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呵毘跋致品 第五十五 卷七十三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5. 아비발치품(阿毘跋致品)을 풀이함 3
問曰:今說“不生疑”,後說“深法不疑”,是二不疑有何差別?
묻나니, 여기서는 ‘의심을 내지 않는, 불생의(不生疑)’라 하시고, 뒤에서는 ‘깊은 법을 의심하지 않는, 심법불의(深法不疑)’라고 하시는데, 이 두 가지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答曰:今不疑者,四諦中如須陁洹所斷;後不疑者,於佛所知深法中不疑。是菩薩福德、智慧力故,雖不作須陁洹、未作佛,而能無此二疑。戒取名外道戒;行此外道戒,不得涅槃。餘四見皆名邪見。
답하나니, 여기에서의 ‘의심하지 않는, 불의(不疑, 불생의)’라는 것은 네 가지 진리인 사제(四諦) 가운데에서 마치 수다원이 끊는 바와 같은 것이며,
뒤의 ‘의심하지 않는, 불의(不疑, 심법불의深法不疑)’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아시는 깊은 심법(深法) 가운데에서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보살은 복덕과 지혜의 힘으로 비록 수다원이 되지 않았고,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이러한 두 가지의 의심이 없으며,
‘계취(戒取, 계금취)’는 외도의 계율이다. 외도의 계율을 행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며, 그 밖의 네 가지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의 사견(四見)도 모두 삿된 사견이라 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잘못된 견해, 즉 올바른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사견(邪見, mithyā-dṛṣṭi)으로 5견(五見)을 꼽으며, 계금취(戒禁取) ·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 등을 말한다.
深信業因緣果報故,不求吉事,不以華香等供養天。求道破憍慢根本故,常不生下賤家。不障他功德、常行勸助故,不生八難處。折薄婬欲、遠離諂媚心故,不受女人身。
업(業)ㆍ인연(因緣)ㆍ과보(果報)를 깊이 믿기 때문에 길한 길사(吉事)를 구하지 않고, 꽃과 향 등으로써 하늘에게 공양하지도 않으며,
도를 구하는 구도(求道)하면서 교만의 근본을 깨뜨리기 때문에 언제나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고, 다른 이의 공덕을 막지 않으면서 항상 권하고 돕기 때문에 8난(難)의 처소에도 나지 않으며, 음욕을 꺾어 얇게 하면서 아첨하는 마음을 여의었기 때문에 여인의 몸도 받지 않으며,
팔난(八難);
* 고통이 심해서 불법을 듣지 못하는, ① 재지옥난(在地獄難),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이 극심하여 수행하지 못하는 어려움. ② 재축생난(在畜生難),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축생으로 태어나서 고통스럽게 살아가기에 불법을 들을 수가 없는 것. ③ 재아귀난(在餓鬼難), 전생의 죄로 아귀에 태어나 부처님을 보거나 불법을 들을 수 없는 것과
*즐거움이 너무 많아서 불법을 듣지 않는, ④ 재장수천난(在長壽天難), 하늘나라 장수에는 즐거움이 너무 많아 그것을 즐기느라 불법을 듣지 못하는 것. ⑤ 재울단월난(在鬱單越難), 수미산의 북쪽에 있는 최상의 세계로 이곳 사람들의 수명은 일천 세다. 이곳 역시 즐거움이 너무 많아 그것을 즐기느라 불법을 듣지 못하는 것과
⑥ 농맹음아난(聾盲音啞難), 신체적 결함으로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말.
⑦ 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 세상일에는 너무 똑똑하고 총명하지만 세상의 지혜를 초월한 부처님의 불법은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움.
⑧ 불전불후난(佛前佛後難),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므로 불법을 직접 들을 수 없는 어려움.
사분율(四分律)의 팔난은, 수계(受戒), 자자(自恣) 등을 행할 때 팔난의 일이 닥칠 경우, 간략히 자자를 설할 것을 인정하였는데, 이때 팔난은 왕난(王難), 적난(賊難), 화난(火難), 수난(水難), 병난(病難), 인난(人難), 비인난(非人難), 독충난(毒蟲難)이다.
