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離相廻向(이상회향) 상을 떠난 회향

菩薩觀察一切法호대 誰爲能入此法者며 云何爲入何所入고하야 如是布施心無住로다

菩薩廻向善巧智하며 菩薩廻向方便法하며 菩薩廻向眞實義호대 於其法中無所着이로다

心不分別一切業하며 亦不染着於業果하고 知菩提性從緣起하야 入深法界無違逆이로다

不於身中而有業하고 亦不依止於心住하야 智慧了知無業性이나 以因緣故業不失이로다

心不妄取過去法하고 亦不貪着未來事하며 不於現在有所住하야 了達三世悉空寂이로다

菩薩已到色彼岸하며 受想行識亦如是라 超出世間生死流하야 其心謙下常淸淨이로다

諦觀五蘊十八界와 十二種處及己身하야 於此一一求菩提하니 體性畢竟不可得이로다

不取諸法常住相하고 於斷滅相亦不着하니 法性非有亦非無로대 業理次第終無盡이로다

不於諸法有所住하며 不見衆生及菩提하야 十方國土三世中에 畢竟求之無可得이로다

若能如是觀諸法하면 則如諸佛之所解하야 雖求其性不可得이나 菩薩所行亦不虛로다

菩薩了法從緣有하야 不違一切所行道하고 開示解脫諸業跡하야 欲使衆生悉淸淨하나니

是爲智者所行道라 一切如來之所說이로다

 

菩薩觀察一切法(보살관찰일체법)호대, 보살은 일체법 관찰하기를 

誰爲能入此法者(수위능입차법자)며, 누가 능히 이 법에 들어갈 것인가[궁극적으로는 이 법에 들어가는 사람도 없고] 

云何爲入何所入(운하위입하소입)고하야들어감은 무엇이며 어디로 들어가나

如是布施心無住(여시보시심무주)로다. 이렇게 보시하되 마음 두지 않으며,[마음에 머묾이 없도다]

[보살이 무주상보시로써 보시 행을 하되, 그 마음에 머무는 바가 없고 집착하는 바가 없다. 

無色 無受想行識. 보시하고 보살행하는 것을 줄기차게 강요하면서, 또 머물고 집착하지 말라, 상내지 말라, 생색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우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어지간히 공부하고, 수행 좀 했다는 사람들, 연륜이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누구는 어떻고, 누가뭐라고 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것이 전부 아집ㆍ아견ㆍ아상 등을드러내는데 급급한 것입니다.] 

菩薩廻向善巧智(보살회향선교지)하며, 보살은 선교한 지혜에 회향하고

菩薩廻向方便法(보살회향방편법)하며, 보살은 방편법에 회향하며

菩薩廻向眞實義(보살회향진실의)호대, 보살은 진실한 뜻에 회향하되

於其法中無所着(어기법중무소착)이로다. 그러한 법에 집착하는 일 없으며,

[離相廻向 끊임없이 상을 떠나기를 바랍니다. 상을 떠나면 그 복의 과보, 그 공덕의 과보가 100배로 늘어나니까 권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자기 지은 복을 까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능력ㆍ 지혜ㆍ수양의 한계가 거기까지라서 까먹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좋은 일 실컷 해놓고도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한 마디 안하면 좋을 텐데 해버리는 경우 많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늘 되돌아보고, 살피고,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옛날 어릴 때, 10대 때 은해사에 진용스님이 주지였는데 ‘강원을 열어서 각성스님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각성스님은 공부를 잘 해서 '옥편'이라 불리던 당대의 아주 최고의 학인인데 범어사 선방에서 차출해서 강사로 간 겁니다. 그때

은해사에서 한 20리 떨어진 곳에 500나한을 모셔놓은 거주암이라는 유명한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우리 학인들이 가서, 3일간 500나한 방석을 전부 갈고, 보시로 뗄 나무 두 단 얻어서, 그것을 지고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은해사까지 20리노둑길을 걸어온 겁니다. 그 때 도보련화라는 대화주 보살이 있었는데, 주지스님하고 뭐가 안 맞아서 “내가 상 내려고 그러는 줄 아느냐?”고 절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치는 겁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상 내려고 그러는 줄 아느냐?”고, 그것은 상내는 겁니까? 안 내는 겁니까?  

