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發趣品 第二十 卷四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0. 발취품(發趣品)을 풀이함① 9
“污穢諸欲”者 如先說。此中佛說:“知是心相虛誑不實故 乃至不生欲心 何況受欲!
“모든 탐욕을 더럽게 여기는 오예제욕(污穢諸欲)”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심상(心相)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욕망의 마음조차 내지 않거늘 하물며 탐욕이겠는가!' 라고 말씀하셨으며,
“厭世閒心”者,如世閒不可樂相中說。此中佛說厭心果報,
所謂“無作解脫門”。“捨一切所有”者,如先說。
“세간을 싫어하는 염세간심(厭世閒心)”이란 세간불가락상(世間不可樂想)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는 “싫어하는 마음의 과보는 이른바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일체 소유를 버리는 사일체소유(捨一切所有)”도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不沒心”者,先已種種因緣說,菩薩聞是不沒不畏相。
“不生二識處”者,二識處,所謂眼、色中不生眼識,乃至意、法中不生意識。
菩薩住是不二門中,觀六識所知皆是虛誑無實;
作大誓願:“令一切衆生住不二法中,離是六識。”
“마음이 위축되지 않는 불몰심(不沒心)”은 앞에서 이미 갖가지의 인연으로 설명하였으며, 보살은 위축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불몰불외상(不沒不畏相)을 듣고 배우며,
“두 가지 식처를 내지 않는 불생이식처(不生二識處)”라 함은, 이식처(二識處)는 이른바 눈(眼)과 물질(色) 가운데에서 안식(眼識)을 내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뜻(意)과 법(法)에 이르기까지도 의식(意識)을 내지 않는 것이니,
보살은 둘이 아닌 불이문(不二門)에 머물러서 6식(識)으로 아는 바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이 없음을 관하면서, 대서원(大誓願)을 세워,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둘이 아닌 불이법(不二法)에 머물러서 이 6식(六識)을 여의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不惜一切物”者 不惜一切物中 雖有種種因緣 此因緣最大 所謂菩薩知一切法畢竟空 不憶念
滅一切取相。是故於受者不求恩惠,施中無高心,如是具淸淨檀波羅蜜。四地竟
“일체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 불석일체물(不惜一切物)”이라 함은, 일체 물건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에는 비록 갖가지의 인연이 있지만, 이 인연이 가장 큰 것으로,
이른바 보살은 일체법은 필경공(畢竟空)임을 알고, 일체의 취하는 취상(取相)이 소멸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받는 수자(受者)에 대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고, 베푸는 동안에도 잘난 체하는 마음이 없는 무고심(無高心)이니, 이와 같이 하여 청정한 단(壇, 보시)바라밀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제4지(地)를 마친다.
“遠離親白衣”者 行者以妨道故出家 若復習近白衣 則與本無異。以是故 行者先求自度 然後度人;
若未能自度而欲度人者,如不知浮人,欲救於溺,相與俱沒!
“속인과 친하지 않는 원리친백의(遠離親白衣)”란, 수행하는 이는 도(道)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출가한 것이거늘, 만약 속인과 가까이지낸다면 아무러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먼저 스스로를 제도한 후에 다른 이를 제도하는 것이다.
만약 아직 스스로가 아직 제도되지 못했으면서도 남을 제도하고자 한다면, 마치 물에 뜰 줄도 모르는 사람이 물 속에 빠진 이를 구하려다가 함께 빠져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是菩薩遠離親白衣 則能集諸淸淨功德;深念佛故 變身至諸佛國 出家 剃頭 著染衣。
所以者何?常樂出家法,不樂習近白衣故。
이 보살이 속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멀리 여의게 되면, 모든 청정한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깊이 부처님을 염(念)하기 때문에 몸을 변화하여 모든 부처님의 불국(佛國)에 이르러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게 되나니, 왜냐하면, 항상 출가하는 출가법(出家法)을 좋아하면서 속인과 가까이하기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遠離比丘尼”者,如初品中說。
“비구니를 멀리 여의는 원리비구니(遠離比丘尼)”라는 것은 초품(初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問曰:菩薩等心視一切衆生,云何不得共住?
