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廻向할 行(회향할 행)
菩薩思惟業廣大하니 種種差別甚希有라 決意修行無退轉하야 以此饒益諸群生이로다
諸業差別無量種을 菩薩一切勤修習하고 隨順衆生不違意하야 普令心淨生歡喜로다
已昇調御人尊地하야 離諸熱惱心無碍라 於法於義悉善知나 爲利群生轉勤習이로다
菩薩所修衆善行이 無量無數種種別이어든 於彼一切分別知하야 爲利群生故廻向이로다
菩薩思惟業廣大(보살사유업광대)하니, 보살은 사유하는 영역이 광대하고
種種差別甚希有(종종차별심희유)라. 여러가지로 다름(차별)이 몹씨 희유하며
[業의廣大=업력난사의. 밖으로 드러난 우리의 행동은 전부 업의 놀음입니다.]
決意修行無退轉(결의수행무퇴전)하야, 뜻을 굳게 하여 물러섬 없이 수행하여
以此饒益諸群生(이차요익제군생)이로다. 그로써 모든 중생 이익되게 하네
諸業差別을 無量種(제업차별 무량종)을, 모든 업은 한량없는 종류로 차별하되
菩薩이 一切를 勤修習(일체 근수습)하고, 보살은 모두 힘써 닦아 익히고
[修習 →특별히 닦는 것이 아니라 다 안다는 것]
隨順衆生不違意(수순중생불위의)하야, 중생의 뜻에 거스르지 않도록
普令心淨生歡喜(보령심정생환희)로다. 마음 청정히 하여 기쁘게 하네
[隨順衆生不違意가 정말 어렵습니다. 조금만 꼬투리를 잡으면 바로 되돌려 상처 주려 하고,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입니다. 특히 단체생활에서 서로 꼬투리 잡는 것도 경책이 되지만, 꼬투리 안 잡히기 위해서, 비판 받지 않기 위해 미리 잘해 버리는 것이지요.]
已昇調御人尊地(이승조어인존지)야, 이미 조어사 인중존의 지위에 올라
離諸熱惱心無碍(이제열뇌심무애)라. 모든 뜨거운 번뇌을 여의어 마음에 장애가 없으며
於法於義에 悉善知(어법어의 실선지)나, 법에나 이치에 밝게 알아서
爲利群生(위리군생)하야 轉勤習(전근습)이로다. 群生= 중생 이익케 하고자 더욱 힘쓰네
菩薩所修衆善行(보살소수중선행)이, 보살이 닦은 온갖 선행은
無量無數種種別(무량무수종종별)이어든, 무량 무수하고 갖가지로 차별하되
於彼一切를 分別知(어피일체 분별지)하야, 그 모두를 분별하여 알고
爲利群生故廻向(위리군생고회향)이로다. 중생 이익케 하고자 회향하네
다. 眞如(진여)
以妙智慧恒觀察 究竟廣大眞實理하야 斷諸有處悉無餘하고 如彼眞如善廻向이로다
譬如眞如遍一切하야 如是普攝諸世間하고 菩薩以此心廻向하야 悉令衆生無所着이로다
菩薩願力遍一切하야 譬如眞如無不在라 若見不見念悉周하야 悉以功德而廻向이로다
夜中隨住晝亦住하며 半月一月亦隨住하며 若年若劫悉住中하니 眞如如是行亦然이로다
所有三世及刹土와 一切衆生與諸法에 悉住其中無所住하야 以如是行而廻向이로다
譬如眞如本自性하야 菩薩如是發大心하니 眞如所在無不在라 以如是行而廻向이로다
譬如眞如本自性이 其中未曾有一法하야 不得自性是眞性이니 以如是業而廻向이로다
如眞如相業亦爾요 如眞如性業亦爾니 如眞如性本眞實하야 業亦如是同眞如로다
譬如眞如無邊際하야 業亦如是無有邊호대 而於其中無縛着일새 是故此業得淸淨이로다
