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發趣品 第二十 卷四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0. 발취품(發趣品) 풀이함① 8

 

問曰:惡師云何得供養信受?善師不能視之如佛,何況惡師!

佛何以故 此中說 “於諸師尊如世尊想”?

묻나니, 어떻게 나쁜 스승인 악사(惡師)를 공양하여 믿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착한 스승도 그를 부처님이라고 여길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나쁜 스승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든 스승을 존경하되 세존을 생각하듯 하라.” 하신 것입니까?

 

答曰:菩薩不應順世間法。順世閒法者,善者心著,惡者遠離;菩薩則不然,若有能開釋深義、

解散疑結,於我有益,則盡心敬之,不念餘惡。

답하나니, 보살은 세간법(世間法)을 따르지 않아야 하나니, 세간의 법을 따른다면, 착한 이라면 마음에 집착하고, 나쁜 이라면 멀리하는 것이하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 

만약 깊은 이치의 심의(深義)를 해석   있고, 의심의 맺힘인 의결(疑結) 풀어 주는 이라면 나에게 이익이 되므로 마음을 다하여 공경하면서  밖의 나쁜 일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如弊囊盛寶 不得以囊惡故 不取其寶;又如夜行嶮道 弊人執炬 不得以人惡故 不取其照。

菩薩亦如是,於師得智慧光明,不計其惡。

마치 헤어진 주머니에 보배가 담겨 있을 주머니가 나쁘다 하여  보배를 취하지 않을  없는 것과 같으며, 

또한 험한 밤길을 갈 때에 나쁜 악인(人惡) 횃불을 잡고 간다고 하여  빛을 따라가지 않을  없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스승에게서 지혜의 광명을 얻을에는 그의 나쁨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復次,弟子應作是念:‘師行般若波羅蜜,無量方便力,不知以何因緣故有此惡事?’

如薩陁波崙聞空中十方佛敎:“汝於法師,莫念其短,常生敬畏!”

또한 제자라면 생각하기를 스승은 반야바라밀의 방편력(方便力) 행하시니, 나로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런 나쁜 일이 있는지  수가 없다.’라고 해야 하나니, 

마치 살타파륜(薩陀坡崙) 공중에서 시방의 부처님께서 그대는 가르침의 스승인 법사(法師) 대하여  단점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공경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라.” 말씀을 들은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菩薩作是念:‘法師好惡,非是我事;我所求者,唯欲聞法以自利益。

如泥像、木像無實功德,因發佛想故,得無量福德,何況是人智慧方便能爲人說!

以是故,法師有過,於我無咎。”

또한 보살은 생각하기를 가르침의 스승이신 법사(法師)께서 나쁜 일을 좋아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오직 법을 듣고서 스스로 이익이 되고자  뿐이니,

마치 진흙으로 만든 불상이나 나무로 만든 불상에는 실로 공덕이 없지만,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냄으로 인하여 무량한 복덕을 얻게 됨과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 지혜와 방편으로 남을 위하여 해석하는 주는 것이겠는가! 

 때문에 가르침의 법사(法師)에게 허물이 있을지언정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 하는 것이다. 

 

“如世尊想”者 我先說:“菩薩異於世人” 世人分別好醜:好者愛著 猶不如佛;惡者輕慢 了不比數。

菩薩則不然,觀諸法畢竟空,從本已來皆如無餘涅槃相;觀一切衆生,視之如佛,

何況法師有智慧利益!以能作佛事故,視之如佛。

마치 세존과 같다는 생각의 여세존상(如世尊想)”이란, 

내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보살은 세간 사람들과는 다르나니,  세간 사람들은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면서 아름다운 이에게는 애착하되 오히려 부처님 같게는 하지 못하며, 미운 이는 낮추어 보는 것 비교하여  수조차 지만,

보살은 그렇지 않아서,법은 필경공(畢竟空)이요, 본래부터 모두가 무여열반(無餘涅槃) 상(相) 같다고 관하며, 일체 중생을 관할 때에도 그들을 마치 부처님과 같다고 보거늘, 하물며 가르침의 법사(法師)이겠는가! 

지혜와 이익이 있으면서 불사(佛事) 지을  있기 때문에 그를 마치 부처님과 같이 보는 것이다.

 

“勤求諸波羅蜜”者 菩薩作是念:“是六波羅蜜 是無上正眞道因緣 我當一心行是因緣”

譬如商人、農夫,隨所適國土所須之物、地之所宜種子,勤修求辦,事無不成。

부지런히 모든 바라밀을 구하는 근구제바라밀(勤求諸波羅蜜)”이라 함이란, 

보살은 생각하기를 바라밀이 바로 위없는 바르고 참된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 인연이니, 나는 일심으로  인연을 행하리라 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장사하는 상인(商人)이나 농부가 적절한 나라에서 구한 물건을 바꾸거나, 땅에 씨를 적당히 뿌려서 애써 가꾸고 구하면, 일마다 이루지 못함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又如今世行布施後得大富 持戒後得尊貴 修禪定 智慧得道。菩薩亦如是 行六波羅蜜則得成佛。

또한 금세에서 보시를 하면 뒤에는  부자가 되고, 계율을 지니면날에 존귀한 이가 되며,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도를 얻게 되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바라밀을 행하면 부처님을 이루게 되는 것이.

