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四念處品 第十九 卷四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19. 사념처품(四念處品) 풀이함 3

 

復次,衆生多著貪欲,取淨相;瞋恚、邪見不爾故,是以先治貪欲,觀不淨。

또한 중생들 대부분이 탐욕에 집착하면서 청정한 정상(淨相) 취하려 하거니와 

성냄의 진에(瞋恚)와 삿된 견해의 사견(邪見)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먼저 탐욕을 다스리기 위하여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며, 

 

念身四威儀等者,先欲破身賊;得一心人,所爲之事皆能成辦。以是故先尋繹其身所爲、

所行、來去、臥覺、坐禪觀身所作,常一心安詳,不錯不亂。

몸의  사위의(四威儀,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을 염하는 염신사위의등(念身四威儀等)이라 함이란, 

먼저 몸이라는 도적을 깨뜨리고자 하는 일심(一心)을 얻은 사람은 하는 일들이 모두 성취되며, 

 때문에 먼저 할 일과 행할 바를 궁구하여 오고 가는 내거(來去), 눕고 께어나는 와각(臥覺), 좌선(坐禪)하는 데서 몸으로 하는 바들을 자세히 관하여, 항상 일심 되어, 항상 안정되고 상세한 안세(安詳)한다면 잘못되지도 않고 산란하지 않게 되며, 

 

作如是觀察,以不淨三昧易得。身雖安詳,內有種種惡覺觀,破亂其心;

以是故,說安那波那十六分以防覺觀。安那般那義,如先說。

이와 같이 관찰하게 되면 부정삼매(不淨三昧)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몸은 비록 찬찬하고 상세한, 안세(安詳)할지라도 안으로는 갖가지 거친 생각의 악각관(惡覺觀)이 있으면서  마음을 파괴하고 어지럽히나니,

이러한 까닭 숨을 다듬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관법(觀法)인 안나반나(安那般那, āna-apāna)의 16분(分, 16행상行相)을 설명하여 거친 생각의 각(覺)과 세밀한 생각의 관(觀)을 막게 하나니, 안나반나의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대지도론(大智度論) 제21권 8)

 

16행상行相= 고제(苦諦), 무상(無相) 고(苦) 무아(無我) 공(空)

집제(集諦), 인(因) 집(集) 생(生) 연(緣)

멸제(滅諦), 멸(滅) 정(靜)또는 지(止) 묘(妙) 리(離)또는 출(出)

도제(道諦), 도(道) 여(如)또는 정(正) 행(行) 출(出)또는 달(達).

 

身旣安詳,心無錯亂,然後行不淨觀,安隱牢固。若先行不淨觀,狂心錯亂故,不淨反作淨相。

佛法中,此二法名甘露初門。

몸이 이미 찬찬하고세한, 안세(安詳)하면서, 마음에 어수선함이 없어진 연후에 부정관(不淨觀)을 행하면 안온하면서 공고하여 지나,

만약 먼저 부정관을 행한다면 광심(狂心)과 착란(錯亂) 때문에 청정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청정한 정상(淨相)으로 되나니, 부처님 가운데에서   법을 감로의  문인 감로초문(甘露初門)이라 하였다.

 

不淨觀者,所謂菩薩摩訶薩觀身如草木瓦石無異。是身外四大變爲飮食,充實內身:

堅者是地,濕者是水,熱者是火,動者是風。

부정관(不淨觀)이란, 이른바 보살마하살이 몸은 마치 풀과 나무와 기왓돌과 다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니,

 몸은 바깥 4대(四大)가 변하여 음식이 되어서 안의 내신(內身)을 충실하게 하여 주되, 단단한 것은 지(地)요 축축한 것은 수(水)이며, 더운 것은 화(火)요 움직이는 것은 풍(風)이다.

 

是四事入內卽是身。是四分中,各各無我、無我所,隨逐自相,不隨人意。苦、空等亦如是說。

  가지가 안으로 들어가서 곧 몸을 이루나니,   가지 갈래는 각각 무아(無我)이고, 내 것도 없는 무아소(無我所)이며, 자상(自相)을 따르나, 사람의 마음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 괴로움과 공함 그와 같으다.

 

“若坐、若立”者,臥則懈怠,身不動故,心亦不動;行則心亂,身不靜故,心亦不靜。

欲以眼見事況所不見,故說譬喩:“牛”卽是行者身,“屠兒”卽是行者,“刀”是利智慧,

“奪牛命”卽是破身一相,“四分”卽是四大。屠者觀牛四分,更無別牛,亦非是牛;

行者觀身四大亦如是。

앉고 서는 약좌약립(若坐若立)이라 함은, 누우면 게을러져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도 움직이지 않게 되며, 다니면 마음이 산란하여지며, 몸이 고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또한 고요하지 않게 되며,

눈으로는 일을 보려 하거늘 하물며 보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비유를 들자면, 소는  수행하는 행자(行者) 몸이요, 백정은  수행하는 행자(行者)이며, 칼은  날카로운 지혜요, 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바로 몸의 신일상(身一相)이라 깨뜨리는 것이며, 부분으로 나누어서 사분(四分)된 것은  4대(四大)이다. 