以妙智慧恒觀察(이묘지혜항관찰) 미묘한 지혜로 항상
究竟廣大眞實理(구경광대진실리)하야, 광대하고 진실하며 구경한 이치를 觀察= 관찰하고
斷諸有處悉無餘(단제유처실무여)하고, 모든 유(존재)의 경계(문제)를 남김없이 끊어서
如彼眞如善廻向(여피진여선회향)이로다. 저 진여와 같이 잘 회향하네
譬如眞如遍一切(비여진여변일체)하야, 진여가 일체에 두루하듯이
如是普攝諸世間(여시보섭제세간)하고, 그처럼 온 세간을 널리 섭수하고
菩薩以此心廻向(보살이차심회향)하야, 보살은 그 마음으로 회향하여
悉令衆生無所着(실령중생무소착)이로다.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없게 하네
菩薩願力遍一切(보살원력변일체)하야, 보살의 원력은 일체에 두루함이
譬如眞如無不在(비여진여무불재)라. 마치 진여가 있지 않은 곳 없는 것처럼
若見不見에 念悉周(약견불견 염실주)하야,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에 생각이 다 두루해서,
悉以功德而廻向(실이공덕이회향)이로다. 그 공덕으로 회향하네
夜中隨住하고 晝亦住(야중수주 주역주)하며, 밤에 머무는 대로 낮에도 머물고
半月一月亦隨住(반월일월역수주)하며, 보름이나 한 달에도 따라 머물며
若年若劫悉住中(약년약겁실주중)하니, 몇 해나 몇 겁에도 다 머무르니
眞如如是行亦然(진여여시행역연)이로다. 진여의 이와 같은 행(선근회향)도 또한 그러하네
[진여가 이와 같듯이 선행도 또한 그렇다.]
所有三世及刹土(소유삼세급찰토)와, 있는 바 삼세와 세계국토와
一切衆生與諸法(일체중생여제법)에, 일체중생이 모든 법과 더불어
悉住其中호대 無所住(실주기중 무소주)하야, 다 그 안에 머뭄없이 머무르니
以如是行而廻向(이여시행이회향)이로다. 이와 같은 행으로 회향하네
譬如眞如가 本自性(비여진여 본자성)하야, 비유컨대 진여의 본래 자성처럼
菩薩如是發大心(보살여시발대심)하니, 보살은 그렇게 큰 마음을 일으키고
眞如所在無不在(진여소재무불재)라. 진여는 있지 않은 데 없으니
以如是行而廻向(이여시행이회향)이로다. 이와 같은 행으로 회향하네
譬如眞如本自性(비여진여본자성)이, 비유컨대 진여의 본래 자성처럼
其中未曾有一法(기중미증유일법)하야, 그 안에 한 법도 있어본 적 없어서 [진여와 다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다.]
不得自性是眞性(불득자설시진성)이니, 자성을 얻지 못함이 참 성품이라
[고정된 것을 자성이라 하고, 진성은 진여를 뜻하는 것으로, ‘고정된 어떤 자성이 진성이 아니니,’]
以如是業而廻向(이여시업이회향)이로다. 이와 같은 업으로 회향하네
如眞如相業亦爾(여진여상업역이)요, 진여의 모양처럼 업도 그러하고
如眞如性業亦爾(여진여성업역이)니, 진여의 성품처럼 업도 그러하며
如眞如性本眞實(여진여성본진실)하야, 진여의 성품이 본래 진실하듯이
業亦如是同眞如(업역여시동진여)로다. 업도 또한 그렇게 진여와 같네 [업을 진여와 같이 안다.]