“내가 상 내려고 그러는 줄 아느냐?” =  ‘나는 상 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내가 이 절에 공로는 많지만 주지스님보고 잘하라고 하는 것은 상 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진짜 상 내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정말 상을 안 내고 그렇게 했는지? 아직도 안 풀리는 문제입니다.

한 50여 년 전 일이니까 여러분에게는 아주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같지만 그런 학인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절에서 나무를 떼는 나무를 오전에 한 짐오후에 한 짐 전부 우리 손으로 했었습니다

心不分別一切業(심불분별일체업)하며, 마음은 모든 업을 분별치 않고 

亦不染着於業果(역불염착어업과)하고, 업과에도 염착하지 아니하며

知菩提性從緣起(지보리성종연기)하야, 보리의 성품이 인연을 쫓듯이 

入深法界하야 無違逆(입심법계무위역)이로다. 깊은 법계에 거슬림 없이 들어가네

 

不於身中而有業(불어신중이유업)하고몸에는 어떤 업도 없고 

亦不依止於心住(역불의지어심주)하야, 의지하지도 마음 두지도 않으며 

智慧了知無業性(지혜요지무업성)이나, 지혜로 업의 성품 없는 줄 알지만 

[지혜로써 無業性= 업 성이 없음을 요지하니,  연기, 인연의 도리로 일어나는 것이니까, 즉 어느 한 가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업력 난사의, 전부 업 놀음이고, 전부 업으로 살아가는데 업의 본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업성이 없음을 지혜로써  요지한다. 

罪無自性從心起이니까 죄라고 하는 고정불변한 자성이 없습니다. 죄도, 업도 전부 우리 한 생각 일으켜서 있는 그런 이치입니다. 깊은 이치는 그렇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알 때 한 순간에 업이 다 녹기도 합니다.] 

以因緣故業不失(이인연고업불실)이로다. 인연으로는 업을 떠나지 않네

[以因緣故= 인연을 사용해서ㆍ인연 때문에 업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업 성은 있는 것이 아닌 罪無自性從心起이지만 또 인연 때문에 ‘그 죄가 없지 않다.’ 즉 그 업이 없지 않아서 그 업의 과보 다 받고, 잘못한 과보 다 받는다.] 

心不妄取過去法(심불망취과거법)하고 과거법을 허망히 취하지 않고

亦不貪着未來事(역불탐착미래사)하며 미래사도 역시 탐착하지 않으며

不於現在有所住(불어현재유소주)하야 현재에 머물지도 아니하여

了達三世悉空寂(요달삼세실공적)이로다. 삼세가 공적한 줄 분명히 아네

[주련에도 많고, 스님들이 많이 인용하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마음이 과거 법을 망령되게 취하지 않고, 또한 미래사에도 탐착하지 아니하며, 현재의 있는 바, 머무는 바에도 있지 아니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 함이로다. 

그러면서 돌아보니 업의 인연은 여여해서, 결국은 업 놀음, 전부 업으로써 이러쿵저러쿵 살아가더라.  

인연의 自性은 없지만, 전부 인연과 업이고, 罪無自性從心起지만 전부 죄업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는, 그 본성은 그야말로 텅 비어 없는 것이니까 心不妄取過去法하고, 마음은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든지 간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미래사에도 탐착할 일도 아니고 현재에도 머물지 아니해서 삼세에 실 공적함을 요달한다. 

이치는 이치대로 분명히 있어서, 업이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사실 또한 분명히 있다.]

 

菩薩이 已到色彼岸(보살 이도색피안)하며, 보살은 이미 색의 피안에 이르렀으며

受想行識亦如是(수상행식역여시)라. 수 상 행 식도 그와 같아서 

[수ㆍ상ㆍ행ㆍ식의 피안에도 또한 이르렀음이라. 아주 차원 높은 것으로, 능엄경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眼耳鼻舌身意 色受想行識 色聲香味觸法 이 모든 것, 5온과 6근과 6진과 18계에서 여래장 묘진여성을 밝힌다, 그것이 곧 여래장 묘진여성이라는 말입니다. 차원 높은 소리이지만, 이것 이해해야합니다.

