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 初品中 '檀波羅蜜義' 第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17. 초품 중 단바라밀(檀波羅蜜)의 뜻을 풀이함 1
▶經. 佛告舍利弗, '菩薩摩訶薩 以不住法 住般若波羅蜜中, 以無所捨法 具足檀波羅蜜, 施者 受者 及財物 不可得故'
▷經.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법에 머물지 않으나, 반야바라밀 가운데 머무르며, 버릴 바 없는 법으로써 단바라밀(보시바라밀)을 구족하니, 施者(시자)=베푸는 이와 受者(수자)= 받는 이와 施物(시물)=베푸는 물건 모두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삼륜청정(三輪淸淨)=施者(시자)=베푸는 이와 受者(수자)= 받는 이와 施物(시물)=베푸는 물건, 세가지에 집착하지 않는 것
▶論. 問曰:般若波羅蜜是何等法?
▷論. 묻나니, 반야바라밀이란 어떠한 (가르침의) 법입니까?
答曰, 有人言, 無漏慧根 是般若波羅蜜相。
何以故, 一切慧中 第一慧 是名般若波羅蜜, 無漏慧根是第一, 以是故 無漏慧根 名般若波羅蜜。
답하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루지혜=無漏慧(무루혜)의 뿌리가 반야바라밀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지혜 가운데 으뜸가는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무루지혜의 뿌리가 곧 으뜸이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無漏慧根(무루혜근)=무루지혜의 뿌리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고 하였다
問曰, 若菩薩未斷結, 云何得行 無漏慧?
묻나니, 만약 보살이 아직 번뇌=結(결)을 끊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무루의 지혜를 얻어 행할 수 있습니까?
答曰, 菩薩雖未斷結 行相似 無漏般若波羅蜜, 是故得名 行無漏般若波羅蜜。
譬如聲聞人 行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 先行相似無漏法, 後易得生苦法智忍。
답하나니, 보살이 비록 번뇌를 끊어 내지는 못하였으나, 행하는 모습=行相(행상)은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닮아 있으므로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라.
비유하자면, 성문의 사람이 난법(煖法, uṣma-gata)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의 사가행위(四加行位)를 행함에 있어서, 먼저 비슷한 무루의 법을 행하게 되면 나중에 고법지인(苦法智忍)이 생기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내범위(內凡位)라고 불리우는 사가행위四加行位는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관하는 것으로, 고제에 4가지, 집제에 4가지, 멸제에 4가지, 도제에 4가지로 각각 관하는 수행법이 있어서, 모두 16가지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4제 16행상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제四諦에 대한 지혜를 깊게 함으로써 이해의 깊고 낮음에 따라 난(暖)위, 정(頂)위, 인(忍)위, 세제일위(世間第一)의 4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지막 세제일위에 가서 4제를 16가지 행법으로 누차 관하고 있으면 세속지에 있어서의 최고의 깨달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최고이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1찰나적입니다. 이 1찰나가 지나고 나면 성인의 지혜로 들어가게 되고 견도위, 즉 道를 보는 성인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호거산 운문사
고법지인(苦法智忍, duḥkha-dharma-jñāna-kṣānti, duhkhe dharma-jñāna-ksāntih, tolerance of the dharma of suffering) 줄여서 고법인(苦法忍).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의 직전에 얻는 마음을 말하며,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특히 견도(見道)의 증득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견도는 4성제를 관찰하여 욕계의 견고소단(見苦所斷), 견혹(見惑) -고통이 일어나게 되는 현상과 작용을 보고 그 실마리를 잘라버리는- 계위로 이 이상의 계위에 이른 유정을 성자 또는 성인이라고 한다.즉, 부파불교의 수행계위인 성문의 4향4과에서는 수다원향(須陀洹向) 즉 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하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5위(五位)의 수행 계위에서는 제3위인 통달위(通達位)에 해당하고, 대승불교 일반의 52위(五十二位)의 보살 수행계위에서는 초지(初地), 즉 10지(十地) 가운데 첫 번째 계위, 즉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한다.
