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初品中 住王舍城釋論 第五卷 第三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임 경량 엮음 참조
大智度共摩訶比丘僧釋論 第六
6. 초품 중 큰 비구승과 함께하시었다를 풀이함-5
▶經. 所作已辦(소작이판)
▷經. 할 일을 이미 다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所作을 하게 됨으로써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춤=已辦이 되었다.)
▶ 論. 問曰(문왈) 云何名所作(운하명소작)? 云何名已辦(운하명이판)?
▷論. 묻나니, 무엇을 (마땅히) 해야 할 일=所作(kṛtya)이라 하며, 무엇을 이미 다했다=已辨이라 하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所作”이라고 부르는 것이며,어찌하여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已辦”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答曰(답왈) 信 戒 捨 定等 諸善法得故(신 계 사 정등 제선법득고) 名爲所作(명위소작)
답하나니, 믿음의 완성=信(ṡraddhā)ㆍ계율을 통한 맑고 깨끗함의 완성=戒(śīla)ㆍ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의 완성=捨 (upekhā)ㆍ평등심의 완성=定(samādhi) 등 온갖 착한 법을 얻었기에 할 일이라 하고,
(올곧게 따르는 굳은 믿음의 완성, 계율을 통한 맑고 깨끗함의 완성, 번뇌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 )의 완성, 갈등(葛藤)과 호불호(好不好)에 대한 저울질 전혀 하지 않는 평등심의 완성을 위한 모든 훌륭하기 그지없는 참된 가르침(善法)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게 되는 까닭에 이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부르는 것이며,)
智慧 精進 解脫等(지혜 정진 해탈등) 諸善法得故(제선법득고) 是名已辦(시명이판)
지혜ㆍ정진ㆍ해탈 등 모든 착한 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 하나니,
(지혜와 정진 해탈에 의해 치우침 없는 참된 가르침(善法)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게 되는 까닭에 이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二法具足滿故(이법구족만고) 名'所作已辦'(명'소작이판')
두 가지 법(믿음과 지혜)이 구족하고 만족하기 때문에 할 일을 이미 다했다 하느니라.
(두 가지 참된 가르침(法)을 통해 일체중생을 화합할 수 있게 하는 믿음과 지혜가 두루 갖춰져 공덕이 넘쳐나는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復次 諸煩惱有二種(부차 제번뇌유이종) 一種屬愛(일종속애) 二種屬見(이종속견)
또한 모든 번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애욕에 속하는 번뇌요, 또한 하나는 견해에 속하는 번뇌이다.
(또한, 모든 번뇌에는 2종(種)이 있나니, 하나는 애욕(愛欲)과 번뇌가 동아리를 이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삿된 견해와 번뇌가 동아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屬愛煩惱斷故 名所作(속애번뇌단고 명소작)
애욕에 속하는 번뇌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할 일=所作이라 하고,
屬見煩惱斷故名已辦(속견번뇌단고 명이판)
견해에 속하는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미 다함=已辦이라 하느니라.
(삿된 견해와 번뇌가 동아리를 이루는 것을 끊어낸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復次(부차) 色法善見故 名所作(색선법견고 명소작)
또한 색법(rūpidharma)을 잘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할 일=所作이라 하고,
(또한, 색온(色蘊)의 현상과 작용(法)에 대해 “공(空)”함을 보아야 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無色法善見故 名已辦(무색선법견고 명이판)
무색법(arūpi-dharma)을 잘 보았기 때문에 이미 다하였음=已辦이라 하느니라.
(색온(色蘊)의 현상과 작용(法)에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견해를 지닌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可見 不可見 有對 無對等(가견 불가견 유대 무대등) 二法亦如是(이법역여시)
可見=볼 수 있는 것(sanidarśana)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不可見(,anidarśana), 마주할 수 있는 것=有對(sapratigha)와 마주할 수 없는 것=無對(apratigha) 등 두 가지 법(현상과 작용)도 이와 같으며,
유대(有對.apratigha)= 제법이 서로 대하는 관계를 말한다. 혹은 장소를 점한 채 물질적으로 장해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유대(有對)는 육정(六情)을 알아차리는 것 무대(無對)는 “어떠한 경우에도 갈애(渴愛)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
復次(부차) 不善 無記法斷故 名所作(불선 무기법단고 명소작)
善法思惟故 名已辦(선법사유고 명이판)
또한 불선 과 무기법 을 끊어야 하기에 할 일=所作이라 하고, 선법을 사유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已辦이라 하며,
(또한, 무의식(無記)속에 갈무리된 불선업(不善業)의 버릇과 무의식의 응어리를 끊어내야 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참된 가르침(善法)을 통해 바른 사유(思惟)를 할 수 있게 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무기법(無記法)=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상태
聞思慧成就故 名所作(문사혜성취고 명소작) 修慧成就故 名已辦(수혜성취고 명이판)
種種三法亦如是(종종삼법역여시)
또한 聞=듣고ㆍ思=사유하는 지혜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수의 지혜를 성취하였으므로 이미 다했다 하며,
갖가지 세 가지로 된 모든 법 역시 모두 이와 같다.
