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般若波羅蜜 第二十九 卷第十八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30. 초품 중 반야(般若)의 모습[]과 뜻[]을 풀이함 6

 

問曰, 無法中 云何有心生?

묻나니, 무법(無法) 가운데에서 어떻게 유(有)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答曰, 若言無 是事卽是有法。

답하나니, 만일 무(無)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유(有)의 법이 되는 것이며,

 

復次 菩薩觀一切法一相 所謂無相。

如牛中無羊相, 羊中無牛相, 如是等諸法中 各各無他相。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한 모습= 一相(일상)으로 관찰하나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마치 소에게는 양의 모습이 없고, 양에게는 소의 모습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러함과 같이 일체법의 각각에는 (다른 법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느니라. 

 

무상(無相)= 식(識)·수(受)·상(想)·행(行)·억념(憶念)·연려(緣慮)·각지(覺知) 등의 갖가지 심수(心數)는 청(靑)·황(黃)·적(赤)·백(白)도 아니고 잡색(雜色)인 것도 아니며, 그것에는 방(方)·원(圓)·장(長)·단(短)·대(大)·소(小)도 없으니, 나아가 시방의 허공과 온갖 세계를 다하여 마음의 형상을 찾으나 한 조각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다.(점찰선악업보경) 

즉 인연의 10가지 모습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이라는 오진(五塵)과 남(男) 여(女) 생(生) 주(住) 멸(滅)이라는 현상과 작용(法)멀리 여의어 얽매임이나 집착이 없는 모습.

 

如先言 因有故有心生 是法異於有 異故應無。若有法是牛 羊亦應是牛。

何以故, 有法不異故。若異則無 如是等一切皆無。

앞에서 '유(有)로 인한 까닭에 유(有)의 마음이 생긴다' 고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법은 유(有, 유상)와는 다르며,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무(無)인 것이니, 

만약 (일체법이) 유법(有法)에서 소라고 정해진 것이 있다면 양 또한 소가 되어야 하나니,

왜냐하면 유법(有法)은 다르게 바뀌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다르게 바뀌게는 것이라면 일체가 다 없어야 하는 것이며,

 

復次 菩薩觀一切法一 因是一法 諸法中一心生。

諸法各各有一相 合衆一故名爲二 名爲三, 一爲實 二 三爲虛。

또한 보살은 일체법이 하나인 것으로 관찰하고, 인(因, 원인)이 一法(일법)이며, 이로 인하여 제법에 대하여 하나라는 마음을 내나니, 제법은 제각각 하나의 모습= 一相(일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여러 개의 一相(일상)이 합하여지면 둘이라 하고, 셋이라고도 하나니, 하나는 진실이요, 둘과 셋은 허황된 것이다.

 

復次 菩薩觀諸法 有所因故有 如人身無常。何以故, 生滅相故。一切法皆如是 有所因故有。

또한 보살은 제법(諸法)이 인(因)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있게 되는 것이니, 마치 사람의 몸은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과 같으니, 왜냐하면 생멸하는 모습= 生滅相(생멸상)이기 때문이니, 제법이 모두가 이와 같이 인(因)하는 바가 있는 까닭에 있게 되는 有(유)인 것이다. 

 

復次 一切諸法 無所因故有, 如人身無常 生滅故, 因生滅故知無常。

또한 일체법(一切法)은 인하는 바가 없는 無所因(무소인)인 까닭에 있는 것이니, 사람의 몸이 무상하여 생멸을 거듭하는 것과 같으니, 생멸을  거듭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임을 아는 것이라.

 

此因復應有因 如是則無窮 若無窮則無因, 若是因更無因 是無常因亦非因 如是等一切無因。

이러한 인(因)에 다시 상응하는 인(因)이 있으니, 이렇게 인(因)이 거듭 상응한다면 그 다함이 없으며, 만약 다함이 없다면 인(因)이 없는 無因(무인)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 인(因)에 다시 또 상응하는 인(因)이 없다면 이 무상인(無常因)도 역시 인(因)이 아닌 것이 될것이니,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 일체법(一切法)에 인(因)이 없는 것이 되며,

 