譬如眞如無邊際(비여진여무변제)하야, 비유컨대 진여가 끝이 없듯이
業亦如是無有邊(업역여시무유변)호대, 업도 그렇게 끝이 없으며
而於其中에 無縛着(이어기중 무박착)일새, 그 가운데 속박도 집착도 없으니
是故로 此業이 得淸淨(시고 차업 득청정)이로다. 그 까닭에 이 업이 청정해지네= 텅비어 있음을 얻네
[如眞如相業亦爾요 如眞如性業亦爾니 如眞如性本眞實하야 業亦如是同眞如로다
譬如眞如無邊際하야 業亦如是無有邊호대 而於其中無縛着일새 是故此業得淸淨이로다
이 두 게송 여덟 구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과 진여를 같이 보는 것으로 ‘업 덩어리 하나하나가 결국 진여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그런 업과는 다른 개념으로, 여기의 업이라고 하는 것은 하는 짓=업이 본래 짓인데, 진여 없이 그 짓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1분 1초, 아무리 작은 행위 하나에도 진여가 개입되지 아니한 행위는 없고, 어느 한 순간에도 진여가 개입되지 아니한 시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라. 就法明(취법명)
如是聰慧眞佛子가 志願堅固不動搖하고 以其智力善通達하야 入於諸佛方便藏이로다
覺悟法王眞實法호대 於中無着亦無縛하니 如是自在心無碍하야 未曾見有一法起로다
如來法身所作業이여 一切世間如彼相이라 說諸法相皆無相하니 知如是相是知法이로다
菩薩住是不思議하야 於中思議不可盡이라 入此不可思議處하야 思與非思皆寂滅이로다
如是思惟諸法性하야 了達一切業差別하야는 所有我執皆除滅하고 住於功德無能動이로다
菩薩一切業果報가 悉爲無盡智所印이니 如是無盡自性盡일새 是故無盡方便滅이로다
菩薩觀心不在外하며 亦復不得在於內하니 知其心性無所有하야 我法皆離永寂滅이로다
如是聰慧眞佛子(여시총혜진불자)가, 이렇듯 총명하고 진실한 불자는
志願堅固不動搖(지원견고부동요)하고, 지원이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以其智力善通達(이기지력선통달)하야, 지혜의 힘으로 잘 통달하여
入於諸佛方便藏(입어제불방편장)이로다. 부처님의 방편장에 들어가리라
覺悟法王眞實法(각오법왕진실법)호대, 법왕의 진실한 법 깨달으면
於中無着亦無縛(어중무착역무박)하니, 그 안에 집착도 속박도 없고
如是自在心無碍(여시자재심무애)하야, 이렇게 자재하여 마음에 장애없으며
未曾見有一法起(미증견유일법기)로다. 일찍이 한 법도 일어남을 본 적이 없네
如來法身所作業(여래법신소작업)이여, 여래의 법신이 지으시는 업이나
一切世間如彼相(일체세간여피상)이라. 일체세간이 그와 같은 상이기에
[如來法身이 所作業이고 一切世間如彼相이라. 일체세간은 전부 여래법신의 모습이다.]
說諸法相皆無相(설제법상개무상)하니, 모든 법의 상이 다 없다 하나니, [모든 법상이 상이 없음을 설하나니,]
知如是相是知法(지여시상시지법)이로다. 이렇게 상을 아는 것이 법을 아는 것이네
菩薩이 住是不思議(주시불사의)하야, 보살의 머문 데는 부사의라 [이러한 불가사의에 머물러서,]
於中思議不可盡(어중사의불가진)이라. 그 안에서 헤아림을 다 할 수 없으며
入此不可思議處(입차불가사의처)하야, 그 불가사의한 데에 들어가면
思與非思皆寂滅(사여비사개적멸)이로다. 思= 헤아리고 非思= 헤아리지 않음이 다 적멸하네
[조사스님들이 잘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관심법, 마음을 관하는 법에 대안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불가사의한 자리가 진여자성 자리이지요.
거기에 머물러서 그 가운데서 사의해도 不可盡이라. ‘진여자성자리에서 아무리 사의해도 그것이 끝이 없다.’
이 불가사의처= 진여자성자리에 들어가서
思議와 非思議가 皆寂滅이라. 사의와 사의하지 않는 것이 다 적멸한 자리= 뚝 끊어진 자리다. 아무 생각없이 불가사의한 진여자성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소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은 상당히 편하고 넉넉한 자리라서 이 구절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如是思惟諸法性(여시사유제법성)하야,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사유하고
了達一切業差別(요달일체업차별)하야는, 모든 업의 차별에 요달하여
所有我執을 皆除滅(소유아집 개제멸)하고, 아집을 다 제멸하고 [나에게 있는 모든 아집들을 다 제해버리고]
住於功德無能動(주어공덕무능동)이로다. 공덕에 머무니 흔들 수 없네 [공덕에 머물러서 능히 동함이 없음이로다.]
