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檀波羅蜜 法施之餘’ 卷第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20. 초품 중 단바라밀의 법시(法施)의 나머지를 풀이함② 6
問曰, 亦不必一切物 皆從因緣和合故有, 如微塵至細故無分, 無分故無和合。疊麤故可破 微塵中無分 云何可破?
묻나니, 일체의 존재=事物(사물)이 반드시 인연 화합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예를 들자면 미진(微塵)은 극히 미세하므로 나눌 수 없으며, 나눌 수 없기 때문에 화합할 것도 없으니,
원단은 거칠기 때문에 쪼갤 수 있지만, 미진은 나눌 수조차 없거늘 어떻게 쪼갤 수 있겠습니까?
答曰, 至微無實 强爲之名。何以故, 麤細相待 因麤故有細, 是細復應有細。
답하나니, 지극히 미세해서 실체가 없거늘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라.
왜냐하면, 거칠음과 미세함은 상대적인 것으로, 거친 것이 있음으로 인하여 미세함이 있거니와 이 미세함에는 다시 미세함이 있게 되는 것이다.
復次 若有極微色 則有十方分, 若有十方分 是不名爲極微, 若無十方分 則不名爲色。
또한, 만약 지극히 미세함=極微(극미, 極微塵 Paramāṇu 청淸, 정淨)에 모습=色(색)이 있다면 곧 시방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며,
시방으로 나눌 수 있다면 이를 극미(極微)라 부를 수 없는 것이며,
만약 시방의 요소가 없다면 볼 수 있는 모습의 물질=色(색)이라 부를 수 없으며,
復次 若有極微 則應有虛空分齊, 若有分者 則不名極微。
또한, 만약 지극히 미세함=極微(극미)가 있다면 곧 허공과의 경계가 있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하나,
그 경계를 分別(분별)할 수 있다면 極微(극미)라 할 수 없으며,
復次 若有極微 是中有 色香味觸 作分 色香味觸作分 是不名極微。
또한, 만약 極微(극미)가 있다면 거기에는 색(色) 향(香) 미(味) 촉(觸)의 경계가 있어야 하나,
색(色) 향(香) 미(味) 촉(觸)의 경계가 있다면 極微(극미)라 할 수 없으니,
以是推求 微塵則不可得。如經言, '色若麤若細 若內若外 摠而觀之 無常無我, 不言有微塵' 是名分破空。
이와 같이 추구하여 따져 보아도 微塵(미진)의 실체를 얻을 수 없나니,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물질은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통틀어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임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微塵(미진)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으니,
이를 공을 나누어 깨뜨리는=分破空(분파공)이라 하느니라.
復有觀空 是疊隨心有。如坐禪人 觀疊 或作地 或作水 或作火 或作風 或靑 或黃 或白 或赤 或都空 如十一切入觀。
또한, 공함을 관하는=空觀(공관, 중도관中道觀)으로는, 이 원단이 마음을 따라 생긴 것이라.
좌선하는 사람이 원단을 관하되 혹은 땅, 혹은 물, 혹은 불, 혹은 바람으로 관하고, 혹은 청색ㆍ황색ㆍ백색ㆍ적색이나 혹은 온통 빈 것으로 관하나니,
이렇게 十一切處(십일제처)에 들어가 관찰하는 것과 같으니라.
삼관(三觀)=공관(空觀) · 가관(假觀) · 중관(中觀)
공관(空觀)= 모든 현상과 만물은 공하여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보는 관하는 것으로, 공의 입장에서 현상계를 관찰하여 삼라만상의 실체는 공한 것이나 인연따라 잠깐 생긴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견사(見思)의 혹(惑)을 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견사의 혹이란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의 도리에 미혹되어 있는 견혹(見惑)과 사상(事象)에 미혹되어 있는 사혹(思惑)을 합한 것으로서, 이 두 가지가 중생 세계의 생사(生死)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
가관(假觀)= 모든 현상계의 만물은 본래 공한 것이라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상의 입장에서 보면 현상적으로 분명하게 있음을 관하는 것으로, 공관에 의하여 공(空)의 이치에 집착한 채 삼라만상이 가지고 있는 차별적인 모습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공관을 통하여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양상을 관찰하고 보살의 자비를 키워가는 것이다.
중도관(中道觀)= 또는 중관은 모든 법이 공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며, 공이면서 유요, 유이면서 공임을 관하는 중도적 입장의 관법으로서, 현상계를 진리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이 관법에 의하여 무명(無明)의 혹을 끊게 된다. 무명의 혹은 모든 것이 일법계(一法界)임을 알지 못하는 미세한 번뇌이며, 이 번뇌를 끊게 되면 해탈을 할 수 있게 된다.
