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出到品 第二十一 卷五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1. 출도품(出到品)을 풀이함 3
問曰:先言“不一故不合”,今何以言“一相”?
묻나니, 앞에서는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불합(不合)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무엇 때문에 일상(一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此中言“一相,所謂無相” 無相則無有出至佛道;爲引導凡夫人故 說言“一相”。
답하나니, 이 가운데에서 일상(一相)이라 하신것은 이른바 무상(無相)이니, 무상(無相)이라면 나오는 곳도 없고, 불도(佛道)에 이를 것도 없으니, 범부인을 인도하기 위하여 짐짓 “일상(一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實際”者,是諸法末後實相 無出無入;若有狂人欲使實際出至佛道者 此人則欲使無相法出。
如、法性、法相,如先說。
“실제(實際)”란 바로 제법의 맨 마지막이니, 실상(實相)또한 나오는 곳도 없고 들어가는 것도 없는 것이니, 만약 어떤 미친 광인(狂人)이 실제를 나오게 하여 불도에 이르게 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곧 무상법(無相法)을 나오게 하려는 것이다.
여(如)ㆍ법성(法性)ㆍ법상(法相)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不可思議性”者,有人言:卽是如、法性 實際 無量無邊 心心數法滅 故言不可思議。
復有人言:過實際、涅槃,更求諸法實,若有若無,是名不可思議。
復次,一切諸佛法,無有能思惟籌量者,故名不可思議。
復有人言:一切諸法,分別思惟,皆同涅槃相,是不可思議。
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이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와 무량하고 무변한 것과 마음(心)과 심수법(心數)]이 소멸하기 때문에 불가사의라 한다.”고 하며,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실제(實際)와 열반(涅槃)을 지나 다시 제법의 진실을 구하면서 있다 없다 하는 것을 불가사의라 한다.”고 하며,
또한 일체 부처님들의 불법은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에 불가사의라 한다고 하며,
다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일체법을 분별하고 생각해 보면 모두가 동일한 열반상(涅槃相)이니, 이것이 불가사의하다.”고 한다.
若人欲使空中出,此人則欲使無相法中出。此中佛自說:五衆空相,不能出三界,不能至薩婆若,五衆中五衆相空故,十二入乃至意觸因緣生受空亦如是。”夢等空譬喩,亦如是;自相空故,無出無至。
만약 사람이 공(空) 가운데 있는 것을 나오게 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곧 무상법(無相法) 가운데 있는 것을 나오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 오중(五衆)의 공상(空相)은 삼계(三界)에서 나올 수도 없고, 살바야(薩婆若)에 이를 수도 없다.”고 하셨으며,
오중 가운데에서는 오중상(五衆相)은 공(空)하기 때문이며, 12입(十二入)에서부터 의촉인연(意觸因緣)으로 생긴 느낌(受)의 공(空)함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꿈 등의 공(空)한 것의 비유도 또한 그와 같나니, 자상(自相)이 공한 자상공(自相空)이기 때문에 무출(無出)이고 이르는 곳도 없는 무지(無至)인 것이다.
若人欲使六波羅蜜出 此人則爲欲使無相法出。何以故?六波羅蜜因緣和合故無自性 自性無故空。
菩薩著六波羅蜜,墮邪道,故爲說空。十八空乃至一切種智,亦如是。
만약 사람이 육바라밀을 나오게 하려 한다면 이 사람은 무상법(無相法)을 나오게 하려는 것이니, 왜냐하면 육바라밀은 인(因)과 연(緣)으로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으며,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空)하나니,
보살이 육바라밀에 집착하여 삿된 사도(邪道)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공(空)을 말씀한 것이며,
18공(十八空) 내지 일체종지(一切種智)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問曰:六波羅蜜有道俗,俗可著故可說空;
出世閒六波羅蜜、三十七品乃至十八不共法,無所著故,何以說空?
묻나니, 육바라밀에는 도(道)와 속(俗)이 있어서, 세속에서는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공(空)을 말씀하실 수 있지만, 출세간(出世間)의 육바라밀과 37품(品, 37조도품) 내지 18불공법(십十八不共法)에는 집착할 바가 없거늘 무엇 때문에 공(空)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諸菩薩漏未盡,以福德、智慧力故行是法,或取相愛著故。
凡夫法虛妄顚倒,此法從凡夫法邊生,云何是實?
以是故,佛說是亦空,以喩無相法。是大乘卽是無相,無相云何有出、有至?
답하나니, 여러 보살의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고, 복덕과 지혜의 힘 때문에 이 법을 행하면서 혹은 상(相)을 취하여 애착하기 때문이며,
범부의 법은 허망하게 전도(顚倒)된 것이니, 이 법은 범부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거늘 어떻게 진실하겠는가?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것도 공하다 하시면서 무상법(無相法)에 비유하신 것이니, 이 대승은 곧 무상(無相)이라, 무상(無相)이거늘 어떻게 나오는 것이 있는 유출(有出)이고 이르는 곳이 있는 유지(有至)가 될 수 있겠는가?
諸法皆空,但有名字相、假名、語言;今名字等亦空,以喩無相,第一義中不可得;
世俗法中有相。名字等假名相義,如先說。
用如是法,從三界出,至薩婆若中住;非是實法,亦無所動。
제법 모두는 공(空)하며, 단지 명자(名字)의 상(相)과 임시의 가명(假名)과 언어만이 있을 뿐이라.