 

勤求道者 常一心勤求六波羅蜜。所以者何?若軟心漸進 則爲煩惱所覆 魔人所壞。

以是故佛說:“於二地中勤求莫懈!”二地竟

부지런히 도를 구하는 일심근구도자(一心勤求道者) 항상 일심으로바라밀을 부지런히 구하나니, 왜냐하면, 만약 부드러운 마음으로 점차 나아가다가 번뇌에 덮이거나 마인(魔人, 마라)에게 무너지게도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2(二) 가운데에서 부지런히 구하면서 게으르지 않는 근구막해(勤求莫懈)하.”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써 제2(第二) 마친다.

 

“多學問無厭足”者 菩薩知多學問是智慧因緣 得智慧則能分別行道;如人有眼 所至無碍。

是故菩薩作是願:“十方諸佛有所說法,我盡受持!”

聞持陁羅尼力故,得淸淨天耳力故,得不忘陁羅尼力故。

많이 배우고 물으면서 만족해함이 없는 다학문무염족(多學問無厭足)”이라 함이란, 

보살은 많이 배우고  것이 바로 지혜의 인연임을 알며, 지혜를 얻으면  분별하면서 도를 수행하게 되나니,

마치 사람이 눈이 있으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니,

 때문에 보살은 서원을 세우되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나는 남김없이  받아지니리라.” 하나니,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  때문이고, 청정한 귀의 천이다라니(天耳陁羅尼) 힘을 얻기 때문이며, 불망다라니(不忘陁羅尼) 힘을 얻기 때문이다.

 

譬如大海,能受持一切十方諸水;菩薩亦如是,能受持十方諸佛所說之法。

비유자면,  바다가  시방의 모든 물을 받아 지니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법(說法)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淨法施者,如苗中生草,除穢則茂;

菩薩亦如是,法施時不求名利,後世果報,乃至爲衆生故,不求小乘涅槃。

청정하게 법을 보시하는 정법시(淨法施)”라 함이란, 마치 모판 안에 풀이 났을 때에,  김을 매어 주면  모가 무성하여지는 것과 같이, 보살 또한 그와 같아서 법을 보시할 때에 명리나 후세의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이에 중생을 위하여승의 열반도 구하지 않으며, 

 

但以大悲於衆生隨佛轉法輪。法施相,莊嚴佛國相,受世閒無量勤苦,住慚愧處,

不捨阿蘭若住處。“少欲知足”如先說。

단지 대비(大悲)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법륜(法輪) 굴리시고 법을 보시하는 법시상(法施相) 부처님의 나라를 장엄하는 장엄불국상(莊嚴佛國相) 따르면서, 세간의 무량한 갖은 고통을 받으며,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아는 참괴(慚愧)하는 곳 머무르고, 아련야(阿練若) 처소를 버리지 않을 뿐이다.

탐욕을 적게 하고 만족할  아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 함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問曰:種種因緣,在生死中不厭;何以故但二因緣說不厭?

묻나니, 갖가지의 인연으로 생사(生死) 안에 있으면서 싫어하지 않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단지  가지의 인연만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是善根備具故,在生死中苦惱薄少;譬人有瘡,良藥塗之,其痛差少。

菩薩得善根淸淨故,今世憂愁、嫉妒、惡心等悉皆止息。

답하나니,  선근(善根) 두루 갖추어진 까닭에 생사 안에 있으면서도 고뇌(苦惱) 희박하고 적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상처가  좋은 약을 바르면 상처가 나으면서  고통이 적게 되는 것과 같이,

보살은 선근을 얻고 청정한 까닭에  세상에서 근심 걱정이나 질투나 악한 마음 등이 모두  그치면서 쉬게 되는 것이.

 

若更受身,得善根果報,自受福樂,亦種種因緣利益衆生,隨其所願;

自淨世界,世界嚴淨,勝於天宮,視之無厭,能慰釋大菩薩心,

何況凡夫!以是故,雖有多因緣,但說二事無厭。

만약 다시 몸을 받으면 선근의 과보를 얻는지라 저절로 복락(福樂) 받게 되며, 또한 갖가지의 인연으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나니,  원한 바대로 스스로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자정세계(自淨世界)하며, 세계가 장엄하고 청정하여 천궁(天宮)보다 뛰어나게 되어서 그를 보고 싫어하지 않게되나니, 대보살(大菩薩)의 마음까지도 위로할  있거늘 하물며 범부이겠는가! 