백정이 사분(四分)되 소를 자세히 관할 때에, 다시  밖에 따로 소가 없고 또한 그것이 소도 아니니, 행자(行者)가 몸의대(四大)를 관함도 역시 그와 같다. 

 

是四大不名爲身。所以者何?此四,身一故;又四大是摠相,身是別相;

若外四大不名爲身,入身中假名爲身。

대(四大)를 몸이라 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가지가 하나의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대(四大), 이것은 전체의 총상(總相)이요, 몸, 이것은 각각의 별상(別相)이라. 

바깥의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지 않으나, 이 몸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임시의 가명(假名)으로 몸이라는 하는 것이다.

 

我不在四大中,四大不在我中;我去四大遠,但以顚倒妄計爲身。

用是散空智慧分別四大及造色,然後入三念處,得入道。

나(我)는대(四大) 가운데 있지도 않고, 사대(四大)도 나(我) 가운데 있지 않으며, 나(我)는대(四大)와 멀어져 가지만 단지 뒤바뀌어 전도(顚倒)된 때문에 망령되이 헤아리면서 몸을 삼나니,

모였다가 흩어져 괴멸(壞滅)되는 현상에 대한 분별과 작용이 끊어진 산공(散空)의 지혜로써대(四大)와 사대로 만들어진 조색(造色)을 분별한 연후에야 신념처를 제외한 나머지 수념처ㆍ심념처ㆍ법념처 삼염처(念處)에 들어가 도(道)에 들게 되며, 

 

又此身從足至髮、從髮至足,周帀薄皮;反覆思惟,無一淨處髮毛等乃至腦膜,

略說則三十六,廣說則衆多。

또한  몸은 발에서 머리카락까지, 머리카락에서 발에 이르기까지의 주위를 얇은 가죽으로 덮어서 싸고 있는 것으로, 거듭생각해 보아도 한 곳 깨끗함이란 없으니, 머리카락 등에서 뇌(惱)와 막(膜)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설명하면 36종이지만 자세히 설명하면 많은 것이라.

 

穀倉是身,農夫是行者,田種穀是行者身業因緣。結實入倉,是行者因緣熟得身。

稻、麻、黍、粟等,是身中種種不淨。黍 기장 서, 粟 조 속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가 바로 몸이고, 농부는 바로 수행하는 행자(行者)이며, 밭에 곡식을 심는 것은 수행하는 이의 몸의 업인연(業因緣)이고, 열매가 맺힌 뒤에 창고에 쌓아 넣는 것은 바로 행자(行者) 인연이 성숙하여 몸을 얻는 것이며, 

벼와 깨와 기장과  등은 바로   속의 갖가지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다.

 

農夫開倉,卽知麻、黍、麥、豆種種別異,是行者不淨觀,以慧眼開見是身倉,知此身中不淨充滿,

必當敗壞,若他來害,若當自死。此身中但有屎尿不淨、種種惡露等。

농부가 창고를 열어서 깨ㆍ기장ㆍ보리ㆍ콩 등이 갖가지로 다른 것을 아는 것은 바로 행자(行者) 부정관을 닦아서, 지혜의 눈으로써  몸이라는 창고를 열어 보고, “이  속에는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득  있고 장차 반드시 무너지게  것이니, 혹은 다른 이가 와서 해치기도 하고, 또한 장차 저절로 줄게  것이며,  몸속에는 단지 똥오줌 같은 부정한 것과 갖가지 오로(惡露) 등만이 있다.”고 아는 것이다.

 

已觀內身不淨,今觀外身敗壞;是故說二種不淨:一者、已壞,二者、未壞。

先觀己身未壞有識,若結使薄、利根人卽生患厭;鈍根結厚者,觀死人已壞,可畏可惡。

이미 내신(內身) 깨끗하지 못함을 관한 뒤에는, 이제 외신(外身)이 부서지고 무너짐을 관하나니,

 때문에  가지의 청정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이미 파괴된 이괴(已壞)요, 둘째는 아직 파괴되지 않은 미괴(未壞)이다.

먼저 스스로 몸이 미괴(未壞)되기 전에 식(識, 분별)이 있다는 것을 관하나니, 

만약 번뇌의 결사(結使)가 얇고 근기가 영리한 사람이라면  싫증을 내게 되거니와 

근기가 둔하고 번뇌의 결사가 두꺼운 이라면, 사인(死人)이 이괴(已壞)되는 두려워할 만하고 싫어할 만한 것을 관하는 것이다.

