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진망화합식으로 수행의 구체적인 면 제시
청정심(진)과 생멸심(망)이 화합하여 이 청정심이 생멸심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아라야식이다
『기신론』은 일심에 심진여·심생멸의 이문이 있으며 다시 심생멸문에는 불생불멸의 여래장이 생멸심과 화합하여 여래장이 생멸심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아라야식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아라야식에는 각의(覺義)와 불각의(不覺義)의 두 가지 면이 있다고 한다.
일심에 심진여·심생멸의 이문이 있다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에 염·정, 선·불선의 양면성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는 또한 『기신론』이 출현하기 전 인도의 대승불교 후기에 서로 대립 상태에 있던 중관학파와 유가학파의 주장을 각기 언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심진여문이란 주로 일심의 자성청정한 면을 밝히고자 하는 중관계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고, 심생멸문이란 일심의 생멸염오한 면을 주로 설명하는 유가·유식계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다시 심생멸문 내에 각의와 불각의의 두 가지 면을 가진 아라야식을 설정한 것은 『기신론』의 구조가 이중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기신론』은 아라야식의 불각의에 의해 우리 범부들의 염오한 의식이 전개되고, 각의에 의해 앞서 전개한 염오한 의식들이 이제는 청정한 깨달음의 심원(心源)에로 돌아가게 됨을 밝힌다. 그렇다면 우리 범부 중생들의 실질적인 염·정 연기의 전개는 심생멸문 내의 이 아라야식이 그 기점이 되는 것이며, 앞서의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설정은 아라야식의 각의와 불각의의 활동에 대한 대전제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또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별기에서 불각의에 의한 염법연기에서 육추(六, 後述) 외에 삼세(三細)라는 세 가지의 미세한 무명업식·전식·현식이 아라야식 자리에 있음을 매우 여러 번(14번) 강조하고 있다.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훈습을 받아 주객미분(主客未分)의 매우 미세한 움직임으로 변화하는데, 바로 이 삼세·아라야식을 기점으로 점차 더 거친 염법(六)으로 전개되어 우리의 미오(迷汚)한 현실심을 이루는 것이다.
무명업식 등의 삼세가 아라야식 자리에 위치한다는 원효의 탁견은 물론 근거없는 주장이 결코 아니고 『기신론』본문에 의해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원효가 두드러지게 밝혀낸 것은 그만큼 원효의 『기신론』 이해가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유식학파에서는 아라야식을 막연한 잠재심으로서 망식(생멸식)이라고만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기신론』에서는 아라야식을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고 말한다. 즉 청정심(진)과 생멸심(망)이 화합하여 이 청정심이 생멸심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 아라야식이라는 것이다.
아라야식을 막연한 생멸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 범부 중생들이 심원에 환멸할 수 있는 실천 단계의 설명에 충분치 못함이 있을 것이다. 진망화합식이란 바로 진여청정심에 무명이 훈습되어 진망이 화합된 삼세라는 미세한 식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유식가에서보다 『기신론』에서 수행의 구체적인 면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원효는 그의 『기신론』별기 종체문에서 『기신론』이 중관·유식의 지양·종합설임을 설파했고, 이 주장은 『기신론』의 기본틀인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이문 구성으로 입증되었다. 더욱이 이는 아라야식 내의 각의와 불각의의 이의로 연결되며, 나아가 삼세가 아라야식이라는 그의 주장에서 우리 마음의 염·정 양면성 중 그 일면만을 대변하는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의 고집, 즉 진과 속을 별체로 보려는 편집(偏執)들을 꺾기 위해 출현한 논서라는 『기신론』의 입장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기신론』의 심진여·심생멸의 이문으로부터 아라야식의 이의, 그리고 삼세·아라야식설에 이르러서 기신론의 정신은 매우 체계적이고도 분명하게 밝혀진 것으로 생각된다.
7. 삼세육추는 무명훈습에 의한 마음 변화
지난 번 아라야식의 이의(二義)에 대한 중요성을 밝힌데 이어 오늘은 이의 중 불각의(不覺義)에 대한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기신론』의 순서에 따른다면, 각의(覺義)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겠지만 우리의 미오(迷汚)한 현실심을 설명하려면 먼저 불각의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훈습을 받아 불각심(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최초의 단계를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한다. 그러나 이 무명업상은 그 움직임이 너무나 미세하여 아직 주객미분의 상태이다.