菩薩已到色彼岸, 물질의 피안, 물질의 저 언덕에 이르렀고, 수상행식 또한 피안이다. 수상행식의 피안에 보살이 이미 이르렀다.  색성향미촉법 안이비설신의, 그 모든 것에서 여래장을 밝히는 것이지요. 

무안이비설신의ㆍ색성향미촉법ㆍ5온ㆍ12처ㆍ18계를 떠나서 여래장 묘진여성이 없다. 진여불성이 없다.’]

超出世間生死流(초출세간생사류)하야, 세간의 생사폭류에서 초출하니

其心謙下常淸淨(기심겸하상청정)이로다. 그 마음 겸하하고 늘 청정하네 

[세간의 생사 流에서 超出해서, 그 마음이 謙下하여 항상 청정함이로다. 아주 의미심장하면서도 좋은 구절이고불교의 궁극적 핵심이 있는 대목입니다. 이해해야 할 相의 문제와 相을 떠난 그 이면의 문제입니다]  

諦觀五蘊十八界(체관오온십팔계), 오온과 십팔계나 십이처들과 [5온과 18계와]

十二種處及己身(십이종처급기신)하야, 자기 몸을 諦觀= 살펴 관찰하고

[18계를 살피고, 十二種處를 살피고 그리고 자기 몸까지 철저히 살펴서,] 

於此一一求菩提(어차일일구보리)하니, 그 낱낱에서 보리를 구하나[12처와 자기 몸에서 낱낱이 보리를 구하나]

體性畢竟不可得(체성필경불가득)이로다. 체성은 필경에 얻을 수 없네 

[능엄경의 5온ㆍ6입ㆍ12처ㆍ18계에서 여래장을 밝힌 대목을 그대로 이 몇 구절 안에 요약 해놨습니다. 

淸淨本然한데 云何忽生山河大地오? 아주 차원 높은 선 도리가 그 가운데 있지요.

선 도리라고해서 무슨 기상천외한 이치가 아니라 그 이치대로, 山河大地 그대로가 여래장 묘진여성이다. 

그런데 山河大地를 산하대지로만 보면 여래장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산하대지ㆍ산천초목ㆍ삼라만상을 여래장으로 보는 사람은 그것이 곧 여래장 묘진여성, 진여불성으로 보는 그 차이입니다.

눈을 뜬 사람과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특히 화엄경은 눈 뜬 사람과 눈뜨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아주 극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구절에, 눈을 뜨니까 그 땅은 견고하여 금강소성이더라. 산하대지가 전부 다이아몬드로 됐더라.

그것은 절대 거짓말 아닌, 그 분에게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을이오고 겨울이오고 봄이 오고 꽃이 피고 온갖 그런 것을 우리가 눈으로 분별해서 즐기고 느끼고 감동하는 광경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 이 꽃은 어찌하여 색깔이 이렇게 고운가? 저 하늘은 어찌하여 저렇게 아름다운가? 저렇게 변화무쌍한가?” 

그런데 눈 어두운 사람은 전혀 모르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이 이해 안 되는 것은 깨달은 사람 눈에는 너무 명확한 사실들만을 이야기해 놨지만, 우리는 아직도 거기까지 못 갔으니까 얼른 와 닿지 않는 겁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아~ 그런가 보다' 할 뿐 사실 얼른 와닿지는 않지만,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 어떻게든 우리들을 눈 뜨게 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근접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이런 방대한 화엄경을 설해놓은 것입니다.] 

 

不取諸法常住相(불취제법상주상)하고, 법이 常住= 항상하다는 상 취하지 않고

於斷滅相亦不着(어단멸상역불착)하니, 단멸의 상에도 집착 않으며

[常住와 斷滅, 있다와 없다, 정반대의 뜻으로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눈앞에 늘 있는 것 같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는, 중도 입니다. 중도적인 안목이라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法性非有亦非無(법성비유역비무)로대, 법의 성품 있지도 없지도 않되

業理次第終無盡(업리차제종무진)이로다. 업의 이치는 차례대로 다하지 않네 

[업의 이치로 볼 때, 그 차제가 마침내 다함이 없다. 업의 이치에서는 그것이 다함없이 계속 된다는 것이지요.]