(듣고 사유(思惟)하는 바른 지혜를 통해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사유와 지혜를 통해 선정(禪定)의 마음이 바르게 분별하고 사유할 수 있게 되어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게 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이며, 여러 가지 교법(敎法) 행법(行法) 증법(證法)도 이와 같습니다.)
復次(부차) 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得故(난법 정법 인법 세간제일법득고)
名所作(명소작)
또한 난법(uṣmagata-dharma, 난위)ㆍ정법(mūrdhan-dharma, 정위)ㆍ인법(kṣāntiḥ-dharma, 인위)ㆍ세간제일법(laukikāgra-dharma, 세제일법위) 등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煖法 頂法 忍法 世閒第一法=열반으로 이르는 네 가지 길인 가행도(加行道)ㆍ무간도(無間道)ㆍ해탈도(解脫道)ㆍ승진도(勝進道)의 네 가지 도 가운데 가행도(加行道)에 이 네 가지 선근이 있다.
사가행위(四加行位)=사선근위(四善根位). 보살의 계위(階位)인 4위(四位)에 해당하는 5위(位)이며, 이 4위는 10회향의 지위가 원만하여, 다음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기 위하여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이며 또한 이를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하며, ① 난위(煖位), ② 정위(頂位), ③ 인위(忍位), ④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이들 사위(四位)는 다음 통달위(通達位)에 이르기 위하여 특히 애써 수행하는 단계입니다.
苦法忍等 諸無漏善根得故(고법인등 제무루선근득고) 名已辦(명이판)
고법인을 비롯한 무루의 선근들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고 하며,
(고법인(苦法忍)을 비롯한 고비인(苦比忍)과 집법인(集法忍) 집비인(集比忍)과 멸법인(滅法忍) 멸비인(滅比忍) 도법인(道法忍) 도비인(道比忍)을 통해 삿된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에 의한 모든 불선업이 다하여 배어나오지 않게 된 무루(無漏)에 의해 훌륭하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명백하게 이해하여(善根) 터득하게 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고법지인(苦法智忍) 즉 고법인(苦法忍)은 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특히 견도(見道)의 증득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견도는 4성제를 관찰하여 견혹(見惑)을 끊는 계위로 이 이상의 계위에 이른 유정을 성자 또는 성인이라고 한다. 즉, 부파불교의 수행계위인 성문의 4향4과에서는 수다원향(須陀洹向) 즉 예류향(預流向)에 해당하고,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5위(五位)의 수행 계위에서는 제3위인 통달위(通達位)에 해당하고, 대승불교 일반의 52위(五十二位)의 보살 수행계위에서는 초지(初地), 즉 10지(十地) 가운데 첫 번째 계위, 즉 환희지(歡喜地)에 해당한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여 그것에 대한 미혹을 끊고 확실하게 인정하는 지혜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 고제(苦諦)의 이치를 관(觀)하여 고법지(苦法智)를 얻으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인가결정(認可決定)하는 마음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관(觀)하여 생기는 무루심이다.
고법인(苦法忍)은 고제를 관찰해 얻는 지혜인 고법지(苦法智)의 직전(直前)에 얻는 마음이다.
고법인(苦法忍)은 욕계의 고제(苦諦)를 관(觀)하여 고법지(苦法智)를 득하기 전에 일어나는 무루의 법지(法智)의 인(忍), 즉 법지(法智)의 무간도지(無間道智)이다.
고법지인(苦法智忍) 즉 고법인(苦法忍)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제 사항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상 이것은 불교의 번뇌론 전반에 대한 이해에 해당한다.
고법지(苦法智)는 고지(苦智)와 법지(法智)가 합쳐진 낱말로, 욕계에서 고제를 아는 무루지를 말한다. '욕계에서 고제를 최초로 알게 된 것'을 달리 표현하여 '고법지를 증득했다'고 말한다.
