정(禪定) 가운데에 있으며, 각관(覺觀)을 일으키지 않으나,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生死人法 入禪定 先以語 覺觀 然後說法。

답하나니, 생사(生死)하는 사람의 법에 따르면, 선정(禪定)에 들어가, 먼저 말을 하기 전에 각관(覺觀)을 일으킨 뒤에 설법을 할 수 있으나, 

 

法身菩薩 離生死身 知一切諸法 常住 如禪定相 不見有亂, 法身菩薩 變化無量身 爲衆生說法 而菩薩心 無所分別。

如阿修羅琴 常自出聲 隨意而作 無人彈者, 此亦無散心 亦無攝心 是福德報生故 隨人意出聲。

그러나 법신 보살(法身菩薩)은 생사의 몸을 여의었으며, 일체법(一切法)이 항상함을 알아 한결같은 선정의 모습에 머물며, 산란한 마음으로 보지 않으니, 

법신 보살은 몸을 무량하게 변화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나, 보살의 그 마음에는 분별이 없음이, 마치 아수라의 거문고(비파)가 마음을 좇아 항상 스스 소리를 내어 울릴 뿐, 거문고를 타 이가 없으며, 또한 이 거문고의 소리는 마음을 산란하게 하거나 마음을 취하게 함도 없는 것이, 오로지 복덕의 댓가로 생겨난 까닭에 사람들의 마음(뜻)에 따라 소리를  뿐인 것과 같으니라. 

법신보살(法身菩薩)=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원융무애한 가르침을 증득한 보살로, 생사에 상즉(相卽)해서 실상(實相)의 도리를 이해한 '법화경'에서의 보살을 의미한다. 즉, 부처님의 뜻으로 색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와서, 중생들에게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불법을 가르쳐, 일불승인 '법화경'에 들게 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보살을 말한다. 흔히 수행을 거듭한 결과, 진여의 진상(眞相)을 일부분씩 계속해서 깨닫고 있는 보살, 혹은 법화(法華)의 깨달음을 얻은 보살을 말하는데, 십지(十地) 이상에 오른 보살을 말한다. - 아미산

 

法身菩薩 亦如是 無所分別 亦無散心 亦無說法相。

是無量福德 禪定 智慧因緣故 是法身菩薩 種種法音 隨應而出。

법신 보살도 그와 같아서 분별이 없고, 마음을 산란하게 함도 없고, 법을 설한다는 모습도 없으니, 이는 무량한 복덕과 선정ㆍ지혜의 인연 때문이며, 

이 법신 보살은 갖가지 법음(法音)을 중생의 뜻이 응함을 좇아 알맞게 표현해 내는 것이니라.

 

慳貪心多聞 說布施之聲, 破戒 瞋恚 懈怠 亂心 愚癡之人, 各各聞說持戒 忍辱 禪定 智慧之聲。

聞是法已 各各思惟 漸以三乘 而得度脫。

인색하고 탐욕이 많은 이는 주로 보시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으며, 계를 파한 이ㆍ성내고 노여워하는 이ㆍ게으른 이ㆍ산란한 이ㆍ어리석은 이 등은 제각가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의 말씀을 듣게 되나니, 

이러한 법의 음성=法音(법음)을 듣고는 제각각 사유하여, 점차 3승(三乘)에 들게 되어 해탈을 얻게 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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