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遍學品 第七十四 卷八十六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4. 변학품(遍學品)을 풀이함 6
問曰:知、見有何差別?
묻나니, 아는 지(知)와 보는 견(見)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有知非見,有見非知,有亦知亦見,有非知非見。
有知非見者,盡智、無生智,除世閒正見及五見,餘慧皆名知,是慧非見。
見非知者,五見、世閒正見、見諦道中八忍,是見非知。
餘無漏慧,亦名知、亦名見。離是見、知,餘法非見非知。
답하나니, 어떤 분이 말하기를 “알기는 하면서도 보는 것이 아닌 지비견(知非見)이 있고,
보기는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견비지(見非知)가 있으며,
또한 알기도 하고 보기도 하는 역지역견(亦知亦見)이 있으며,
아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닌 비지비견(有非知非見)이 있다”고 하였다.
‘알기는 하되 보는 것이 아닌 지비견(知非見)’이라 함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그것이니, 세간의 바른 정견(正見)과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상견 단견), 사견(邪見),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의 오견(五見)을 제외한 그 밖의 지혜를 모두 ‘아는 지(知)’라 하는 것으로, 이 지혜는 보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보기는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견비지(見非知)’라 함은 유신견(有身見), 변집견(邊執見, 상견 단견), 사견(邪見), 견취(見取), 계금취(戒禁取)의 오견(五見)과 세간의 바른 정견(正見)과 견제도(見諦道) 가운데의 고법인(苦法忍)ㆍ고류인(苦類忍), 집법인(集法忍)ㆍ집류인(集類忍), 멸법인(滅法忍)ㆍ멸류인(滅類忍), 도법인(道法忍)ㆍ도류인(道類忍)의 팔인(八忍)으로, 이것은 보기는 하면서도 아는 것이 아니다.
그 밖의 무루혜(無漏慧)는 또한 ‘아는 지(知)’라 하기도 하고 ‘보는 견(見)’이라 하기도 하나니,
이 보는 견(見)과 아는 지(知)를 여읜 나머지 법은 ‘보는 것도 아닌 비견(非見)이며, 아는 것도 아닌 비지(非知)인 것이다.
復次,有人言:定心名爲見,定、未定通名爲知。如『轉法輪經』中說:“苦諦知已應見,知已分別知 是法應見,是苦諦;是法應斷,是集諦;是法應證,是滅諦;是法應修,是道諦。”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정해진 마음의 정심(定心)을 보는 견(見)이라 하고, 정(定)해진 후나 미정(未定) 모두를 통틀어서 아는 지(知)라고 한다”라고 하나니,
마치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 말하기를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는 알고 난 뒤에 보아야 하는 지이응견(知已應見)이고, 알고 난 뒤에 분별하여 아는 지이분별지(知已分別知)이니,
‘이 법을 마땅히 보아야(見) 한다’고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의 진리인 고제(苦諦)요,
‘이 법은 마땅히 끊어야(斷)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쌓임의 진리인 집제(集諦)요,
‘이 법은 마땅히 증득해야(證) 한다’고 하는 것은 곧 사라짐의 진리인 멸제(滅諦)이며,
‘이 법은 마땅히 닦아야(修) 한다’고 하는 것은 곧 도의 진리인 도제(道諦)이다”고 한 것과 같다.
或知煩惱斷名爲見,如九斷知。須菩提聞般若異名字,所謂聖法,故問:“何等是聖法?”
佛答:“聖法中諸賢聖 若佛、若辟支佛、聲聞等,以欲等諸法不合不散。”
혹은 번뇌가 끊어짐을 아는 것을 보는 견(見)이라 하는데, 마치 愛結(사랑) · 恚結(성냄) · 慢結(자만하는 것) · 無明結(무지) · 見結(그릇된 견해) · 取結(집착) · 疑結(의심) · 嫉結(질투) · 慳結(인색함)의 구결(九結)이 끊어짐을 아는 것과 같다.
