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大慈大悲義 第四十二 卷二十七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42. 초품 중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뜻을 풀이함 10

 

▶ 經. “欲過聲聞 辟支佛地 住阿跋致地 當學般若波羅蜜!”

▷ 經.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지(阿鞞跋致地, 무생법인)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 익혀야 한다.

 

▶ 論. 問曰; 菩薩入法位時 卽已過聲聞 辟支佛地 住阿跋致地 何以故復說?

▷ 論. 묻나니, 보살이 법위(法位)에 들어갈 때에는 이미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雖三事一時 諸法各各相 應當次第讚, 如一心中 一時得無漏五根 而各各分別說其相。

답하나니, 비록 공덕(功德)과 혜명(慧明) 방편구족(方便具足)의 세 가지를 한꺼번에 다 이룬다 할지라도 마땅히 제법 각각의 고유한 상(相)을 차례로 찬탄해야 하나니,

마치 한마음 가운데서 한꺼번에 무루(無漏)의 오근(五根,신근 진근 염근 정근 혜근)을 얻게 되면, 그 각각의 고유한 상(相)을 분별하여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入法位時 斷若干結使 得若干功德 過是地 住是地 唯佛能知,

亦欲引導諸菩薩故 佛種種讚說。

보살이 법위에 들 때에는 약간의 번뇌의 결사(結使)를 끊고 약간의 공덕을 얻게 되며, 이 지위를 지나게 되거나 이 지위에 머물게 게 되는 것은 오직 부처님께서만이 능히 아시는 것이며, 또한 모든 보살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갖가지의 찬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如此經始 佛在耆闍崛山 與五千比丘俱 皆是阿羅漢 諸漏已盡 所作已辦等。

阿羅漢卽是漏盡 漏盡者卽是所作已辦等。

亦爲引導餘人 令心淸淨故 種種讚說 無咎。

마치 이 경의 시작에서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 머물실 때에 5천의 비구들과 함께 하셨으니,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어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였고 할 일을 다하여 마쳤다”고 하는 것과 같이,

아라한이란 곧 번뇌를 다한 누진(漏盡)이며, 누진(漏盡)이라는 것이 바로 할 일을 다하여 마친, 소작이판(所作巳辦)이라. 역시 그 밖의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므로 여러 가지의 찬탄의 말씀을 하신 것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此亦如是 “入法位”卽是“過阿羅漢 辟支佛地 住阿跋致地”。

復次 因入法位故 得過阿羅漢 辟支佛地 住阿跋致地。

여기에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법위에 드는 입법위(入法位)라는 것이 곧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이다.

또한 이 법위(法位)에 들게 된 것으로 인하여 아라한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問曰; 入法位中 過老病死 及斷諸結使 破三惡道等 如先說, 何以但說“過聲聞 辟支佛地”?亦住種種功德, 何以故 但說“住阿跋致地”?

묻나니, 법위(法位)에 들게 되면 노병사(老病死)를 초월하며, 나아가 모든 번뇌를 끊고 삼악도(三惡道) 등을 깨뜨리게 된다는 등은 앞에서의 설명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갖가지의 공덕에 머무른다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다만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른다고만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 捨諸惡事 得諸功德 後當次第說 及所住功德, 諸法當須次第 不可一時頓說。

답하나니, 모든 나쁜 일을 버리게 되면 모든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며, 머물게 될 공덕의 차례에 대해서는 나중에 마땅히 설명하겠지만, 제법은 모름지기 순서가 있는 것이니 한꺼번에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復次 菩薩初發意時 所可怖畏 無過聲聞 辟支佛地。正使墮地獄 無如是怖畏 不永破大乘道故, 阿羅漢 辟支佛於此大乘 以爲永滅。

또한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킨 초발의(初發意) 때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지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야 하는 것이다. 정작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이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으니, 대승(大乘)의 도(道)를 영원히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니, 아라한과 벽지불은 이 대승을 영영 소멸시키는 것이다.

 

譬如空地有樹 名舍摩梨 觚枝廣大 衆鳥集宿。一鴿後至 住一枝上 其枝及觚 卽時壓折。澤神問樹神, “大鳥雕鷲 皆能任持 何至小鳥 便不自勝?” 觚 술잔 고, 네모 고, 

비유하자면, 마치 넓은 빈 땅에 사마리(舍摩梨, Śābari)라는 나무가 있었는데, 높고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무성하였으므로 온갖 새들이 잠을 자기 위하여 모여 들었는데, 늦게 비둘기 한 마리가 이 나뭇가지 위에 와서 앉았는데, 그 나뭇가지가 이내 휘청하면서 부러져 버리자 택신(澤神, 연못의 신)이 그 나무신에게 묻기를 “독수리와 같은 큰새도 모두 견뎌내었으면서 어찌하여 작은 새인, 비둘기도 이겨 내지 못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樹神答言; “此鳥從我怨家 尼俱盧樹上來 食彼樹果 來我上 必當放糞, 子墮地者 惡樹復生 爲害必大。以是故 於此一鴿 大懷憂畏, 寧捨一枝 所全者大。