復次,餘人雖行十善道,或一、或二、或三,不能具足四種;是菩薩大悲心,深愛善法故,具足行四種。常修集十善道故,乃至夢中不行十不善道。餘人所修福德,但自爲身;小菩薩雖爲衆生,亦自爲己;阿鞞跋致諸所作福,皆爲衆生,不爲其身。若福德可以與人,則盡與衆生,更自修習;但不可得與。故菩薩以十二部經教化衆生,亦但爲衆生,不自爲己。
또한 그 밖의 사람들이 비록 열 가지 착한 길의 십선도(十善道)를 행할지라도 혹 하나이거나 혹 둘이거나 혹 셋이어서 네 가지를 두루 갖출 수 없지만, 이 보살은 대비심(大悲心)으로 착한 선법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히 갖추어서, 네 가지 모두를 행하며,
항상 십선도(十善道)를 닦고 쌓은 때문에 꿈속에서도 열 가지 착하지 않은 십불선도(十不善道)를 행하지 않으며,
그 밖의 사람들이 닦는 바의 복덕은 다만 그들 스스로만을 위한 것으로, 작은 소(小)보살은 비록 중생들을 위한다고 할지라도 역시 스스로를 위할 뿐이지만, 아비발치 보살이 짓는 모든 복덕은 중생을 위한 것이요, 스스로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복덕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전부를 중생에게 다 주나,
스스로가 닦아 익혔으나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살은 12부경(部經)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나니, 역시 중생들을 위할 뿐, 스스로를 위하지는 않는 것이다.
復次,菩薩信等五根利故,雖未作佛,於諸法能信。佛此中更說空因緣:“菩薩不見色等法故,無生疑處。”復次,是菩薩常行慈悲心故意業柔軟,意業柔軟故身、口慈業成就。
또한 보살은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 등의 오근(五根)이 예리하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제법에서 능히 믿으며,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다시 공한 공인연(空因緣)을 말씀하시니, 보살은 물질(色) 등의 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의심을 내지 않으며,
또한 이 보살은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의업(意業)이 부드러우며, 의업이 부드럽기 때문에 몸과 입의 인자한 자업(慈業)이 성취되는 것이다.
問曰:慈悲心外道亦有,云何說是阿鞞跋致相?
묻나니, 자비로운 마음은 외도에게도 있거늘 어떻게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상(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答曰:外道雖有而不深,不能遍念衆生,亦不常有,非諸法實相和合故;菩薩不爾。復次,是菩薩呵五欲、除五蓋,入五支初禪,不與五蓋俱。五蓋覆心,能耗減智慧、破佛道、開魔路故。
답하나니, 비록 외도에게도 있을지라도 깊지 않으므로 중생들을 두루 생각할 수도 없고, 항상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제법의 실상(實相)에 화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지 않으며, 또한 이 보살은 외적 대상인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의 5경(五境)에 대한 탐욕 또는 집착인 색욕(色欲) · 성욕(聲欲) · 향욕(香欲) · 미욕(味欲) · 촉욕(觸欲)의 오욕(五欲)을 꾸짖고,
탐욕개(貪欲蓋), 진에개(瞋恚蓋), 수면개(睡眠蓋), 도회개(掉悔蓋), 의개(疑蓋)의 오개(五蓋)를 제거하며,
