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四緣義 第四十九 卷三十二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49. 초품 사연(四緣) 뜻을 풀이함 4

 

問曰:若未生法名爲未有;生法現在,則有法可用;

因現在法有事用相,故追憶過事,是名過去。

三世各異,不應如實爲一,云何言“三世平等是名爲如”?

묻나니, 만약 아직 법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를 이름하여 아직 없는 미유(未有)라 할 것이며,

현재에 바로 법이 생겼으면, 곧 사용할 수 있으므로 가용(可用)이라 할 것이며,

현재의 법이 있으므로 인(因)하여 쓸 수 있는 작용의 상(相) 있는 까닭에 지난 일을 돌이켜 기억하면서, 이것을 과거라 하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각각 다른 것이므로, 응당 여실(如實)대로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삼세가 평등한 것을 () 삼는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諸法實相中,三世等一無異。如『般若波羅蜜如品』中說

“過去如、未來如、現在如、如來如,一如無有異"

답하나니,법의 실상(實相)에서는 삼세가 평등하고 동일하며 다름이 없는 것이니,

마치 반야바라밀의 여품(如品) 중에서 과거의 () 미래의 여(如)와 현재의 여(如)와 여래(如來) 여(如)는 동일한 일(一)로써 다름이 없는 것이다 말한 바와 같은 것이며, 

 

復次,先論議中已破生法;若無生法者,未來、現在亦無生,云何不等!又復過去世無始,未來世無後,現在世無住;以是故,三世平等名爲如。行是如已,入無量法性中。

또한 앞에서 논의(論義) 가운데에서 이미 생기는 생법(生法) 파하였으니,

만약 생법(生法) 없다면 미래나 현재에서도 역시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이거늘 어떻게 평등하지 않겠는가!

 다시 과거의 세상은 비롯됨이 없고, 미래의 세상은 나중이 없으며, 현재의 세상은 머무르지 않나니,  때문에 삼세가 평등하기에 여(如)라 하며,  평등한 여(如)를 행하 무량한 성(法性) 들게 되 것이다.

 

法性者,法名涅槃,不可壞,不可戲論。

法性名爲本分種,如黃石中有金性,白石中有銀性;

법성(法性)이라 함이란, 법(法)은 열반을 말하며 무너뜨릴  없고 희론할 수도 없는 것이라. 법성은 그 근본의 씨알인 본종분(本分種)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마치 황색의 에는 금의 성품이 있고, 백색의 에는 은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是一切世閒法中皆有涅槃性。

諸佛賢聖以智慧、方便、持戒、禪定、教化引導,令得是涅槃法性。

이와 같이 모든 일체 세간의 에는 열반의 성품인 열반성(涅槃性)이 있나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지혜(智慧) 방편(方便) 지계(持戒) 선정(禪定)으로써 교화하고 인도하여 중생들이 열반성(涅槃性) 얻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利根者卽知是諸法皆是法性;譬如神通人能變瓦石皆使爲金。

鈍根者方便分別求之,乃得法性;譬如大冶鼓石,然後得金。

근기가 영리한 이근(利根)이면   제법은 모두가 바로 법성(法性)임을 아나니, 마치 신통있는 사람이 기와와 돌을 변화시켜 모두 금이 되게 하는 것과 같으며,

근기가 둔한 둔근(鈍根)이면 방편으로 분별하고 구하여, 비로소 법성을 얻게 되나니, 마치  대장장이가 돌을 두드려 부순 연후에야 금을 얻게 되는 것과 같으며,

 

復次,如水性下流故會歸於海,合爲一味;

諸法亦如是,一切摠相、別相皆歸法性,同爲一相,是名法性。

또한 마치 물의 성품은 아래로 흘러가기 때문에 마침내는 바다로 돌아가서 합쳐지게 되어 하나의 맛인 일미(一味)가 되는 것과 같이,  역시 그와 같아서 일체의  총상(總相) 각각의 별상(別相) 모두가 법성으로 돌아가서  같은 하나의 상인 일상(一相) 되나니, 이러한 것을 법성(法性)이라 하는 것이며, 

 

如金剛在山頂,漸漸穿下至金剛地際,到自性乃止;

諸法亦如是,智慧分別推求已,到如中,從如入自性,如本末生,滅諸戲論,是名爲法性。

마치 금강(金剛) 산의 정상에 있다가 점차 아래를 향하여 뚫고 내려가 금강으로 된  끝에 이르러 자성에 도달하면, 비로소 그치는 것과 같이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로 분별하며 추구하여서 () 가운데에 이르게 되고, 여(如)를 쫓아 자성(自性)에 들어가서 본말(本末, 근본) 생긴 바와 같음이 되어 모든 희론이 소멸되는 것을 법성(法性)이라 하나니, 

 

又如犢子周慞嗚呼,得母乃止;諸法亦如是,種種別異,取捨不同,得到自性乃止,無復過處,是名法性。

 마치 송아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울어대다가도 어미소를 만나게 되면 비로소 그치는 것과 같이,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갖가지로 다르며, 취하고 버릴 것이 같지 않으나, 자성에 이르게 되면 비로소 그치게 되어서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나니, 이러함을 법성(法性)이라 하는 것이다.

