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釋初品中 羼提波羅蜜 法忍義 第二十五 卷第十五

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경량 엮음 참조

25. 초품 중 찬제바라밀(提波羅蜜)의 법인(法忍)의 뜻을 풀이함 3

 

復次 一切法中有相 故言一, 一相故 名爲一。一切物名爲法 法相故名爲一。如是等無量一門 破異相 不著一 是名法忍。

또한 일체법 가운데에는 각각의 모습이 있으므로 하나라 하고, 하나의 모습이기에 하나라 하며,

일체의 사물을 일컬어 법이라 하나니, 법의 모습=法相(법상)이기 때문에 하나라 하며,

이와 같이 무량한 하나의 문=一門(일문)으로 차별된 상을 깨뜨리고, 하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법인(法忍)이라 하며, 

 

▷참고= 질문: 어찌하여 일체법은 상(相)이 있다고 하는가?
답; 일체법에는 좋음이 있고, 추함이 있고, 안이 있고, 밖이 있으며, 일체법에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있으므로 이름이 유()가 된다 
질문: 법이 없는 중에서 어찌하여 상(相)이 있다고 하는가?
압: 만약에 법이 없으면 법이라 이름붙이지 못하고, 다만 유(有)를 차단하기 때문이 이름이 법이 없음이다. 만약 실로 법이 없음이라면 곧 이름이 유(有)가 되므로 일체법에 상(相)이 있다고 설한다.- 대지도론 31권

 

法相(법상)=dharmalakṣaṇa, dharmanimitta, dharmasaṃjñā, dharmatā 등이 ‘법상(法相)’으로 한역된다. 법상은 현상의 실상, 또는 체상(體相)을 가리킨다. 불교가 어느, 또는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하게 인식함으로써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추구한다고 할 때 인식의 대상으로 중요시되는 것이 바로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즉 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법상은 번역자에 따라서 법성(法性)과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법상을 안다는 것은 곧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의미하고 이는 오직 부처님만 가능한 것으로 설해져 왔다. 예를 들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는 “오직 부처님만 완전히 모든 법의 법상을 깨닫는다.”고 한다. 또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서는 “여래의 지혜는 법체(法體)와 법상에 대해서 모든 장애가 없다.”라고 설하는 등 여러 경론에서 이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유가행유식학파(瑜伽行唯識學派)의 소의경전인 『해심밀경(解深密經)』의 「일체법상품(一切法相品)」과 이 학파의 대표적인 논서인 무착(無著)의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에서는 법상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고 있는데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법상에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의타기상(依他起相)·원성실상(圓成實相)의 세 종류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수행자가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법이기 때문에 소지법(所知法)이라고도 한다. 이때의 세 가지 법상, 즉 삼상(三相)은 법상과 법성이 통하기 때문에 삼성(三性)이라고도 한다.
변계소집상은 두루 계탁(計度), 즉 '알음알이를 내어 집착하는 모습'이라는 의미로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구의 개념을 통해서 식별하는 존재의 허망한 상태를 가리킨다. 의타기상은 '다른 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모습'이라는 의미로서 존재가 조건 지어져 일어난 상태, 즉 연기(緣起)의 상태를 뜻한다. 원성실상은 '원만히 성취된 참다운 모습'이라는 의미로서 존재의 진실한 상태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상은 흔히 “밤에 길을 가다 길 가운데 뱀이 있는 줄 알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노끈임을 알았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즉 노끈을 착각하여 뱀으로 안 것은 변계소집상이고, 뱀이 아니라 노끈임을 안 것은 의타기상이고, 노끈이 마(麻)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것은 원성실상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의 현상[노끈]에 대해서도 이를 잘못 인식하면[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이를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즉 법상을 파악하면[마] 열반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유가행유식학파는 후에 이러한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서 법상을 자세히 분별하게 되는데 이러한 흐름이 동아시아에 전해져 법상의 분별에 중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유가행유식학파를 법상종(法相宗)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법상종은 세친의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등에 근거하여 오위백법(五位百法)의 설을 주창한다. 오위백법설은 곧 일체 모든 현상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일체 모든 현상을 다섯 종류 백 가지 법으로 자세히 분별해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일체의 현상을 심법(心法)·심소법(心所法)·색법(色法)·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무위법(無爲法)의 종류로 구분하고, 각각에 일체 현상을 나누어서 백 가지 법으로 한 것이다.-다움

 

