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善根供養義 第四十六 卷第三十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6. 초품 중 선근공양(善根供養)의 뜻을 풀이함 3
問曰:佛在時,衆生尚有飢餓,天不降雨,衆生困弊;佛猶不能滿一切衆生之願,云何菩薩能滿其願?
묻나니, 부처님께서 계실 때에도 오히려 굶주림이 있었으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중생들이 곤액을 받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온갖 중생들의 소원을 다 채워주지 못하셨는데, 어떻게 보살이 그 소원을 채워준다는 것입니까?
答曰:菩薩住於十地,入首楞嚴三昧,於三千大千世界,或時現初發意,行六波羅蜜;或現阿鞞跋致;或現一生補處於兜率天上,爲諸天說法;或從兜率天上來下生淨飯王宮,或現出家成佛;或現大衆中轉法輪,度無量衆生;或現入涅槃,起七寶塔,遍諸國土,令衆生供養舍利;或時法都滅盡。
답하나니, 보살은 십지(十地)에 머무르게 되어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어가서 삼천대천세계에서
혹은 처음에 뜻을 일으킨 초발의(初發意)로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아비발치를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일생보처(一生補處) 보살로써 도솔천(兜率天) 위에서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설법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도솔천 위에서 내려와 정반왕(淨飯王)의 궁전에 태어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출가하여 성불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대중 가운데서 법륜(法輪)을 굴리며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열반에 들어가서 칠보의 탑을 일으켜 두루 모든 국토의 중생으로 하여금 사리(舍利)에 공양하게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법이 모두 사라져서 다한 것을 나타내기도 하나니,
菩薩利益如是,何況於佛!而佛身有二種:一者、眞身,二者、化身。衆生見佛眞身,無願不滿。
보살이 이익되게 하는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부처님이겠는가!
부처님의 몸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진신(眞身)이고, 둘째는 화신(化身)이라.
중생이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면 그 원마다 만족하지 않음이 없으니,
부처님의 삼신(三身)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이 자신의 몸에 있음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생략~ 사람의 의식은 대상을 쫓아가는 강력한 특질을 갖고 있다. 부처님의 삼신(三身)이 제시되면 듣는 이는 자기의 몸을 놓친다. 자기를 떠나 허상을 좇는다. 그렇다고 자기의 몸을 놓치지 말라는 것은 자기 몸에 집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온(五蘊)을 조견(照見)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마음챙김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즉 의식이 지금 이 순간을 떠나서 생각(개념)에 머물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그 대상이 부처님이라도 마찬가지고 진리여도 예외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금강경의 실천적 수행법이다. 자기 색신(色身)에서 삼신(三身)을 본 이가 어찌 아상(我相)이 생길 수 있겠는가! 이를 의심하고 걱정하는 이는 경(經)의 가르침을 이해한 후 단 한 번도 자신에게서 증험하는 일을 해보지 않은 이다. 오로지 관념으로 이해한 것을 수행한 것으로 착각한 데서 기인한 망령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불교신문, 태현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다시보기
佛眞身者,遍於虛空,光明遍炤十方,說法音聲亦遍十方;無量恒河沙等世界滿中大衆皆共聽法,說法不息,一時之頃,各隨所聞而得解悟。
부처님의 진신(眞身)이라 함이란, 허공에 두루하고 광명이 시방을 두루 비추며 설법하는 음성 역시 시방의 무량한 항하의 모래 수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므로 그 안에 가득 찬 대중은 모두가 함께 법을 들으며, 그 설법을 쉬지 않으시니, 일시에 각각이 들은 바에 따라 각각으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如劫盡已,衆生行業因緣故,大雨澍下,閒無斷絕,三大所不能制;惟有劫盡,十方風起,更互相對,能持此水。
마치 겁(劫)이 다하여 마칠 때이면 중생은 그가 행한 업의 인연 때문에 큰 비가 끊임없이 쏟아지므로 3대(大)를 제어할 수 없게 되나, 오직 겁이 다할 때에만 일어나는 시방의 바람이 서로 다시 상대하여서 이 물이 버틸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如是法性身佛有所說法,除十住菩薩,三乘之人皆不能持;惟有十住菩薩不可思議方便智力,悉能聽受。
이와 같이 부처님의 법성신(法性身)은 이렇게 설법하시지만, 십주(十住) 보살을 제외한 삼승(三乘)의 사람들 모두는 그 설법을 지니지 못하며, 오직 십주 보살만이 불가사의한 방편과 지혜 힘으로 모두 능히 듣고 받아 들일 수 있을 뿐이다.
衆生其有見法身佛,無有三毒及衆煩惱,寒熱諸苦一切皆滅,無願不滿。如如意珠,尚令衆生隨願皆得,豈況於佛!珠與一切世閒之願,佛與一切出世閒願。若言“佛不能悉滿衆生所願”,是語不然!
