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兩不和合品 第四十七之餘 卷六十九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 三藏法師 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잡법사 구마라집 소역.
47. 양불화합품(兩不和合品)을 풀이함② 2
復次,須菩提!說法者欲至他方飢餓、穀貴、無水之處,聽法者不欲隨去。兩不和合,不得書深般若波羅蜜乃至正憶念,當知是爲魔事。聽法者欲至他方飢餓、穀貴、無水之處,說法者不欲去。兩不和合,不得書深般若波羅蜜乃至正憶念,當知是爲魔事。
다시 수보리야, 법을 설할, 설법자(說法者)는 기아(飢餓)로 곡식은 귀하고 물이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려 하는데, 법을 들을 청법자(聽法者)가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쓰거나(書) 나아가 바르게 정억념(正憶念) 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마사(魔事)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청법자(聽法者)는 기아로 곡식은 귀하고 물은 없는 다른 지방으로 가고자 하는데, 설법자(說法者)가 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악마의 마사(魔事)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說法者欲至他方豐樂之處,聽法者欲隨從去。說法者言:‘善男子!汝爲利養故追隨我,汝善自思惟,若得、若不得,無令後悔!’以是少因緣故,兩不和合。聽法者聞之心厭,作是念:‘是爲距逆我,不欲與我相隨。’便止不去。兩不和合,不得書深般若波羅蜜乃至正憶念,當知是爲魔事。
다시 수보리야, 설법자는 풍요하고 쾌락한 다른 지방으로 가려하고, 청법자가 그를 따라가고자 하는데 설법자가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이양(利養, 이익)을 위하여 나를 따라 가는 것이니, 그대는 잘 생각하셔서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뒷날에 후회가 없게 하시오’라고 할 때,
이 조그마한 인연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며, 청법자가 그의 말을 듣고 싫어하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려고 나를 거부하는 것이구나’라고 하면서 그만두고, 따라가지 않으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마사(魔事)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說法者欲過曠野,賊怖、旃陁羅怖、獵師怖、惡獸毒蛇怖;聽法者欲隨逐去。說法者言:‘善男子!汝何用到彼?彼中多有諸怖 賊怖乃至毒蛇怖。’聽法者聞之,知其不欲與般若波羅蜜書、持乃至正憶念,心厭,不欲追隨。以是少因緣故,兩不和合,當知是爲魔事。
다시 수보리야, 설법자가 넓은 들판을 지나가려 할 때, 도둑의 두려움과 전다라의 두려움과 사냥꾼의 두려움과 거친 짐승과 독사의 두려움이 있는 데도 청법자가 따라가려 하므로, 설법자가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려 하는가? 그 곳에는 도둑의 두려움에서 독사의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많은 두려움이 있다’라고 하자,
청법자가 그 말을 듣고는 ‘그는 함께 반야바라밀을 쓰고 지니고 나아가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며 마음으로 싫어하면서 따라가지 않으며, 이 조그마한 인연 때문에 양쪽이 화합하지 않으면 이것도 바로 마사(魔事)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復次,須菩提!說法者多有檀越數往問訊,以是因緣故,語聽法者:‘我有因緣,應往到彼。’聽法人知其意,便止。兩不和合,不得書深般若波羅蜜乃至正憶念,當知是爲魔事。”
다시 수보리야, 설법자는 단월(檀越, 시주)들이 많이 있으므로 자주 찾아가는데, 이런 인연으로써 청법자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이 있어서 그를 찾아 가 보아야 한다’고 하자, 청법자가 곧 그의 뜻을 알고 그만두어버리므로 양쪽이 화합하지 않아서 깊은 심(深)반야바라밀을 쓰거나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수 없으면, 이것도 바로 마사(魔事)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論. 問曰:有人書、持、讀、誦般若波羅蜜,不能行而犯戒,或可有是;若不信,云何從受法?
▷論. 묻나니,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서사해서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계율을 범하는데, 혹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만약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로부터 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答曰:是人不信般若波羅蜜所謂畢竟空,但欲求名故讀、誦、廣說;如佛弟子不信外道經書,亦爲人講說。復次,不能深心信樂般若故名不信,非都不信。
답하나니,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이 이른바 필경공임을 믿지 않으면서도 다만 이름만을 구하고자, 짐짓 읽고 외우며 널리 해설할 뿐이니, 마치 부처님의 불제자가 외도의 경서(經書)를 믿지 않으면서도 역시 남을 위하여 강설(講說)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깊은 심심(深心)으로 반야를 믿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지 아예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問曰:弟子法應供養師,奉諸所有,何以言師不能施?