십일체처(十一切處, kasinayatana) 新譯에서는十遍處(십변처)라 하며, 일체만유를 총합하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觀(관)하는 방법으로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공(空)·식(識)의 열 가지 중의 하나가 삼계에 가득 차 있다고 관하여, 차례로 차례로 관(觀)해가는 선정법이다.
如佛在耆闍崛山中 與比丘僧俱 入王舍城。道中見大水 佛於水上 敷尼師檀坐 告諸比丘, '若比丘入禪 心得自在 能令大水作地 卽成實地。
何以故, 是水中有地分故。如是 水火風金銀 種種寶物 卽皆成實。
何以故, 是水中 皆有其分'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영축산)에서 비구의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에 왕사성(王舍城)에 들어가시다가 길가에 있는 큰 물을 보시고는, 부처님께서 물 위에 니사단(尼師壇, niṣidana)을 펴시고 앉으셔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으니,
'만일 비구가 선정에 들어 자재(自在)를 얻으면 큰 물로 하여금 땅이 되게 하기도 하나니, 그 때에는 곧 실제의 땅이 되느니라.
왜냐하면 이 물속에는 땅의 요소(단단함과 막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마찬가지로 물ㆍ불ㆍ바람ㆍ금ㆍ은 등 갖가지 보물들도 모두 즉시에 실제로 이루어 지게 할 수 잇나니,
왜냐하면 이 물속에는 사대(四大)의 성분 모두가 담겨 있기 때문이니라' 하셨다
승복(僧服)은 스님들이 입는 옷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장삼(長衫)과 가사(袈裟)를 포함하며, 승의(僧衣) 또는 법의(法衣)라고도 한다. 가사(袈裟)란 장삼 위에 스님들이 입는 법의(法衣)를 말한다.
가사(袈裟)는 사람이 버린 헌옷이나 죽은 사람의 옷을 모아 염색하고 꿰매어 만든 옷, 분소의로 출발하였다. 이후 일반천으로 가사를 만드는 것도 허용되었으나, 천을 조각 조각 잘라서 다시 꿰메어서 할절의를 만들었다.
인도는 날씨가 더워 원래는 하의(下衣) 위에 직접 입는 옷이었으나, 중국과 한국, 일본 등에서는 추워서 가사만을 입을 수 없으므로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게 되었으니, 대부분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옆구리에 걸쳐 두른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의 옷이 화려함을 갖추는 것을 경계하며 5가지 색(청ㆍ적ㆍ황ㆍ흑ㆍ백)을 피하고 잡색인 괴색으로 만들어 사용하도록 하셨다.
옛 인도에서는 누더기 옷을 ‘가사야(Kasaya)’라고 불렀으며 이는 바르지 못한 색(不正色), 물들인 색(濁染色), 탁한 색(濁色), 괴색(壞色) 등으로 번역된다.
초기 교단에서 수행자들은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남들이 입다가 버린 옷, 죽은 사람의 옷, 낡은 옷 등의 천 조각을 모아 꿰매어 깨끗이 세탁해 ‘분소의(糞掃衣)’라는 남루한 누더기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인도에서는 이렇게 만든 옷이 곧 가사였던 것이 중국에 와서 기후와 풍습에 따라 가사인 편삼을 착용하였으며 한국에 와서는 가사에 장삼을 두르는 형태로 변천하게 된 것이다. - 참고 대한불교화엄종 약사사 등
復次 如一美色 婬人見之以爲淨妙 心生染著,
不淨觀人視之 種種惡露 無一淨處,
等婦見之 妒瞋憎惡 目不欲見 以爲不淨,
또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으니, 음탕한 사람=淫人(음인)이 보면 맑고 묘하다 하여 마음으로 염착을 일으키며,
不淨觀(부정관)을 닦는 사람이 보면 갖가지 악(惡, 더러움)이 드러나서 어느 한 곳도 깨끗지 않으며,
비슷한 부인들이 보면 질투와 미움으로 증오하고 눈을 흘기며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더럽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婬人觀之爲樂, 妒人觀之爲苦, 行人觀之得道, 無豫之人觀之 無所適莫 如見土木。
若此美色實淨 四種人觀 皆應見淨, 若實不淨 四種人觀 皆應不淨。
以是故 知好醜在心 外無定也。觀空亦如是。
음란한 사람이 보면 즐거워지고, 질투하는 사람이 보면 괴로워지고, 수행하는 사람이 보면 도를 얻게 되고, 관심 없는 사람이 보면 아무런 느낌도 없어서 마치 흙이나 초목같이 여기나니,
만약 이 예쁜 모습이 실로 깨끗한 것이라면 위의 네 종류의 사람이 다 깨끗하게 보아야 할 것이요,
만약 실제로 더러운 것이라면 네 종류의 사람이 다 더럽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좋고 나쁨=好醜(호추)는 마음 속에 있는 것으로 밖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음이라.
