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名;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또는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당나라의 반자밀제(般刺密帝) 번역,
송나라 급남(及南) 편찬(編纂), 송나라 계환(戒環) 해석, 개운조사 능엄경 참조.
수능엄경(首楞嚴經) 5권 4
阿難!今汝諸根若圓拔已內瑩發光,如是浮塵及器世閒諸變化相如湯銷冰,應念化成無上知覺。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각 기관인 제근(諸根)에서 만약 원만하게 벗어난다면, 안으로 환하게 광명을 발하여, 이러한 부질없는 대상경계인 부진(浮塵)과 기세간의 모든 변화하는 변화상(變化相)들이 마치 끊는 물에 얼음이 녹듯하여, 생각을 따라 변화해서 위 없이 높은 깨달음인 무상지각(無上知覺)을 이루리라.
阿難!如彼世人聚見於眼,若令急合,暗相現前,六根黯然頭足相類,彼人以手循體外繞,彼雖不見,頭足一辯知覺是同,緣見因明暗成無見,不明自發則諸暗相永不能昏,根塵旣銷,云何覺明不成圓妙。”
아난아, 마치 세상 사람들이 보는 힘을 눈에 집중시켰다가 만약 갑자기 눈을 감으면 어두운 것이 앞에 나타나서 육근(六根)이 캄캄하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가 서로 똑같을 것인데, 그 사람이 손으로 몸을 따라 밖을 더듬으면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할지라도 머리와 발을 하나하나 분별하여 깨달아 아는 지각(知覺)은 밝을 때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대상 경계를 보는 것은 밝음을 인해야 하고, 어두우면 볼 수가 없지만, 밝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발하면 모든 어두운 현상이 영원히 어둡지 않을 것이니, 감각기관(根)과 그 대상 물질의 근진(近盡)이 소멸된다면 어찌하여 각명(覺明)이 원만하고 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는가?
ㅡ'보는 힘을 눈에 집중시킨다'란, 밝음으로 인하여 보이는 것이 있을 때이고,
'갑자기 눈을 감으면 어두운 것'이란, 어두워져서 보이는 것이 없을 때이다.
*각명(覺明)→육근(六根)→육진(六塵)→육식(六識)
각명(覺明) 또는 본각(本覺)이 스스로를 밝혀보려고 하는 것은 무명(無明)의 시작이다. 각명은 본성(本性)이고 여래장(如來藏)의 묘진여성(妙眞如性)이다.
①각비소명(覺非所明) 본각은 밝힐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본각은 허공처럼 청정하여 주객이 없으나)
②인명입소(因明立所) 밝혀보자는 것으로 인하여 대상이 생겼다 (내 마음이 내 마음을 밝혀보려는 것)
③소기망입(所既妄立) 객관이 생기고
④생여망능(生汝妄能) 주관이 생겼다.
각명이 무명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의 정료(精了)한 밝은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심(妄心)으로 승의근(勝義根)과 부진근(浮塵根)이 생기고, 환경에 따른 다양한 모양의 감각기관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각명이 정료(精了)함을 잃어버리고 육진(六塵)이 육근(六根)에 붙어서 육식(六識)을 내는 것이다.
정료는 앞의 원담(圓湛)을 말하며, 발광(發光)은 육식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한다. 마음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빛(光)이라고 한다심광(心光), 묘광(妙光)은 진(眞)이고, 망광(妄光)은 망(妄)이다.
근을 의지한다는, 기근명발(寄根明發)은 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다는 뜻이다.-향적법진
阿難白佛言:“世尊!如佛說言,因地覺心欲求常住,要與果位名目相應。
아난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지(因地)의 깨닫는 마음으로 상주(常住)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과위(果位)의 명목(名目)과 상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世尊!如果位中,菩提、涅槃、眞如、佛性、菴摩羅識、空如來藏、大圓鏡智,是七種名稱謂雖別,淸淨圓滿體性堅凝,如金剛王常住不壞;
세존이시여, 과위(果位) 가운데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진여(眞如)와 불성(佛性)과 암마라식(菴摩羅識)과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일곱 가지 이름은, 명칭은 비록 다를지라도, 청정하고 원만해서 그 체성이 견고함이 마치 금강왕(金剛王)이 상주(常住)하여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ㅡ칠상주과(七常住果);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깨달음이 보리(菩提),
적정(寂靜)하며 항상하고 즐거운 적멸(寂滅)이며 멸도(滅度)이며 완전한 생사해탈이 열반(涅槃),
허망한 것도 아니고 변하지도 않는 불변(不變)이 진여(眞如),
일체의 허물을 고치고 잘못을 끊어 없앤 것이 불성(佛性),
제8식에서 무명이 없어진 상태로서 제구백정식(第九白淨識)으로, 일체를 분별하되 물들거나 집착함이 없는 것이 암마라식(菴摩羅識, 무구),
한 가지의 법도 성립되지 않아서 번뇌가 다 없어진 공적영지한 불성자리가 공여래장(空如來藏),
만법을 환하게 다 비추어 보되 분별함이 없는 제8식을 초월한 것이 대원경지(大圓鏡智).