復有人言, 菩薩有二種, 有斷結使淸淨, 有未斷結使不淸淨。斷結使淸淨菩薩 能行 無漏般若波羅蜜。
또한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하기를, '보살에 두 부류가 있으니, 번뇌=結使(결사)를 끊어 청정해진 이와 아직 번뇌=結使(결사)를 끊지 못하여 청정하지 못한 이이라. 번뇌=結使(결사)를 끊어 청정해진 보살은 능히 무루의 반야바라밀을 행하게 된다.' 고 하였다
問曰, 若菩薩斷結淸淨, 復何以行 般若波羅蜜?
묻나니, 만일 보살이 번뇌=結使(결사)를 끊어 청정하다면 어찌하여 다시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答曰, 雖斷結使 十地未滿 未莊嚴佛土 未教化衆生, 是故行般若波羅蜜。
답하나니, 비록 번뇌=結使(결사)를 끊었으나 십지(十地)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아직 불국토를 장엄하지 못하였으며, 아직 중생을 교화하지 못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니라.
復次 斷結有二種, 一者 斷三毒 心不著 人天中五欲,
二者 雖不著人天中五欲 於菩薩功德 果報五欲 未能捨離 如是菩薩 應行般若波羅蜜。
또한, 번뇌=結使(결사)를 끊음에 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삼독(三毒)을 끊어 그 마음이 인간과 하늘의 5욕(欲)에 집착되지 않음이요,
둘째는 비록 인간이나 하늘의 오욕(五欲)에 집착하지는 않으나 보살의 공덕의 과보에 대한 오욕(五欲)을 아직 버리지 못함이니, 이러한 보살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譬如 長老阿泥盧豆 在林中坐禪時 淨愛天女等 以淨妙之身 來試阿泥盧豆。
阿泥盧豆言, '諸姊作靑色來 不用雜色'
欲觀不淨 不能得觀, 黃 赤 白色 亦復如是。
비유하자면, 장로 아니로두(阿泥盧豆, 아나율)께서 숲 속에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정애천녀(淨愛天女) 등이 맑고 묘한 몸으로 찾아와서는 아니로두를 시험하려 하였다.
이에 아니로두(아나율) 존자가 말씀하기를 '여러 누이들이여, 푸른색으로 오시라. 뒤섞인 빛은 필요 없느니라'고 하고는 부정(不淨)을 관하려 하였으나 관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황색ㆍ적색ㆍ백색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時 阿泥盧豆 閉目不視 語言, '諸姊遠去' 是時天女卽滅不現。
天福報形 猶尚如是, 何況菩薩 無量功德 果報五欲?
이에 아니로두(아나율) 존자는 눈을 감은 채 쳐다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여러 누이들아 멀리 물러가거라.'
이에 천녀들이 즉시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으니, 하늘 복덕의 과보로 나타난 형상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보살의 한량없는 공덕의 과보로 닦는 오욕(五欲)이겠는가?
又 如甄陁羅王 與八萬四千 甄陁羅來到佛所, 彈琴歌頌以供養佛。
爾時 須彌山王 及諸山樹木 人民 禽獸一切皆儛。
佛邊大衆 乃至大迦葉 皆於座上不能自安。禽 날짐승 금, 獸 짐승 수
또한 견다라(甄陀羅, 긴나라) 왕이 8만 4천의 견다라(긴나라)들과 함께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와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러 부처님께 공양하자,
그때 수미산왕과 산과 나무와 인간과 금수(禽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춤을 추었으며, 부처님 곁의 대중들과 마하가섭존자까지도 모두가 앉은 자리에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是時 天須菩薩 問長老大迦葉, '耆年舊宿 行十二頭陁法之第一, 何以在座 不能自安?'
大迦葉言, '三界五欲 不能動我, 是菩薩 神通功德果報力故 令我如是 非我有心 不能自安也。
譬如須彌山 四邊風起 不能令動, 至大劫盡時 毘藍風起 如吹爛草'
이때 천수(天須)보살이 마하가섭존자에게 묻기를,
'나이 많으신 구숙(舊宿)께서는 12두타(頭陀)의 법을 행하심에 으뜸이시거늘, 어찌하여 이 자리에서 스스로 안정을 찾지 못하십니까?'