갑돌이가 갑순이를 처음 대했을 때, 갑돌이의 마음에는 갑순이에 대해 거의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는다. 그러나 갑순이를 대하기 전과는 아주 조금 다른데, 이를 ‘꿈틀한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꿈틀’의 ‘꿈’도 아니고 ‘끄’의 단계가 시작될까 말까 한 경계이다.
◆ 다음은 무명업상의 지극히 미세한 동념(動念)에 의해 능견(能見)의 작용은 있지만 아직 소연경상(所緣境相)은 드러내지 않고 다만 밖으로 향하고 있을 뿐 경계(대상)를 의식하지 않는 상태, 즉 갑돌이가 갑순이를 대하여 ‘끄’의 단계가 시작되었지만 갑순이를 바라만 볼 뿐 그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를 능견상 또는 전상(轉相)이라 한다.
◆ 이제 세 번째 경계상(境界相 즉 現相)은 앞서 전상의 능견작용에 의해 마치 맑은 거울이 만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경계가 나타나게 되는 상태이다. 즉 갑돌이가 갑순이를 대하면서 비로소 인식하게 되지만 이것은 그냥 상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할 뿐, 아직 아무런 호오(好惡)의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이니 여기서 ‘꿈틀’의 ‘꿈’ 정도의 단계가 된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업상, 전상, 현상은 매우 미세하여 이를 삼세(三細:세 가지 미세념)라 하며 이는 아라야식의 자리에 있음을 원효는 그의 소·별기에서 매우 강하게 주장한다.
◆ 이 무의식 단계인 업, 전, 현의 삼상은 그 마지막 경계상에 의해 다시 육추(六)의 첫 단계인 지상(智相)으로 발전한다. 이 지상은 경계가 본래 마음(心)에서 나타난 것임을 모르고 마음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망상하여 이에 개개의 사물을 좋다, 나쁘다라고 헛되이 분별한다.
즉 갑돌이는 갑순이를 대하자 꿈틀하면서 비로소 좋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는 대상을 경험한 후에 일어나는 좋다는 감정이 아니고 대상을 대할 때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선험적인 호오의 감정이다. 원효는 이 제칠식의 지상을 아치, 아견, 아애, 아만의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한다.
◆ 지상 다음으로는 상속상이다. 앞의 지상에 의해 고락(苦樂)을 내고 그 고락의 생각이 상응하여 계속되는 상태이다. 즉 갑돌이의 갑순에 대한 좋은 감정이 계속되어 끊어지지 않는 상태이다.
◆ 이 상속상에 의하여 다시 경계(대상)를 연념(緣念)하고 호오를 분별함에 의해 고락의 생각을 계속 가지고 다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자리가 집취상(執取相)이다. 즉 갑돌이는 갑순이에 대해 좋다는 생각을 지속시키면서 점점 더 집착을 하게 되는 상태이다.
◆ 이러한 집취상의 헛된 집착에 의해 다시 바깥 사물에 대해 좋다든가 나쁘다는 임시 이름을 세우고 그 이름의 상을 분별, 계탁하는 것이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다. 즉 갑돌이의 갑순이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져 이제는 갑순이처럼 갸름한 얼굴, 날씬한 몸매 등에만 좋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 마지막 기업상(起業相)은 앞서의 갑순의 이미지에 집착함에 의해(즉 더욱 강해진 집착심에 의해) 다시 생각을 일으켜 선악을 만들어내는 자리이다. 즉 갑순을 위해 갑돌이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 업계고상(業繫苦相)은 제칠식과 육식에 해당되는 육추 중에서 칠식을 제외한 제육식에서 생긴 과보로서 삼계육취(三界六趣)의 괴로운 과보를 받아 자제하지 못한 상태이다. 즉 갑돌이는 갑순이로 인해 괴로움에 빠진다.
무의식에 해당하는 삼세에 비해 지상을 제외한 육추는 이름 그대로 그 의식의 흐름을 우리 범부들이 능히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거친 의식이다.
이상의 삼세육추의 순서는 자성이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무명의 훈습을 받아 어떻게 점점 거칠게 변화해 가는가(染法緣起)를 설명한 것이며, 이러한 미오한 현실심을 수행, 극복하여 원래의 청정한 심원(心源)에 도달할 수 있는(淨法緣起) 방안을 설명한 것이 시각(始覺)의 사(四)단계이다.
8. 악업에 실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한게 불각
지난번에는 아라야식의 이의(二義) 중 불각의에 의한 염법연기 즉 삼세육추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삼세육추로 물들여진 우리의 현실심을 어떻게 치유하여 심원(心源)의 자리에 되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 즉 아라야식의 이의 중 각의에 의한 정법연기를 검토할 차례이다.