중생으로서 그러한 법신불을 볼 수 있는 이라면 삼독(三毒)을 비롯한 많은 번뇌와 춥고 더운 한열(寒熱)의 모든 고통이 다 소멸되면서 원마다 만족하지 않음이 없게 되나니,
여의주(如意珠)와 같은 것도 중생이 원하는 바를 모두 얻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부처님이겠는가!
여의주는 일체 세간의 원을 이루어 주나,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출세간 원을 이루어 주시나니,
만약 “부처님께서도 중생의 소원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말은 옳지 못한 것이다.
復次,釋迦文尼佛,王宮受身,現受人法,有寒熱、飢渴、睡眠,受諸誹謗,老、病、死等;內心智慧神德,眞佛正覺,無有異也。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왕궁에서 몸을 받았을 때에는 인간이 받는 법으로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과 목마름과 잠을 자는 등이 있었고, 모든 비방과 늙고 병들고 죽는 일 등을 나타 내시면서도 마음 속의 지혜와 신령한 덕은 참 부처님의 바른 깨달음인 정각(正覺)과 다름없으셨으며,
欲滿衆生所願,悉皆能滿;而不滿者,以無數世來,常滿衆生衣食之願,而不免苦;今但以涅槃無爲常樂益之。如人憐愍所親,不與雜毒美食。如是世閒願者,生諸結使,又復離時心生大苦,是故不以爲要。
중생의 소원하는 바를 모두 다 만족시키고자 하시어 모두 다 만족하게 하였으나, 불만족의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는 세계로부터 오게 되어서, 중생으로서의 옷과 밥에 대한 원은 만족하나 괴로움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이제는 다만 열반무위(涅槃無爲)의 상락(常樂)으로써만 그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셨나니,
마치 사람이 친한 이를 가엾이 여기어서 맛은 있으나 여러가지 독이 섞여있는 음식은 주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세간의 원이란 모든 결사(結使, 번뇌)를 내는 것이고, 또 그것을 여읠 때에는 마음에 큰 고통이 생기게 하는 것이므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復次,有人言:釋迦牟尼佛已滿衆生所願,而衆生自不能得。如『毘摩羅詰經』說:“佛以足指案地,卽時國土七寶莊嚴,我佛國如是。爲多怒害者,現佛國異" 又如龍王等心降雨,在人爲水,餓鬼身上皆爲炭火。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미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켰건만, 중생들 스스로가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의 설명과 같으며,
부처님께서 발가락으로 땅을 어루만지자 즉시 국토가 칠보로 장엄되었으니, 우리의 불국토가 이러하건만 원한과 해침의 원해(怨害)가 많은 이들에게는 불국토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
마치 용왕이 평등한 마음으로 비를 내리지만 사람들에게는 물이 되고, 아귀(餓鬼)들에게는 숯불이 몸에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若能滿一切衆生願者,則衆生有邊,無有受諸飢寒苦者。何以故?一切衆生皆滿所願,願離苦得樂故。
묻나니, 만약 일체 중생들의 소원을 다 만족시킬 수 있다면, 중생은 끝이 있고, 이 모든 이들이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중생의 소원하는 바와 고통을 여의고 쾌락을 얻기를 원하 바를 다 만족하였기 때문입니다.
答曰:“滿一切”者,名字一切,非實一切。如『法句』偈說:
답하나니, 일체(一切)를 다 만족시킨다고 할 때의 일체(一切)란 진실로 모든 것이 아니니,
마치 '법구경'에서 설한 게송과 같은 것이다.
一切皆懼死,莫不畏杖痛,恕己可爲譬,勿殺勿行杖。
일체(一切)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매질의 아픔인 장통(杖痛)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나니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듯 남에게도 그렇게 하여서
죽이지도 않고 폭력(매질)을 휘두르지 말라.
雖言“一切畏杖痛”,如無色衆生無身故,則無杖痛;色界衆生雖可有身,亦無杖痛;欲界衆生亦有不受杖痛。而言“一切”,謂應得杖者說言“一切”,非實一切。
비록 "일체(一切)의 것이 폭력의 아픔을 두려워한다”고 말하기는 하나,
무색계(無色界)의 중생은 몸이 없기 때문에 폭력의 고통이 없으며,
색계(色界)의 중생은 비록 몸이 있기는 하나 역시 폭력의 고통이 없으며,
욕계(欲界)의 중생 또한 폭력의 고통을 받지 않는 이가 있으므로
‘일체(一切)'란 말은 폭력을 당하게 될 이를 염두에 두고 ‘일체(一切)’라 한 것일 뿐, 진실로 ‘일체(一切)’인 것이 아니다.
以是故,菩薩滿一切衆生所願,謂應可得者。然菩薩心無齊限,福德果報亦無有量;但衆生無量阿僧祇劫罪厚障故,而不能得。
그러므로 보살이 ‘일체(一切)’ 중생의 소원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가능한 중생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당연히 보살의 마음은 제한이 없으므로 복덕의 과보도 역시 무량하지만, 단지 중생이 한량없는 아승기겁(劫) 동안 지은 죄의 두꺼운 장애 때문에 얻지 못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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