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願樂品 第六十四 卷七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4. 원요품(願樂品) 풀이함 2

 

世尊!若菩薩摩訶薩聞是深法,心不驚、不沒、不怖、不畏,是名爲行般若波羅蜜。

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我行般若波羅蜜,亦不見是般若波羅蜜,亦不見我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聲聞、辟支佛地去我遠,薩婆若去我近。’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깊은 심심법(甚深法)을 듣고 마음으로 놀라지 않고 침몰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겁내지도 않는다면, 이를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있다’고 보지 않고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다’고도 보지 않으며, 또한 ‘나는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라고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으나 살바야는 나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世尊!譬如虛空不作是念:‘有法去我遠、去我近。’何以故?世尊!虛空無分別故。

世尊!行般若波羅蜜菩薩亦不作是念:‘聲聞、辟支佛地去我遠,薩婆若去我近。’何以故?般若波羅蜜中無分別故。

世尊!譬如幻人不作是念:‘幻師去我近,觀人去我遠。’何以故?幻人無分別故。行般若波羅蜜菩薩亦不作是念:‘聲聞、辟支佛地去我遠,薩婆若去我近。’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은 ‘어떤 법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어떤 법은 나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허공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 또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환술로 만들어진 사람은 ‘환술사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구경하는 사람은 나와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환술로 만들어진 환인(幻人)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닦는 보살 역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世尊!譬如鏡中像不作是念:‘所因者去我近,餘者去我遠。’何以故?像無分別故。行般若波羅蜜菩薩亦不作是念:‘聲聞、辟支佛地去我遠,薩婆若去我近。’何以故?般若波羅蜜中無分別故。

世尊!行般若波羅蜜菩薩無愛無憎。何以故?般若波羅蜜自性不可得故。

世尊!譬如佛無愛無憎;行般若波羅蜜菩薩無愛無憎亦如是。何以故?般若波羅蜜中無憎無愛故。

世尊!譬如佛一切分別想斷;行般若波羅蜜菩薩亦如是,一切分別想斷,畢竟空故。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거울 속의 영상의 인(因)은 나와 가까우나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울 속의 영상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 역시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살바야는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은 사랑함의 애(愛)가 없고, 미워함의 증(憎)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자성(自性)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는 사랑함도 없고 미워함도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에게는 사랑함이 없고 미워함이 없는 것 또한 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는 미워함도 없고 사랑함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 일체의 분별을 끊으신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그와 같아서 일체의 분별하는 생각을 끊었으니, 그것은 필경공이기 때문입니다.


世尊!譬如佛所化人不作是念:‘聲聞、辟支佛去我遠,阿耨多羅三藐三菩提去我近。’何以故?佛所化人無分別故。行般若波羅蜜菩薩亦如是,不作是念:‘聲聞、辟支佛去我遠,阿耨多羅三藐三菩提去我近。’

世尊!譬如有所爲故作化,化所作事無分別。世尊!般若波羅蜜亦如是,有所爲事而修是事成就,而般若波羅蜜亦無分別。

世尊!譬如工匠、若工匠弟子有所爲故作木人,若男、若女、象、馬、牛、羊,是所作亦能有所作,是亦無分別。

世尊!般若波羅蜜亦如是,有所爲故說是事成就,而般若波羅蜜亦無分別。”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화인(化人)은 ‘성문과 벽지불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화인은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도 그와 같이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화작(化作)의 변화로 만들었으나, 그 화작(化作) 된 것에는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이, 닦아서 성취되는 일이 있어도 역시 반야바라밀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마치 공장(工匠, 장인)이나 그 장인의 제자가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인(木人)으로서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코끼리ㆍ말ㆍ소와 양을 만들었으나, 그 만들어진 것들은 맡은 바의 역할을 할 뿐, 그 소와 말에는 역시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도 그와 같이, 하는 바의 일이 있어서 그 일을 성취한다고 하나, 역시 반야바라밀에는 분별이 없습니다.”


舍利弗問須菩提:“但般若波羅蜜無分別,禪波羅蜜乃至檀波羅蜜亦無分別?”

須菩提語舍利弗:“禪波羅蜜無分別,乃至檀波羅蜜亦無分別。”

사리불 존자가 수보리 존자에게 물었다.

“다만 반야바라밀만이 분별이 없습니까? 아니면 선바라밀, 내지는 단바라밀도 또한 분별이 없습니까?”

