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發趣品 第二十 卷四十九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20. 발취품(發趣品) 풀이함① 4

 

問曰:捨相有種種:內外、輕重,財施、法施,世閒、出世閒等,

佛何以故 但說無分別憶想出世閒施?

묻나니, 버리는 사상(捨相)에는 안과 밖의 내외(內外)와, 가볍고 무거움의 경중(輕重)과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와 세간과 출세간 등의 갖가지가 있거늘,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단지 분별과 생각이 없는 출세간의 보시만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布施雖有種種相,但說大者不取相。復次,佛於一切法不著 亦以此敎菩薩布施

令如佛法不著。此中應廣說無分別布施;餘布施相,處處已種種說。

답하나니, 보시에는 비록 갖가지의 종종상(種種相)이 있을지라도, 다만  것만을 말씀하시고 상(相)을 취하지 않을 뿐이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으시며, 또한 이로써 보살에게 보시를 가르치며, 법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분별이 없는 무분별보시(無分別布施)를 자세히 설명하시는 것으로, 그 밖의 보시상(布施相) 곳곳에서 갖가지로 이미 말씀하셨으며, 

 

“近善知識”義,如先說。“求法”者,

“法”有三種:一者、諸法中無上,所謂涅槃;二者、得涅槃方便——八聖道;

三者、一切善語、實語助八聖道者,所謂八萬四千法衆,十二部經,四藏——所謂阿含、

阿毘曇、毘尼、雜藏,『摩訶般若波羅蜜』等諸摩訶衍經,皆名爲“法”。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법을 구하는 구법(求法)”이란, 법에서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법 가운데에서 무상(無上)이 되는 이른바 열반이고, 

둘째는 열반을 얻는 방편으로서의 8성도(八聖道)이며,

셋째는 일체의 선어(善語)와 진실한 실어(實語)이니,

이른바 팔성도를 돕는 8만 4천의 법들과 12부경(部經)과 아함(阿含, agama 전설傳說)ㆍ아비담(阿毘曇, Abhidharma 대법對法)ㆍ비니(毘尼, Vini 율장律藏)ㆍ잡장(雜藏)의 4장(藏, 4개의 장)과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密) 등의 모든 마하연경(摩訶衍經) 모두를 법(法)이라 하나니, 

 

此中“求法”者,書寫 誦讀 正憶念 如是等,治衆生心病故 集諸法藥 不惜身命。

 가운데에서 구법(求法)이라는 것은, 베껴쓰는 서사(書寫), 읽고 외우는 독송(讀誦), 바르게 기억하는 정억념(正憶念)이니, 이러한 등으로 중생들의 심병(心病)을 다스리기 위하여법의 약(藥)을 모음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이니,

 

如釋迦文佛 本爲菩薩時,名曰樂法。時世無佛 不聞善語 四方求法 精勤不懈 了不能得。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본래 보살이셨을 이름을 낙법(樂法)이라 하였는데, 그 때의 세상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서 착한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므로 사방으로 구법(求法)하여 애쓰고, 게으르지 않았으나 마침내 얻을  없었다.

 

爾時,魔變作婆羅門而語之言:“我有佛所說一偈,汝能以皮爲紙,

以骨爲筆,以血爲墨,書寫此偈,當以與汝!”

그 때에 악마가 바라문(婆羅門)으로 변화되어 그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게송이 있으니, 그대의 피부로 종이를 삼고, 뼈로써 붓을 삼으며, 피로써 먹을 삼아서  게송을 베껴 쓴다면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고 하였다.

 

樂法卽時自念:“我世世喪身無數,不得是利” 卽自剝皮曝之令乾 欲書其偈 魔便滅身。

是時,佛知其至心,卽從下方踊出,爲說深法,卽得無生法忍。

낙법(樂法)이 즉시, “내가 세세마다 몸을 잃음이 헤아릴  없지만, 이러한 이익을 얻기 위한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는, 곧 스스로의 살갗을 벗겨 햇볕에 쪼여 말린 뒤에 받아쓰려고 하였으나, 악마가 몸을 숨겨 버렸으니,

그 때에 부처님께서 그의 지극한 지심(至心) 아시고는  아래로부터 솟아오르시어 그를 위하여 깊은법(深法)을 말씀하시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되었다.

 

又如薩陁波崙苦行求法。如釋迦文菩薩,五百釘釘身,爲求法故。

又如金堅王割身五百處爲燈炷;投巖、入火。如是等種種苦行難行,爲衆生求法。

또한 살타파륜(薩陀波崙)은 고행(苦行)을 하면서 구법(求法)하였고, 

석가문(釋迦文, 석가모니) 보살은 5백 개의 못을 몸에 박았으니, 그것은 구법(求法)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금견왕(金堅王)은 5백 군데에 몸을 파서 심지를 넣고 등불을 켰으며, 몸을 바위에 던지기도 하고, 불에 뛰어 들기도 하는,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의 고행난행(苦行難行)으로 중생을 위하여 구법(求法)을 하였으며, 

 

復次,佛自說求法相:“爲薩婆若,不墮聲聞、辟支佛地。”

또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법을 구하는 구법상(求法相) 말씀하시기를, “살바야를 위하여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며, 

 

“常出家”者 菩薩知在家有種種罪因緣:“我若在家 自不能得行淸淨行 何能令人得諸淨行?

