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依言眞如(의언진여) - Illustrate the true suchness with word
復次(부차) 此眞如者(차진여자) 依言說分別(의언설분별)
有二種義(유이종의) 云何爲二(운하위이)
또 이 진여라는 것을 말(언설)에 의하여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이 둘이 되는가?
Furthermore, if one discerns this true suchness with worded illustration, there can be two meanings. What are they?
[진여라는 것을 말로 나타낼 수 없으나,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힌트를 줄 수도 없다. 그래서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여, 그것을 아는 길잡이로 삼는다는 것이다.
분별이라 함은 여기서는 생각으로 진여를 추측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달은 것을 말로써 나타낸다는 뜻이다.
* 지운스님 :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로써 설명하는 것은 수행의 출발에 서 있는 사람에게 신심(信心)을 일으키고, 삶과 죽음의 진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발심(發心)하게 하여 수행을 출발하게 하기 위함이다.-물처럼바람처럼]
一者(일자) 如實空(여실공) 以能究竟顯實故(이능구경현실고)
첫째는 여실공이니, 능히 궁극적으로 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며,
First, it is the emptiness(purity) in True Suchness, because it can manifest the ultimate truth of mind.
[마음의 진여는 절대적인 것이므로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의지하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분별하여 말로 표시한다면 진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여실공(如實空)이고 다른 하나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다. 즉 공과 불공의 두가지 성격의 측면에서 고찰되고 있다.
여실공(如實空)은 여실(如實) 즉 진여에는 염법(染法)인 번뇌가 공(空)이라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무명번뇌가 없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심진여(心眞如)는 불지(佛智)이므로 거기에는 번뇌가 전혀 없는 것으로서, 순수청정(純粹淸淨)이기 때문이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의 공(空)을 말하는 것으로서, 역으로 말한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진여 자체는 진실한 실재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진여 그 자체가 아무것도 없는 공(空)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종식]
二者(이자) 如實不空 (여실불공) 以有自體具足(이유자체구족) 無漏性功德故(무루성공덕고)
둘째는 여실불공이니, 스스로 체=自體가 있어 번뇌가 없는=無漏의 성공덕을 갖춤=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
Second, its non-emptiness in True Suchness, because it endued the inifinite virtues with which free from the earthly desires.
[無漏(무루) : 새지 않는 즉 번뇌가 없음.]
[여실불공(如實不空)은 여실 즉 심진여(心眞如)는 실재로서 번뇌를 떠난 청정불변의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실속에는 성공덕이 공(空)한 것이 아니므로 불공(不空)이라 하였으나 이는 성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진여에는 번뇌가 없다[如實空]는 것과, 그 진여에는 불변의 뛰어난 성질[性功德]을 갖추고 있다는 것[如實不空], 이것을 언설로서 표현한 것이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의미이다.]
(1) 여실공(如實空) - Emptiness in True Suchness
所言空者(소언공자) 從本已來(종본이래) 一切染法(일체염법) 不相應故(불상응고)
謂離一切法差別之相(위이일체법차별지상), 以無虛妄心念故(이무허망심념고)
이른바 공이라는 것은 본래 일체의 미망과 번뇌=染法이 상응하지 않으므로
일체법의 차별상을 떠난 것을 말하니, 허망한 심념이 없기 때문이니,
What is called the emptiness here is that inherently it does not interact with earthly delusional desires of the mind, therefore it is free from all types of differentiation since it does not have delusional and falsity discrepancies.
[染法(염법) : 無明(무명)으로 인해 생멸하는 차별적인 세계. 이를 떠난 것이 진여이다.
* 元曉 : 一切染法 不相應故란 능소(能所:主客)의 분별로서는 진여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一切法差別之相이란 대상으로서의 모습[所取相]을 떠나기 때문이다.
無虛妄心念이란 주관적 견해[能取見]를 떠나기 때문이다. 곧 여읜다는 뜻으로 공을 풀이한 것이다.]
當知眞如自性(당지진여자성) 非有相(비유상) 非無相(비무상),
마땅히 알라. 진여 자성은 유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One should understand that the True Suchness itself can not be classified as a Form or Formless,
非非有相(비비유상), 非非無相(비비무상),
유상이 아님도 아니고, 무상이 아님도 아니며,
it is not a Existing-form or not Existing-formless,
非有無具相(비유무구상), 非一相非異相(비일상비이상),
유와 무가 함께 있는 상도 아니며, 하나의 상=一相도 아니오 다른 상=異相도 아니며,
it is not a Form with Fom or Formless, it is not a One-form or not a Different-format,
非非一相(비비일상), 非非異相(비비이상), 非一異俱相(비일이구상).
일상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이상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일상과 이상이 함께 한 상도 아니다.
it is not a No-one-form, not a No-different-form, nor a Form with No-one-form and No-different-form
[모든 상(相)이란 생각이 지어낸 것이다. 있다는 상, 없다는 상, 다르다는 상, 다르지 않다는 상 이 모두가 망념이 만든 것이다. 진여란 이런 생각을 떠난 것이다.]