각(覺)ㆍ관(觀)ㆍ희(喜)ㆍ낙(樂)ㆍ심일경성(心一境性)의 다섯 가지 마음의 5지(支)의 초선(初禪)에 들고 오개와는 함께하지 않나니, 오개가 마음을 덮으면 지혜를 소모시키고 부처님의 불도를 파괴시키면서 악마의 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是菩薩知一切有爲作法虛妄不實、如幻如夢,無爲法空無所有、寂滅相,是故於一切處無所愛著。於衆生中,乃至佛亦不著;於法中,乃至涅槃亦不著。瞋,麤罪,小菩薩已斷,故不說;愛,深微難斷,故今說。
이 보살은 일체의 유위(有爲)의 만들어진 작법(作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지만,
무위(無爲)의 법은 공하여서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적멸상(寂滅相)임을 알기 때문에 일체법에 대하여 애착하는 바가 없으니,
중생에서 부처님까지도 집착하지 않고, 법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애착하지 않으며,
성내는 진(瞋)은 거친 추죄(麤罪)이라서 작은 소보살들도 이미 끊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으며,
애착은 깊고 미미한 것이라서 끊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復次,是菩薩深入禪定故,守護一切衆生;守護一切衆生故,常一心念,不惱衆生。不破戒故,出入來去等安詳一心。“擧足下足,視地而行”者,爲護衆生、爲避亂心故。
또한 이 보살은 선정에 깊이 들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을 수호하고, 일체 중생들을 수호하기 때문에 항상 한 마음의 일심(一心)으로 염하면서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계율을 깨뜨리지 않기 때문에 들고 나고 오고 가는 등(사위四威)이 안온하고 의젓하며,
‘한 마음의 일심(一心)으로 발을 들고 발을 내리되 땅을 보면서 간다’고 함이란, 뭇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요, 산란한 마음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復次,是菩薩久修集無量無邊善法,身中無八萬戶虫,亦少於病痛故,衣服、臥具等常淨潔無污。得諸法實相等善根力故,身中無八萬戶虫。心淸淨故,身、口等亦淸淨;離虛誑邪曲等下賤煩惱,故心淸淨。二事淸淨故,雖行世閒,離諸逼迫苦惱;心不厭沒故,出過聲聞、辟支佛地。是菩薩貴佛道故,不貴利養;雖行頭陁,不貴是法,以是法是究竟道因緣少分,非究竟道。是名阿鞞跋致菩薩行、類、相貌。
또한 이 보살은 오랜 동안 무량하고 무변하게 착한 선법을 닦고 쌓았기에 몸속에는 8만 마리의 충(虫)이 없으며, 또한 질병도 적기 때문에 의복과 침구 등이 항상 정결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제법의 실상(實相) 등과 선근(善根)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몸속에는 8만 마리의 벌레가 없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몸과 입 등도 청정하며,
거짓되고 삿되고 굽은 등의 하천한 번뇌를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며, 몸과 마음 두 가지가 청정하기 때문에 비록 세간사를 할지라도 모든 핍박과 고뇌를 여의며,
마음이 싫증내거나 침몰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넘는 것이다.
이 보살은 부처님의 불도를 귀히 여기기 때문에 이양(利養)을 귀히 여기지 않고, 비록 두타(頭陀)를 행할지라도 그 법을 귀히 여기지 않으니, 이 법은 구경도(究竟道)의 인연에서 볼 때에는 적은 부분일 뿐이요 구경도가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을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행(行)과 유(類, 부류)와 상모(相貌, 모습)이라 하는 것이다.
問曰:是菩薩未得佛道,未斷諸煩惱,云何常不生慳貪等諸惡心?