 

“實際”者,如先說:法性名爲“實”,入處名爲“際”。

실제(實際) 함이란, 앞에서 설명한 법성(法性)을 실(實)이라 하고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제(際)라 하며, 

 

復次,一一法有九種:一者、有體;二者、各各有法;如眼、耳雖同四大造,而眼獨能見,耳無見功;又如火以熱爲法,而不能潤;三者、諸法各有力;如火以燒爲力,水以潤爲力;

또한 하나하나 법에는 아홉 가지의 구법(九法) 있으니,

첫째는 몸(근본) 있는 유체(有體)이며,

둘째는 저마다 법이 있는 유법(有)이니, 마치 눈과 귀는 같은 4() 만들어졌으나, 눈만이  수가 있고 귀는 보는 () 없는 것과 같으며,  불은 더운 열(熱)로써 법을 삼으니 능히 적셔지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셋째는 제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힘이 있는 유력(有力), 마치 불은 태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물은 적시는 것으로 힘을 삼는 것과 같으며, 

 

四者、諸法各自有因;五者、諸法各自有緣;六者、諸法各自有果;七者、諸法各自有性;八者、諸法各有限㝵;九者、諸法各各有開通方便。諸法生時,體及餘法,凡有九事。

넷째는 제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인이 있는 유인(有因)이고, 

다섯째는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연이 있는 연(有緣)이며, 

여섯째는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결과가 있는 유과(有果)이며, 

일곱째는 제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성품이 있는 유성(有性)이고, 

여덟째는 제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한계가 있는 유한애(有限礙)이며, 

아홉째는 제법은 각각 저마다 스스로의 열어서 통하는 방편이 있는 유개통방편(有開通方便)이니,

법이 생길 때에는 몸을 비롯하여 그 밖의 법에 이르기까지 아홉 가지의 제법구사(諸法九事)가 있는 것이다.

 

知此法各各有體、法具足,是名“世閒下如”。知此九法終歸變異盡滅,是名“中如”。譬如此身生,從不淨出,雖復澡浴嚴飾,終歸不淨。是法非有非無、非生非滅,滅諸觀法,究竟淸淨,是名“上如”。

이러한 법에는 저마다 각각의 유체(有體) 법(法)을 두루 갖추고 있음 알게 되는 것을 세간에서의 () () 하고, 

 아홉 가지의법(九法)은 마침내 변하여 달라지고 다하여 소멸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 () 하나니, 마치  몸이 태어날 때는 청정하지 않는 곳으로부터 나왔으니, 비록 몸을 씻고 장식한다 하여도 마침내는 다시 청정하지 않은 것으 되돌아가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관법(觀法) 소멸하여야 마침내는 청정하여 지는 것이니, 이러함 아는 것을 () () 하는 것이.

 

復次,有人言:是九事中有法者,是名“如”。

譬如地法堅重,水法冷濕,火法熱照,風法輕動,心法識解;如是等法名爲“如”。

또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러한 구사(九事) 안에 법이 있는 유법(有法) 바로 ()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땅의 법은 굳고 무거운 견중(堅重)이며, 물의 법은 차고 습한 냉습(冷濕)이며, 불의 법은 덥고 비추는 열조(熱照)이며, 바람의 법은 가볍고 움직이는 경동(輕動)이며, 마음의 법은 식별하고 이해하는 식해(識解)인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법을 여(如)라 하는 것이.

 

如經中說, “有佛無佛,如、法相、法位,常住世閒所謂無明因緣諸行 常如本法"

“法性”者,是九法中性。“實際”者,九法中得果證。

마치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거나 간에 그대로의 여(如)와 법상(法相)과 법위(法位) 항상 세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이른바 무명(無明)의 인연과 모든 지어감의 행(行)은 항상 본래의  그대로이다”라고 하였으며, 

법성(法性)이라 함이란 이 아홉 가지의 구법(九法)에서의 성(性, 성품)이 되며, 

실제(實際)라 함이란 아홉 가지 구법(九法)에서 과를 증득하여 과증(果證)을 얻는 것이다.

