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三慧品 第七十之餘 卷八十四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70. 삼혜품(三慧品)을 풀이함 ② 6
又如畢陵伽婆蹉阿羅漢,五百世生婆羅門中,習輕蔑心故,雖得阿羅漢,猶語恒水神言:“小婢!止流!”恒神瞋恚,詣佛陳訴;佛教懺悔,猶稱“小婢”。
如是等身、口業煩惱習氣,二乘不盡。佛無如是事。如一婆羅門惡口,一時以五百事罵佛,佛無慍色;婆羅門心乃歡喜,卽復一時以五百善事讚歎於佛,佛亦無喜色。
當知佛煩惱習氣盡故,好、惡無異。
또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 아라한은 5백 세상 동안 바라문으로 태어나 남을 경멸하는 마음을 익혔던 까닭에 비록 아라한이 되었으면서도 항하의 수신인 항수신(恒水神)에게 말하기를 “작은 소비(小婢)야, 물이 흐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으므로, 항수신(恒水神)이 화를 내며 부처님께 와서 그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부처님은 그에게 참회하라고 명하시었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은 소비(小婢)야”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인한 번뇌의 습기는 성문승 연각승의 이승(二乘)에 있어서는 다하지 못하지만, 부처님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는 것이니,
어느 한 바라문이 한꺼번에 오백 가지의 나쁜 악사(惡事)를 들먹이면서 부처님께 욕설을 퍼부었으나, 부처님께서는 성내는 기색조차 없었으며, 그 바라문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곧 다시 5백 가지의 착한 일을 들먹이면서 부처님을 찬탄하였지만 부처님께서는 역시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셨던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는 번뇌의 습기가 다한 까닭에 좋고 나쁜 것에 차별이 없으셨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又復佛初得道,實功德中出好名聲充滿十方,唯佛自知;而孫陁梨梵志女,殺身謗佛,惡名流布。佛於此二事,心無有異,亦不憂喜。又入婆羅門聚落中,空鉢而出;天人種種供養。
又復三月食馬麥;釋提桓因恭敬,以天食供養。阿羅婆伽林中,棘刺寒風,佛在中宿;
又於歡喜園中,在天白寶石上,柔濡滑澤,又敷天臥具。於此好惡事中,心無憂喜。
또한 부처님께서 처음 득도(得道)를 하시자, 그 진실한 공덕 속에 좋은 명성(名聲)이 시방에 두루 퍼져서 가득히 찼었으나, 오직 부처님만 혼자만이 알고 계셨을 뿐이다.
그런데 외도인 손타라(孫陀梨), Sundarī, 손다리)가 부처님과 관계가 있다고 소문을 내고, 이 일로 인하여 범지(梵志) 여인이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부처님을 비방하였으므로 그 나쁜 평판이 널리 퍼졌었다.
부처님께서는 비방과 칭찬의 두 가지에서 마음으로 아무런 차별이 없었으며, 또한 근심하거나 기뻐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바라문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가셨다가 빈 발우로 나오시자, 하늘과 사람들이 갖가지로 공양하였으며, 또 석 달 동안 말먹이 보리인 마맥(馬麥)을 잡수시자, 6욕천(欲天) 가운데 두 번째 천인 도리천(忉利天), 곧 삼십삼천의 주인이며, 수미산 꼭대기의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는 석제환인(釋帝桓因, Śakradevendra)이 공경하면서 천상의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아라바가림(阿羅婆伽林) 속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시덤불에 찔리고 찬바람을 맞으면서 그곳에 묵으셨고,
한편 환희원(歡喜園) 가운데에서는 천상의 흰 보배돌 위의 부드럽고 윤택한 위에 하늘의 침구를 깔아서 머무셨으니,
이런 좋고 나쁜 호악사(好惡事)에 대하여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근심함이 없으셨던 것이다.
