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품(初品) 중 여시아문일시(如是我聞一時)를 풀이함-3

 '如是'를 풀이함

復次(부차) '如是'義者('여시'의자) 若人心善直信(약인심선직신)

또한 ‘如是=이와 같다’의 정의는 만약 어떤 사람의 마음이 착하여 올곧은 믿음을 지녔다면, 

 

是人可聽法(시인가청법) 若無是相則不解(약무시상즉불해)

 사람은 참된 가르침=법을 들을  있거니와, 만일 그러하지 못하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니라

 

如所說偈(여소설게) 게송에서 말씀하심과 같으니,

 

聽者端視如渴飮(청자단시여갈음) 一心入於語議中(일심입어어의중)

듣는 이는 단정히 바라보며 목마른 이가 물을 마시듯, 일심을 기울여 말씀 속의 이치로 들어가네.

踊躍聞法心悲喜(용약문법심비희) 如是之人應爲說(여시지인응위설)

법을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나니, 이러한 사람이라야 마땅히 말해 줄 수 있다네.

(올곧게 참된 가르침()을 듣고 눈여겨 살펴보기를, 마치 목말라 마실 것을 찾듯이 하여,

한마음으로 말씀하신 정의(定義)를 통해 마음이 반야바라밀과 어우러져서 막힘없이 꿰뚫어볼 수 있게 되거니와

참된 가르침()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도, 중생이 오도(五道)를 오가며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는 것을 한없이 가엾고 안쓰럽게 생각하여야(大悲) 하는 것이나니, 이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마땅히 말씀해주시는 것이니라.)


復次(부차) ‘如是’義在佛法初(‘여시’의재불법초) 

또한 ‘如是=이와 같이'의 뜻이 부처님 가르침의 첫머리에 있는 것은 

 

現世利 後世利 涅槃利(션세리 후세리 열반리) 諸利根本 信爲大力(제리근본 신위대력)

현세의 이로움이, 後世=뒷세상의 이로움, 열반의 이로움 등, 모든 이로움의 근본이 믿음을 큰 힘으로 삼음을 말하며,

 

復次(부차) 一切諸外道出家(일체제외도출가) 心念我法微妙(심념아법미묘) 第一淸淨(제일청정)

또한 일체의 온갖 외도 출가자들이 제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나의 법은 미묘하고 청정하고 제일이다’ 하나니, 


如是人自歎所行法(여시인자탄소행법) 毀他人法(훼타인법)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가 행하는 가르침=법은 찬탄하고 다른 사람의 가르침=법은 헐뜯나니, 


是故現世相打鬪諍(시고현세상타투쟁) 後世墮地獄(후세타지옥) 受種種無量苦(수종종무량고)

그러한 까닭에 이 세상에서 서로 치고 싸우다가 후세에는 지옥(naraka)에 떨어져서 갖가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니라. 

 

如說偈(여설게) 게송의 말씀과 같으니,

自法愛染故(자법수염고) 呰毀他人法(자훼타인법)
스스로의 가르침=法만을 사랑하여 애착에 물든 까닭에, 다른 이의 법을 헐뜯나니
雖持戒行人(수지계행인) 不脫地獄苦(불탈지옥고) 呰 꾸짖을 자
비록 계행을 살펴 지키는 사람일지라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是佛法中(시불법중) 棄捨一切愛(기사일체애) 一切見 一切吾(일체견 일체오) 
我憍慢悉斷不著(아교만실단불착)

이렇게 불법을 통해서 일체의 애착과 모든 소견(삿된 견해)과 모든 아만을 버리고, 남김없이 끊어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佛法)을 통해서 일체의 애착과 일체의 삿된 견해, 일체의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을 ‘내 것’이라는 마음으로 남을 업신여기고 얕잡아보는 버릇을 버리게 되면,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에도 애착하지 않고 끊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如’栰喩經’言(여’벌유경’언) 汝曹若解我栰喩法(여조약해아벌유법) 
是時善法應棄捨(시시선법응기사) 何況不善法(하황불선법)?
너희들이 마치 벌유경(Kolopama-sūtra)에서 '나의 뗏목 비유의 가르침을 이해하였다면, 이 때의 착한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훌륭하지 못한 법이겠는가'하셨으니,

 

佛自於般若波羅蜜(불자어반야바라밀) 不念不猗(불념불의) 何況餘法有猗著者(하황여법유의착자)?
猗 아름다울 의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반야바라밀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의지하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의지할 다른 법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반야바라밀을 따라 일체법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는 생각을 않으시고, 기대지도 않으시거늘, 더군다나 그 외의 다른 가르침(法)을 통해 일체법에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있을 것이라 여기어 기대는 삿된 견해에 집착하랴!