復次 菩薩觀一切法有相 無有法無相者 如, 地堅 重相, 水冷 濕相, 火熱 照相, 風輕 動相, 虛空 容受相, 分別覺知 是爲識相。

또한 보살은 일체법(一切法) 유상(有相)이어서 어떠한 법도 無相(무상)임을 관찰하나니, 마치 지대(地大)의 땅은 굳고 무거움이 그 모습이요, 수대(水大)의 물은 차고 습함이 그 모습이요, 화대(火大)의 불은 뜨겁 비춤이 그 모습이요, 풍대(風大)의 바람은 가볍고 움직임이 그 모습이요, 허공(虛空)은 용납하여 받아들임이 그 모습이며, 분별하여 스스로 느끼고 아는 것은 식(識)의 모습이니, 

 

有此有彼 是爲方相, 有久有近 是爲時相。濁惡心惱衆生 是爲罪相, 淨善心愍衆生 是爲福相。著諸法 是爲縛相, 不著諸法,是爲解脫相。現前知一切法無是爲佛相。如是等 一切各有相。

이쪽과 저쪽은 방위(방향)의 모습이요, 오랫동안이나 가까움은 시간의 모습이요, 흐리고 악한 마음으로 중생을 괴롭히는 것은 죄의 모습이요, 맑고 착한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것은 복의 모습이요, 제법에 집착하는 것은 속박의 모습이요, 제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해탈의 모습이요, 앞에서 펼쳐지는=現前(현전)에서 제법이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음을 아는 것은 부처님의 모습이니,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것에는 제각각의 모습= 各有相(각유상)이 있느니라.

 

復次 菩薩觀一切法皆無相 是諸相 從因緣和合生 無自性故無。如地 色香味觸 四法和合故名地 不但色故名地 亦不但香 但味 但觸故 名爲地。何以故, 若但色是地 餘三則不應是地 地則無香味觸, 香味觸亦如是。

또한 보살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 모두 없는 모습 無相(무상)이니, 이러한 10가지 무상의 모습은 인연화합을 따라 생긴 것이니, 스스로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고 관찰하나니, 

즉, 마치 땅(地)이 색향미촉(色香味觸)이라는 사망(四妄)으로 된 네 가지 현상과 작용(法)이 화합하게 된 까닭에 땅이라 부르는 것으로, 모양(色)만으로 땅이라 하지 않는 것이며, 향(香)이나 미(味)나 촉(觸)만으로도 땅이라 하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모양(色)만을 땅이라 한다면 나머지 향(香) 미(味) 촉(觸) 세 가지는 땅이 아니어야 하고, 땅에서 향(香)을 맡을 수 없고, 맛(味)도 느낄 수 없을 것이며 촉감(觸)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

향(香) 미(味) 촉(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색향미촉(色香味觸)= 사망(四妄)이라 하고 극미(極微 paramāṇu)라고도 하며 유위법(有爲法)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復次 是四法 云何爲一法? 一法云何 爲四法? 以是故 不得以四爲地 亦不得離四爲地。

또한 색향미촉(色香味觸)의 네 가지 법이라면 어떻게 一法(일법)이 될 수 있으며, 一法(일법)이라면 어떻게 네 가지 법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네 가지로써 땅이라 할 수도 없고, 다시 이 네 가지를 떠난 것을 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問曰, 我不以四爲地 但因四法故 地法生 此地在四法中住

묻나니, 저는 색향미촉(色香味觸)의 네 가지로써 땅이라 여기지 않으며, 다만 네 가지의 법을 인한 까닭에 땅이라는 법이 생긴다고 하였으니, 곧 땅이 이 네 가지 법 속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答曰, 若從四法生地 地與四法異。如父母生子 子則異父母。

若爾者 今眼見色 鼻知香 舌知味 身知觸 地若異此四法者 應更有異根 異識知, 若更無異根 異識知 則無有地。

답하나니, 만약 색향미촉(色香味觸)의 四法(사법)을 따라 땅이 생기는 것이라면, 땅은 四法(사법)과는 다를 것이니,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나 그 자식은 부모와 다른 것과 같으니,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지금 눈으로 모양(色)을 보고, 코로 냄새(香)를 맡고, 혀로 맛(味)을 알고, 몸으로 촉감(觸)을 아는 것이나, 만약 이 네 가지 법과 다른 것이라면, 응당 다른 감관(根)과 다른 의식(識)이 있어야 할 것이요,

만약 다른 감관(根)과 다른 의식(識)이 없다면 땅은 곧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니라.

 

問曰, 若上說地相有失 應如阿毘曇說地相。地名四大造色 但地種是堅相 地是可見色.