수보리 존자가 사리불 존자에게 말하여, 

“선바라밀도 분별이 없고, 나아가 단바라밀에 이르기까지도 분별이 없습니다.”


舍利弗問須菩提:“色無分別乃至識亦無分別?眼乃至意無分別?色乃至法無分別?眼識觸乃至意識觸無分別?眼觸因緣生受乃至意觸因緣生受,四禪、四無量心、四無色定、四念處乃至八聖道分,空、無相、無作,佛十力、四無所畏、四無㝵智、大慈大悲、十八不共法、阿耨多羅三藐三菩提、無爲性,亦無分別?

須菩提!若色無分別乃至無爲性無分別,若一切法無分別,云何分別有六道生死 是地獄、是餓鬼、是畜生、是天、是人、是阿修羅?云何分別是須陁洹、斯陁含、阿那含、阿羅漢、辟支佛、諸佛?”

사리불 존자가 수보리 존자에게 물었다.

“물질(色)은 분별이 없고 또한 수항행식(受想行識)에 이르기까지도 분별이 없으며, 눈(眼)  내지  ()ㆍ코()ㆍ혀()ㆍ몸() ()에 이르기까지도 분별이 없고, 빛깔(色)ㆍ  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ㆍ법(法)에 이르기까지도 도 분별이 없습니까?

안식촉(眼識觸), 이식촉(耳識觸), 비식촉(鼻識觸), 설식촉(舌識觸), 신식촉(身識觸), 의식촉(意識觸)에 이르기까지도 분별이 없고,

눈의 접촉의 인연으로 생긴 느낌의 안촉생수(眼觸生受), 이촉생수(耳觸生受), 비촉생수(鼻觸生受), 설촉생수(舌觸生受), 신촉생수(身觸生受), 의촉생수(意觸生受)에 이르기까지와

사선ㆍ사무량심ㆍ사무색정과 사념처 내지 8성도분과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 부처님의 십력ㆍ사무소외ㆍ사무애지ㆍ대자대비(大慈大悲)ㆍ18불공법(不共法)ㆍ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무위성(無爲性도 역시 분별이 없습니까?

수보리여, 만약 일체법에 분별이 없다면 어떻게 6도(道) 가운데에서 생사(生死)가 있어서, 이것은 지옥(地獄)이요, 이것은 아귀(餓鬼)이며, 이것은 축생(畜生)이요, 이것은 하늘(天)이며, 이것은 사람(人)이요, 이것은 아수라(阿修羅)이라고 분별하겠습니까?

어떻게, 이것은 수다원(須陀洹)이요, 사다함(斯陀含)이며, 아나함(阿那含)이요, 아라한(阿羅漢)이요, 벽지불(辟支佛)이며, 모든 부처님이라고 분별하겠습니까?”


須菩提報舍利弗:“衆生顚倒因緣故,造作身口意業,隨欲本業報受六道身:地獄、餓鬼、畜生、人、天、阿修羅身。如汝言:‘云何分別有須陁洹乃至佛道?’舍利弗!須陁洹卽是無分別故有,須陁洹果亦是無分別故有,乃至阿羅漢、阿羅漢果、辟支佛、辟支佛道、佛、佛道,亦是無分別故有。

舍利弗!過去諸佛亦是無分別、斷分別故有。以是故,舍利弗!當知一切法無有分別、不壞相,如法如、法性、實際故。舍利弗!如是菩薩摩訶薩應行無分別般若波羅蜜;行無分別般若波羅蜜已,便得無分別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존자가 사리불 존자에게 답하여, 

“중생은 뒤바뀌어 전도(轉倒)된 인연 때문에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을 지으며, 

탐욕의 근본이 되는 업보(業報)에 따라 지옥ㆍ아귀ㆍ축생ㆍ사람ㆍ하늘 및 아수라 육도의 몸을 받는 것이니, 

당신의 말씀과 같이 어떻게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의 도(道)가 있다고 분별하겠습니까?

사리불이여, 수다원은 곧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고, 수다원의 과(果, 과위)도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며, 나아가 아라한ㆍ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ㆍ벽지불의 도와 부처님ㆍ부처님의 도(道) 역시 분별이 없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사리불이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역시 분별이 없었으며 분별을 끊으셨기 때문에 존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일체법에는 분별이 없다고 알아야 하나니, 파괴되지 않는 불괴상(不壞相)인 여여한 법의 여법(如法)과 여여한 법성(法性)이며 여여한 실제(實際)이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분별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분별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한 뒤에는 곧 분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다.”