수보리 존자가 반야의 다른 이름이란 이른바 거룩한 성법(聖法)이라는 말씀을 듣고 여쭈기를 “어떠한 것이 거룩한 성법(聖法)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거룩한 성법(聖法) 가운데에서는 모든 성현인 부처님과 벽지불과 성문 등은 욕(欲, 욕탐) 등 모든 법과는 합하지도 흩어지지도 않는 불합불산(不合不散)이니라”고 하셨다.
不合者,一切煩惱名顚倒,顚倒卽無所有;若無所有,云何可合?若不合,云何有散?
不合故不輕凡人,不散故不自高;於一切衆生不憎不愛。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이라 함은, 일체 번뇌의 뒤바뀐 전도(顚倒)라 하나니, 이 뒤바뀜은 곧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이니라. 만약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라면, 어떻게 합할 수 있으며, 만약 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흩어짐이 있겠는가?
합하지 않기 때문에 범부를 업신여기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이기 때문에 스스로 뽐내지도 않나니,
이에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又復此中佛自說不合不散因緣,所謂:“是法皆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
無色與無色法不合不散,乃至無相法與無相法不合不散。何以故?是法皆一性故,自性不與自性合,是名一相無相般若波羅蜜,菩薩應學;學已,無法可得相。
또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합하지 않는 불합(不合)과 흩어지지 않는 불산(不散)의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이 법 모두는 무색(無色), 무형(無形), 무대(無對)의 동일한 하나의 일상(一相)으로, 이른바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이다"고 하신 것이니, 무색(無色)의 법은 무색(無色)의 법과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나아가 무형(無形)의 법은 무형(無形)의 법과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나니, 왜냐 하면, 이 법은 모두 동일한 성품의 일성(一性)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성(自性)은 스스로의 자성(自性)과 합하지 않나니, 이를 곧 동일한 하나의 일상(一相)으로서의 무상(無相)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니,
보살은 마땅히 배워야 하는 응학(應學)이나, 배우고 난 학이(學已)한 후에는 어떠한 법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須菩提白佛言:“世尊!菩薩不學色相耶?乃至不學有爲、無爲相耶?
世尊!若不學是諸法相,云何經中說‘菩薩先學諸法相,後過聲聞、辟支佛地’?
若不過聲聞、辟支佛地,云何入菩薩位?”如此中廣說。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물질(色)의 상(相)을 배우지 않으며, 나아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상(相)까지도 배우지 않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이 제법의 상(相)을 배우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경에서 ‘보살은 먼저 제법의 상(相)을 배운 뒤에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 넘는다’고 하는 것이며?
만약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지 못하면 어떻게 보살위에 들어가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佛告須菩提:“若諸法實有相,應當學是相。須菩提!一切法實無相,是故菩薩不應學相。無相亦不應學,以取相故。”破相事,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제법에 실로 상(相)이 있다면 마땅히 그 상(相)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만, 수보리야, 일체법은 실로 상이 없는 무상(無相)이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상(相)을 배우지 않아야 하며, 무상(無相)도 배우지 않아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상(相)을 취하기 때문에 상(相)을 깨뜨리신 것이다.
如「問相品」中說。有佛、無佛,諸法常住,一相,所謂無相。
須菩提從佛聞一切法無相,今還問佛:“世尊!若一切法非有相、非無相,云何菩薩修般若?”
若有無相,因無相可修般若,今相以無相皆無,因何事得修般若?
若不修般若,不能得過聲聞、辟支佛地,乃至不能安立於三福田。”
'문상품(問相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처님이 계시는 유불(有佛)이거나 계시지 않는 무불(無佛)이거나 간에 제법은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는 동일한 일상(一相)이라서 이른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으로부터 일체법이 무상(無相)이라는 것을 듣고 도리어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약 일체법이 상이 있는 것도 아닌 비유상(非有相)이고 상이 없는 것도 아닌 비무상(非無相)이라면 보살이 어떻게 반야를 닦는 것입니까?