不於諸法有所住(불어제법유소주)하며머물러 있지 않는 모든 법에서[모든 법이 있는 것에도 머무는 바 아니며,]

不見衆生及菩提(불견중생급보리)하야, 중생이나 보리는 보지 못하고 

十方國土三世中(시방국토삼세중)에시방의 국토 삼세 가운데서    

畢竟에 求之無可得(필경 구지무가득)이로다. 필경하여 구해도 얻을 수 없도다

[우리가 이렇게 번듯이 보고ㆍ듣고ㆍ말하고ㆍ주고ㆍ받고ㆍ시시비비하면서 살지만, 또 어떤 한 면으로 보면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본래로 적멸한 모습 뿐이고 적멸뿐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사실과 같이, 여여하게 실재하는 것이 畢竟不可得(필경불가득)입니다]

若能如是觀諸法(약능여시관제법)하면, 만약 이렇게 모든 법을 관찰할 수 있다면 

[만약 이와 같이 모든 존재ㆍ모든 것나ㆍ너, 산하대지ㆍ산천초목을 관찰하면]

則如諸佛之所解(즉여제불지소해)하야, 곧 부처님의 이해와 같을 것이라

[寂滅相과 常住相과 斷滅相,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하는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이해하는 바입니다] 

雖求其性不可得(수구기성불가득)이나, 비록 그 성품 구하여 얻지 못해도 

菩薩所行亦不虛(보살소행역불허)로다보살의 행하는 바 헛되지 않네 

[비록 그 성품을 가히 얻지는 못하여도 보살의 보살행까지 허망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말하자면 空華, 허공의 꽃과 같은 만행을 부지런히 닦고, 水月道場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불사를 크게 짓는 그 中道!

6바라밀에서, 일상 수행에서 중도로써 살아가는 이치를 표현을 했는데, 비록 그 어떤 변하지 않는 실체는 가히 얻을 수 없지만, 菩薩의 所行은 亦不虛허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살행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菩薩了法從緣有(보살요법종연유)하야, 보살은 법이 인연좇아 있음을 알아 

不違一切所行道(불위일체소행도)하고, 일체의 행할 바 도를 어기지 않고 

開示解脫諸業跡(개시해탈제업적)하야, 모든 업의 자취를 열어 해설하여

欲使衆生悉淸淨(욕사중생실청정)하나니, 중생을 모두 청정히 하려 하네

[그런 이치를 열어보여서 중생으로 하여금 다 훌륭하게 만든다.] 

是爲智者所行道(시위지자소행도)라. 이것이 지자가 행해야 할 바 길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있음에도 없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로 사는 겁니다.

배가 이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강물을 타고 내려가야 되듯이, 우리 삶도 중도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살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 강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가 그러니까 중도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一切如來之所說(일체여래지소설)이로다. 모든 여래= 모든 깨달은 분들이 말씀하신 바이니

 

마. 第六廻向의 名(제6회향 명)

隨順思惟入正義하면 自然覺悟成菩提하리니 諸法無生亦無滅이며 亦復無來無有去로다

不於此死而生彼하면 是人悟解諸佛法이라 了達諸法眞實性하야 而於法性無分別이로다

知法無性無分別하면 此人善入諸佛智라 法性遍在一切處와 一切衆生及國土하며

三世悉在無有餘호대 亦無形相而可得이로다 一切諸佛所覺了를 悉皆攝取無有餘하야

雖說三世一切法이나 如是等法悉非有로다 如諸法性遍一切하야 菩薩廻向亦復然하니

如是廻向諸衆生하야 常於世間無退轉이로다

 

隨順思惟入正義(수순사유입정의)하면, 수순하여 사유하고 바른 뜻에 들면

自然覺悟成菩提(자연각요성보리)하리니, 자연히 보리를 깨달아 이루리라

諸法無生亦無滅(제법무생역무멸)이며, 모든 법은 생도 없고 멸도 없고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바로 그 도리입니다]

亦復無來無有去(역부무래무유거)로다. 오고 가는 것도 또한 없으며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러 왔지만, 또 가야 되고