又提婆達瞋心以石堆佛,羅睺羅敬心合手禮佛;於此二人,其心平等,如愛兩眼。
如是等種種干亂,無有異想;譬如眞金,燒磨鍛截,其色不變。佛經此衆事,心無增減,是故可知諸佛愛恚等諸煩惱習氣都盡。
또한 제바달다(提婆達多)는 성을 내는 진심(瞋心)으로 돌을 부처님께 밀어붙였고,
나후라(羅睺羅)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손을 합장하고 부처님께 예배하였지만,
이 두 사람에 대한 그 마음이 평등하시어 마치 두 눈을 똑 같이 아끼시는 것과 같았으며,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혼란함에서도 차별을 내지 않으셨으니, 마치 순금을 녹이고 갈아서 단련할지라도 그 빛깔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도 마음이 늘어나고 덜하는 증감(增減)이 없으셨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사랑하거나 성내는 애진(愛恚) 등의 모든 번뇌의 습기(習氣)가 다한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須菩提意:“若諸法實相中,若道、若涅槃無所有;若無所有,何以分別是須陁洹乃至辟支佛習氣未盡、佛習氣盡?”
佛言:“三乘聖人皆以無爲法而有差別。”雖因無爲有差別,而有爲法中可得說。
수보리 존자가 생각하기를 ‘제법의 실상(實相) 가운데에서는 도(道)나 열반은 있는 바가 없는 무소유(無所有)이며, 만약 무소유(無所有)라면 무엇 때문에 수다원에서 벽지불까지는 습기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고, 부처님만이 습기가 다하였다고 분별하시는 것일까?’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삼승의 성인들 모두는 무위법(無爲法)에 있어서 차별이 있으니,
비록 무위로 인하여 차별이 있을지라도 유위법(有爲法)에서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須菩提欲定佛語,故問:“世尊!實以無爲法故有差別耶?”
佛答:“世俗法語言名相故可分別,第一法中無分別。何以故?第一義中一切語言道斷,以一切心所行斷故。
但以諸聖人結使斷故,說有後際。”後際者,所謂無餘涅槃。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의 말씀을 확정하고자 한 까닭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진실로 무위법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세속법의 언어와 이름과 상(相) 때문에 분별하는 것일 뿐, 으뜸가는 제일법(第一法) 가운데에서는 분별이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으뜸가는 이치의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온갖 언어의 길이 끊어진 어언도단(語言道斷)이고, 일체의 온갖 마음 작용이 끊어진 심소행단(心所行斷)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성인은 결(結, saṃyojana)은 ‘얽어 매임’, 사(使, anuśaya)는 내면에 깃든 악한 성향의 번뇌의 결사(結使)가 끊어졌기 때문에 후제(後際, 미래)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후제(미래)라 함이란, 이른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하는 것이다.
須菩提問:“世尊!諸法自相空故,前際不可得,何況後際!”何以故?因前際故有後際。
佛可其意,以衆生不知諸法自相空故,說是前際、是後際;自相空諸法中,前、後際不可得。何以故?若先有生,則後有老死;若離老死有生,是則不死而生,是生無因無緣;若先老死後有生者,不生云何有老死?
先後旣不可得,一時亦不可得,以是故說:“自相空法中,無有前後際。”
수보리 존자가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제법은 자상공(自相空)이기 때문에 전제(前際, 과거)조차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후제(미래)이겠습니까? 왜냐 하면, 전제(과거)로 인하여 후제(미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하자,
부처님은 그의 뜻을 옳다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으니,
“중생들은 제법의 자상(自相)이 공(空)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전제(과거)이다, 이것은 후제(미래)이다’고 말하느니라. 자상공(自相空)의 제법 가운데에서는 전제와 후제를 얻을 수 없나니,
왜냐 하면, 먼저 태어나는 생(生)이 있은 뒤에 늙어 죽는 노사(老死)가 있기 때문이니라.
만약 늙어 죽는 노사(老死)를 여의고 태어나는 생(生)이 있다면, 이것은 곧 죽지 않았는데도 태어나는 것이 되느니라.
태어나는 것은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으니, 만약 먼저 노사(老死)를 한 뒤에 생(生)이 있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거늘 어떻게 늙어 죽는 것이 있겠는가?
앞과 뒤의 선후(先後)는 얻을 수 없는 불가득(不可得)이고, 또한 일시(一時)도 불가득(不可得)이나니,
이 때문에 ‘자상공(自相空)의 법(法) 가운데에는 전제(과거)와 후제(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佛言:“如是!須菩提!菩薩應以自相空法行般若,內外法乃至佛法不著故。”
이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자상공법(自相空法)으로써 반야를 행해야 하나니, 안팎의 내외법(內外法, 12입) 내지는 부처님 불법(佛法)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問曰:上來常說般若波羅蜜相,今何以更問?