以是故 佛法初頭稱 '如是'(이시고 불법초두칭 ‘여시’)
그러므로 불법의 첫머리에 ‘如是=이와 같이’라고 한 것이니, 


佛意如是(불의여시) 我弟子無愛法(아제자무애법) 無染法 無朋黨(무염법 무붕당)

부처님의 뜻하신 바는, ‘나의 제자는 법에 애착하지 않고, 법에 물들지 않고, 패거리(파당)를 가르지도 않으며, 

 

但求離苦解脫(단구리고해탈) 不戲論諸法相(불희론제법상)

오직 괴로움(고통)을 여의고자 해탈만을 구하는 것으로, 諸法=모든 법의 相=실상에 대하여 희론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이니라.

如說’阿他婆耆經’摩犍提難偈言(여설 ‘아타바기경’ 마건제 난게언)

마치 '아타바기경(Arthavargiya-sūtra)에서 마건제(Mākandika)가 게송으로 따져 물은 것과 같으니,

 

決定諸法中(결정제법중) 撗生種種想(횡생종종상)

제법은 흐트러짐 없도록 결정지어진 것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들이 넓게 펼쳐지게 되는 것이거늘
悉捨內外故(싱사내외고) 云何當得道(운하당득도)

捨內外=12을 다 버려 사라져 없어지면, 어떻게 도를 통해 제법의 실상을 터득할 수 있단 말이오?

 

佛答言(불답언)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으니,

非見聞知覺(비견문지각) 亦非持戒得(역비지계득)

결코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요, 持戒=계를 지켜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며,  
非不見聞等(비불견문등) 非不持戒得(비불지계득)
보고 듣는 것 아님도 아니며,
지계를 지키지 않고 터득하게 되는 것도 아니니라.


如是論悉捨(여시론실사) 亦捨我我所(역사아아소)

이와 같은 논의 모두 버리고, 나=我와 내 것=我所 모두를 버리어
不取諸法相(불취제법상) 如是可得道(여시가득도)

모든 법상을 취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을 수 있으리.

(후세의 실마리가 되는 업(業)을 짓게 하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모습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다 버려

무언가 정()해진 실상(實相)이 있다는 삿된 견해를 지니지 않아야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취하게 되어, 생사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참된 길()을 통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터득하게 되느니라.)

 

아(我)와 아소(我所)를 통칭하여 아사(我事)라고 한다. 보다 엄밀하게는 아와 아소를 각각 아상사(我相事)와 아소사(我所事)라 부른다.
아사(我事)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나의 일' 또는 '나에 관련된 일'로,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나=我' 또는 '내 것=我所'라고 계집(計執= 생각하여서 집착함, 헤아려서 집착함)하는 것, 즉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나=我' 또는 '내 것=我所'이라 생각하여서 5온의 개별 또는 다수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과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아사(我事)에는 신구아사(身具我事) · 수용아사(受用我事) · 언설아사(言說我事) · 조작일체법비법아사(造作一切法非法我事) · 피소의지아자체사(彼所依止我自體事)의 5가지가 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5종아사(五種我事) 또는 5가지 아사라고 한다. 5종아사는 크게 아상사(我相事)와 아소사(我所事)로 분류된다.
아상사(我相事)는 '나[我]라는 계집(計執)', 즉,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나=我'라고 생각하여서 5온의 개별 또는 다수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피소의지아자체사가 아상사에 속한다.