乃至總說(내지총설) 依一切衆生(의일체중생) 以有妄心念念分別(이유망심념념분별)
皆不相應(개불상응) 故說爲空(고설위공) 若離妄心(약리망심) 實無可空故(실무가공고)
이른바 총설하여, 일체의 중생은 망심이 있어서 생각 생각=念念으로 분별하여 모두 상응되지 않기 때문에, 설하여 공이라 하나니,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In general, since each of us all have our own subjectively delusional mind, and discriminate the truth by thought-thought. That can be named as Emptiness.
However, there is nothing that one can call it as Emptiness if one is free from the subjective delusional mind
[위에서 공이라는 것은 차별상을 떠나고 망심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분별로서 진여에 부합하려 한다면 그러한 것이 모두 망념이 된다. 망심을 떠난 것이 공이므로, 만약 망심을 떠난다면 따로 공이랄 것이 없다.
憨山 : 여기에서는 여실공의 의미를 간략히 풀이하였다. 진여의 실체는 망념이 본래 없음을 의지하였음을 말한다. 때문에 진여 자체에는 망념의 오염이 여실하게 비었다라고 설명하였다. 만일 망념의 오염을 떠나기만 한다면 비었다고 설명할 만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진여 자체는 원래부터 일체의 염법으로 더불어 상대적 의존관계로 호응하지 않기 때문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말해본다면 외적으로 일체 망법의 차별적인 모습을 떠났다면 인식할 대상의 세계[境]가 단절하였고, 내적으로는 허망한 심념이 없다면 망상의 진행인 심의식이 단절하였다. 이처럼 인식의 주체인 심의식과 심의식이 그림자인 대상의 세계가 모두 단절하였다. 그 때문에 여실공일 뿐이라고 하였다.]
[진여속에 번뇌가 없다는 의미로서의 여실공(如實空)이 어찌 여실공이냐 하면, 심진여는 일체의 염법(染法), 즉 미망(迷妄)과 번뇌와는 상응(相應)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번뇌는 진여에 합일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공(空)은 번뇌와 미망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심진여가 일체의 염법과 상응하지 않는다 함은 심진여 자체는 그것이 객관적 존재 형태나 주관적 존재 형태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심진여는 전체적인 것이므로 객관적 존재인 일체법의 차별상이 그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주관과 객관이 구별되지 아니하는, 있는 그대로의 전체적인 진여 그것이다.
그러나 범부의 인식주관(認識主觀)에는 객관적 세계가 차별상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주관적 인식속에 나타난, 객관적 일체법의 차별상이 진여일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범부의 주관은 망념 즉 허망한 심념(心念), 망심(妄心)으로서, 대상을 인식하면서도 무명(無明)에 움직여지고 있으므로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일체법의 차별상을 떠나 허망한 심념이 없어질 때, 절대 평등한 진여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같은 진여의 세계는 상대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므로 차별의 상에 기인한, 허망한 신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경계이다.
따라서 진여 자체의 상에는 본래 일정한 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절대 무상이라는 이치도 아니다. 상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상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에 따라 상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것 같은, 유무(有無)가 함께 있는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상이 있다 하더라도 일정한 상이 있다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상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진여는 절대 평등한 상이기 때문에 일상(一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또한 진여는 연(緣)에 따라 여러가지 상을 나타내는 덕성(德性)이 있기 때문에, 단적으로 다른 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일상(一相)과 이상(異相)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유(有)와 무(無)라는 인식은 주관과 객관의 분열된 상대적 인식계(認識界)에서 인식되는 존재 방식이므로 진실한 인식이 아니며, 따라서 이 같은 상대적 차원에서 주장하는 비유(非有), 비무(非無), 역유(亦有), 역무(亦無), 비비유(非非有), 비비무(非非無) 등이 정당한 인식이 아님은 명백한 이치이다.
이 같이 부정된 유무가 유무구상(有無俱相)을 주장한다면 그것 역시 말로서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비유비무(非有非無)가 존재의 진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거기에 망심(妄心)이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망심속에서 어떠한 말을 세운다 하더라도 심진여(心眞如)를 알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의미로 일이(一異) 비일비이(非一非異), 일이구상(一異俱相)도 존재의 진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상에서 유무부터 시작하여 일이구상(一異俱相)까지 일체법의 차별상(差別相)을 구체적으로 표시한 것이지만 이와 같은 차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일체 중생 즉 범부에 망심(妄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망심은 자기의 주관적, 주체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어, 객관적 대상을 차별적, 구별적(區別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찰나찰나 염념(念念;자꾸 생각함)으로 분별함으로서, 차별의 세계가 인식되는 것이며, 진여와는 상응(相應)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일 여기에서 망심이 해소되면 있는 그대로의 인식의 세계, 즉 진여와 상응하는 인식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망심의 배후에는 무명번뇌(無明煩惱)가 있는 것이므로 진여에는 이 망심이 공(空)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공(如實空)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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