若隨在家法,則有鞭杖等苦惱衆生;若隨善法行,則破居家法。”

籌量二事:“我今不出家者,死時俱亦當捨;今自遠離,福德爲大!”

“항상 출가한다는 상출가(常出家)”란, 보살이 집에 있으면 종종 죄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므로 “내가 만약 집에 있으면  자신도 청정한 행을 행할  없거늘,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청정한 행을 얻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재가의 법을 따른다면 채찍이나  따위로 중생을 괴롭히는 일이 있을 것이요, 

만약 착한법을 따라 행한다면 재가의 법을 깨뜨리게 될 것이니,   가지를 헤아려 보건대 나는 지금 출가하지 않을지라도 죽을 때에는 모두 함께 버려야 할 것이니, 지금 스스로 멀리 여읜다면 복덕이 크리라.”고 하며, 

 

復次,菩薩作是念:‘一切國王及諸貴人力勢如天,求樂未已,死强奪之。

我今爲衆生故捨家,持淸淨戒,求佛道,具足尸羅波羅蜜因緣。’

또한 보살은 생각하기를 ‘일체 국왕과 모든 귀인은 세력이 마치 하늘 같아서 쾌락을 구함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죽음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아 가나니, 나는 이제 중생들을 위하여 집을 버리고 청정한 계율을 지니며, 부처님도를 구하면서 시라(尸羅, 지계)바라밀의 인연을 두루 갖추리라.’고 하며, 

 

此中佛自說:“菩薩世世不雜心"

"出家不雜心”者,不於九十六種道中出家,但於佛道中出家。

所以者何?佛道中有二種正見:世閒正見、出世閒正見故。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세세마다 뒤섞이지 않은 불잡심(不雜心)이다.”고 하셨으며, 

“출가하되 뒤섞인 마음이 되지 않는 출가불잡심(出家不雜心)”이라 함이란, 96종의 외도(外道) 가운데에서 출가하지 않고, 단지 불도 가운데에서 출가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운데에는 두 종류의 정견(正見)이 있으니, 세간정견(世閒正見)과 출세간정견(出世閒正見)이 있는 까닭이다.

 

“愛樂佛身”者,聞種種讚佛功德:十力、四無所畏、大慈大悲、一切智慧;

又見佛身三十二相、八十種隨形好,放大光明,天人供養,無有厭足。

自知:“我當來世,亦當如是。”

“부처님의 몸을 좋아한다는 수락불신(受樂佛身)”이란, 갖가지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과 10력(十力)ㆍ4무소외(四無所畏)ㆍ대자대비(大慈大悲)와 일체 지혜를 듣고, 또한 부처님의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광명을 놓는 것과 하늘과 사람들이 공양하면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을 보고,

스스로 “나도 장차 오는 미래세에서는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나니, 

 

假令無得佛因緣,猶尚愛樂,何況當得而不愛樂!得是深心愛樂佛故 世世常得値佛。

가령 부처가  인연이 없을지라도 좋아할 것이거늘, 하물며 장차 부처가  터인데 좋아하지 않을  있겠는가!

이러한 깊은 심심(深心) 얻어서 부처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세세마다 항상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演出法敎”者,菩薩如上求法已,爲衆生演說。

“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연출법교(演出法敎)”란, 보살이 위에서와 같이법(求法)을 하고,  뒤에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이니, 

 

菩薩在家者,多以財施;出家者,愛佛情重,常以法施。

若佛在世 若不在世 善住持戒 不求名利,等心一切衆生而爲說法。

재가(在家)의 보살은 많은 재물을 보시하는 재시(財施)를 행하지만, 

출가한 이는 부처님을 사랑하는 정(情)이 무거우며, 항상 법시(法施)로써 행하며, 부처님이 세간에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계율을  지니고, 명예와 이득을 구하지 않으며, 일체 중생들에게 마음이 평등한 등심(等心)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讚歎檀義故,名爲“初善”;分別讚歎持戒,名爲“中善”;

是二法果報,若生諸佛國、若作大天,名爲“後善”。

단(檀)의 이치를 찬탄하기 때문에 처음이 좋은 초선(初善)이고, 

계율 지니는 것을 분별하여 찬탄하기 때문에 중간이 좋은 중선(中善)이며, 

  가지 법의 과보로 모든 불국(佛國) 태어나거나, 대천(大天)이 되므로 나중이 좋은 후선(後善)이라 하며, 

 

復次,見三界、五受衆身多苦惱,則生厭離心,名爲“初善”;