각의(覺義)란 깨닫지 못한 데서 오는 허망한 생각을 여읜 것, 즉 본각을 의미한다. 이 본각에 의해 불각이 있는 것이며 또 불각에 의해 시각(始覺)이 있다고 하겠다. 시각이란 ‘비로소 깨달아 간다는 뜻’으로 우리가 불각심을 여의고 본각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시각의 네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앞서의 삼세육추가 세(細)에서 추(麤)로 진행된 것과는 달리 이제 이 정법 연기에서는 추에서 세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거칠게 물든 마음을 차츰 차츰 제거하여 미세하게 물든 마음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청정한 심원에까지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먼 십신(十信) 정도의 사람은 앞서의 생각에 신(身)·구(口)의 일곱 가지 악(惡 : 살생, 도적질, 음행, 거짓말, 욕설, 이간질, 교묘히 꾸며대는 말)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는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니 이를 불각(不覺)의 단계라 한다. 이 때 불각은 시각의 처음 단계로서 일곱 가지 악업이 나쁜 것임은 알았지만 아직 이 악업이 실체가 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각이라 하는 것이지 본각에 대한 불각의 의미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십주(十住) 이상의 삼현(三賢) 보살 정도의 사람은 무명이 아집과 화합·계탁하여 생긴 아(我)와 아소(我所)가 공(空)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일으키는 여섯 가지, 탐(貪)·진(嗔)·치(癡)·만(慢)·의(疑)·견(見)의 근본 번뇌를 깨닫게 되어 이런 생각이 영구토록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역경계와 순경계를 분별하여 탐·진 등의 거친 집착상을 일으키는 것은 그쳤으나 아직 주객미분의 무분별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으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이라 한다.
셋째 초지(初地) 이상 십지 정도의 사람은 앞서의 상사각에서 탐·진 등의 번뇌에서는 벗어났지만 아견(我見)·아치(我癡)·아애(我愛)·아만(我慢) 등의 인아집(人我執)과 법아집(法我執)에서는 해탈하지 못했다가 이제 이 수분각(隨分覺)에서는 무분별지와 상응하여 인·법집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분별각은 얻었으나 아직도 무명업상·전상·현상의 미세념은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이를 수분각이라 한다.
마지막 네 번째 보살지를 다 수행해 마친 사람은 방편도를 완수하여 무간도에 이르러 마음이 처음이 일어나는 상(心初起相)을 깨달아 마음에 이 심초기상이 없어지게 된다. 즉 여기에서는 무명업상·전상·현상의 미세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 한다.
앞의 세 단계에서는 깨달은 바가 있기는 하나 그 동념(動念)이 일어나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구경각 자리에서는 동념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일심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앞의 세 단계에서는 심원에 아직 이르지 못하여 미세념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오히려 무상하였으나 이 구경위에서는 무명이 완전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도달하여 다시는 동념을 일으키지 않으며 일심이 일여(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자리에서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으므로 구경각이라 한 것이다.
시각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각은 바로 본각과 일치하는데 이 구경각, 즉 본각에는 또한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지정상(智淨相)과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먼저 지정상이란 진여법의 내훈(內勳)의 힘에 의해 자량을 수습·수행하여 초지 이상의 단계로부터 보살 수행의 마지막 단계인 무구지(無垢地)에 이르게 되며 이 무구지에서 방편을 만족하게 되면 미세념 내의 생멸상을 깨트리고 불생불멸의 본성을 나타내어 드디어 일심에 귀원하여 순정지(淳淨智)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둘째 불사의업상이란 순정하게 된 마음의 지력에 의해 일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한량없는 공덕상을 나타내는 것이니 끊임없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다.
원효는 이 지정상을 자리(自利), 불사의업상을 이타(利他)에 배대하고 또 지정상을 무분별지, 불사의업상을 후득지 내지 후득지의 작용이라 보며 나아가 이들을 다시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관련시키고 있다. 지정상에 이르러 무분별지를 얻어 심원에 이른 사람은 불사의업상을 절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따라서 제대로 된 불사의업상을 발휘하려면 지정상 즉 근본무분별지를 먼저 갖추어야만 되는 것이다.
이 불사의업상이야 말로 원효가 늘 강조하는 무주열반(열반에 머물지 않음) 바로 그것이다. 성자(聖者) 혼자서 열반락을 누리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오, 중생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성인의 진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9. 하나의 법계임을 모르는 게 무명
시각의 마지막 단계인 구경각이 바로 본각이며 이 본각에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의 두 가지 모습이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지정상과 불사의업상이 수염본각(隨染本覺) 즉 생멸문에서 본 본각의 성질임에 비해 성정본각(性淨本覺) 즉 진여문에 있는 본래부터 자성청정한 본각의 성질에 네 가지가 또 있다.