復次 菩薩觀一切爲二。何等二? 二名內 外相。內外相故 內非外相 外非內相。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관찰하여 둘로 보나니, 무엇이 둘인가? 둘이란 안팎의 모습을 말하며, 안팎의 모습이기 때문에 안은 밖의 모습이 아니요, 밖은 안의 모습이 아니니며, (안팎의 모습이 있는 까닭에 6() 6()의 모습이 아니고, 6() 6()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復次 一切法 有無相故爲二。空不空 常非常 我非我 色非色 可見不可見 有對非有對 有漏無漏 有爲無爲 心法非心法 心數法非心數法 心相應法非心相應法。

또한 일체법은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둘이 되며, 공함과 공하지 않음,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 나와 나아님, 색과 색 아님, 볼 수 있음과 볼 수 없음, 대할 수 있음과 대할 수 없음, 유루(有辯)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마음의 법과 마음 아닌 법, 마음에 속하는 법=心數法(심수법)과 마음에 속하지 않는 법=非心數法(비심수법), 마음에 응하는 법=心相應法(심상응법)과 마음에 응하지 않는 법=非心相應法(비심상응법)이라.

 

如是無量二門 破一不著二 是名爲法忍。

이와 같이 무량한 두 가지=二門(이문)으로 하나를 깨뜨리고 둘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법인(法忍)이라 하며, 

 

復次 菩薩或觀 一切法爲三。何等爲三? 下中上, 善不善無記, 有無非有非無, 見諦斷思惟斷無斷, 學無學非學非無學, 報有報非報非有報。如是無量三門 破一不著異 是名爲法忍。

또한 보살은 일체법을 혹 셋으로 관찰하나니, 어떤 것이 셋인가? 아래(下)ㆍ중간(中)ㆍ위(上)와 선함(善)ㆍ불선함(不善)ㆍ선도 불선도 아닌 =無記(무기)와 유(有)ㆍ무(無)ㆍ유도 무도 아닌=非有非無(비유비무)와 견제단(見諦斷)ㆍ사유단(思惟斷)ㆍ무단(無斷)과 유학ㆍ무학ㆍ학도 무학도 아닌=非學非無學(비학비무학)과 과보ㆍ과보 있음ㆍ과보도 아니고 과보가 있지도 않음 등 이렇듯 무량한 세가지=三門(삼문)으로 하나를 깨뜨리나, 그 차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법인(法忍)이라 하느니라.

 

비바사론 30) 학법(學法)과 무학법(無學法)과 비학비무학법(非學非無學法)
[문] 어떤 것이 학법인가?
[답] 5음(陰)을 배우는 것이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무학법인가?
[답] 5음에 대하여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문] 어떤 것이 비학비무학법인가?
[답] 유루의 5음과 무위법이 그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학ㆍ무학ㆍ비학비무학법을 말하게 되는가?
[답] 탐내지 아니하는 도리에서 탐욕을 끊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학이고,
탐내지 아니하는 길에서 탐욕을 끊는 방법을 배우지 아니하여도 되는 사람 이것이 무학이고, 그 나머지가 비학비무학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노여워하지 아니하는 도리에서 노여움을 끊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학이고, 노여워하지 아니하는 길목에서 노여움을 끊을 필요가 없는 사람 이것이 무학이고,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리석지 아니하는 길에서 어리석음을 끊는 방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학이고, 어리석지 아니하는 길에서 어리석음을 끊을 필요가 없는 것 이것이 무학이다.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도로써 애착을 끊는 방법을 배우고, 애착이 아닌 근본을 찾는 이것이 학이며, 여기서 도로써 애착을 끊는 방법을 배우는 일 이것으로 학과 무학이 구별되며, 애착이 아닌 근본을 찾는 이것으로 학과 세속의 도가 구별된다.
도로써 애착을 끊는 방법을 배우지도 아니하고 또한 애착이 아닌 근본을 찾는 이것이 무학이다.
여기서 도로써 애착을 끊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는 이것으로써 학과 구별되고, 애착이 아닌 근본을 얻는 이것으로 세속의 도와 구별된다.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애착을 떠나지 아니한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학이고, 애착을 떠난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무학이다.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결(結)로 속박받는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학이고, 결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見道)의 경지와 사유도(思惟道)의 경지에 포함되는 이것이 학이며, 무학의 경지에 속하는 것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도와 사유도가 학이고, 더 배울 도가 없는 경지에 속하는 사람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지근(未知根)과 이지근(已知根)에 포함되는 것 이것이 학이고, 무지근(無知根)에 속하는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견신(堅信)ㆍ견법(堅法)ㆍ신해탈(信解脫)ㆍ견도(見到)ㆍ신증(身證) 이 다섯 경지의 생각 중에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학이고, 혜해탈(慧解脫)과 구해탈(俱解脫)의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4향(向)ㆍ3과(果)를 얻은 일곱 단계의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학이며, 마지막 한 과보 아라한과를 얻은 사람의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열여덟 경지에 든 사람[十八有學]것 이것이 학이고, 아홉 경지에 든 사람[九次第定:四禪ㆍ四無色定ㆍ滅盡定 혹은 九解脫]의 생각 가운데서 무루법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이 무학이며, 그 나머지는 비학비무학에 속한다”라고 하였다.-석가모니 붓다의 말씀