 

復次,諸法實相,常住不動。衆生以無明等諸煩惱故,於實相中轉異邪曲;諸佛賢聖種種方便說法,破無明等諸煩惱,令衆生還得實性,如本不異,是名爲“如”。

또한 제법의 실상(實相) 항상 머무르면서 부동(不動)한 것이지, 중생이 무명 등의 모든 번뇌 때문에 실상 가운데에서 바뀌고 달라지고 삿되고 굽어지는 것이라.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갖가지 방편으로 설법하시면서 무명 등의 모든 번뇌를 파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진실한 성품을 다시 얻게 하여서 본래의 여본(如本)대로 다르지 않게 하고자 하시나니, 이것을 () 하는 것이.

 

實性與無明合故變異,則不淸淨;若除卻無明等,得其眞性,是名“法性淸淨”。

“實際”名入法性中,知法性無量無邊,最爲微妙,更無有法勝於法性、出法性者,心則滿足,更不餘求,則便作證。

진실한 성품이 무명과 합하기 때문에 변하고 달라져서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만약 무명 등을 물리쳐서 없애버리면  진실한 성품을 얻게 되나니, 이러한 것을 법성이 청정한 실제(實際) 하고 법성(法性)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법성(法性)이 무량하고 무변한 것임 아는 것이 가장 미묘함이며,

나아가 어떠한 법도 법성(法性)보다 뛰어 것이 없음 알게 되면 마음이 만족하여져서 다시는  밖의 것을 구하지 않으며,  증과를 짓게 되나니, 

 

譬如行道,日日發引而不止息,到所至處,無復去心;行者住於實際,亦復如是。如羅漢、辟支佛住於實際,縱復恒沙諸佛爲其說法,亦不能更有增進,又不復生三界。

비유하자면, 마치 길을  때에는 날마다 쉬지 않고 나아다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면 다시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이가 실제(實際) 머무르는  역시 그와 같은 것이며,  

마치 아라한과 벽지불이 실제에 머무르게 되면 비록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그를 위하여 설법한다 하여 다시는  나아가고자 하지 않으며 다시는 삼계(三界) 태어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若菩薩入是法性中,懸知實際,若未具足六波羅蜜、教化衆生,爾時若證,妨成佛道。是時菩薩以大悲、精進力故,還修諸行。

만약 보살이  법성(法性) 가운데에 들어가게 되면 실제(실상)를 알게 되나니, 설령 아직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하였다 하여 중생을 교화하게 되며, 

이 때에 만약 증득하여 버리면 중생이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이기에 보살은 대비(大悲) 정진하는 힘으로 다시 모든 행을 닦아 나아가는 것이다.

 

復次,知諸法實相中無有常法、無有樂法、無有我法、無有實法,亦捨是觀法;如是等一切觀法皆滅,是爲諸法實,如涅槃,不生不滅,如本末生。譬如水是冷相,假火故熱;若火滅熱盡,還冷如本。

또한 제법의 실상에는 항상하는 상법(常法)이 없고, 즐거운 낙법(樂法)이 없으며, '나'라는 아법(我法)이 없고, 진실한 실법(實法)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 이러한 관법(觀法) 또한 버리나니,

이 같은 등의 일체 관법이 모두 소멸하게 되는 것이 곧 제법은 실로 열반과 같고 불생불멸(不生不滅)이어서 생겨난 근본 그대로의 여본말(如本末)이 되는 것이니,

마치 물은 찬 모양이지만 불의 힘을 빌려서 더워졌다가, 만약 불이 꺼지고 열이 다하게 되면 다시 찬 본말대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用諸觀法,如水得火;若滅諸觀法,如火滅水冷,是名爲如。如實常住。何以故?諸法性自爾。譬如一切色法皆有空分。

모든 관법(觀法)을 쓰는 것은 마치 물이 불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고,

모든 관법이 소멸되는 것은 마치 불이 꺼져서 물이 차게 되는 것과 같나니,

이러함을 일컬어 한결같음의 여(如)라 하며, 실답게 항상 머무르는 상주(常住)라고 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제법의 법성(法性) 자체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라. 비유하자면, 일체의 형상이 있는 색법(色法)에는 모두 공한 부분의 공분(空分)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諸法中皆有涅槃性,是名法性。得涅槃種種方便法中皆有涅槃性。若得證時,如法性則是實際。復次,法性者,無量無邊,非心心數法所量,是名法性。妙極於此,是名眞際。 

모든 제법에는 열반성(涅槃性)이 있으니 이를 법성이라 하는 것이며,

열반을 얻는 갖가지의 방편법(方便法)의 모두에는 열반성(涅槃性)이 있으니, 만약 과를 증득할 때에 법성과 같이 여여한 여법성(如法性)이 된다면 이를 곧 실제(實際)라 하는 것이며, 
또한 법성은 무량하고 무변한 것으로,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러한 것을 법성(法性)이라 하고, 그 미묘한 극치에 이르는 것을 진제(眞際)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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