지금의 이름들 역시도 공한 것으로, 무상(無相)에 비유되며,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거니와 세속법(世俗法)에서는 상이 있는 유상(有相)인 것이다.
명자상(名字相)과 가명(假名)의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와 같은 법으로써 삼계로부터 나와서 살바야에 이르러 머무르나, 이 실상(실제)은 법(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바도 없는 것이다.
▶經. “須菩提!汝所問‘是乘何處住’者?須菩提!是大乘無住處。
何以故?一切法無住相故。是乘若住,不住法住。
▷경. 수보리야, 그대는 이 탈 승(乘)이 머무르는 주처(住處)를 물었는데, 수보리야, 이 대승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니라. 왜냐하면 일체법에는 머무르는 주상(住相)이 없기 때문이니, 이 대승이 만약 머무른다고 한다면 법주(法住)에 머무르지는 않느니라.
須菩提!譬如法性,不生不滅、不垢不淨、無起無作,非住非不住。
須菩提!是乘亦如是,非住非不住。
수보리야, 비유하자면, 법성(法性)은 불생(不生)이고 불멸(不滅)이며, 더럽지도 않은 불구(不垢)이고 깨끗하지도 않은 불정(不淨)이며, 일어남도 없는 무기(無起)이고, 지음도 없는 무작(無作)이며,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비주비불주(非住非不住)인 것과 같이, 수보리야, 이 대승 또한 그와 같아서 비주비불주(非住非不住)이니라.
何以故?法性相乃至無作相 非住非不住. 所以者何?法性相性空故 乃至無作性 無作性性空故。
諸餘法亦如是。須菩提!以是因緣故,是乘無住處,以不住法、不動法故。”
왜냐하면 법성상(法性相) 또는 무작상(無作相)은 머무르는 것도 아니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비주비불주(非住非不住)이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법성상(法性相)은 성공(性空)인 까닭이요, 나아가 무작성(無作性) 또한 무작성(無作性)이 공한 성공(性空)인 까닭이니, 그 밖의 제법 또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러한 인연 때문에 이 탈 승(乘)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니, 머무르지 않는 불주법(不住法)이고 움직이지 않는 부동법이(不動法)기 때문이니라.
▷論. 問曰:上言“是乘到薩婆若,更無勝法可去”,今何以復說“是乘無住處”?
▷논. 묻나니, 위에서 “이 탈 승(乘)은 살바야에 이르러서 다시는 더 나은 법으로 나아감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다시 “이 탈 승(乘)은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先說“以空、不二法故言住” 如幻、如夢,雖有坐臥行住,非實是住;
菩薩亦如是,雖言“到薩婆若住”,亦無定住。
답하나니, 앞에서의 말씀은 공(空)하여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주(住)”라 하셨으니, 마치 여환(如幻 허깨비) 같고 여몽(如夢, 꿈)과 같아서 비록 앉고 눕고 가고 서는 좌와행주(坐臥行住)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실로 머무르는 것이 아닌 것으니,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비록 “살바야에 이르러 머무른다.”고 말한다 하여도, 역시 일정하게 머무르는 것은 없는 것이다.
佛此中自說:“一切法從本已來無住相 云何獨大乘有住?若有所住 以畢竟空法住”
譬如:如、法性、法相、實際,非住、非不住,不生不滅,不垢不淨,不起不作。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되 “일체법은 본래부터 머무르는 모양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이거늘 어떻게 유독 대승만이 머무를 수 있겠느냐?
만약 머무르는 바가 있다면 필경공(畢竟空)의 법에 머무르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여(如)ㆍ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실제(實際)는 머무르는 것도 아닌 비주(非住)이고,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비불주(非不住)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불기불작(不起不作)인 것과 같다.”고 하신 것이다.
“不住”者,自相中不住;“非不住”者,異相中不住。
“不住”者,說空破有;“非不住”者,說世諦方便有住。
“不住”者,說無常破常相;“非不住”者,破滅相。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라 함이란, 자상(自相) 가운데에서 머무르지 않는 불주(不住)요,
“머무르지 않는 것도 아닌 비불주(非不住)”란, 다른 모양의 이상(異相) 가운데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불주(不住)는 공(空)을 말하면서 유(有, 존재)를 깨뜨리는 것이요,
비불주(非不住)는 세속의 이치인 세제(世諦)를 말씀하시면서 방편(方便)으로 머무름이 있는 유주(有住)이며,
불주(不住)라 함이란, 무상함을 말하면서 항상하다는 상(常)의 상(相)을 깨뜨리는 것이요,
비불주(非不住)라고 함이란, 사라지는 멸상(滅相)을 깨뜨리는 것이다.
此中佛自說:“法性、法性相空。何以故?自相空故。乃至無起無作諸餘法亦如是”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법성(法性)은 법성의 상(相)이 공한 법성상공(法性相空)이나니, 왜냐하면 자상공(自相空)이기 때문이니라. 나아가 일어남도 없고 지음도 없는 무기무작(無起無作)이니, 그 밖의 다른 법 또한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대지도론(大智度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1권 1 (2) | 2024.07.20 |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0권 7 (0) | 2024.07.19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0권 5 (1) | 2024.07.18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0권 4 (0) | 2024.07.18 |
대지도론(大智度論) 제50권 3 (1) | 2024.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