갔다고 해서 그 가는 것이 전부냐? 또 와야 되는

오고ㆍ가고, 가고ㆍ오는 것이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워야 늘 공부하러 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돌아가서 각자 사찰에서 열심히 맡은바 임무를 다하는,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不於此死而生彼(불어차사이생피)하면,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나지 않으면

是人悟解가 諸佛法(시인오해 제불법)이라. 그 사람은 불법을 깨달아 안 것이네

了達諸法眞實性(요달제법진실성)하야,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과

而於法性無分別(이어법성무분별)이로다. 법성품에 분별이 없음에 요달하여

知法無性無分別(지법무성무분별)하면, 법의 성품 분별이 없음을 알면 

此人善入諸佛智(차인선입제불지)라. 이는 불지에 잘 들어간 것이네

 

法性遍在一切處(법성편재일체처)와 법의 성품은 일체처에 두루 하여

一切衆生及國土(일체중생급국토)하며, 일체중생과 국토와 

[법성은 일체 處와, 일체중생과 모든 국토에 遍在 두루두루 꽉 차있지만 법성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닌, 전부 법성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면 전부 “법성이다.”  

‘너도 법성ㆍ나도 법성ㆍ산도 법성ㆍ하늘도 법성ㆍ강물도 법성ㆍ바다도 법성! 전부 법성 아닌 것이 없다.’]

三世悉在無有餘(삼세실재무유여)호대삼세에 모두 빠짐없이 존재하나

[앞에는 공간적, 삼세는 시간적인 과거ㆍ현재ㆍ미래에 다 있어서 남은 데가 없는, 다 있다는 뜻]

亦無形相而可得(역무형상이가득)이로다역시 형상도 얻을 수도 없네

[법성은 수억만 광년 저 끝에 있는 멀고 먼 별세계까지도 다 차 있지만, 형상을 가히 얻을 것이 없다. 내재 돼있는 원리니까 법성의 형상은 없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진여불성이 엄청나게 크게 있어서 나를 좌지우지하고세상을 좌지우지하고전부 그것이 들어서 나를 이러고 저러고 하지만찾아보려니까 손에 안 잡히는 渾大有(혼대유) 너무 크게 있습니다그렇게 크게 있는 것이 확연한데도 찾으려면 찾아지지 않는 그 것이 不可得입니다.]

一切諸佛所覺了(일체제불소각료)를일체제불이 깨달아 아신 바를

悉皆攝取無有餘(실개섭취무유여)하야모두 다 남김없이 섭취하여

雖說三世一切法(수설삼세일체법)이나, 비록 삼세의 일체법을 설한다 해도

如是等法이 悉非有(여시등법 실비유)로다. 이런 법은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네

[우리가 화엄경을 이렇게 저렇게 말하면서 감동 하고ㆍ또 감동 해서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고 좋아하지만,

如是等法悉非有 이와 같은 등의 법이 실로 있는 것이 아니더라. 기가 막힌 도리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 그대로입니다.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감격하고, 무엇이 들어서 화를 내게 하는지 확실한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悉非有 실로 모두 다 있는 것이 아니더라. 그것이 도대체가 불가사의입니다.]

 

如諸法性遍一切(여제법성편일체)하야, 법의 성품 일체에 두루하듯이

菩薩廻向도 亦復然(보살회향 역부연)하니, 보살의 회향도 그와 같아서

[보살의 회향= 善用其心 그 마음 잘 쓰는 것도 또한 그러하니]

如是廻向諸衆生(여시회향제중생)하야, 모든 중생에게 그렇듯 회향하며 

常於世間無退轉(상어세간무퇴전)이로다. 언제나 세간에서 물러섬이 없네.    

[달마상서, 달마스님의 관상 보는 책이 있는데, 달마스님 저술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서= 관상에 대한 이야기에 결론이 萬相이 不如心相이라. 족상 복상 관상 두상 수상, 온갖 이야기를 다 해놓고 만 가지 형상이 不如心相 마음의 모습 같은 것이 없다. ‘마음 잘 쓰는 것보다 더 나은 형상은 없다.’ 사람이 아무리 잘 생교도 마음 잘 못쓰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상은 꾀죄죄하게 생겨도 마음 잘 쓰는 사람은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善用其心입니다

길고 긴 第六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의 끝인데, 한 마디로 어떤 모습보다도 회향하는 善用其心이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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