'욕계에서 고제를 계속 알고 있는 상태'를 달리 표현하여 엄밀히는 '고법지를 증득한 상태'라고 말하고, 통상적인 표현으로 '욕계의 고제를 안다' 또는 '고법지를 증득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고법지(苦法智)는 일단 한 번 증득되면 다시는 상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계의 고제를 안다는 것 즉 고법지를 증득했다는 것은 수행자가 욕계에 있을 때 수행자의 마음에 고법지가 항상 현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고법지가 항상 현행한다는 것은 '고법지를 가리는 어떤 번뇌 또는 고법지의 반대가 되는 어떤 번뇌'는 결코 현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見諦道得故 名所作(견제도득고 명소작) 思惟道得故 名已辦(사유도득고 명이판)
또한 견제도를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사유도를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다고 하며,
(사지(四地)인 견제(見諦)의 도(道)를 통해 무생인(無生忍)을 터득할 수 있게 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사유(思惟)의 도(道)라는 수도(修道)를 통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成學道故 名所作(성학도고 명소작) 無學道得故 名已辦(무학도득고 명이판)
또한 유학도를 성취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무학도를 성취한 까닭에 이미 다했다고 하며,
(생사고해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참된 길(道)에서 제법(諸法)이 “공(空)”하여서 삼세에 걸쳐 치우치지 않는 것임을 배우게 되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하게 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생사고해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오직 하나뿐인 참된 길(道)에서 제법(諸法)과 그 실상(實相)이 “공(空)”하여서 삼세에 걸쳐 어느 것 하나 치우치지 않는 것임을 배우게 되어 일체법(一切法)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는 것이라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학(學) 무학(無學), 학도(學道) 무학도(無學道)는 성자들의 성위(聖位)의 체계(體系)에서 나오는 말이며 성위(聖位)= 성자(聖者)의 지위(地位)에는 유학도(有學道)와 무학도(無學道)가 있습니다.
1. 학(學) 혹은 유학도(有學道)=번뇌(煩惱)의 습기(習氣)를 다 못 끊어서, 수도(修道)가 더 필요(必要)한 단계(段階)입니다.
① 견도(見道, 須陀洹果, 預流果)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현관(現觀)하는 것이 견도(見道), 견성(見性)입니다.
범부(凡夫)의 경계(境界)를 떠나 생사의 그물(生死網)을 벗어나(出離), 초과(初果)에 머무니, 수다원(須陀洹)이요,
처음으로 성자(聖者)의 지위(地位)인 예류과(預流果)에 참여(參與)한다는 뜻입니다.
② 수도(修道, 斯陀含果, 一來果)는 욕계(欲界) 번뇌(煩惱)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이 성자(聖者)는 인천(人天)에 한 번만 더 왕래(往來)하면 반열반(槃涅槃)에 든다 하여 일래과(一來果)라 합니다.
③ 수도(修道, 阿那含果, 不還果)는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思惑)과 번뇌(煩惱)를 모두 끊어 욕계(欲界)에 다시 오지 않는다 하여 불환과(不還果)라고 합니다.
2. 무학(無學) 혹은 무학도(無學道)=멸진정(滅盡定)을 성취(成就)하여, 더 공부(工夫)할 것이 없는 단계(段階)입니다.
① 아라한도(阿羅漢道, 阿羅漢果)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成就)해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리(道理)를 확실(確實)히 증득(證得)한, 실아실법(實我實法)을 다 멸진(滅盡)해서 더 알 것이 없는 경계(境界)입니다.-오봉정사
心解脫得故 名所作(심해탈득고 명소작) 慧解脫得故 名已辦(혜해탈득고 명이판)
또한 심해탈을 얻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혜해탈을 얻는 까닭에 이미 다했고 하며,
漏盡故 名所作(누진고 명소작) 得共解脫故 名已辦(득공해탈고 명이판)
또한 누(번뇌)를 다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공해탈을 얻은 까닭에 이미 끝냈다고 하며,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의 모든 불선업의 버릇이 배어나오는 유루(有漏)를 다하여야 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심해탈과 혜해탈(共解脫)을 얻게 된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 가지 해탈(三解脫)=마음의 해탈인 심해탈(心解脫), 지혜의 해탈인 혜해탈(慧解脫), 양면해탈인 구해탈(俱解脫)을 말하며, 또한 다른 세 가지 해탈은 공해탈(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願解脫)이다.
一切結使除故 名所作(일체결사제고 명소작) 得非時解脫故 名已辦(득비시해탈고 명이판)
온갖 번뇌=結使를 제거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때 아닌=非時 해탈을 얻은 까닭에 이미 다했다고 하며,
(오개(五蓋)에 덮히게 되어(結) 탐진치(貪瞋癡) 삼독의 부림을 당하는 버릇(使)을 없애야 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터득한 것이 잠깐의 시해탈(時解脫)이 아닌 까닭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해탈(時解脫)= 탐욕을 비롯한 육정(六情)이 일어날 적에 마주하게 되는 현상과 작용에 마음이 결코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 부동심(不動心 ).
自利益竟故 名所作(자이익경고 명소작) 利益他人故 名已辦(이익타인고 명이판)
스스로의 이익을 끝내야 하기에 할 일이라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이미 다했다고 하느니라.
(스스로에게 이로움이 더해지게 되어서 마지막 끝맺음(究竟)에 이르고자 하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더해주는 까닭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쳐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如是等所作已辦義 自在說(여시등소작이판의 자재설)
이와 같이 할 일을 이미 다했다는 이치를 자유롭게 설명하였노라.
(이와 같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이미 방편의 힘을 갖추게 되었다.”라는 것에 대해 정의(定義)하여 걸림 없고 막힘없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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