일곱 가지는 명칭만 다를 뿐 상주과(常住果)인 본래의 마음자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암마라식(菴摩羅識)은 무구(無垢)라 하며, 아홉 번째 인식 작용인 백정식(白淨識)으로, 이미 지(智)가 성립되었음에도 식(識)이라고 이름한 것은 분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미혹할 때는 아뢰야식이라 하고 불과위(佛果位)에서는 암마라식이라 한다.
'능가경'에서, "분별은 식(識)이고, 무분별은 지혜의 지(智)이다"고 하였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공여래장(空如來藏)은 해탈하지 못한 일체의 번뇌를 여의는 것이고,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은 항하사의 모래와 같이 많은 부처님의 불사의(不思義)한 법을 갖춘 것이며,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은 상황에 따라 색과 공이 되어서 일체에 널리 호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여래장(空如來藏)만이 참다운 체(體)가 된 까닭에 과(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나,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과 공불공여래장(空不空如來藏)은 작용(作用)을 따라 얻어진 이름이다.
若此見聽離於暗明、動靜、通塞,畢竟無體,猶如念心離於前塵本無所有,云何將此畢竟斷滅以爲修因,欲獲如來七常住果?
만약 보고 듣는 것이 어둠(暗)과 밝음(明)과 움직임(動)과 고요함(靜)과 통(通)함과 막힘(塞)을 여의면 마침내 실체가 없게 되는 것이, 마치 생각하는 마음이 앞에 나타나는 경계를 여의면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장차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하는 인지(因地, 첫 발심)로 삼아 여래의 일곱 가지 여래의 칠상주과(七常住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ㅡ아난 존자는 본성(本性)을 단멸(斷滅)이라고 잘못 알고 의심하는 것이다.
주객(主客)이 없으면 아는 마음도 없는 것이 아닌가? 마음, 즉 '심왕(心王, 주主)과 마음의 대상인 심소(心所, 객客)가 없다면, 무엇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의심한 것이다.
世尊!若離明暗見畢竟空,如無前塵念自性滅,進退循環微細推求,本無我心及我心所,
將誰立因求無上覺?如來先說湛精圓常,違越誠言終成戲論。云何如來眞實語者?唯垂大慈開我蒙悋。”
세존이시여, 만약 밝음과 어둠을 떠난다면, 보는 것이 마침내 공하게 되어서, 마치 앞에 나타나는 경계가 없는 것과 같으며,
생각의 자성(自性)이 없어진 것과 같다면, 이리저리 순환하면서 미세하게 추구하여도 본래 나의 마음인 아심(我心)과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가 없을 것이니, 무엇으로 원인(因)을 세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무상각(無上覺)을 구하겠습니까?
여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맑고 정밀안 담정(湛精)이 원만하고 항상한 원상(圓常)이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진실한 말씀이 못되고 마침내에는 희론(戲論)이 될 것이니, 여래께서 어떻게 진실한 말만 하시는 진실어자(眞實語者)라고 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ㅡ아난 존자는 견성 문성 등의 본성(本性) 자체가 상주(常住)하는 불생멸(不生滅)이 아니고 단멸(斷滅) 생멸(生滅)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단멸(생멸)하는 것을 어떻게 상주(불생멸)하는 진심인 칠상주과의 보리열반을 얻을 수가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인지(因地)의 발심(發心)과 과지(果地)의 각(覺)이 서로 성질이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단멸의 마음으로 상주과를 어떻게 성취할 수가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佛告阿難:“汝學多聞未盡諸漏,心中徒知顚倒所因,眞倒現前實未能識,
恐汝誠心猶未信伏,吾今試將塵俗諸事當除汝疑。”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듣고 아는 다문(多聞)만으로 배우고 모든 새어나가는 루(漏)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 속에 다만 뒤바뀐 원인만 깨닫고, 참으로 뒤바뀐 실체의 진도(眞倒)가 앞에 나타나는 것을 진실로 잘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아직도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못할까 염려하여, 지금 내가 시험삼아 진속(塵俗)의 모든 일들을 예로 들어서 너의 의혹을 없애 주리라.”
ㅡ전도된 원인은 곧 의혹과 망령된 분별 때문으로, 진도(眞倒)가 항상한 것이라고 집착하여서 끊어 없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성(聞性)
卽時,如來勅羅睺羅擊鍾一聲,問阿難言:“汝今聞不?”