수신이 대답하기를 “이 새는 나의 원수의 가문인 니구로(尼俱盧, Nyagrodha, 나무 선인장) 나무 위에 있다가 온 것입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다가 와서 나의 나뭇가지에 앉게 되면 틀림없이 똥을 싸게 될 것이고, 그 씨가 땅에 떨어지면 그 나쁜 나무가 다시 자라나게 될 것이며, 그 해로움이 아주 클 것이기 때문에 이 비둘기 한마리를 몹시 두려워한 것이니, 차라리 나뭇가지 하나를 버리고 온전함을 도모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菩薩摩訶薩亦如是 於諸外道 魔衆及諸結使 惡業 無如是畏如阿羅漢 辟支佛。何以故?聲聞 辟支佛於菩薩邊 亦如彼鴿 壞敗大乘心 永滅佛業。以是故 但說“過聲聞 辟支佛地”。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외도나 악마와 그리고 번뇌와 악업이 있다 할지라도 아라한이나 벽지불만큼은 두렵지가 않으니, 왜냐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은 보살 곁에 있으면서 마치 저 비둘기처럼 대승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부처님의 업을 멸하게 하기 때문이니, 이러한 까닭에 다만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住阿跋致地”者 從初發意已來 常喜樂住阿跋致地, 聞諸菩薩多退轉故 發意時作願, “何時當得 過聲聞 辟支佛地 住阿跋致地?”以是故說“住阿跋致地”。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문다는 것이란, 초발의(初發意)를 일으킨 때부터 항상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여서 모든 보살들이 물러나게 되는 일이 많음을 들었기 때문에, 처음 뜻을 낼 때에 원을 세우되 “언제나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지나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리라”고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문다”고 한 것이다.

 

問曰; 何等是阿跋致地?

묻나니, 어떠한 것이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입니까?

 

答曰; 若菩薩 能觀一切法 不生不滅 不不生不不滅 不共非不共。如是觀諸法 於三界得脫 不以空 不以非空,

답하나니, 만약 보살이 일체법은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나지 않는 것도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며, (유위법과)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제법을 관찰하여 삼계(三界)를 벗어났으나, 공(空)하지도 않고 공(空)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며, 

 

一心信忍 十方諸佛所用 實相智慧 無能壞 無能動者 是名無生忍法。無生忍法 卽是阿跋致地。

일심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실상(實相)의 지혜를 믿고 소용(所用, 이용)하며,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믿고 인욕하는 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하는데, 이 무생법인이 곧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인 것이다.

 

復次 入菩薩位 是阿跋致地, 過聲聞 辟支佛地 亦名阿跋致地。

또한 보살의 지위에 드는 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지위에 드는 것이며,

성문과 벽지불의 경지를 뛰어 넘는 것도 역시 아비발치의 지위에 드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復次 住阿跋致地 世世常得 果報神通 不失不退。若菩薩得此二法 雖得諸法實相 而以大悲 不捨一切衆生。

또한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면 세세마다 신통을 잃지 않으며, 물러나지도 않는 과보(果報)를 항상 얻게 되나니,  

만약 보살이 혜명(慧明)과 방편(方便)의 두 가지 법을 얻게 되면 비록 제법의 실상을 얻는다 하여도 대비(大悲)로써 일체 중생들을 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復有二法, 一者 淸淨智慧, 二者 方便慧。

復有二法, 一者 深心念涅槃, 二者 所作不離世閒。

譬如大龍 尾在大海 頭在虛空 震電雷霆而降大雨。

또한 두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지혜이고, 둘째는 방편의 지혜인 방편혜(方便慧)이며,

다시 두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는 깊은 마음으로 열반을 염(念)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을 하되 세간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용이 꼬리를 큰 바다에 담근 채 머리는 허공에다 두면서 우레와 번개를 치며 큰 비를 내리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 阿跋致菩薩 得是諸法實相智慧 世世不失 終不離。於諸佛深經終不疑 亦不作礙。何以故?我未得一切智慧故 不知何方便 何因緣故 如是說。

또한 아비발치를 이룬 보살은 이 제법 실상의 지혜를 증득하여 세세마다 잃지 않고 끝내 잠시도 여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의 심오한 경전에 대하여 끝내 의심을 내지도 않고, 또한 방해가 되지도 않으니,

왜냐하면, “나는 아직 일체지혜를 얻지 못한 때문에 어떠한 것이 방편이고 어떠한 인연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는 때문이다.