묻나니, 제자의 법으로는 마땅히 스승에게 공양하고 온갖 것을 바쳐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스승이 보시를 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弟子作是念:“師少物不能捨,何況捨身!雖讚說布施,是爲欺誑!是故不和合。”
답하나니, 제자가 생각하기를 ‘스승은 조그마한 물건조차도 버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몸을 버리겠는가? 비록 보시를 찬탄할지라도 이것은 바로 속임수이다’고 하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불화합(不和合)인 것이다.
弟子欲以四事供養師。師少欲知足故不受,或羞愧似如賣法故不受。或師多知多識,無所乏少,能供給弟子,弟子自念:“人當謂我貪師衣食故受法。”或自以德薄,不消所給。此心雖好,不能成般若波羅蜜故,亦是魔事。師鈍根者,是誦經師,非解義師。十二部經,亦是誦經師。
제자는 음식ㆍ의복ㆍ와구ㆍ탕약의 네 가지 공양물의 사사(四事)로써 스승에게 공양하고자 하나, 스승이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이므로 받지 않기도 하고, 혹은 법을 파는 것과 같아서 부끄러이 여기어서 받지 않기도 하며,
혹 스승은 아는 것이 많고 부족한 것이 없으므로 제자에게 물건을 공급하게 되면, 그 제자가 생각하기를 ‘사람들은 내가 스승의 옷과 밥을 탐내는 까닭에 법을 받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고 할 것이며,
혹은 ‘나 자신의 복덕이 박하기 때문에 주는 것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하기도 할 것이니,
이러한 마음들은 비록 좋은 것이기는 하나 반야바라밀을 이룰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도 마사(魔事)이며,
‘근기가 둔한 스승, 사둔근(師鈍根)’이라 함이란, 이 사람은 바로 경을 외우는 송(誦)을 할 수는 있으나 뜻을 해설하지 못하는 스승이며, 12부경(部經)도 그저 외우는 송(誦)만 할 뿐인 스승이며,
復次,師有六波羅蜜者,作是念:“弟子罪人、鈍根,不能行六波羅蜜,著世閒事,但有弟子名,無有實事。”是師不知弟子聞般若已,後成大事,但以現前無六波羅蜜,不肯教化。
弟子亦作是念:“六波羅蜜義,我亦能行;師但能口說,不能修行” 不知師轉身因緣當成大事,又不知師別有讀誦利益因緣,故不和合。
또 ‘육바라밀을 갖춘 스승’이라고 함이란, 스승이 생각하기를 ‘제자는 죄업이 많아서 근기가 둔한 둔근(鈍根)이므로 육바라밀을 행할 수 없으며, 세간의 일에 집착하므로 다만 제자라고 이름할 뿐, 실다운 일이란 없을 것이다’고 한다면,
이 스승은 제자가 반야를 듣고 나서 뒷날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다만 바로 눈앞에 육바라밀을 알지 못하는 것만을 보고 교화하려 하지 않는 것이며,
제자도 생각하기를 ‘육바라밀의 이치는 나 역시도 행할 수 있는 것이며, 스승은 다만 입으로 설명만 할 수 있을 뿐, 수행하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으로, 그는 스승이 몸을 바꾸어 장차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며,
또 스승에게는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의 이익 인연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불화합(不和合)인 것이다.
復次,弟子直信著善法。師不著法,以方便行六波羅蜜;弟子謂爲不深樂六波羅蜜。何以知之?師或時讚歎六波羅蜜;或時斷人著故,破散六波羅蜜。弟子有方便,亦如是。
또한 제자는 바로 믿으면서 착한 선법에 집착하지만, 스승은 법에 집착하지 않고 방편으로써 육바라밀을 행하고 있으므로, 제자가 생각하기를 ‘육바라밀을 깊이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스승은 때로는 육바라밀을 찬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의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육바라밀을 깨뜨리기도 하기 때문이다’고 하나니,
제자는 방편이 있는 것에 대하여서도 역시 그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問曰:若弟子得陁羅尼,師無陁羅尼,何以爲師?
묻나니, 만약 제자는 다라니(陀羅尼, 총지)를 얻었으나, 스승에게는 다라니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스승이라 하겠습니까?