묻나니,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불도를 얻지 못하였으며, 아직 모든 번뇌를 끊지 못했거늘, 어떻게 항상 간탐 등의 모든 나쁜 악심을 내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阿鞞跋致菩薩得無生法忍時斷諸煩惱,但未斷習;若不斷者,云何常能不生諸慳貪等障道心?如經說:“須陁洹乃至阿羅漢,卽是菩薩無生法忍。”
답하나니, 아비발치 보살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때에 모든 번뇌를 끊었으나, 아직 그 습(習, 습기)을 끊지 못했을 뿐이다. 만약 모든 번뇌를 끊지 않았다면 어떻게 모든 간탐 등의 도를 장애하는 장도심(障道心)을 항상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치 경에서 “수다원 내지 아라한은 곧 그것이 보살에게는 무생법인이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有人言:菩薩行六波羅蜜、深修集諸功德故、諸煩惱折薄,心中不生故,是名“常不生”。
또한 어떤 분이 말하기를 “보살은 육바라밀을 행하고 깊이 모든 공덕을 닦고 쌓았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꺾어지고 희박하여져서 마음 속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나지 않는, 상불생(常不生)이다”고 하며,
復次,是菩薩無量世行禪波羅蜜故,心住不動;積習般若故,深入智慧。
是菩薩知法味微妙故,從他聞法一心聽受;樂法情深故,所聞若三乘法、若外道及世閒法,自心妙故,皆與般若和合,不破法相。譬如壯夫無病,所食之物,無不消化;又如佛得最上味相,雖復苦辛不美之食,在佛口中皆是上味;又如煮石蜜欲熟時,種種物內中,皆成石蜜,妙味力盛故。菩薩亦如是,般若波羅蜜力盛故,種種諸法,能令皆與般若合爲一味,無諸過罪。
또한 이 보살은 무량한 세세 동안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행한 까닭에 마음이 부동(不動)에 머물며,
반야를 쌓고 익혔기 때문에 깊은 지혜에 들어가며,
이 보살은 법미(法味)의 미묘함을 알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들으면 일심으로 청수(聽受)하며,
법을 좋아하는 마음의 낙법정(樂法情)이 깊은 까닭에 들은 법이 삼승(三乘)의 법이거나, 외도의 법이거나 혹은 세간의 법이거나, 스스로의 마음이 묘한 까닭에 모두가 반야와 화합하여서 법상(法相)을 깨뜨리지 않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장부(壯夫)가 병이 없으면 먹은 음식물마다 소화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고,
또 부처님께서는 가장 좋은 맛의 미상(味相)을 얻으신지라 비록 쓰고 맵고 맛없는 음식을 드실지라도 부처님의 입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가 으뜸가는 맛으로 변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석밀(石蜜)을 끓일 때, 갖가지를 그 속에 섞어 넣으면 모두가 석밀이 되는 것과 같으니,
묘한 맛의 묘미력(妙味力)이 왕성하기 때문이라.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의 힘이 왕성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법이 모두 반야와 화합하여 한 맛의 일미(一味)가 되면서 모든 허물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復次,世閒事者,菩薩所起身、口諸業,皆爲憐愍度衆生故;此憐愍心皆入般若波羅蜜初門。又復世閒諸事因緣,乃至坐、起、行步、飮食、言語,常念安隱衆生。是來去等法,皆入法性,如“破來去”中說。產業之事,亦如是。是名阿鞞跋致相。
또 세간사(世閒事)란 보살이 일으키는 신업(身業)ㆍ구업(口業)의 모든 업이니, 이 모두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자민심(憐愍心)은 모두가 반야바라밀에 들어가는 초문(初門)이며,
또한 여러 세간사의 인연 내지는 앉고(坐) 일어나고(起) 다니고(行步) 음식을 먹고, 말을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항상 중생을 안온하게 할 것을 생각하나니, 이 오고 가고 하는 등의 법은 모두가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오고 가는 일을 타파한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일을 만들어 내는 산업(産業)’ 또한 그와 같나니, 이러함을 아비발치의 상(相)이라 하는 것이다.
▶經. 復次,須菩提!若惡魔於阿鞞跋致菩薩前化作八大地獄,一一地獄中,有千萬億菩薩皆被燒煮,受諸辛酸苦毒,語菩薩言:‘是諸菩薩皆是阿鞞跋致,佛所授記,墮大地獄中。汝若爲佛授阿鞞跋致記者,當入是大地獄中;佛爲授汝地獄記,汝不如還捨菩薩心,可得不墮地獄,得生天上。’須菩提!若是菩薩見是事、聞是事,心不動、不疑、不驚,作是念:‘阿鞞跋致菩薩若墮地獄、畜生、餓鬼中,終無是處!’須菩提!以是行、類、相貌,當知是名阿鞞跋致菩薩摩訶薩。
▷경.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아비발치 보살 앞에서 변화로 팔대지옥을 만들어 놓고, 그 낱낱 지옥 안에는 천만억의 보살들이 모두 불에 타고 삶아지는 등의 갖은 고생을 받는 것을 보게 하면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이 보살들은 모두가 아비발치이며 부처님께서 수기하신 이들인데 대지옥 안에 떨어져 있다. 만약 그대도 부처님으로부터 아비발치의 수기를 받게 되면 장차 이 대지옥 안에 떨어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대에게 지옥의 수기를 주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보살심을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며, 그러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에 가서 태어 날 것이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이 보살이 이러함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놀라지도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아비발치 보살이 지옥과 축생과 아귀 중에 떨어지는 일은 끝내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이러한 행(行)과 유(類, 부류)와 상모(相貌, 모습)으로써 그가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惡魔化作比丘被服,來至菩薩所,語菩薩言:‘汝先聞應如是淨修六波羅蜜乃至應如是修行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事汝疾悔捨!汝先於過去、未來、現在諸佛所,從初發心乃至法住,於其中閒所作善根,隨喜、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事汝亦疾放捨!若汝疾捨,我當語汝眞佛法。汝先所聞,皆非佛法、非佛教,皆是文飾合集作耳!我所說是眞佛法。’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비구로 변화하여 가사(袈裟)를 입고 보살에게로 와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먼저 이와 같이 청정하게 육바라밀을 닦아야 하고, 나아가 이와 같이 청정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수행해야 한다고 들었을 것이나, 그대는 그러힘을 빨리 뉘우치고 버리도록 하시오.