[법성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몰라ㆍ몰라’입니다.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 뿐!’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끊어지니까 자기 이름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고, 내가 어디 있는 것도 모르고, 모른 자리에 앉아버리면 일체를 모르는 겁니다. 거기에 맛들인 선사들은 중생제도도 다 귀찮은 일입니다.
‘언제 그들을 가르쳐서 이 자리에서 얻는 이 맛을 보여줄 수 있겠나?’ 생각하면 너무 거리가 먼 겁니다. 선사들은 불교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자기가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까지 이끌어 가는 것이 “제도, 교화”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 심리에서 ‘나는 모른다. 중생제도 알 바 없다.’ 우리는 선사들의 행적을 그렇게 이해 할 수가 있는 겁니다.]
菩薩一切業果報(보살일체업과보)가 보살의 모든 업과 과보는
悉爲無盡智所印(실위무진지소인)이니, 다함없는 지혜로 인가한 것이라[無盡智= 다함이 없는 지혜의 도장 찍은 바이니]
[菩薩의 業果報는 다 지혜에서 나온 것이니까, 일체 業果報가 결국은 다함이 없는 지혜의 所印입니다.]
如是無盡自性盡(여시무진자성진)일새, 이와 같이 다함없는 자성이 다하기에
是故로 無盡方便滅(시고 무진방편멸)이로다. 그러므로 다함없는 방편도 소멸하네
菩薩의 觀心不在外(관심불재외)하며, 보살은 마음이 밖에 있지 않고
亦復不得在於內(역부불득재어내)하니, 또한 안에도 있지 않음을 관찰하고
知其心性無所有(지기심성무소유)하야, 그 마음의 자성이 없음을 알아서
我와 法을 皆離하야 永寂滅(개리 영적멸)이로다. 나와 법= 주관과 객관을 다 떠나서 영원히 적멸하도다.
[산하대지가 궁극적으로 청정본연하다. 그대로 이 산하대지가 진여자성이다. 그래서 거기에 나중에 가서는
5온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히다.
6근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히다.
6처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히다.
18계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히다.
‘여래장ㆍ묘진여성 아닌 것이 없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론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디 한 곳에 마음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五蘊山頭古佛堂(오온산두고불당)이라 우리 5온, 몸뚱이 안에 그것이 있다. 일단은 이해하기는 쉽고, 일견 맞는 말입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굉장한 겁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5온ㆍ6입ㆍ12처ㆍ18계. 이 우주 삼라만상 모두가 진여자성이다.” 거기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히는 것이지요.]
[능엄경의 칠처징심; 능엄화상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마음의 소재를 물으시고, 아난이 일곱 번에 결쳐 일곱 군데에 마음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부처님께서 마음은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常住眞如(상주진여)이며, 性淨明體(성정명체)임을 가리키시고 客塵 煩惱(객진번뇌)를 설명하여 眞見(진견)으로 이끌어 가는 내용이다.
① 내재(在內)- 몸 속에 있다고 함 = 방안에 있으면서 먼저 방 안의 것들을 보지 않고 밖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몸 안에 있는 마음이 먼저 몸 속을 보아야 하나 안을 보지 못하므로 몸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② 재외(在外) -「몸 밖에 있다고 하다」 마치 등불을 방안에 켜 놓으면 방안부터 비춘 다음 창문을 통해 마루, 뜰, 마당을 차례로 비추듯이 우리의 마음도 몸안을 보지 못하고 몸 밖을 보는 것이 마치 등불을 방밖에 켜 놓으면 방안을 비추지 못함과 같이 마음이 몸밖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면, 한 사람이 밥먹음에 여러 사람이 따라 배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지 못하나니 너의 각료능지(覺了能知)하는 마음이 실(實)로 몸 밖에 있다고 하면 밖(外)인 몸(身)과 안(內)인 마음(心)과는 하등의 상관(相關)이 없어 마음의 대상을 몸이 느끼지 못할 것이며, 반면 감각(感覺)이 신제[身際(몸과 바깥경계와의 연접선(連接線))]에 있을진댄 마음이 또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의 손을 볼 때에 마음이 따라서 작용(分別)하나니 몸과 마음이 서로 알 것 같으면 어찌 마음이 몸 밖에 있겠는가? 몸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느니라.