 

復次 菩薩雖未得 無漏道 結使未斷, 能信無漏聖法 及三種法印,

一者 一切有爲生法 無常等印, 二者 一切法無我印, 三者 涅槃實法印。

得道賢聖人 自得自知, 菩薩雖未得道 能信能受 是名法忍

또한 보살은 비록 무루의 도를 얻지 못하여 결사를  끊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무루의 성스러운 법과  가지 법인=法印(삼법인)을 믿나니

첫째는 온갖 유위의 (인연) 생법은 고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변화하여 영구히 존속하지 않는 無常(무상)한 것이어서 온갖 욕됨과 번뇌를 참아 한결같은 마음의 등인(等印)이요, →제행무상(諸行無常)

둘째는 일체법은 생멸변화를 벗어난 영원불멸의 실체 또는 본체가 없는 무아인(無我印)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

째는 열반은 진실한 실법인(實法印)이다.→열반적정(涅槃寂靜)

득도한 성현들은 스스로 얻어 스스로 아나, 보살은 비록 도는 얻지 못하였더라도 능히 믿고 받아 지니나니이를 법인(法忍)이라 하며, 

 

등인(等印, samāhita)= 마음이 들뜨거나 침울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온하게 된 상태-아함삼장사경

삼법인(三法印)= ① 제행무상(諸行無常), ② 제법무아(諸法無我), ③ 열반적정(涅槃寂靜)이며, 이 세 가지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사법인이 된다. 

법인(法印)은 ‘법의 표지’ 또는 ‘불법의 특징’을 뜻한다. 이 법인사상은 석가모니의 정각(正覺)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어느 불경이든 법인사상에 합치되면 이를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라 인정하고, 만약 법인사상에 어긋나면 이를 바른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판정하였다. 법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은 3종 또는 4종이 있는데, 이를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 한다.-다움

 

復次 於十四難不答 法中有常 無常等 觀察無㝵 不失中道 是法能忍 是爲法忍。

또한 14가지의 난문=十四難(십사난) 대하여 대답하지 않은 가운데서 항상함과 무상함 등의 장애 없이 중도(中道) 잃지 않음을 관찰하여, 이러한 법을 능히 참을 수 있는 것 법인(法忍)이라 하나니,  

 

十四難(십사난)=열네 가지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말한다. 곧 세상의 존속성, 세간의 공간적 한계, 몸과 마음, 깨달은 이[如來]의 사후 존족에 관한 질문을 말한다. 곧 ①세계는 항상한가. ②무상한가. ③항상하면서 무상한가. ④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가. ⑤세계는 끝이 있는가. ⑥끝이 없는가. ⑦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 ⑧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⑨몸과 마음은 하나인가. ⑩다른 것인가. ⑪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⑫존재하지 않는가. ⑬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가. ⑭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 열네 가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이 곧 14무기(無記)이다. 여기에서 무기(avyākṛta)란 ‘대답되지 않거나 혹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답하나니, 부처님 경전=佛經(불경)에서 비록 '세계무량(世界無量)'이라 말씀하셨으나 이는 방편의 말씀으로 실제의 가르침이 아니다. 마치 실제로는 영혼, 정신=神(신)이 없지만 방편으로 정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곧 열네 가지의 난문=十四難(십사난)이 되나니, 세계의 끝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함은 모두 삿된 소견이 되느니라.

만일 끝이 없다면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가 없어야 하나니, 왜냐하면 지혜로써 두루 알아서 다 알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것이 일체지(一切智)라.

만약 세계가 끝이 없다고 한다면, 다 알지 못하는 바가 있게 될 것이며,

만약 세계가 끝이 있다고 한다면, 앞에서 (일체의 세계는 무량(無量) 무변(無邊)하다) 말씀하신 것은 허물이 되느니라.

즉 두 가지 견해 모두가 삿된 견해(소견)이니, 왜냐하면 無邊(무변)에 의하여 有邊(유변)의 견해가 깨뜨려지기 때문이니라.-대지도론(大智度論) 제9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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