阿難大衆俱言:“我聞。”
鍾歇無聲,佛又問言:“汝今聞不?”
阿難大衆俱言:“不聞。”
時,羅睺羅又擊一聲,佛又問言:“汝今聞不?”
阿難大衆又言:“俱聞。”
佛問阿難:“汝云何聞?云何不聞?”
阿難大衆俱白佛言:“鍾聲若擊則我得聞,擊久聲銷音響雙絕,則名無聞。”
그 때 여래께서는 라후라(羅睺羅) 존자에게 명하여 종을 한번 치게 하시고는 아난 존자에게 물으셨다.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를 들었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대답하기를, “예, 들립니다.”
종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지금도 들리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들이 함께 답하기를, “들리지 않습니다.”
그 때에 라후라 존자가 다시 한번 종을 치게 하고 아난 존자에게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이제는 들리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답하기를, “예,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것을 들린다 하고, 어떤 것을 들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저희들에게 들리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如來又勅羅睺擊鍾,問阿難言:“爾今聲不?”
阿難言:“聲。”
少選聲銷,佛又問言:“爾今聲不?”
阿難大衆答言:“無聲。”
有頃,羅睺更來撞鍾,佛又問言:“爾今聲不?”
阿難大衆俱言:“有聲。”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 존자에게 종을 치도록 하시고 아난 존자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대답하기를, “소리가 납니다.”
조금 지나서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도 소리가 나는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대답하기를,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라후라 존자가 다시 와서 종을 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너희는 지금 소리가 나는가?”
아난과 대중이 함께 대답 하기를, “소리가 납니다.”
佛問阿難:“汝云何聲?云何無聲?”
阿難大衆俱白佛言:“鍾聲若擊,則名有聲,擊夂聲銷音響雙絕,則名無聲。”
부처님께서 아난 존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것을 소리가 난다고 하며, 어떤 것을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아난 존자와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하며,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ㅡ문성(聞性)은 항상 있는 것으로 자거나 깨거나 항상 작동하는 즉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청각현상이 없어도 문성은 변하지 않고 항상 있는 것이다. 견성(見性)은 잠잘 때는 작동하지 않지만, 문성(聞性)은 24시간 작동하는 1200공덕이다. 따라서 공부할 때에는 24시간 변하지 않고 작동하는 문성(聞性)을 가지고 공부한다. 문성은 항상 있는 것으로, 자거나 깨거나 항상 작동한다는 그것이 바로 성자신해(性自神解)하는 영지(靈知)인, 문성은 신통하게 앎으로 따라서 영지(靈知)로서 공부하는 인지(因地)로 삼아야 한다. 영지(靈知, 진심)를 확실하게 모르면 수행할 수 없고, 수행하여도 도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심, 공적영지, 여래장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그때부터 수행할 수 있다. 망심(妄心)을 바탕으로 수행하면 망과(妄果)를 얻을 뿐이다.
문성은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난 존자는 지식으로만 알고 아직 아라한도를 얻지 못하여서 아직도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견성과 문성을 단멸(斷滅)이라고 의심하는 이것이 바로 전도(顚倒)된 소견이다.
종소리는 단멸(斷滅)이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나고 시간이 지나면 소리가 사라진다. 그러나 종소리를 듣는 그 놈은 소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알아듣는 문성(聞性)이 단멸이 아니라는 것을 종소리를 가지고 부처님께서 증명하여 주신 것이다.
소리는 유무(有無) 동정(動靜)이 있지만 소리를 듣고 아는 성품은 항상 있는 것으로, 소리가 있거나 또는 없다고 해서 듣는 성품이 생기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난 존자는 소리의 유무에 따라 문성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착각하여서, 소리가 날 때는 듣는 것이 생기고 소리가 사라질 때 듣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종소리가 사라진다고 해서 문성(聞性)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소리만 없어졌을 뿐, 문성은 항상 그대로 있다. 즉, 듣고 아는 문성이 종소리를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변함없이 상주하는 것이며, 생멸을 떠났으므로 상진실(常眞實)인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기억을 못할 것 같지만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은 문성은 잠잘 때에도 없어지지 않는다. 아난 존자는 처음에 문성을 단멸로 생각한 까닭에, 단멸을 가지고 어떻게 불생멸인 열반 보리 등의 칠상주과를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문성은 단멸이 아니고 상주(常住)한다고 하셨다. 육근이 작용할 때는 수시로 변하여 생멸과 단멸이 있는 것 같으나, 그 자성, 체성, 본성, 아뢰야식은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상주불멸인 것이다. ㅡ향적법진님의 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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