答曰:陁羅尼有種種。有弟子得聞持陁羅尼,能持、能誦,不能解義;師能爲解說。弟子或能得諸法實相陁羅尼義,而不能次第讀誦;或師得聞持陁羅尼,未得大悲故,輕賤弟子,不能教導。
답하나니, 다라니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어떤 제자는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를 얻었으므로 능히 지니고 능히 독송하기는 하되 그 뜻을 해설하지 못하므로 스승이 그를 위하여 해설하여 주며,
또 제자는 제법의 실상(實相)인 다라니의 이치를 얻었으나 차례대로 독송할 수 없기도 하며,
혹 스승은 문지다라니를 얻었으나 아직은 대비(大悲)를 얻지 못한 때문에 제자를 업신여기면서 교화하거나 인도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問曰:弟子欲受持般若波羅蜜,師不與,或可有是;云何師欲與法,弟子不欲受?
묻나니, 제자는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는 수지(受持)하고 싶어 하는데, 스승이 주지 않는 것은 혹 있을 수 있지만, 어떻게 스승이 법을 주고자 하는데 제자가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如先答,弟子見師有過故,不欲受法。復次,師欲教化前人爲弟子;而是人或邪見諸惡因緣故,不肯受教。
復次,一切衆生所行法,同則和合;一人離五蓋,一人不離,故相輕,相輕故不和合。一切上法皆爾。
답하나니, 앞에서 대답한 것과 같이, 제자가 스승의 허물만을 보기 때문에 법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또한 스승은 그 앞에 있는 사람을 교화하여 제자를 삼으려고 하지만, 이 사람이 혹은 삿된 소견이나 여러 악한 인연 때문에 교화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일체 중생들이 행하는 소행법(所行法)에는 곧 화합하는 것이니,
한 사람은 탐욕개(貪欲蓋) · 진에개(瞋恚蓋) · 혼면개(惛眠蓋) · 도회개(掉悔蓋) · 의개(疑蓋)의 다섯 가지 장애인, 오개(五蓋)를 여의었고, 한 사람은 오개를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방을 업신여기게 되며, 상대방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며,
일체의 으뜸가는 상법(上法)들에 대하여서도 모두 그렇게 서로 달라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復次,書、誦般若波羅蜜乃至正憶念時,一人呵三惡道,一人讚歎諸天,是事如先答。雖不能都破其善行,且壞其大乘,授小乘法。
또한 반야바라밀을 서사하고 독송하며 나아가 바르게 기억할 때에 한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를 꾸짖고, 한 사람은 모든 하늘을 찬탄하기 하나니, 이렇게 다른 것도 앞에서 대답한 것과 같으며, 비록 그것이 선행(善行)을 파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의 대승(大乘)을 무너뜨리고 소승(小乘)의 법을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復次,師少欲知足,不樂衆聚;弟子多有人衆。師作是念:‘弟子雖好可度,而將徒衆多。’師深著善法,捨離弟子。弟子一身,亦如是。
또한 스승은 욕심이 적은 소욕지족(少欲知足)이며, 많은 대중의 모임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므로 그 스승이 생각하기를 ‘제자는 비록 잘 제도될 수 있기는 하나 도중(徒衆)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스승은 착한 선법에 깊이 집착하여 그 제자를 버리게 되는 것이며, 제자가 대중을 멀리하여 일신(一身)일 뿐인 것도 역시 그와 같으며,
復次,說法者意:若弟子隨我意行,若去、若住,隨時問訊,如是等。聽法者但欲從求法利,不能行此衆事。是不和合。或時聽法者隨意進止、問訊等;說法者不聽,作是念:“何用是事?損我功德!”聽法者意謂輕賤,不相好喜。是不和合。
또한 설법자의 뜻에 ‘만약 제자가 나의 뜻을 따라 행한다면 혹은 단월(시주)에게 거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면서 때때로 방문하는 등의 일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설법자는 다만 그로부터 법의 이익인 법리(法利)만을 구하고자 할 뿐,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일들을 행하지 못하므로, 이러한 일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며,
혹은 청법자가 설법자의 뜻을 따라 가고 오고 하면서 방문하기도 하나, 설법자가 허락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로 공덕을 까먹는 것인가?’ 하므로 청법자가 천하게 여기면서 좋아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다.