아소사(我所事)는 '내 것=我所라는 계집(計執)', 즉, 5온의 개별 또는 다수를 '내 것=我所'라고 생각하여서 5온의 개별 또는 다수에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신구아사 · 수용아사 · 언설아사 · 조작일체법비법아사의 4가지가 아소사에 속한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 따르면, 세간의 유정들은 대부분 5온 가운데 식온에 대해 '나=我'라고 계집(計執)하는 일, 즉 아상사를 가지며, 그 밖은 다른 온, 즉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에 대해서는 '내 것=我所라고 계집(計執)하는 일, 즉 아소사를 가진다.-위키

 

‘아(我)’란 일반적으로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인 자기(自己)를 말한다. 그래서 대개 자아(自我)와 동의어로 본다. 이러한 아(我)에 대해 고대 인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철학에서는 주체로서 실재(實在)하는 것, 주재(主宰)하는 것으로서의 아(我, ātman)가 강조돼, 우주아(宇宙我. 梵)와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주장했다. 
• 고대 인도 수론학파(數論學派; Sāṃkhya학파)에서 세운 신아(神我―신비로운 자아). 순수정신, 영아(靈我, puruṣa). 범아(梵我) 등의 말이 있었다.
이와 같이 아(我)는 온갖 사물의 근원에 있으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독립 영원의 주체로 봤다.
초기불교에서도 ‘아(我)’는 실체로서 ‘나’를 말하며, 이것은 브라만교에서 사용하는 아트만(atman)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초기불교 <아함경>에서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한 존재로서 아(我)의 본체는 없다고 하는 무아(無我, anatman)을 세워 제시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나’를 한자로 표시하면 아(我)가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아트만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아트만을 실체적 ‘아(我)’라고 하므로, 그렇다면 아트만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실재와 맞는다. 자구(字句)로 풀이해 봐도 아(我)와 무아(無我)가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자아(自我)와 무아(無我)를 상대적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 
현대철학에서도 ‘자아(自我)’는 고정불변의 독립된 개체(個體)로서 동일성(同一性)을 유지하면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나’를 말한다고 하고 있다. 이것이 브라만의 “아트만”을 의미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교 철학의 사상적 저변에서 심화돼 온 것이 무아설(無我說)이라고 본다면, 종교적으로 실천적 폭을 넓힌 것은 윤회설(輪迴說)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전개과정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하면서 불교를 발전시켜왔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나온 ‘아(我)’에 대해 좀 더 검토를 해보자. 
일반적으로 ‘나(我)’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아(我)를 말한다. 이 ‘범부의 아’는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라는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색(色)은 육체이고, 수ㆍ상ㆍ행ㆍ식은 정신에 해당된다. 그런데 범부는 이와 같이 오온에 의해 이루어진 ‘아(我)’를 상주 불변하는 본질적인 자기로서의 ‘아(我)’라고 집착한다. 이렇게 무명(無明)에 의해 범부가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는 ‘아(我)’는 오온이 가합해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가아(假我-거짓된 나)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가아를 범부는 자아(自我)로서 집착한다는 말이다. 즉, 범부가 있다고 고집하는 아(我)는 바로 자아를 말한다.
그런데 이 자아(自我)는 '범부의 자아'일 뿐이며, 결코 상주 불변하는 자아가 아닌 것이다.