묻나니, 보살은 동등한 등심(等心)으로 일체 중생들을 보거늘, 어떻게 함께 머물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是菩薩未得阿鞞跋致、未斷諸漏,集諸功德,人所樂著,以是故不得共住。
又爲離人誹謗,若誹謗者墮地獄故。
답하나니, 이 보살은 아직 아비발치(阿毘跋致, 불퇴전)에 이르지 못했고, 아직 모든 번뇌도 끊지 못하였으며, 모든 공덕을 쌓고 있는 사람이라 쾌락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사람들을 비방하지 않기 위해서이니, 만일 비방하게 되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遠離慳惜他家”者,菩薩作是念:“我自捨家,尚不貪不惜,云何貪惜他家?
菩薩法欲令一切衆生得樂,彼人助我與衆生樂,云何慳惜?
衆生先世福德因緣,今世少有功夫,故得供養,我何以慳嫉?”
“남의 집에 대한 간탐을 멀리 여의는 원리간석타가(遠離慳惜他家)”라 함은,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 자신의 집조차도 버려서 오히려 탐내고 아까워하지 않거늘, 어찌 남의 집을 탐내고 아까워하겠는가!
보살법(菩薩法)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사람은 나와 중생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며, 또한 그 사람은 나와 중생의 즐거움을 돕고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간탐을 부리겠는가!
중생은 전세의 복덕 인연과 금세에 적은 노력의 소공부(小功夫)로도 공양을 얻게 되거늘, 내가 어찌 간탐하고 질투하겠는가?”라고 한다.
“遠離無益談說”者,此卽是綺語,爲自心、他心解愁事,說王法事、賊事,大海、
山林,藥草、寶物,諸方國土,如是等事,無益於福、無益於道。
“무익한 담설을 멀리 여의는 원리무익담설(遠離無益談說)”이란, 곧 교묘하게 꾸민 말인, 기어(綺語)이니, 스스로의 마음과 다른 이의 마음에 근심(스트레스)되는 것을 풀기 위하여 국법에 대한 일과 도적에 대한 일과 큰 바다와 산과 숲과 약초와 보물이며 모든 지방과 국토 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복도 얻지 못하는 무익어복(無益於福)이고 도의 이익도 없는 무익어도(無益於道)이다.
菩薩愍念一切衆生沒在無常苦火,我當救濟,云何安坐空說無益之事?
如人失火,四邊俱起,云何安處其內語說餘事?
此中佛說“若說聲聞、辟支佛事,猶爲無益之言”,何況餘事!
보살은 일체 중생이 무상함과 괴로움의 불속에 빠져 있음을 가엾이 여기면서 “내가 마땅히 구제하리라.”고 해야 하거늘 어떻게 편히 앉아서 부질없이 무익한 것들을 말하겠는가!
마치 사람이 실수오 불을 내어서 사방에서 한꺼번에 타오르고 있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그 속에 편히 있으면서 다른 일이나 말하고 있겠는가!
여기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일을 말하는 것조차 오히려 무익한 말이 되거늘,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遠離瞋恚”者,心中初生名瞋心,以未定故;瞋心增長事定,打斫殺害,是名惱心;
惡口讒謗,是名訟心;若殺害打縛等,是名鬪心。菩薩大慈悲衆生故,則不生是心;
常防此惡心,不令得入。
“성냄을 멀리 여의는 원리진에(遠離瞋恚)”라고 함은, 마음 속에 처음에 생긴 것을 성내는 마음의 진심(瞋心)이라 하나니,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내는 진심(瞋心)이 더욱 자라서 확정되면서, 마음속으로 때리고 찢고 살해하게 되는 것을 괴롭히는 마음의 뇌심(惱心)이라 하고,
나쁜 말로 헐뜯으면 이를 송사하는 마음의 송심(訟心)이라 하며,
만약 몸으로 살해하고 때리고 묶거나 한다면, 이는 바로 싸우는 마음의 투심(鬪心)이라 하는 것으로,
보살은 중생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이러한 마음을 내지 않으며, 항상 이러한 악한 마음을 막아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것이다.