復次,師爲利養故欲與法;弟子心則不敬師:“云何欲賣經法?”弟子亦如是,爲財利養讀誦般若,非淸淨心故;師知弟子心如是,則薄賤不與。故不和合。復次,師欲至他方,路經嶮難;弟子惜身命故不能隨,作是念:‘我有身,然後求法。’弟子欲去,亦如是。飢餓、穀貴、無水處,亦如是。
또 스승은 세상의 이익인, 이양(利養)을 위하여 법을 주고자 하므로 제자가 마음으로 그 스승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경법(經法)을 팔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며,
제자 또한 그와 같아서 재물과 이양을 위하여 반야를 독송하는 것이라서 청정한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스승이 그 제자의 마음을 알고서, 이와 같이 천하게 여기므로 서로가 화합하지 않는 것이며,
또 스승이 다른 지방으로 가고자 할 때에 험난한 길을 지나가야 할 것이므로 그 제자는 몸과 목숨이 아까운 까닭에 함께 가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내 몸이 있은 연후에야 법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며,
제자가 함께 가고자 하나, 스승이 거부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며,
굶주리고 곡식이 귀하며 물이 없는 곳으로 가는 것도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復次,師欲至豐樂處;弟子欲隨師,或羞愧不欲將去;或弟子串樂,不任涉遠;或道里懸遠。或師諳彼國;弟子不悉,謂師稱美彼國,不必實爾;時或慮師,謂貪飮食故去。如是等種種因緣,師語弟子:“如汝所聞彼國土所有,不必盡爾,好自籌量!若自欲去者便去,無以財物豐樂故去,至彼不得隨意,勿以見怨!”
또한 스승이 풍요하고 안락한 곳으로 가고자 할 때 제자가 스승을 따라가려 한다면,
혹은 부끄러워하면서 데리고 가려 하지 않기도 하고,
혹은 제자가 쾌락에 빠져 멀리 가지 않으려 하기도 하며, 혹은 길이 너무 멀기도 하고,
혹은 스승은 그 나라를 잘 알지만 제자는 잘 모르므로 말하기를, “스승은 그 나라를 찬미하고 계시지만, 반드시 그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스승을 염려하면서 “음식을 탐하기 때문에 간다”고 하기도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 때문에 스승이 제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들었던 대로 그 국토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는 않다. 잘 생각한 뒤에 가고 싶거든 함께 갈 것이요, 재물의 풍요와 쾌락을 생각하여 가지는 말라. 그곳에 가서 뜻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원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師復爲說:“汝聞彼國土豐樂故去,非爲法故,不須隨我。”師好心止弟子,不知是壞般若波羅蜜因緣。弟子聞是說,敬難師故不能答,便止不去,故不和合。師復欲至遠國,彼中有種種虎狼、賊盜;語弟子言:“彼閒多難,汝不須去!”弟子聞已便止。師但知彼有難事故止弟子,不知是壞般若波羅蜜因緣。
스승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 국토에 풍요와 쾌락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는 것이요, 법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스승은 좋은 마음으로 제자를 말리기는 하나,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인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며,
제자도 이 말을 듣고 스승을 공경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을 멈추기 때문에 화합하지 않는 것이며,
또 스승이 먼 나라로 가고자 할 때, 그 중도에는 갖가지 범과 이리와 도둑들이 있으므로 제자에게 말하기를 “그곳에는 많은 재난이 있으니, 너는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제자는 그 말을 듣고 함께 갈 것을 중지하나니,
그 스승은 다만 그곳에 재난들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제자를 말린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인연임을 모르는 것이다.
問曰:若遠國多難,何以自去?
묻나니, 만약 먼 나라에 재난이 많다면 그 자신은 무엇 때문에 가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師彼國生故,服習彼土,能自防護。有人言:彼有好師、經書,不惜身命故去。師作是念:“我身自死則可,云何枉他?”如是等因緣故,止弟子不令去。師多有知識檀越,心生樂著;弟子少欲知足,不著檀越。師常隨時問訊檀越;弟子但欲求法,不喜是事。師知其意,語言:“我有因緣,不得爲汝說法。”弟子聞已,不悅:“師貴俗緣,不貴於法。”是不和合。
답하나니, 어떤 분은 말하기를 “스승은 그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땅에서 사는 것에 익숙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고,
다시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곳에는 좋은 스승과 경서가 있으므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부러 가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 스승이 생각하기를 ‘나 자신은 죽어도 되거니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잘못되게 하겠는가’라고 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제자를 말리면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스승에게는 아는 지인과 단월들이 많으므로 마음에 애착을 내지만, 제자는 욕심이 적고 만족할 줄 알므로 단월들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스승은 항상 때때로 단월을 방문하지만, 제자는 다만 법만을 구하는 구법(求法)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니, 그 스승이 그의 뜻을 알고 말하기를 “나에게는 인연(일)이 있어서 너에게 설법할 수 없다”고 하나니,
제자는 그 말을 듣고는 좋아하지 않으면서 “스승은 세속의 인연을 귀히 여기고, 법을 귀히 여기지 않는구나”고 하는 등의 일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는 불화합(不和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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