棄捨居家,爲身離故,名爲“中善”;爲心離煩惱故,名爲“後善”。

또한 삼계(三界)의 5수중(五受衆)의 몸에 고뇌가 많은 것을 보고  싫증내어 여의고자 하는 마음을 내므로 처음이 좋은 초선(初善)이라 하고, 

살던 집을 버리고 몸이 떠나기 때문에 중간이 좋은 중선(中善)이라 하며, 

마음이 번뇌를 여의기 때문에 나중이 좋은 후선(後善)이라 하며, 

 

5수중(五受衆)=五陰(오음) 五蘊(오온), 五取蘊(오취온), 五受陰(오수음), 五聚(오취), 五衆(오중)이며,

蘊(온), 聚(취), 衆(중) 등은 ‘한 데 모인 것’ ‘집합체’라는 뜻으로, 색(色)ㆍ 느낌(受)ㆍ생각(想)ㆍ 지어감(行)ㆍ분별(識)

 

解說聲聞乘,名爲“初善”;說辟支佛乘,名爲“中善”;宣暢大乘,名爲“後善”。

“妙義好語”者 三種語:雖復辭妙而義味淺薄 雖義理深妙而辭不具足 以是故說“妙義好語”。

성문승(聲聞乘)을 해설하는 것을 처음이 좋은 초선(初善)이라 하고, 

벽지불승(辟支佛乘)을 해설하는 것을 중간이 좋은 중선(中善)이라 하며,

대승을 선양하는 것을 나중이 좋은 후선(後善)이라 하는 것이다.

묘한 이치의 묘의(妙義)와 좋은 말의 호언(好言)이라 함이란, 

 종류의 말이 비록 언사는 묘할지라도 의미(義味)가 천박하거나, 비록 의리(義理, 이치)는 깊고 묘할지라도  언사가 완전하지 못한 때문에 묘한 이치의 묘의(妙義)와 좋은 말의 호언(好言)으로써 설명하는 것이다.

 

離三毒垢故,但說正法,不雜非法,是名“淸淨”。

八聖道分、六波羅蜜備故,名爲“具足”。修多羅十二部經,如先說。

탐진치의 삼독구(三毒垢)를 여의는 까닭에 오직 바른법(正法)만을 말하고, 

그릇된 법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을 청정(淸淨)하다 하며,

팔성도분과바라밀을 구비하기 때문에 “구족(具足)”이라 하며,

수다라(修多羅, sūtra, 경經)와 12부경(部經)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破憍慢”者,是菩薩出家、持戒、說法、能斷衆疑,或時自恃而生憍慢;

是時應作是念:“我剃頭著染衣,持鉢乞食,此是破憍慢法,我云何於中生憍慢?”

“교만을 깨뜨리는 파교만(破憍慢)”이란,  보살이 출가하여 계율을 지니고 설법하여 대중의 의심을 끊어 줌으로 간혹 스스로 뽐내면서 교만이 생기기도 하나니,

이 때에는 생각하기를 “나는 머리를 깎고 물든 옷을 입고 발우를 가지고 걸식을 하고 있으며, 이러함이 바로 교만을 깨뜨리는 파교만법(破憍慢法)이거늘, 내가 어떻게  가운데에서 교만한 마음을 내는 것인가!”라고 해야 하며, 

 

又此憍慢在人心中則覆沒功德 人所不愛 惡聲流布;後身常生弊惡畜生中 若生人中卑鄙下賤。

또한  교만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면서 공덕을 덮어 가리우고 없애며,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고, 나쁜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며, 후세에 받는 몸은 항상 불행한 축생 가운데 태어나게 되고, 또는 인간 가운데 태어난다 하여 비루하고 하천한 곳에 태어나게 되나니,  

 

知是憍慢有如是無量過罪。破是憍慢,爲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如人求財,猶尚謙遜下意,何況求無上道!以破憍慢故,常生尊貴,終不在下賤家生。

교만에는 이러한 무량한 허물과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교만을 깨뜨리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사람이 재물을 구하려 함에 있어서 오히려 겸손하게 뜻을 낮추거늘, 하물며 위없는 무상도를 구함이랴!

교만을 깨뜨리기 때문에 언제나 존귀(尊貴)한 태어나고, 끝끝내 하천한 집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實語”者,是諸善之本,生天因緣,人所信受。

行是實語者 不假布施 持戒 學問 但修實語 得無量福。實語者,如說隨行。

“진실한 말씀의 실어(實語)”라 함이란, 이것은 모든 선(善)의 근본이요, 하늘에 태어나는 인연이며,

사람들이 믿고 받게 되나니, 이 실어(實語)를 행하는 이는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학문(學問)을 빌리지 않고 단지 진실한 말씀만을 닦아도 무량한 복을 얻나니, 실어(實語)란 그 말씀대로 따라서 행하는 여설수행(如說隨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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