 

跋致菩薩 常以深心 終不生惡, 阿跋致 以深心集諸善 淺心作諸不善。

아비발치보살은 항상 깊은 마음으로써 끝내 악(惡)이 생겨나지 않게 하며, 아비발치보살은 깊은 마음으로써 모든 선행(善行)을 쌓아 모으나, 얕은 마음의 천심(淺心)으로 여러 가지 불선업(不善業)을 짓지 않는 것이다.

 

問曰; 若阿跋致相 得無生法忍, 云何 以淺心作諸不善?

묻나니, 만약 아비발치의 상(相, 특성)이라면 무생법인을 얻는 것인데 어찌하여 천심(淺心)으로써 여러 불선업(不善業)을 짓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答曰; 有二種阿跋致, 一者 得無生忍法, 二者 雖未得無生忍法 佛知其過去 未來所作因緣 必得作佛 爲利益傍人故 爲其授記。是菩薩 生死肉身 結使未斷 於諸凡夫中 爲最第一 是亦名阿跋致相。

답하나니, 두 가지의 아비발치가 있느니, 첫째는 무생법인을 얻음이고,

둘째는 비록 아직 무생법인은 얻지 못하였으나 부처님께서  그의 과거와 미래에 지은 바와 지을 바의 인연을 아시고 반드시 장차 부처를 이루어, 주변 사람들을 이익되게 할 것을 아시는 까닭에 그를 위하여 수기(授記)하시는 것이니, 이 보살은 생사의 육신(肉身)과 번뇌는 아직 끊지 못하였다 하여도 모든 범부 가운데에서 가장 으뜸이 되므로, 이도 역시 아비발치의 상(相, 특성)이라 하는 것이다.

 

수기(受記)= 부처님으로부터 후에 부처기 될 것이라는 기별(記別)을 받은 중생의 입장이며,

수기(授記)= 부처님께서 기별(記別)을 주는 것.

 

若得無生忍法 斷諸結使 此則淸淨 末後肉身盡 得法性生身 結使所不礙 不須誡, 如大恒河中船 不須將御 自至大海。

만일 무생법인을 얻었다면 모든 번뇌를 끊었으므로 이야말로 청정하여서 마지막의 육신도 다하고 법성생신(法性生身, 8지 이상의 보살)을 얻게 되며, 번뇌의 방해 받지도 않으며, 가르치거나 훈계할 필요도 없나니,

마치 큰 항하(恒河)에 떠 있는 배는 끌어갈 필요도 없이 저절로 큰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復次 有初發意生大心 斷諸煩惱 知諸法實相 便得阿跋致。

有但行檀波羅蜜 便具足六波羅蜜 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

또한 어떤 이는 처음 뜻을 일으킬 때에 대심(大心)을 내어서 모든 번뇌를 끊고 제법의 실상을 알수 있게 되어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하며,

어떤 이는 다만 단(檀, 보시)바라밀만을 행하면서 곧 육바라밀을 두루 갖추기도 하나니, 나아가 반야(般若)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으며,

 

有行六波羅蜜 未得阿跋致 於衆生中生大悲心 是時便得阿跋致。

어떤 이는 육바라밀을 행하나, 아직 아비발치를 얻지 못하다가 중생들에 대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는 순간에 곧 아비발치를 얻기도 하며, 

 

有得悲心而作是念, “若諸法皆空則無衆生 誰可度者?” 是時悲心便弱。或時以衆生可愍 於諸法空觀弱。

또 어떤 이는 가엾이 여기는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만약 제법이 모두 (空)’한 것이라면, 제도될 중생도 없는 것이니, 누가 제도된 다는 것인가” 하면서 대비(大悲)의 마음이 미약해 지기도 하며,

때로는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제법이 공함을 살피는 공관(空觀)에 있어서는 약해지기도 하는 것이나, 

 

若得方便力 於此二法 等無偏黨 大悲心不妨諸法實相 得諸法實相不妨大悲生。

如是方便 是時便得入菩薩法位 住阿跋致地 往生品中說。

復次 阿跋致相 如後跋致二品中說。

만약 방편의 힘을 얻게 되면 이 두 가지 법이 평등하여 치우침이 없게 되므로 대비의 마음도 제법의 실상에 대하여 방해되지 않으며, 제법의 실상을 깨달음에 있어서도 대비의 마음에 방해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방편의 힘을 얻게 될 때에 곧 보살의 법위에 들게 되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나니, 마치 「왕생품(往生品, Upapada-parivarta) 중에서 설하는 바와 같으며, 

또한 아비발치의 상(相, 특성)에 대한 것은 뒤의 아비발치이품(阿鞞跋致二品) 중에서 설명할 것이다. 

大智度論卷第二十七 終  대지도론 제 27 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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