첫째 여실공경(如實空鏡)은 모든 마음의 경계상들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만한 법이 없는 것을 뜻한다.
둘째 인훈습경(因熏習鏡)은 여실불공(如實不鏡)이니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으며 잃지도 깨지지도 않아 일심에 항상 머무른다. 그리하여 이러한 성공덕으로 바른 인연을 지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불과(佛果)에까지 이르게 한다.
셋째 법출리경(法出離鏡)은 위의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의 두 번뇌를 벗어나고 진망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은 것이다.
네 번째 연훈습경(緣熏習鏡)은 위의 법출리에 의해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 선근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는 것이다.
원효는 이 성정본각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것은 인성(因性)에 있고 뒤의 둘은 과지(果地)에 있다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연훈습경과 앞의 수염본각의 불사의업상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해 불사의업상에서는 응신과 시각의 업용을 밝힌 것이고 연훈습경에서는 법신과 본각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불사의업상에서는 중생들과의 연(緣)의 상속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하므로 친소가 있으며 연훈습경에서는 연의 상속을 가리지 않고 근기가 성숙된 정도에 따라 널리 이익되게 하므로 일체에 고루 통하여 친소가 없다.
지금까지 아라야식의 각의와 불각의에 의해 심생멸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 생멸의 인(因)과 연(緣)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기신론』에서는 아라야식의 심체가 모든 법을 변작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생멸인이라 하고, 근본무명이 심체를 훈습하여 움직이게 하므로 이를 생멸연이라 한다. 또한 무명주지(근본무명)는 모든 염법의 근본으로 모든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이라 하고, 육진경계(색성향미촉법)는 칠식의 물결의 생멸을 요동시키니 이를 생멸연이라 한다. 생멸의 인·연은 이상과 같이 두 가지 뜻이 있다.
요컨대 중생은 아라야식의 자상심(自相心)과 그 안에 있는 무명에 의해 의(意)와 의식(意識)으로 전변한다고 한다. 여기서 의란 업식(무명업식), 전식, 현식, 지식, 상속식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우리는 앞서 아라야식의 불각의에서 삼세육추를 논할 때 삼세는 아라야식에, 지식은 제 칠식에, 그리고 상속식에서 기업식까지는 분별사식 즉 제6의식에 배대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생멸인연편에서는 상속식을 오의(五意) 안에 두어 의식과 구별하고 있으니 이 뜻이 무엇인가?
원효는 이에 대해 이 오의가 차례로 업식에서 상속식까지 전성(轉成)함에 의해 모든 경계에 대해 의식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다섯 가지를 의라고 하며, 이 가운데 제 5상속식은 오히려 의식이지만 뒤의 의식을 낸다는 뜻에 의해 의(意) 가운데 함께 넣어 포함시킨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이 상속식은 법집(法執)과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고 오래 상속함으로 상속식이라 한 것이며 이 식이 애취번뇌(은애에 집착하여 뗄 수 없는 정)를 일으켜 과거 무명에서 일으킨 모든 행위를 인지하여 미래의 과보가 있도록 하고 또한 윤생번뇌(임종시 자기와 자기의 경계에 대해 연연해 하고 집착하여 중유(中有)의 생을 윤택케 하는 세력을 가진 번뇌)를 일으켜 업의 과보가 계속 생겨서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지식(智識)의 미세한 분별과는 같지 않아 의식 쪽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원효의 견해이다.
생멸의 연인 무명이란 하나의 법계임을 알지 못한데서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뜻하는데, 이 때 무명은 가장 미세하여 능(能)·소(所)와 심왕·심소의 차별이 아직 없다. 기신론은 이 근본무명을 제거함에 있어 거친 것으로부터 미세함에 이르기까지의 그 차례를 밝힌다.
먼저 상응염으로서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바로 의식이다.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상속식이다.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지식이다.
다음은 불상응염으로서 넷째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현식이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전식이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업식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염심은 아라야식의 불각의의 삼세육추에서 이미 밝힌 것이므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육염심 중의 상응, 불상응의 뜻은 우선 상응심은 거친 염심으로 지(知)·연(緣)·체(體)가 같음(三等)을 말하며 불상응심은 미세한 염심으로 지·연·체가 같은 뜻이 없음을 말한다.
-海印의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