 

若死一日至五日,親里猶尚守護;是時禽獸未食,靑瘀、胮脹、膿血流出、腹脹破裂、

五藏爛壞,屎尿臭處,甚可惡厭。行者心念:“此色先好,行來、言語,妖蠱姿則,

惑亂人情,淫者愛著;今者觀之,好色安在?

만약 죽은  하루에서 닷새까지는 마을의 친척들이 아직도 수호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날짐승ㆍ길짐승들이 아직 뜯어 먹지 못하지만, 푸르뎅뎅하게 멍이 들고 띵띵 부풀어서 피고름이 흘러나오며 배가 불어서 터지고 5장(藏)이 문드러지며 똥오줌이 질퍽하여 심히 싫어할 만하면, 수행하는 행자(行者)가 생각하기를 ‘이 사람의 빛깔이 먼저는 좋아서 가고 오고 말하면서 아리따운 자태로 인정(人情)을 미혹되게 했으므로 음심을 품은 이는 애착하였는데, 지금은  좋았던 빛깔은 어디로 간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다.

 

如佛所說,眞是幻法,但誑無智之眼!”今此實事露現,行者卽念:“我身與彼,等無有異;

未脫此法,云何自著、著彼?又亦何爲自重輕他?” 如是觀已,心則調伏,可以求道,能除世閒貪憂。

마치 부처님의 말씀과 같으니, 실로 이것은 미혹된 환법(幻法)이라서 단지 지혜 없는 이의 눈을 속일 뿐이다. 지금 실제가 드러났으니, 행자(行者)  생각하기를 ‘나의 몸도 저렇게 똑같이 될 뿐이리라. 아직  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자신에게 집착하고 그들에게 집착하겠으며! 또한 어찌 자신을 중히 여기면서 남을 가벼이 여기겠는가!'라고 하나니,

이와 같이 관한 뒤에는 마음을 다스리게 되어 도를 구할  있게 되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할  있게 되는 것이다.

 

又復思惟:‘此屍初死之時,鳥獸見之,謂非死人,不敢來近’

以是故說“過六七日,親戚旣去,烏鷲、野干之屬競來食之。”

또한 다시 생각하기를 ‘이 시체가 처음 죽었을 때에는 날짐승ㆍ길짐승들이 보고서도 죽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어 감히 가까이 오지 않았었다.’고 하며,

그러한 때문에 말하기를 “6ㆍ7일이 지난 뒤에 친척들이  떠나가고 나며, 까마귀와 수리와 야간(野干, śṛgāla. 쟈칼의 일종)의 족속들이 다투어 와서 그를 뜯어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皮肉旣盡,日日變異,以是故說“但有骨人”。見其如此,更生厭心,念言:‘是心肝皮肉,實無有我,

但因是身合集罪福因緣,受苦無量!’卽復自念:‘我身不久,會當如是,未離此法’

그리하여 가죽과 살이 이미 다하고 날마다 변하면서 달라지기 때문에 말하기를 “단지 뼈만 남은 사람이 있을 뿐이구나.” 하며, 그가 이렇게  것을 보면서 다시 싫증을 내며 생각하기를 ‘이 심장과 간과 가죽이며 살에는 실로 나(我)가 없고, 단지  몸의 화합으로 인하여 죄와 복의 인연을 쌓아서 고통을 받음이 무량할 뿐이다.’라고 하며,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를 “나의 몸 또한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이렇게  터인데 아직  법을 여의지 못하고 있구나”하고 하며, 

 

或時行者見骨人在地,雨水澆浸,日曝風吹,但有白骨;或見久骨筋斷節解,分散異處,

其色如鴿;或腐朽爛壞,與土同色。

간혹 행자(行者) 뼈만 남은 사람이 땅에서 빗물에 잠기고 햇볕에 쪼이고 바람에 불리어서 오직 흰뼈만 남아 있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오래되어서 뼈와 힘줄이 끊어져서 마디마디가  떨어진 것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그 빛깔이 마치 비둘기와 같은 것을 보기도 하며, 혹은  썩고 문드러져서 흙 빛깔로  것을 보기도 하나니, 

 

初觀三十六物,死屍胮脹,一日至五日,是不淨觀。鳥獸來食,乃至與土同色,是無常觀。

是中求我、我所不可得,如先說“因緣生,不自在故”,是非我觀。

觀身相如此,無一可樂;若有著者,則生憂苦,是名苦觀。

처음에 36가지를 자세히 관하고 죽은 시체가 부풀어 하루에서 닷새에 이르기까지를 관하는 것은 바로 부정관(不淨觀)이며,

날짐승ㆍ길짐승이 뜯어 먹거나, 흙 빛깔이 되기까지는 바로 무상관(無常觀)이며,

이 가운데에서 나(我)와 내 것(我所)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앞에서의 설명과 같이,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라 자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바로 비아관(非我觀)이요

몸의 신상(身相)은 이와 같이 하나도 즐길 만한 것이 없음에도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하여 근심과 고통이 생긴다고 관하는 것은 바로 고관(苦觀)이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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