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含受品第二十三 卷五十一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3. 함수품(含受品)을 풀이함 6
復次,須菩提!我、衆生乃至知者、見者無所有故,當知四念處無所有;四念處無所有故,乃至十八不共法無所有;十八不共法無所有故,當知虛空無所有;虛空無所有故,當知摩訶衍無所有;摩訶衍無所有故,當知阿僧祇、無量、無邊無所有;阿僧祇、無量、無邊無所有故,當知一切諸法無所有。
다시 수보리야, 나(我)와 중생에서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에 이르기까지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사념처(四念處)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나아가 18불공법(不共法)에 이르기까지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사념처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나아가 18불공법까지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허공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허공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마하연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고,
마하연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아승기와 무량함과 무변함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아승기와 무량함과 무변함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제법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以是因緣故,須菩提!是摩訶衍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何以故?我、衆生乃至一切諸法皆不可得故。
이러한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이 마하연은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나니, 왜냐하면 나(我)와 중생에서 제법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니라.
復次,須菩提!我、衆生無所有乃至知者、見者無所有故,當知性地無所有,乃至已作地無所有;已作地無所有故,當知虛空無所有;虛空無所有故,當知摩訶衍無所有;摩訶衍無所有故,當知阿僧祇、無量、無邊無所有;阿僧祇、無量、無邊無所有故,當知一切諸法無所有。
다시 수보리야, 나(我)와 중생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고, 나아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성지(性地)도 무소유(無所有)이고 나아가 이작지(已作地)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나아가 이작지(已作地)에 이르기까지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허공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허공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마하연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마하연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아승기와 무량하고 무변함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아승기와 무량하고 무변함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제법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성지(性地)’라 함은, 성문은 난법(煖法)으로부터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에 이르기까지이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순인을 얻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애착하면서도 삿된 소견[邪見]을 내지도 않으며 선정의 물을 얻는 지위다.
이작지(已作地)’라 함은 성문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얻어서 아라한이 되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불지(佛地)를 성취하는 것이다. - 대지도론(大智度論) 75권
以是因緣故,是摩訶衍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何以故?我、衆生乃至一切諸法皆不可得故。
이러한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이 마하연은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나니, 왜냐하면 나(我)와 중생에서 제법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니라.
復次,須菩提!我、衆生乃至知者、見者無所有故,當知須陁洹無所有;須陁洹無所有故,當知斯陁含無所有;斯陁含無所有故,當知阿那含無所有;阿那含無所有故,當知阿羅漢無所有;阿羅漢無所有故,當知乃至一切諸法無所有。
다시 수보리야, 나(我)와 중생 내지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수다원(須陀洹)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다원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사다함(斯陀含)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사다함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아나함(阿那含)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아나함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아라한(阿羅漢)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아라한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제법에 이르기까지의 모두가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以是因緣故,須菩提!摩訶衍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何以故?須菩提!我乃至一切諸法皆不可得故。
이러한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이 마하연은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나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나(我)와 중생에서 제법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니라.
復次,須菩提!我乃至知者、見者無所有故,當知聲聞乘無所有;聲聞乘無所有故,當知辟支佛乘無所有;辟支佛乘無所有故,當知佛乘無所有;佛乘無所有故,當知聲聞人無所有;聲聞人無所有故,當知須陁洹無所有;須陁洹無所有故,乃至佛無所有。
다시 수보리야, 나(我)에서 아는 지자(知者)ㆍ보는 견자(見者)에 이르기까지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성문승(聲聞乘)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성문승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벽지불승(辟支佛乘)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벽지불승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불승(佛乘)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불승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성문인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성문인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수다원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수다원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나아가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佛無所有故,當知一切種智無所有;一切種智無所有故,當知虛空無所有;虛空無所有故,當知摩訶衍無所有;摩訶衍無所有故,當知乃至一切諸法無所有。
부처님도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일체종지(一切種智)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일체종지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허공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허공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마하연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며,
마하연이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나아가 제법에 이르기까지도 무소유(無所有)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以是因緣故,摩訶衍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何以故?我乃至一切諸法皆不可得故。
이러한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이 마하연은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나니, 왜냐하면 나(我)와 제법에 이르기까지 모두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니라.
譬如,須菩提!涅槃性中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是摩訶衍亦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
비유하자면, 마치 수보리가 열반성(涅槃性, 열반의 성품) 가운데에서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이 마하연 또한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느니라.
以是因緣故,須菩提!如虛空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是摩訶衍亦如是受無量無邊阿僧祇衆生。”
이러한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마치 허공이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이 마하연 또한 그와 같아서 무량하고 무변한 아승기의 중생을 받아들이느니라.
▶論. 問曰:何以不說“虛空廣大無邊故受一切物”,而言“虛空無所有故能受一切物衆生,摩訶衍亦無所有”?