공을 관함도 역시 이와 같느니라.
復次 是疊中 有十八空相故 觀之便空 空故不可得。如是種種 因緣財物空 決定不可得。
또한 그 한 필의 원단에는 열여덟 가지 공한 모습=십팔공(十八空)이 있는 까닭에 그것을 관하는 즉시 공함을 알게 되며, 공한 까닭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재물이 있는 것으로, 재물은 공하여 결정코 그 실상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십팔공(十八空)=내공(內空)‧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자상공(自相空)ㆍ제법공(諸法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云何施人 不可得? 如疊 因緣和合故有 分分推之 疊不可得。
施者亦如是 四大圍虛空 名爲身 是身 識動作來往坐起 假名爲人。
分分求之 亦不可得。
어찌하여 보시하는 사람의 실상을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입니까?
마치 한 필의 원단이 인연 화합으로써 있게 된것이라. 그 부분부분을 분석하여도 원단의 실상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보시하는 사람도 그러하여 4대(四大)가 허공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몸이라 하며,
이 몸의 의식이 동작하고 왕래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것을 거짓 이름으로 사람이라 하거니와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 그 실상을 구하고자 하여도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復次 一切衆界入中 我不可得 我不可得故 施人不可得。
何以故, 我有種種名字, 人天男女 施人 受人 受苦人 受樂人 畜生等, 是但有名 而實法不可得。
또한 일체의 오온(五蘊)을 비롯한 18계(界)와 12입(入)에서 ‘나’의 실상을 얻을 수 없나니,
‘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보시하는 사람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나'에게는 갖가지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인간ㆍ하늘ㆍ남자ㆍ여자ㆍ베푸는 사람ㆍ받는 사람ㆍ괴로운 사람ㆍ즐거운 사람ㆍ축생 등으로, 이들은 단지 잠시 붙여진 이름으로 일체법의 그 어디에도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으므로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問曰, 若施者不可得 云何有菩薩行 檀波羅蜜?
묻나니, 만약 보시하는 이의 실상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보살의 단바라밀을 행함이 있습니까?
答曰, 因緣和合故 有名字, 如屋 如車 實法不可得。
답하나니, 인연 화합으로 이름이나 글이 있는 것이니, 마치 집이나 수레 등과 같아서 실다운 법은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問曰, 云何我不可得?
묻나니, 어찌하여 '나'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의 그 어디에도 실상(實相)이 없으므로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答曰, 如上 '我聞一時'中已說 今當更說。
佛說六識, 眼識及眼識相應法 共緣色 不緣屋舍 城郭種種諸名。
耳鼻舌身識 亦如是。意識及意識相應法 知眼 知色 知眼識 乃至 知意 知法 知意識。
답하나니, 앞에서 ‘我聞一時(아문일시)=어느 때 내가 들었다’를 풀이하면서 이미 설명하였거니와 이제 다시 설명하리라.
부처님께서 6식(六識)을 설명하셨으니,
'안식(眼識)과 안식에 서로 상응하는 법은 함께 색을 반연하나, 집이나 성곽 등 갖가지의 이름에 반연하지 않나니,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그리고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과 서로 상응하는 법(法)도 이와 같으니라.
뜻과 의식(意識) 그리고 의식(意識)에 서로 상응하는 법으로 눈은 색경(色境)에 대해 알게 되며, 눈으로 본 것을 안식(眼識)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며, 나아가 뜻을 알게 되고 법경(法境)에 대해 알게 된 것을 의식(意識)을 통해 아는 것이니라.
육정(六情)과 육진(六塵) 육식(六識)이 맞닿아 한데 어우러지는 “촉(觸)”에 대한 설명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是識所緣法 皆空無我 生滅故 不自在故。無爲法 中亦不計我 苦樂不受故。
是中若强有我法 應當有第七識識我, 而今不爾 以是故知無我。
이처럼 의식(意識)이 반연하는 법은 모두가 공하여 '나'가 없나니,
그것은 (인연화합에 의해)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스스로) 자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무위법(無爲法)에서는 '나'가 있다고 계교할 수 없나니,
괴로움과 즐거움의 (유위법)을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구태여 '나'라고 할 법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제7식(七識)이 있어서 '나'를 식별하여야 할 것이나, 지금 그렇지 않으므로 '나'라는 실상이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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