묻나니, 만약 위에서 설한 땅의 모습에 틀린 점이 있다면, 당연히 아비담(논장)에서 땅의 모습을 말해 '땅이란 4대(四大)로 만들어진 색(色)이며, 땅의 根幹(근간) 地種(지종)은 굳은 모습이니, 땅은 볼 수 있는 물질=可見色(가견색)이다'라고 설하여야 할 것입니다.

 

答曰, 若地但是色 先已說失。又地爲堅相 但眼見色 如水中月 鏡中像 草木影 則無堅相 堅相則身根觸知故。

답하나니, 만약 땅이 다만 색(色)일 뿐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이미 잘못이라고 말하였으며, 

또한 땅의 단단한 모습, 堅相(견상)은 다만 눈으로 보는 색(色)일 뿐이라 한다면,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그림자와 초목의 그림자와 같이 堅相(견상)이 없어야 하나니, 단단함이란 몸=身根(신근)이 닿아야 알게 되는 때문이니라.

 

復次 若眼見色是地 堅相是地種, 眼見色亦是 水火濕熱相是水 火種。

若爾者 風 風種亦應分別 而不分別. 如說, '何等是風? 風種, 何等風種? 風'

若是一物 不應作二種答, 若是不異者 地及地種 不應異。

또한 눈으로 색을 보고 그러함을 땅이라 하며, 그 굳은 모습이 지종(地種)이라 한다면,

눈으로 보게 되는 색역시 그러할 것이니, 물과 불의 젖거나 뜨거운 모습이 수종(水種)이며 화종(火種)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바람과 바람의 요소 풍종(風種, 가벼움과 움직임)도 응당 따로 나누어 분별할 수 있어야 하거늘 사실은 분별하지 못하나니, 

위의 말과 같다면, 어떠한 것이 바람인가? 바람이라는 근간(根幹) 풍종(風種)인 가벼움과 움직임이다.

어떠한 것이 풍종(風種)인가? 바람이다. 

만약 바람과 풍종(風種)이 하나이라면 두 가지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요,

만약 바람과 풍종(風種)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땅과 지종(地種)도 응당 다르지 않을 것이니라.

 

問曰, 是四大各各不相離 地中有四種 水火風各有四種。

但地中地多故 以地爲名 水火風亦爾。

묻나니, 이 사대(四大)는 각각 서로를 여의지 않아서 땅(地)에도 사대(四大)의 대종(大種)이 들어 있고, 수(水) 화(火) 풍(風)에도 각가 사대(四大)의 요소가 들어 있지만,  땅에는 지대(地大)가 치우쳐 많기 때문에 땅이라 부르며, 물ㆍ불ㆍ바람의 경우 역시도 그러한 것입니까?

 

4대종(四大種, catvāri mahā-bhūtāni, Four primary elements)은 색법(色法), 즉 물질계를 구성하는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4가지 원소를 말한다. 줄여서 4대(四大, Four elements)라고도 하며, 또는 지계(地界) · 수계(水界) · 화계(火界) · 풍계(風界)의 4계(四界, Four dhatus)라고도 한다.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4대종은 물질계의 땅[地] · 물[水] · 불[火] · 바람[風]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구분하여 4대종을 실4대(實四大)라고 후자의 4종을 가4대(假四大)라 한다.

4대종은 5근(五根)의 경계(境界), 즉 세력 범위이자 인식작용 대상인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의 5경(五境) 중 촉경(觸境)에 속한다. 즉, 4대종은 분류상으로는 신근에 의해 지각되는 촉경에 속하지만, 그 대종성(大種性: 만드는 성질) 면에서는 촉경의 나머지 물질 또는 물체들은 물론이고, 나머지 색경 · 성경 · 향경 · 미경의 물질 또는 물체들도 형성하는 근원 물질이며, 또한 안근(눈) · 이근(귀) · 비근(코) · 설근(혀) · 신근(몸)의 5근을 형성하는 근원 물질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몸을 이루는 근원 물질이 곧 눈 · 귀 · 코 · 혀 · 몸을 이루는 각각의 특정한 물질들의 바탕이 되는 물질이며 또한 눈 · 귀 · 코 · 혀 · 몸에 의해 지각되는 각각의 객관적 물질들을 형성하는 근원 물질이며, 몸을 바탕으로 하여야만 눈 · 귀 · 코 · 혀가 존재할 수 있고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위키

 