▶論. 釋曰:是時,釋提桓因及會中人皆共歡喜。釋提桓因作是念:“是菩薩行菩薩道時,所有功德尚勝一切衆生,何況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衆生有二種:一者、發心,二者、未發心。發心菩薩勝一切未發心者。所以者何?是人種無量無上佛法因緣,欲度一切衆生,令離苦得樂;其餘衆生但自求樂,欲與他苦。如是等因緣故,發心者勝。

▷논. 해석한다. 이때 석제환인과 그 모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며, 석제환인이 생각하기를 ‘이 보살이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있게 되는 모든 공덕조차도 오히려 일체 중생들보다 수승하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룸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중생에게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발심(發心)한 이요, 둘째는 아직 발심하지 못한 미발심(未發心)의 중생이다.

발심한 보살은 아직 미발심자보다 뛰어나나니, 왜냐하면 이 사람은 무량하고 무상한 부처님 불법의 인연을 심고,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면서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중생은 자기 스스로의 즐거움만을 구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괴로움을 주는 까닭에,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발심(發心)한 이가 수승한 것이다.


問曰:諸阿羅漢、辟支佛及五通,是離欲人;發心者,或有未離欲但發心,云何得勝?

묻나니,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과 그리고 오신통을 지닌 이는 바로 탐욕을 여읜 이욕인(離欲人)이나니, 발심한 이라도 혹은 아직은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다만 발심만 한 이도 있거늘, 어떻게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先品中已種種答。阿羅漢等雖漏盡,不如初發心菩薩。譬如轉輪聖王太子,雖在胎中,已勝餘子;又如國王太子,雖未卽位,勝諸大臣有位富貴者。

답하나니, 이러함은 앞의 품(品) 가운데서 이미 여러 가지로 대답하였다.

아라한은 비록 번뇌가 다하였을지라도 처음 발심한 보살보다는 못하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전륜성왕의 태자는 비록 태 안에 있을지라도 벌써 그 밖의 다른 아들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으며, 또 마치 국왕의 태자가 비록 아직 왕위에는 오르지 않았을지라도 지위가 있고 부귀한 모든 대신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은 것이다.


發心菩薩有二種:一者、行諸波羅蜜等菩薩道,二者、但空發心。

此中說“行菩薩道”者;是人雖事未成就,能勝一切衆生,何況成就!如歌羅頻伽鳥在㲉中,未發聲已能勝諸鳥,何況成就!菩薩亦如是,雖未成佛,行菩薩道,說諸法實相音聲,破諸外道及魔民戲論,何況成佛!

발심한 보살에게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바라밀 등의 보살도(菩薩道)를 행하는 이요, 둘째는 다만 헛되이 발심만 한 이이다.

여기에서는 보살도를 행하는 이만을 말하는 것으로, 비록 이 사람이 아직 일을 성취 못하였을지라도 일체 중생들보다 뛰어나거늘, 하물며 성취한 후이겠는가?

마치 가릉빈가(歌羅頻伽, Kalaviṅka, 호성조好聲鳥) 새가 알 속에 있을 때에는 아직 소리를 내지 않았어도 벌써 그 밖의 새들보다 뛰어난 것과 같으니, 하물며 알에서 나온 뒤이겠는가?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비록 아직 부처님은 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보살도를 행하면서 제법의 실상(實相)을 설하는 음성은 모든 외도와 악마의 백성들의 쓸모없는 희론을 부수거늘 하물며 성불한 뒤이겠는가?


有人言:若有能一發心言:“我當作佛,滅一切衆生苦。”雖未斷煩惱、未行難事,以心、口業重故,勝於一切衆生。

一切衆生皆自求樂,自爲身故,愛其所親;阿羅漢、辟支佛雖不貪世樂,自爲滅
苦故,求涅槃樂,不能爲衆生;菩薩心生、口言,爲度一切,是故勝。

어떤 분은 말하기를 “만약 한번만이라도 발심하면서 ‘나는 장차 부처님이 되어 일체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 줄 것이다’고 한다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고 아직 어려운 난사(難事)를 행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마음과 입의 심구업(心口業)이 중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보다 뛰어나며,

일체 중생들은 모두가 자기 스스로의 즐거움만을 구하며, 자기 스스로만을 위하고, 그와 친한 이만을 사랑하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비록 세간의 쾌락을 탐내지는 않지만, 스스로의 괴로움만을 소멸하기 위하여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지 않으나,

보살은 마음으로부터 입으로 하는 말까지 모두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수승하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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