만약 무상(無相)이 있다면 그 무상(無相)으로 인(因)하여 반야를 닦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상은 무상(無相)이니, 모두 없는 것이라 한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반야를 닦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반야를 닦지 못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을 수도 없고, 중생을 삼복전(三福田)에 확고히 세울 수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바새경(優婆塞經)에서 삼복전(三福田)을 말씀하셨는데 ①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섬기면 그 은혜를 갚음이 될 뿐 아니라 따라서 복을 얻게 되는 보은복전(報恩福田) ②삼보(불 ․ 법 ․ 승)를 공경 ․ 공양하면 비단 무량한 공덕이 생할 뿐 아니라 또한 복을 얻게 되는 공덕복전(功德福田) ③가난한 사람에게 자비심으로 베풀면 자연히 복을 얻게 되는 빈궁복전(貧窮福田)이다 - 불교사랑
佛可其言:“如是!如是!”而更說修般若因緣,所謂:“菩薩不以修相故,是修般若;修無相故,是修般若。”
부처님께서 그의 말을 인가하시어 “참으로 그러하고 그러하느니라”고 하셨으며, 또 반야를 닦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은 상을 닦는 수상(修相)으로써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반야를 닦는 수반야(修般若)요,
무상(無相)을 닦기 때문에 이 반야를 닦는 수반야(修般若)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復問:“世尊!云何修無相是修般若?若無相云何可修?”
佛答:“修諸法壞是修般若。”以諸法壞故,無相相亦壞。譬如車分壞故,車相亦滅;又如輪分壞故,輪相亦滅。如是乃至微塵。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떻게 무상(無相)을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수반야(修般若)입니까?
만약 무상(無相)이라면 어떻게 닦을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시기를 “제법의 무너짐의 괴(壞)를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것이니라. 제법은 파괴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無相)의 상(相) 또한 파괴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수레가 조각조각 파괴되었기 때문에 수레라는 상(相)도 소멸된 것과 같고, 또 수레바퀴가 조각조각 파괴되었기 때문에 수레바퀴라는 상(相) 또한 소멸된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작은 티끌의 미진(微塵)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世尊!何等是諸法可破壞者?”
佛答:“修色法壞,卽是修般若波羅蜜;乃至修斷一切煩惱習壞,卽是修般若波羅蜜。”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제법이 파괴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물질(色)의 괴(壞)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요, 나아가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의 괴(壞)를 닦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須菩提白佛:“云何修色壞乃至修斷一切煩惱習壞是修般若?”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떻게 물질(色)의 괴(壞)를 닦으며, 나아가 일체 번뇌의 습기를 끊는 것의 괴(壞)를 닦는 것이 바로 반야를 닦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佛答:“菩薩一心念薩婆若,憐愍衆生,欲得正行般若波羅蜜,不念色是有法;如是修,是修般若。”以色是定實,有相過故。所以者何?佛此中自說因緣:“有相者不修般若,般若中無法尚無,何況有法!是人不修般若波羅蜜,亦不修五波羅蜜;是人著有法戲論,不修布施等。”如是著者,無有解脫,無道、無涅槃:無三解脫門故言無解脫,無聖人空法故言無道,無道故言無涅槃。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일심으로 살바야(薩婆若)를 생각하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며, 반야바라밀을 바르게 행하고자 하여 ‘물질(色)이 바로 존재하는 유법(有法)’이라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닦는 것이 곧 반야를 닦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물질(色)은 정해진 실체이고 유상(有相)이다’고 하는 것에는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상이 있는 유상(有相)이라면 반야를 닦지 않는 것이다. 반야 가운데에는 ‘무법(無法)’ 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유법(有法)’이겠는가!
이러한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닦지도 못하고 또한 다섯 가지 바라밀도 닦지 못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유법(有法)’이라는 희론에 집착하여서 보시 등도 닦지 못하나니, 이와 같이 집착한 이에게는 해탈도 없고 도(道)도 없고 열반도 없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삼해탈문(三解脫門)이 없기 때문에 ‘해탈이 없다’ 하고 ‘성인도 없다’ 하며, 공한 공법(空法)이기 때문에 ‘도가 없는 무도(無道)’라 하며, 무도(無道)이기 때문에 ‘열반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問曰:何以故無道?