“遠離自大蔑人”者,不見內外法,所謂受五衆、不受五衆。
“遠離十不善道”者,菩薩觀十不善道中過罪種種因緣,如先說。
此中佛說:“十不善道破小乘,何況大乘!”
“자신은 위대하여서 남을 멸시하는 것을 멀리 여의는 원리자대멸인(遠離自大蔑人)”이라는 것은
내법(內法,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과 외법(外法,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내외법(內外法)을 보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5중(五衆)을 받아들이는 수오중(受五衆, 고수苦受 낙수樂受 희수喜受 우수憂受 사수捨受)과 5중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수오중(不受五衆)인 것이다.
“10불선도(十不善道)를 멀리 여읜다.”고 함은, 보살은 10불선도에 있는 허물의 갖가지 인연을 관찰하나니, 이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0불선도는 소승(小乘)조차도 파괴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대승(大乘)이겠는가”라고 하셨다.
“遠離大慢”者,菩薩行十八空,不見諸法定有大小相。
“遠離自用”者,拔七種憍慢根本故,又深樂善法故。
“遠離顚倒”者,一切法中,常、樂、淨、我不可得故。
“遠離三毒”者,三毒義如先說。又此三毒所緣,無有定相。五地竟
“크게 잘난 체함을 여의는 원리대만(遠離大慢)”라는 것은, 보살은 18공(十八空)을 수행하면서 제법은 일정하여 크고 작은 대소상(大小相)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며,
“스스로의 작용을 멀리 여의는 원리자용(遠離自用)”이란, 만(慢) · 과만(過慢) · 만과만(慢過慢) · 아만(我慢) · 증상만(增上慢) · 비만(卑慢) · 사만(邪慢)의 일곱 가지 교만인 칠만(七慢)의 근본을 뽑아 없애기 때문이며, 또한 착한 선법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이다.
“뒤바뀜을 멀리 여의는 원리전도(遠離顚倒)”란, 일체법에서는 항상하다는 상(常)ㆍ즐겁다다는 낙(樂)ㆍ깨끗하다는 정(淨)ㆍ나라는 아(我)라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탐진치 3독을 멀리 여의는 원리삼독(遠離三毒)”이란, 3독에 대한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또한 이 삼독이 반연할 바의 소연(所緣)에는 일정한 정상(定相)이 없는 것이다.
이로써 제5지(地)를 마친다.
칠만(七慢)
①만(慢, arrogance), 비록 자기가 다른 이보다 뛰어나거나 혹은 다른 이와 동등한 것이 사실이나, 그 사실을 굳이 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내가 뛰어나다' 또는 '내가 그와 동등하다' 등의 경멸(輕蔑)하거나 자부(自負)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②과만(過慢, exaggerated arrogance), 실제보다 자신을 한 단계 더[過] 높여서[高舉, 慢] 생각하여 경멸(輕蔑)하거나 자부(自負)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③만과만(慢過慢, outrageous arrogance), 실제보다 자신을 두 단계 더[慢過] 높여서[高舉, 慢] 생각하여 경멸(輕蔑)하거나 자부(自負)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④아만(我慢, egotistic arrogance), 5온, 즉 자신[我]의 육체[색] · 감수성[수] · 사고력[상] · 의지력[행] · 지식[식]에 대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높이는[慢, 高舉] 것으로, 예들 들어, 스포츠 능력[색], 예술적 능력[수], 학문적 능력[상], 정치적 · 경영적 능력[행], 총체적 능력[식] 등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⑤증상만(增上慢, false arrogance), 증상(增上) 즉 뛰어난 것을 가지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가졌다고 착각하여 자신을 높이는[慢, 高舉] 것, 즉 덕을 가지지 못한 것을 덕이 있는 것 즉 덕을 가진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이데, 이것은 '이치(理致)적으로 틀린'[邪] 생각이 아니라 '사실(事實)적으로 틀린'[虛誑] 생각에 근거하여 자신을 높이는 것.