마하가섭존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삼계의 오욕(五欲)이 나를 요동시킬 수 없지만, 지금 이러함은 보살의 신통한 공덕과 과보의 힘인 까닭에 나로 하여금 이러하게 하는 것일 뿐, 스스로의 마음이 안정치 못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수미산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움직지 않으나, 대겁이 다할 때에 크게 부는 비람풍(毘藍風, 수람풍, Vairambhaka)이 일어나면 마치 마른 풀이 바람에 날리듯 요동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以是事故知 二種結中 一種未斷, 如是菩薩等 應行般若波羅蜜。是阿毘曇中 如是說。
이런 일로 인하여 두 가지의 번뇌 가운데 한 가지를 아직 끊지 못하였다면, 이와 같은 보살들은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이라. 이는 아비담(阿毘曇, Abhidharma)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니라.
아비담(阿毘曇, Abhidharma)= 그 어의는 ‘법(dharma)에 관하여(abhi)’라는 의미로, 아비달마(阿毘達磨)ㆍ비담(毘曇)이라 음역하거나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 등으로 의역한다.
復有人言, 般若波羅蜜 是有漏慧。
何以故, 菩薩至道樹下 乃斷結, 先雖有大智慧 有無量功德 而諸煩惱未斷。
是故言 菩薩般若波羅蜜 是有漏智慧。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나니,
'반야바라밀은 유루(有漏)의 지혜이니, 왜냐하면 보살이 보리수=道樹(도수) 아래에 이르러서야 (구결九結)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다. 비록 큰 지혜와 무량한 공덕이 전에 있었으나 모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하였던 까닭으로 말하기를, '보살의 반야바라밀을 유루의 지혜라 한다.'고 하였다
구결(九結)= 애결(愛結) 에결(恚結) 만결(慢結) 치결(癡結) 의결(疑結) 견결(見結) 취결(取結) 간결(慳結) 질결(嫉結).
復有人言, 從初發意 乃至道樹下, 於其中閒 所有智慧 是名般若波羅蜜。
成佛時 是般若波羅蜜 轉名薩婆若。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처음 발심할 때부터 보리수하에 이르기까지의 그 중간 지혜를 반야바라밀이라 하고, 마지막 성불할 때의 반야바라밀은 다시 살바야(薩婆若, sarvaja)라 한다.' 하였으며,
復有人言, 菩薩有漏 無漏智慧 摠名般若波羅蜜。
何以故, 菩薩觀涅槃 行佛道 以是事故 菩薩智慧應是無漏,
以未斷結使 事未成辦故 應名有漏。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의 유루ㆍ무루의 지혜 모두를 합한 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나니, 왜냐하면 보살은 열반을 관찰하고 불도를 행하기 때문이다.
이러함으로 인하여 보살의 지혜는 응당 무루(無漏)일 것이지만,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여 불사(佛事)를 이룰 수 있는 방편의 힘이 아직 갖춰지지 않은 까닭에 유루(有漏)라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復有人言, 菩薩般若波羅蜜 無漏無爲 不可見無對。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무루(無漏)이고, 생주멸(生住滅) 없는 무위(無爲)이며, 볼 수 없는=不可見(불가견)이며 대할 수 없는=無對(무대)이다.'라고 하였으며,
復有人言, 是般若波羅蜜 不可得相 若有若無 若常若無常 若空若實。
是般若波羅蜜 非陰界入所攝 非有爲 非無爲 非法 非非法 無取無捨 不生不滅 出有無四句 適無所著。
譬如火焰 四邊不可觸 以燒手故, 般若波羅蜜相 亦如是不可觸 以邪見火燒故。
또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나니,
'이 반야바라밀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혹은 있는 듯, 혹은 없는 듯, 혹은 항상한 듯, 혹은 무상한 듯, 혹은 공한 듯, 혹은 실한 듯하다.
이 반야바라밀은 오음(陰, 오온五蘊)ㆍ계(界, 19계)ㆍ입(入, 12입)에 속하지 않는 것이며,
(생주멸(生住滅)이 펼쳐지는)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며,
(인연화합에 의해 펼쳐지게 되는 현상과 작용) 법(法)도 아니고 법 아닌=非非法(비비법)도 아니며,
無取(무취)=취할 수도 없고 無捨(무사)=버릴 수도 없으며,
不生(불생)=나지도 않고 不滅(불멸)=멸하지도 않는 것이나니,
곧 유무(有無)의 사구(四句)를 벗어나 실로 집착할 바가 없는 것이라.
비유하자면, 마치 화염(火焰)=불꽃과 같아서, 사방 어디에서도 손을 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손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의 모습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질 수 없으니, 삿된 소견의 불을 태우기 때문이다.'고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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