그대는 먼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처음 초발심해서부터 그 법이 머무르기까지의 그 중간에 지은 모든 선근을 따라 기뻐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할 것이나, 이러함도 그대는 빨리 버리도록 하시오.
만약 그대가 빨리 버린다면 나는 그대에게 참으로 진정한 부처님의 불법을 말해 주겠소.
그대가 먼저 들었던 바는 모두가 부처님의 불법이 아니요, 부처님의 가르침도 아니니, 그 모두는 말만 그럴 듯하게 꾸며서 모아 놓은 것일 뿐이오. 내가 말하는 바가 바로 진실한 부처님의 불법이오’라고 하느니라.
若是菩薩聞作是說心驚、疑、悔,當知是菩薩未得諸佛授記、未定住阿鞞跋致性中。若是菩薩心不動、不驚、不疑、不悔,隨順依止無作無生法,不信他語、不隨他行,行六波羅蜜時,不隨他語;乃至行阿耨多羅三藐三菩提時,亦不隨他語。須菩提!譬如漏盡阿羅漢,不信他語、不隨他行,現見諸法實相,惡魔不能轉。
만약 이 보살이 이러한 말을 듣고는 마음으로 놀라거나 의심하거나 후회한다면, 그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얻지도 못하였고, 아직 아비발치의 성(性) 가운데에 확고히 머물러 있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만약 이 보살의 마음이 부동(不動)이고 놀라지 않으며,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면서 무작(無作), 무생(無生)의 법에 수순하고 의지하며, 다른 이의 말을 받지도 않고, 다른 이의 행을 따르지도 않는다면,
역시 육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요,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면서도 역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마치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다른 이의 말을 믿지도 않고 다른 이의 행을 따르지도 않으며, 현재의 모든 제법의 실상(實相)을 보고 있으므로 악마가 그를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如是,須菩提!阿鞞跋致菩薩摩訶薩亦如是,求聲聞道、辟支佛道人不能破壞、不能折伏其心。須菩提!是菩薩摩訶薩必定住阿鞞跋致地中,不隨他語;乃至佛語不直信取,何況求聲聞、辟支佛人及惡魔、外道梵志語!終無是處!何以故?是菩薩不見有法可隨信者,所謂色,若受、想、行、識,若色如乃至識如,乃至不見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況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須菩提!以是行、類、相貌,當知是名阿鞞跋致菩薩摩訶薩。
이와 같이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를 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그 보살을 파괴할 수도 없고 그 마음을 조복할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틀림없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므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곧이곧대로 믿거나 취하지도 않거늘, 하물며 성문이나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이나 악마ㆍ외도ㆍ범지의 말이겠는가! 그러한 일은 끝내 있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따르고 믿을 만한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 이른바 물질(色)과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과 물질의 색여(色如)에서부터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여(如)까지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보지 않거늘,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如)이겠는가!
수보리야, 이러한 행(行)과 유(類, 부류)와 상모(相貌,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의 보살마하살이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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