묻나니, 무엇 때문에 도가 없는 무도(無道)라 하신 것입니까?
答曰:是人戲論諸法,不厭老、病、死,著法故生邪見;邪見故,不能如實觀身不淨等;不能觀身故,不修身念處;不修身念處故,不能修受、心、法念處;不修四念處故,不能修乃至一切種智。何以故?著有法故。
답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제법에 대하여 희론을 펴면서 늙고ㆍ병들고ㆍ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법에 집착하기 때문에 삿된 사견을 내며, 삿된 사견 때문에 몸에 대한 신부정(身不淨) 등을 여실하게 관찰하지 못하며, 몸을 관찰하는 관신(觀身)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념처(信念處)를 닦지 못하고, 신념처를 닦지 못하기 때문에 수념처(受念處)와 신념처(信念處)와 법념처(法念處)를 닦지 못하며, 사념처를 닦지 못하기 때문에 나아가 일체종지까지도 닦지 못하나니, 왜냐 하면, 법이 있는 유법(有法)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須菩提問佛:“世尊!何等是有法?何等是無法?”凡人或於有法中生無想,無法中生有想,欲分別是事故問。
佛答:“二相是有,不二相是無。”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법이 있는 유법(有法)고 어떠한 것이 법이 없는 무법(無法)입니까?”라고 하였다.
범부는 혹 유법(有法) 가운데에서 없다는 생각을 내고, 무법(無法) 가운데에서 있다는 생각을 내기도 하나니, 이러한 것을 분별하고자 일부러 물은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둘의 이상(二相)이 곧 있는 유(有)요, 둘이 아닌 불이상(不二相)이 곧 없는 무(無)이니라”고 하셨다.
復問:“何等是二相?”佛答:“取色相卽是二。”如先品中說:“離色無眼,離眼無色。”乃至有爲、無爲性。何以故?離有爲不得說無爲,離無爲不得說有爲實相。是故,是二法不得相離;凡人謂此爲二,是故顚倒,
다시 여쭈기를 “어떠한 것이 둘의 이상(二相)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물질(色)의 상(相)을 취하는 것이 곧 둘이니라”고 하셨으니,
앞의 품(品)에서는 “빛깔(色)을 여의면 눈(眼)이 없고, 눈(眼)을 여의면 빛깔(色)도 없으며, 나아가 유위성과 무위성까지도 그러하다”고 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말할 수 없고, 무위를 여의고는 유위의 실상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의 이법(二法)은 서로 여읠 수 없음에도 범부는 이것을 둘이라 여기나니, 이 때문에 뒤바뀌어 전도(顚倒) 되는 것이다.
佛略說二相:“一切法中取相皆是二,一切二皆是有。”適有便有生死。何以故?有中生著心,著心因緣生諸煩惱,煩惱因緣往來生死,生死因緣憂悲苦惱。是故說:“適有法便有生死,有生死不得免老病憂苦。”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두 가지 상을 말씀하셨으니, “일체법 가운데에서 상을 취하면 그 모두는 둘이니, 일체의 둘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있는 유(有)이니, 있는 유(有)인 까닭에 곧 생사(生死)가 있게 된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있는 유(有) 가운데에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고, 집착하는 마음의 인연으로 모든 번뇌가 생기며, 그 번뇌의 인연으로 생사에 왕래하고, 생사의 인연으로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뇌하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마침내 법이 있으면 곧 생사가 있고, 생사가 있으면 늙고ㆍ병들고ㆍ근심하고 괴로워함을 면할 수 없다고 하셨다.
“須菩提!以是當知二相人無有檀波羅蜜乃至無有順忍,何況見色實相!乃至見一切種智實相!
是人若不見色等諸法實相,則無修道,云何有須陁洹果乃至斷一切煩惱習?”
수보리야, 둘의 이상(二相)을 지닌 사람에게는 단바라밀이 없고, 나아가 순인(順忍)까지도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하거늘, 하물며 물질(色)의 실상(實相)을 보겠으며, 나아가 일체종지의 실상을 보겠는가?