答曰, 不然. 何以故, 若火中有四大 應都是熱 無不熱火故。

若三大在火中 不熱 則不名爲火, 若熱 則捨自性 皆名爲火。

답하나니,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불(火)에 네가지 요소가 있다면 마땅히 모두가 뜨거워야 하리니, 뜨겁지 않은 불(火)이란 없기 때문이며,

만약 세 요소= 三大(삼대)가 불에 있으되 뜨겁지 않다면 불(火)이라 할 수 없을 것이요,

만약 뜨겁다면 각각 스스로의 자성을 버린 것이 되며 또한 모두 불(火)이라 불러야 할 것이며,

 

若謂細故不可知 則與無無異。若有麤可得 則知有細 若無麤 亦無細。

만약 미세(細)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없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며,

만약 거침=麤(추)가 있다고 한다면 미세함도 있어야 하고, 거친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미세함도 없어야 하나니, 

 

如是種種因緣 地相不可得, 若地相不可得 一切法相亦不可得。是故一切法皆一相。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地相(지상)을 얻을 수 없고, 地相(지상)을 얻을 수 없다면 일체법(一切法)의 모습(실상)도 얻을 수 없는 것이 되므로 일체법(一切法)은 모두 한 모습= 一相(일상)이니라.

 

일체법(一切法)이 인연화합에 의해 펼쳐지는 것이기에 무위법(無爲法)에서 변화에 의해 유위법이 있게 된 것으로 유위법이라는 사대(四大)의 종(種)인 '색향미촉(色香味觸)'의 그 어디에도 무언가 정(定)해진 실상(實相)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問曰, 不應言無相。何以故, 於諸法 無相卽是相。若無無相 則不可破一切法相。

何以故, 無無相故。若有是無相 則不應言 '一切法無相'.

묻나니, ‘무상(無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법이 무상(無相)이라는 것은 곧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삼기 때문이며,

만약 무상(無相)이 없는 것이라면 곧 일체법(一切法)의 상(相)을 깨뜨릴 수 없으니

왜냐하면 무상(無相)이 없기 때문이며,

만약 이 무상(無相)이 있는 것이라면 '일체법이 무상(無相)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상(無相)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오진(五塵)과 남(男) 여(女) 생(生) 주(住) 멸(滅)의 10가지 상(相) 

 

答曰, 以無相破諸法相。若有無相相 則墮諸法相中, 若不入諸法相中 則不應難!

無相皆破諸法相 亦自滅相, 譬如前火木 然諸薪已 亦復自然。

是故聖人 行無相無相三昧 破無相故。

답하나니, 무상(無相)으로 제법에 상(相)이 있다는 사견을 깨뜨리거니와

만약 무상(無相)의 상(相)이 있다고 한다면 제법에 상(相)이 있다는 상견(常見) 떨어지게 되며,

만약 제법에 상(相)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곧 따져 묻지 말아야 하나니,

무상(無相)으로 하나같이 제법(諸法)의 상(相)이 있다고 하는 사견을 깨뜨리려면 스스로의 상(相)도 멸하여 없어져야 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나무를 태우기 전에 불을 붙이는 불쏘시개는 여러 땔감들을 타게하고 자신도 타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상(無相)을 행하고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나니, 무상삼매(無相三昧)가 무상(無相)까지도 깨뜨리기 때문이니라.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네 가지 지음이 있나니, 열반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고통(苦痛)을 다한 것임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에 “진(盡)”이라고 부르고, 삼독(三毒)을 비롯한 수많은 번뇌의 불이 꺼진 것임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에 “멸(滅)”이라 부르며, 일체법속에서 으뜸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에 “묘(妙)”라고 부르고, 세간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임을 살필 수 있었기 때문에 “출(出)”이라고 부릅니다.-마하반야바라밀다경

 

復次 菩薩觀一切法 不合 不散 無色 無形 無對 無示 無說, 一相所謂無相。

如是等 諸法一相。

또한 보살은 일체법(一切法)이 인연화합으로 합하는 것도 아니며, 인연의 흩어짐도 아니며, 無色(무색)이며 형상이 없는 無形(무형)이며, 대할 수도 없는 無對(무대)이며, 볼 수 없는 無示(무시)이며, 말할 수도 없는 無說(무설)의 一相(일상)이므로 곧 무상(無相)이라고 관찰하나니, 이와 같이 제법이 한 모습 一相(일상)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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