③ 잠근(潛根) -「눈 속에 있다고 하다」 마음이 오근(五根)속에 있는 것이 마치 안경을 쓰면 비록 물질(質碍)의 물(物)이 눈과 합(合)하였으나 외경(外境)을 보는데는 장애(障碍)가 없어서 낱낱이 분별하여 알게되므로 몸 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오근(五根)뒤에 있기 때문이요, 바깥을 보는 것은 근내(根內)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 하니 너의 눈이 안경을 통하여 바깥을 볼 때에 안경을 먼저 보는 것처럼 마음이 눈을 통하여 외물(外物)을 볼 때에 자기의 눈을 먼저 보아야 하리니 어째서 보지 못하는고? 만일 억지로 본다고 하면 능견(能見)인 눈이 소견(所見)인 경(境)이 되었으니 따라서 분별한다(隨卽分別)는 말이 성립되지 않고 만일 자기의 눈을 스스로가 보지 못할진댄 어찌 근(根)속에 잠재한 것이 유리(琉璃)를 눈에 댄 것과 같다고 하리요. 그러므로 근(根)속에 잠복(潛伏)하고 있는 것이 유리를 댄 것과 같다고 한 말이 옳지 않느니라.
④ 장암(藏暗) -「어두운 몸 속에 있다고 하다」 중생의 부장(腑臟)이 몸 안에 있고 구멍(通關)이 밖의 표면에 있은 즉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있어서는 어둡고 통규(通窺)에 있어서는 밝아서 눈을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은 몸 안을 보는 것이고 눈을 뜨고 밝음을 보는 것은 바깥을 봄이라고 하니, 눈을 감고 어둠을 볼 때에 어두운 경계(境界)가 너의 눈과 상대[相對(前對)]하였는가? 상대했다면 어둠이 눈 앞에 있는 것이니 어떻게 내대(內對)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억지로 안을 이룬다고 고집(固執)한다면 밝음이 없는 방안에 있을 때에 이 암경(暗境)이 다 모두 너의 초부[焦腑]일 것이며, 반면에 너의 눈이 그 어둠과 상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그 어둠을 볼 수 있겠는가? 만일 외견을 떠나서 내대(內對)가 성립되어 눈감고 어둠을 보는 것이 바로 몸 안을 보는 것이라고 하면 눈뜨고 밝음을 볼 때에 어찌 너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는가? 내대(內對)가 성립되지 못하리라. 또 만일 얼굴을 본다고 할진댄 안근이 허공에 있는 것이니 안을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너의 몸이 아니며 너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의 눈은 지각하는 작용이 있지만 너의 몸은 감각의 작용이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눈과 몸 모두가 감각이 있다면 너의 한 몸에 신지(身知)와 안지(眼知)인 이지(二知)가 있어 양불(兩佛)을 이룰 것이니 네가 말한 눈 감고 어둠을 보는 것이 곧 신내(身內)를 보는 것이라고 함이 옳지 않느니라.
⑤ 수합(隨合) -「합하는 곳을 따라 있다고 하다」 사유하는 체가 실로 나의 심성(心性)이므로 법을 반연(攀綠)할 때에(생각이 미친곳) 마음이 따라 있다 하니 이 사유심이 체가 없다면(경계가 없어져서 반연하지 아니할 때에) 따라서 합할 바가 없을 것이요, 만약 억지로 체(體)가 없으되 합할 바가 있다고 하면 이는 19계(界)가 7진(塵)을 인(因)하여 합한다는 말과 같으리라. 또한 사유심이 체가 있다고 한다면 몸을 누를 때에 마음이 안에서 나오겠는가? 밖으로부터 들어가겠는가? 안으로부터 나온다면 마땅히 내장을 보아야 할 것이요, 밖으로부터 들어온다면 네 얼굴을 보아야 하리라. 또한 사유심이 체가 있다면 일체(一體)냐, 다체(多體)냐, 體냐, 體가 아니냐, 만약 일체라면 몸을 누를 때 누르는 처소가 없을 것이니, 누르는 처소가 있다면 일체가 성립되지 아니하고 만약 다체라면 많은 사람을 이루리니 성립되지 아니하고 體라 하면 일체의 비유와 같고 체에 두루하지 않는다 하면 머리를 만지고 다리를 만질 때에 머리는 느끼는 바가 있고 발은 아는 바가 없어야 하리니 또한 두루하지 않다 하는 것도 불성립(不成立)이라.