▷논. 묻나니, 무엇 때문에 “허공은 광대하고 끝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허공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과 중생을 받아들이며, 마하연 또한 무소유(無所有)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現見虛空無所有,一切萬物皆在其中,以無所有故能受。
답하나니, 지금 허공을 보건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인데도 일체 만물이 모두 그 안에 있으니, 곧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問曰:心心數法亦無形質,何以不受一切物?
묻나니,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 또한 형질(形質)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일체 물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心心數法覺知相,非是受相,又無住處:若內、若外,若近、若遠,但以分別相故知有心。
답하나니,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깨달아 아는 각지상(覺知相)이요 그것은 받아들이는 수상(受相)이 아니다.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며, 단지 안이거나 바깥이거나 가깝거나 먼 것을 분별하는 분별상(分別相)이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는 유심(有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일 뿐이다.
形色法有住處,因色處故,知有虛空。以色不受物故,則知虛空受物;色與虛空相違,色若不受,則知虛空是受;如以無明故知有明,以苦故知有樂。因色無故說有虛空,更無別相。
물질의 형색법(形色法)이 머무르는 곳이 있는 유주처(有住處)라서 물질(色)이 있는 곳으로 인하여 허공이 있다는 것을 알며,
물질(色)은 물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물(不受物)인 까닭에 허공은 물건을 받아들이는 수물(受物)이라는 것을 알게 되나니, 물질(色)과 허공은 서로가 다른 상위(相違)한 것이다.
만약 물질(色)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허공 이것이 바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마치 광명이 없기 때문에 광명이 있게 되는 것을 알게 되고, 괴로움 때문에 즐거움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나니, 물질(色)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 있다고 말할 뿐 다시 다른 별상(別相)은 없는 것이다.
復次,心心數法更有不受義,如邪見心不受正見,正見心不受邪見。虛空則不然,一切皆受故。
또한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에는 다시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不受)의 뜻이 있으니, 마치 삿된 사견(邪見)의 마음은 바른 정견(正見)를 받아들이지 않고, 바른 정견(正見)의 마음은 삿된 사견(邪見)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으나,
허공은 그러하지 않으니, 일체의 모든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일체개수(一切皆受)이기 때문이다.
又心心數法生滅相,是可斷法,虛空則不然。心心數法、虛空,但無色、無形同,不得言都不異。以是故,諸法中說虛空能受一切。
또한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은 나고 없어지는 생멸상(生滅相)이라, 이것은 끊을 수 있는 법이지만 허공은 곧 그렇지 않으며,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과 허공은 단지 무색(無色)이고 형상도 없는 무형(無形)인 것이 동일한 것으로, 모두 다르다고 말 할 수는 없으니,
이러한 때문에 제법 가운데에서 “허공은 일체 물건을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問曰:我先問意不然!何以不言“虛空無量無邊能受一切物”,而言“無所有受一切物”?
묻나니, 제가 앞에서 물은 뜻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니, 다시 말씀드리자면, 무엇 때문에 “허공은 무량하고 무변하므로 일체 물건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에 일체 사물을 받아들이다.”고 하신 것입니까?
答曰:我說虛空無自相,待色相說虛空;若無自相,則無虛空,云何言無量無邊?
답하나니, 내가 말한 허공이란 자상이 없는 무자상(無自相)이라, 곧 색상(色相)을 기다려서 허공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자상이 없다면 허공도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무량하고 무변하다.”고 말하겠는가?
問曰:汝言“受相則是虛空”,云何言“無”?
묻나니, 그대는 받아들이는 수상(受相)이 곧 허공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없는 무(無)”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答曰:受相卽是無色相,色不到處,名爲虛空;以是故無虛空。若實有虛空,未有色時應有虛空!若未有色有虛空,虛空則無相。何以故?以未有色故。
답하나니, 받아들이는 수상(受相)이 곧 물질이 없는 무색상(無色相)이다.
물질(色)이 이르게 되지 않은 곳을 허공이라 하기 때문에 허공은 없는 것이다. 만약 진실로 허공이 있다면 아직 물질(色)이 있기 전에도 허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만약 아직 물질(色)이 있기 전에 허공이 있다면 그 허공은 없는 무상(無相)이니, 왜냐하면 아직 물질(色)이 있기 전이기 때문이다.
因色故知有虛空,有色故便有無色。若先有色後有虛空,虛空則是作法,作法不名爲常。若有無相法,是不可得,以是故無虛空。
물질(色)로 인하여 허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물질(色)이 있기 때문에 곧 물질(色)이 없다는 것도 아나니,
만약 먼저 물질(色)이 있고 뒤에 허공이 있다면 그 허공은 바로 조작하는 작법(作法)이니, 조작하는 작법은 항상한 것이라 하지 않으며,
만약 없는 무상법(無相法)이 있다면 이것은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나니,
이 때문에 없는 곳의 무처(無處)가 허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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