⑥비만(卑慢, modest arrogance),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卑]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못한 정도[卑]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는[慢, 高舉] 것.
⑦사만(邪慢, distorted arrogance), '이치상 그릇된 생각'에 바탕한 오만은 덕(공덕)이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이치(理致)적으로 틀린'[邪] 생각에 근거하여 자신을 높이는[慢, 高舉] 것이기 때문에 사만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뛰어난 사냥꾼, 뛰어난 도둑[大盜], 뛰어난 바람둥이, 뛰어난 사기꾼, 혹은 뛰어난 술꾼인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사만에 속한다. 각각은 5계 중 순서대로 불살생 · 불투도 · 불사음 · 불망어 · 불음주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므로 악업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은 본질적으로 덕이 없는데 그릇되이 생각하여 덕이 있는 것이라고 여겨 자신이 이러한 상태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六波羅蜜”者,如先說。此中佛說:”三乘之人皆以此六波羅蜜得到彼岸。”
“육바라밀”이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3승(三乘)의 모두는 이 6바라밀로써 저 언덕의 피안(彼岸)에 이르게 된다.”고 하셨다.
問曰:此是菩薩地,何以故說聲聞、辟支佛得到彼岸?
묻나니, 이것은 바로 보살마하살 지위의 보살지(菩薩地)이거늘 무엇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도 저 피안(彼岸)에 이르게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佛今說六波羅蜜多有所能,大乘法中則能含受小乘,小乘則不能。
답하나니, 부처님께서는 지금 육바라밀은 능(能)한 바가 많음을 말씀하신 것이니, 대승의 법에서는 소승을 능히 포함하고 포용(含容)하여 받아들이지만, 소승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是菩薩住六地中,具足六波羅蜜;觀一切諸法空,未得方便力,
畏墮聲聞、辟支佛地,佛將護故說:“不應生聲聞、辟支佛心。”
이 보살은 제6지(六地) 가운데 머무르면서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고, 일체법이 공함을 관찰하나, 아직 방편력(方便力)을 얻지 못하였기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질까 두려워함으로, 부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菩薩深念衆生故,大悲心故,知一切諸法畢竟空故,施時無所惜;
見有求者,不瞋不憂;布施之後,心亦不悔。
보살은 중생들을 마음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일체법은 필경공이라고 알기 때문에, 보시할 때에도 아까와 하는 바가 없으며, 구하는 이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보시한 뒤에도 또한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으며,
福德大故,信力亦大,深淸淨信敬諸佛;具足六波羅蜜,雖未得方便、無生法忍、
般舟三昧,於深法中亦無所疑。作是念:“一切論議皆有過罪!唯佛智慧,滅諸戲論,
無有闕失故,而能以方便修諸善法。”是故不疑。六地竟
복과 덕이 크기 때문에 믿음의 신력(信力) 또한 크며, 깊고 청정하게 모든 부처님을 믿고 공경하며, 또한 여섯 가지의 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었으므로 비록 아직 방편을 얻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무생법인(無生法忍)과 반주삼매(般舟三昧)의 깊은 심법(深法) 가운데에서 역시 의심하는 바 없이 생각하기를 “일체의 논의(論議) 모두는 허물이 있지만, 오직 부처님의 지혜만은 모든 희론(戱論)이 사라졌으니, 모자람이나 허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방편으로써 모든 착한 선법을 닦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제6지(地)를 마친다.
大智度論卷第四十九 대지도론 49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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