⑥ 중간(中間) -「근(根)과 진(塵)의 중간에 있다고 하다」 그 중간의 지점이 어디인가? 몸에 있는가? 경계에 있는가? 몸에 있다면 몸이 전후좌우의 변(邊)이 아닐 것이요, 중간에 있다면 안에 있음과 같다. 중간이란 지점을 뚜렷이 표시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없다면 이는 아주 없는 것이고, 있다면 이는 일정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푯말을 중심으로 하여 보는 사람의 위치변경에 따라 사방과 상하로 변하여지기 때문이다. 근과 진이 대합하는 가운데 식이 생하므로 그것을 중간이라 하니 근진의 중간에 있는 마음은 근과 진 두 가지를 겸섭(兼攝)했는가? 않았는가? 만일 양변을 겸하였다면 진(六塵-境)은 그 자체가 지각의 작용이 없는 것이고, 근은 수촉(受觸)의 감각이 있는 것이다. 유지(有知)인 근과 무지(無知)인 진이 서로 합하였으니 이는 물에 기름을 섞은 듯 하여 양립한 것이지 어찌 중내(中內)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겸이(兼二)가 성립되지 않으면 네가 말한 그 마음의 자체는 육근과 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적작용이 없을 것이요. 육진과 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지(不知)인 무정도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자체성(自體性)을 찾아 볼 수 없으니 중(中)이란 것이 어떤 것이겠는가? 마음이 근경(根境)의 중간에 있다는 말이 옳지 않느니라.
⑦ 무착(無着) -「안 밖, 중간 어디에고 있지 않다고 하다」 분별심성(分別心性)이 주(住)하는 바가 없다고 하니 우주안에 존재한 삼라만상을 일체라고 한다. 네가 착(着)함이 없다고 하는 말은 대상이 있는데 착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본래 아무 것도 없어서 착할 것이 없다는 말인가? 없다면 귀모토각(龜毛兎角)과 같아서 착하지 않는다고 할 것도 없으며, 착하지 않는다고 하면 벌써 대상이 있음을 뜻하니 이것은 무라고 할 수 없다. 현상이 없으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아니면 곧 있는 것이니 상(相)이 있으면 곧 착함이니 어찌 착이 없으랴. 일체에 착하지 않는 것이 마음이라 함이 옳지 않느니라.]
마. 利益(이익)
彼諸佛子如是知 一切法性常空寂하야 無有一法能造作하니 同於諸佛悟無我로다
了知一切諸世間이 悉與眞如性相等하야 見是不可思議相하니 是則能知無相法이로다
若能住是甚深法하야 常樂修行菩薩行하며 爲欲利益諸群生하야 大誓莊嚴無退轉하면
是則超過於世間이라 不起生死妄分別하고 了達其心如幻化하야 勤修衆行度群生이로다
菩薩正念觀世間의 一切皆從業緣得하고 爲欲救度修諸行하야 普攝三界無遺者이로다
了知衆生種種異가 悉是想行所分別하고 於此觀察悉明了호대 而不壞於諸法性이로다
彼諸佛子如是知(피제불자여시지)에 저 모든 불자들이 이렇게 안다면
一切法性이 常空寂(일체법성 상공적)하야, 일체법의 성품은 늘 공적하고
無有一法能造作(무유일법능조작)하니, 지을 수 있는 한 법도 없어서
同於諸佛悟無我(동어제불오무아)로다. 부처님과 같이 무아를 깨달으리라.