이 사람이 만약 물질(色) 등의 제법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면 도를 닦는 것조차 없을 것이거늘, 어떻게 수다원의 과위가 있겠으며, 나아가 일체 번뇌의 습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六波羅蜜有二種:世閒、出世閒。此人無有出世閒六波羅蜜故,是故說:“是有相人無有六波羅蜜。”若有者,但有世閒波羅蜜,此中不說世閒波羅蜜。聲聞道果尚無,何況有佛道!
육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세간(世間)의 것과 출세간(出世間)의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겐 출세간의 육바라밀이 없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모양이 있다는 유상(有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6바라밀이 없다”고 하신 것이니, 만약 있다고 한다면, 오직 세간의 바라밀이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에서는 세간의 바라밀을 말하지 않나니, 성문의 도과(道果)에서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부처님의 불도(佛道)에서겠는가!
問曰:順忍是何等順忍!
答曰:是小乘順忍。小乘順忍尚無,何況大乘!
묻나니, 순인(順忍)이라 하는데, 어떠한 것이 순인(順忍)입니까?
답하나니, 이것은 소승의 순인이다. 소승의 순인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하물며 대승에서겠는가!
問曰:頂法已能不退,何以說“乃至忍法”?
묻나니, 정법(頂法)에서는 이미 물러나지 않는 불퇴(不退)이거늘 무엇 때문에 더 나아가 인법(忍法)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법(頂法)= 인위(忍位)에 들어 곧장 견도에 이르든가 아니면 악취에 떨어지든가 그 중간에 위치한 것을 말한다. 이는 비록 동요는 있지만 최상의 선근을 낳는 절정(絶頂)의 지위이기도 하다.
인법(忍法)= 성자의 지위에 들기 직전의 상태이다. 여기에서 인(忍)이란 고ㆍ집ㆍ멸ㆍ도의 4제를 인정하고[忍] 받아들이게 된 것을 말한다.
答曰:聲聞法中亦說頂墮,摩訶衍亦說頂墮,汝何以故言“頂法不墮”?有人言:雖頂法不墮,不牢固、不能一定故不說。忍是久住,已入正定,雖未得無漏而與無漏同。以隨順苦法忍故名爲忍;未曾見是法故,見便能忍,是故名忍。是人於諸佛聖人爲小,於凡夫爲大。
답하나니, 성문법 가운데에서도 “정법에서 떨어지는 정타(頂墮)”라 하고, 마하연(摩訶衍)에서도 “정법에서 떨어지는 정타(頂墮)”라고 설명하고 있거늘,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정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가?
어떤 분은 말하기를 “비록 정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견고하지 못하고 일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인위(忍位)에 오래도록 머무르면 이미 바른 선정의 정정(正定)에 들어가서 비록 무루(無漏)를 얻지는 못하였어도 무루와 같나니, 고법인(苦法忍)을 따르는 수순(隨順)하기 때문에 인(忍)라 하며, 일찍이 이러한 법을 아직 보지 못한 까닭에 본 후에 잘 참는 능인(能忍)한 까닭에 인(忍)이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모든 부처님이나 성인에 비하면 작지만, 범부에 있어서는 위대한 것이다.
見色有二種:一者、見色實相了了,二者、斷繫諸色煩惱故名爲見。如色,乃至一切種智、一切煩惱習事,亦如是。若人見色、修道尚無,何況能得修須陁洹果乃至斷煩惱習!
‘물질을 보는 색견(見色)’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色)의 실상(實相)을 보아 똑똑히 아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물질(色)에 매인 번뇌를 끊은 까닭에 보는 견(見)이라 하는 것이다.
마치 물질(色)에서와 같이 일체종지와 일체 번뇌의 습기에 이르기까지도 이와 같으니,
만약 사람이 물질(色)을 본다면 도를 닦는 것조차도 오히려 없겠거늘, 하물며 수다원의 과위를 닦고 나아가 번뇌의 습기를 끊음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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