근본불교에서는 이러한 자아를 3종으로
① 무아로서 부정되는 아(我). 
② 거짓된 나(假我)라고 불리는 아(我). 
③ 범부가 집착하는 아(我)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범부가 집착하는 ‘아(我)’가 바로 자아(自我)란 것이다. 
이처럼 범부의 ‘아’는 자아로서, 범부들은 자아가 있다고 믿고 이것을 본질적인 자기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자아는 없다. 본질적인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범부의 자아일 뿐이고, 바로 이러한 착각 때문에 범부는 윤회를 하는 것이다. 오온이란 끊임없이 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무상한 것인데, 이것을 고정된 불변하는 자아로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윤회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각자(覺者 : 깨달은 자)는 범부가 생각하는 자아의 실상이 거짓된 나(假我)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리하여 자아의 실상을 확실히 알게 되면 윤회하는 주체인 자아의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음은 초기불교 입장에서의 거해 스님 법문의 요약이다. 
고대 인도 브라만교에서 ‘아(我)’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아트만(Atman)으로서 영혼, 자아(自我), 자기(自己)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아(我)’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우리의 미래를 연속시키며 절대적 불변, 영원, 불생불멸의 본질이라고 했다. 
큰 것은 범(梵)ㆍ브라흐만ㆍ창조주ㆍ법신(法身)ㆍ천상에의 영생(永生) 등을 말하고 여기에서 파생된 작은 것이 ‘아(我)’라는 것이다. 
‘아(我)’는 개개인의 심중에 존재해 있으며, 이 심중에 존재해 있는 것이 오랜 윤회 속에서 선업을 닦고 신에 기도하며, 제사하고, 공물을 바치며, 그의 이름을 외워서 찬탄하고 그럼으로써 깨끗해져서 마침내 창조신이나 범(梵)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아(我)가 범(梵)에 이르는 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시고 위와 같은 ‘아(我)’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을 유아(有我)의 상견(常見;Sakkaya-ditthi)이라고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영혼ㆍ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을 인정치 않는 것으로서 종교의 사상사적 측면에서 사실상 독특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는 자아(自我)는 환상적인 것, 혹은 가공적(架空的)인 것으로 실재(實在)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신념 혹은 믿음이며,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것 때문에 탐ㆍ진ㆍ치가 일어나고 무명에 의한 생사윤회의 끝없는 고통이 따르게 되며, 갖가지 삿된 견해와 교만ㆍ속임수ㆍ이기주의ㆍ깨끗지 못함 등의 업을 익히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로 인해 세상의 모든 불선업(不善業)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셨다. 
어리석은 인간이 이와 같이 ‘아(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그것의 존재를 내세우는 것은, 곧 자기 보존적 집착이며, 의지의 나약함과 소유에 대한 허무를 메우기 위해서 갖는 보호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그 주체가 없다면 한 생명의 모든 꿈과 의욕이 상실되고 삶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여기는 것이 중생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 무엇, ― 자아라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고, 이에 의존함으로써 안전과 안녕을 기약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이 중생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의 실제는 그 실상이 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에서 발생된 환상적인 것이다. 
이 환상적인 유아(有我)가 사실적인 진리가 아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위빠사나(Vipassana) 수행법이다. 그리하여 수행을 통해서 실상을 깨달을 때 자신의 성품과 모든 사물의 현상을 바르게 보는 법안(法眼)이 열리게 되고, 이를 정견(正見)이라 한다. 이로써 진리로부터 물러섬이 없게 되고, 아견(我見)과 망견(妄見)에서 벗어나게 되며, 그리하여 도(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자연스러운 관찰이다. 그리고 육체의 일어나고 사리지는 현상을 마음이라 이름 한 나마(nama)를 관찰했을 때, 그 나마(마음) 자체는 계속 변화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브라만교(힌두교)에서는 마음이라는 것이 심장에 자리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마음’이라 하면 흔히들 일반사회에서 심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심장이 마음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음이 현대의학의 심장이식 수술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플라스틱의 인공심장이식으로 혈액을 순환시켜 살게 되고 (그것이 자연심장처럼 오래 가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짐승의 심장을 이식해 인간심장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심장이 진정 인간의 마음으로서 사고하고 분별하며 감정과 이성을 좌우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넣고 인간의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로 봐도 마음은 심장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심장 그 자체가 마음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정 장소에 자리해 머무는 곳이 있는 게 아니라 여섯 가지 감각기관(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기능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조건에 의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한다. 

 

―――무아와 위빠사나――― 
다음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무아경(無我經, Anatta-lakkhana Sutta ― Samyutta Nikaya XXII.59)의 앞부분이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붓다께서 이시파나타에 있는 사슴 공원, 베나레스에 머물고 계셨다. 붓다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형상(色)은 내가 아니다. 만일 형상이 나라면 이 형상은 (나를) 고통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형상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형상이 내가 아닌 까닭에, 그것은 고통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형상에게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형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비구들이여, 느낌(受)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인지(想)는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형성(行)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식(識)은 내가 아니다. 만일 식이 나라면 이 식은 나를 고통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식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식이 내가 아닌 까닭에 그것은 고통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식에게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라, 나의 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 형상은 영원한 것인가, 아니면 무상한 것인가?”
“무상한 것입니다. 세존시여.”
“그렇다면 무상한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인가 유쾌한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 변화하므로 고통스러운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은 나, 이것은 나 자신.”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출처] <‘아(我, 나)’에 대한 이해>|작성자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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