了知一切諸世間이 일체 세간의 성품과 상이 悉與眞如性相等(실여진여성상등)하야. 진여와 더불어 같은 줄 알고
見是不可思議相(견시불가사의상)하니, 그 불가사의한 상을 보면
是則能知無相法(시즉능지무상법)이로다. 이것이 곧 無相法= 모양(상)없는 법을 안 것이네
若能住是甚深法(약능주시심심법)하야, 이 심오한 법에 머물 수 있다면
常樂修行菩薩行(상락수행보살행)하며, 늘 즐거이 보살행을 수행하고
爲欲利益諸群生(위욕이익제군생)하야, 중생을 이익케 하려는
大誓莊嚴無退轉(대서장엄무퇴전)하면, 큰 서원으로 장엄하여 퇴전치 않으리라
是則超過於世間(시즉초과어세간)이라. 이것이 곧 세간을 초월하는 것이요
不起生死妄分別(불기생사망분별)하고, 생사의 헛된 분별 일으키지 않는 것이며
了達其心如幻化(요달기심여환화)하야, 그 마음이 헛깨비 같음을 깨닫고
勤修衆行度群生(근수중생도군생)이로다. 여러 행을 힘써 닦아 중생을 제도하리라
菩薩이 正念으로 觀世間의 보살은 정념으로 세간이란
一切皆從業緣得(일체개종업연득)하고 일체가 다 업의 연에서 얻어짐을 觀= 관찰하고
爲欲救度修諸行(위욕구도수제행)하야, 구호하고 제도하고자 모든 행을 닦아서
普攝三界無遺者(보섭삼계무유자)이로다. 널리 삼계를 남김없이 섭수하네 [遺 남길 유]
了知衆生種種異(요지중생종종이)가, 중생이 갖가지로 다름이
悉是想行所分別(실시상행소분별)하고, 다 생각과 행의 분별임을 알고
於此에 觀察悉明了(어차 관찰실명료)호대, 이러한 관찰을 통해 모두 분명히 하여
而不壞於諸法性(이불괴어제법성)이로다. 법의 성품 무너뜨리지 않네
[想과 行은 마음의 작용. 마음이 가만히 있지 않고, 수ㆍ상ㆍ행ㆍ식으로 나가서 想과 行= 생각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범죄가 일어 나는 것이, 사람이 정도로 사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고, 想 行. 끊임없이 움직이니까 자기가 보는 대로ㆍ자기가 익혀온 업대로 움직이니까 험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저를 관찰해보니까 가만히 안 있고 TV를 틀든지ㆍ책을 보든지ㆍ염불을 하든지 등등 6근으로 작용을 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는 것도 일종의 작용인 겁니다. 눈은 뭔가 보려고 하고, 귀는 뭔가 들으려고 하고, 코는 뭔가를 감지하려고 하고, 말은 입은 혀는 뭔가 먹으려고 하고, 숨 쉬려고 하고 또 대화하려고 하고, 어쨌든 가만히 안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앉아 있는데 화두가 여러 수 100번 드는 겁니다. 놓쳤다ㆍ들었다, 놓쳤다ㆍ들었다, 놓쳤다ㆍ들었다.
그렇게 되는 그것이 사람의 본래 생김새입니다. 想의 行 또는 想과 行= 마음의 행. 생각의 행, 생각의 움직임입니다]
[六窓猿猴(6창원후), 구멍을 6개가 있는 상자 안에 원숭이 넣어놓고 부르면 부르는 대로 원숭이가 얼굴을 내민다는 비유가 아주 적절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 그렇게 살고 있어서 제어하기 어렵지만 좋은 방향으로 유도 해야지요.
그래서 자꾸 공부하는 겁니다.
금강경의 應無所住(응무소주) 절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而生其心(이생기심) 그 마음이 날뛰고 돌아다니잖아요.]
바. 結(결)
智者了知諸佛法하고, 以如是行而廻向하야 哀愍一切諸衆生하야 令於實法正思惟로다
智者了知諸佛法(지자요지제불법)하고, 지혜있는 자는 모든 불법을 알고
以如是行而廻向(이여시행이회향)하야, 이와 같은 행으로 회향하며
哀愍一切諸衆生(애민일체제중생)하야, 일체의 모든 중생을 애민하여
令於實法正思惟(영어실법정사유)로다. 진실한 법을 바르게 사유케 하네
[중생의 지혜가 바로 부처의 지혜이며, 부처의 지혜가 바로 중생의 지혜이니 미혹한 자는 부처의 지혜가 중생을 짓고, 깨달은 자는 중생이 바로 부처의 지혜이네. 이같이 體의 동일성과 차별성을 요달하면, 중생과 더불어 依止를 지음을 감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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