 때문에 비록 많은 인연이 있을지라 단지  가지만의 싫어함이 없는 무염(無厭) 말하는 것이다.

 

慚愧雖有種種,此中大者,聲聞、辟支佛心。菩薩發心,欲廣度一切衆生;

得少苦惱,便欲獨取涅槃,是可慚愧!譬如有人大設餚膳,請呼衆人;

慳悋心起,便自獨食,甚可慚愧!三地竟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함의 참괴(慚愧)에는 비록 갖가지가 있을지라도, 그 중에  것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이다. 

보살이 발심한 것은 일체중생을 널리 제도하고자 하는 것이거늘 조그마한 고뇌가 있다고 하여,  혼자만 열반을 취하려 한다면, 이야말로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만한 가참괴(可慚愧)인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크게 진수성찬을 마련해 놓고 여러 사람을 청한 후에, 인색한 마음이 일어나서 자기 혼자서 먹어 치우면 참으로 나와 남에게 부끄러워할 만한 일인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써 제3(第三) 마친다.

 

“不捨阿蘭若住處”者,離衆獨住,若過聲聞、辟支佛心,是名離衆。

一切法以無所得空故,不取不著相;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不取,用無有著心故。

아련야의 처소를 버리지 않는 불사아란야주처(不捨阿蘭若住處)”라 함이란, 

대중을 여의고 혼자 머무르면서 만약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초월하게 되면, 이를 곧 대중을 여읜, 이중(離衆)이라 하며,

일체법은 얻을 바가 없는 무소득공(無所得空)이기 때문에 상(相)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취하지 않나니, 집착하는 마음이 없게 되는 용무유착심(用無有著心)이 때문이다.

 

菩薩常集諸功德無厭足,得無上道則足,更無勝法故。

飮食、衣服、臥具知足者,是善法因緣,不以爲要,故不說。

보살은 항상 모든 공덕을 쌓으면서 만족해함이 없지만, 위없는 무상도를 증득하게 되면  만족하나니, 그보다 더욱 수승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음식과 의복과 침구에 있어서 만족할  아는 것은 바로 착한법의 인연이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는다.

 

“不捨頭陁功德”者,如後「覺魔品」中說。無生法忍,此中以無生法忍爲頭陁。

菩薩住於順忍,觀無生法忍。是十二頭陁爲持戒淸淨故 持戒淸淨爲禪定故 禪定爲智慧故;

無生忍法卽是眞智慧。無生法忍是頭陁果報,果中說因故。

두타(頭陀) 공덕을 버리지 않는 불사두타공덕(不捨頭陁功德)”이라 함은, 뒤의 각마품(覺魔品)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 말하는 것과 같으며,  가운데에서는 무생법인을 두타로 삼나니, 보살은 순인(順忍) 머무르면서 무생법인을 관하는 것이다.

 12두타(十二頭陀)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기 위한 까닭이요,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는 것은 선정을 위한 까닭이며, 선정은 지혜를 위한 까닭이다. 

무생법인은  진실한 지혜이자 무생법인은 바로 두타의 과보(果報)이니, 결과 가운데에서 원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12두타(十二頭陀, dhūta)=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여의고 최소한의 생활수단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열두 가지를 말한다.

①인적 없는 한적한 곳에서 머무는 재아란야처(在阿蘭若處),

②항상 걸식하는 상걸식(常乞食), ③빈부를 가리지 않고 걸식하는 차제걸식(次第乞食)

④하루에 한 끼만 먹는는 수일식법(受一食法), ⑤발우 안의 음식으로 만족하는 절양식(節量食),

⑥정오가 지나면 꿀조차 먹지 않는 중후불득음장(中後不得飮漿),

⑦낡은 옷만을 입는 분귀의(糞掃衣), ⑧세 벌의 옷만을 가지는 단삼의(但三衣),

⑨무덤 옆에 머무는 총간좌(塚間坐), ⑩나무 아래에 앉는 수하좌(樹下坐),

⑪지붕 없는 곳에 머무는 노지좌(露地坐), ⑫앉기만 할 뿐 눕지 않는 상좌불와(常坐不臥).

 

“不捨戒,不取戒相”者,是菩薩知諸法實相故,尚不見持戒,何況破戒!

雖種種因緣不破戒,此最爲大,入空解脫門故。

계율을 버리지 않는 불사계(不捨戒)와 불취계상(戒相)”이라 함은, 보살은법의 실상(實相) 알기 때문에 오히려 계율을 지니는 것조차도 보지 않거늘 하물며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겠는가! 

비록 갖가지의 인연이 있을지라도 계율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가장 것이나니, 공해탈문(空解脫門) 들기 때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