묻나니, 위에서부터 지금까지 늘 반야바라밀의 상(相)을 말씀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이제사 묻는 것입니까?
答曰:不但問相,人常說般若波羅蜜,般若波羅蜜以何義故名般若。
佛言:“以第一度,一切法到彼岸,名般若波羅蜜。”
第一度者,聲聞人以下智度;辟支佛以中智度;菩薩以上智度,故名第一度。
답하나니, 다만 상(相)만을 물은 것은 아니니라, “사람들은 항상 반야바라밀을 말하고 있는데, 반야바라밀은 무슨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라 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일도(第一度)으로써 일체법을 얻어서 저 언덕의 피안에 이르는 도피안((到彼岸)이므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셨으니,
‘제일도(第一度)’라 함은, 성문인은 하등 지혜인 하지(下智)로써 건너고, 벽지불은 중등 지혜인 중지(中智)로써 건너며, 보살은 상등 지혜인 상지(上智)로써 건너기 때문에 제일도(第一度)라 하며,
復次,煩惱有九種,上、中、下各有三品。智慧亦有九種:下下智慧從鈍根須陁洹來,乃至上下是第一聲聞舍利弗等;上中是大辟支佛;上上是菩薩。以上上智慧度,故名第一度。
또 번뇌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에 각각 3품(品)으로 나뉘는 것이며,
지혜 역시도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의 하인 하하(下下) 지혜는 근기가 둔한 수다원부터이고,
나아가 상의 하인 상하(上下)의 지혜는 곧 으뜸가는 성문인 사리불 등이며,
상의 중의 상중(上中) 지혜는 대벽지불이요, 상의 상인 상상(上上) 지혜는 곧 보살이니,
상상(上上) 지혜로써 건너기 때문에 제일도(第一度)라 하는 것이다.
聲聞、辟支佛但摠相度,於別相少;菩薩一切法摠相、別相皆了了知,故名第一度。
復次,菩薩度時,智慧遍滿可知法中;二乘人可知法中不能遍滿。是故名第一度。
성문과 벽지불은 다만 전체의 총상(總相)만으로 건너므로 각각의 별상(別相)은 적지만, 보살은 일체법의 전체의 총상(總相)과 각각의 별상(別相)을 모두 환히 알기 때문에 제일도(第一度)라 하며,
또 보살이 건널 때에는 지혜가 두루하고 원만하여 법에 대하여 잘 알지만,
이승인(二乘人)은 법의 이치를 알기는 하여도 두루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일도(第一度)라 하며,
復次,第一度者,大乘福德、智慧、六波羅蜜、三十七品具足滿,故安隱度。
又十方諸佛、大菩薩、諸天皆來佐助,安隱得度。如人乘七寶舩,牢治行具,上有種種好食、有好導師,遇隨意好風,則爲好度;若人乘草栰度恐怖,不名好度。
復次,佛說:“三乘人以是般若波羅蜜度到彼岸涅槃,滅一切憂苦,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栰 뗏목 벌
또한 제일도(第一度)라 함이란, 대승의 복덕과 지혜와 6바라밀과 37 조도품을 완전히 갖추어 원만하여진 때문에 안온하게 건너며,
또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과 모든 하늘들이 와서 도우므로 안온하게 건너게 됨을 말하나니,
마치 사람이 칠보(七寶)로 된 배를 타고 행구(行具, 행장)을 단단히 꾸리고 갖가지 좋은 음식과 좋은 길잡이와 함께 알맞은 바람을 만나면 잘 건넌다고 하지만, 만약 사람이 풀로 된 뗏목을 타고 건넌다면 두려워하게 되어 잘 건넌다고 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또한 부처님께서는 3승의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반야바라밀로써 저 언덕의 피안(彼岸)에 이르면 일체의 근심과 고통이 소멸한다”고 하셨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며,
復次,是般若波羅蜜中,一切法,內外、大小,思惟、籌量、分別、推求,乃至如微塵,不得堅實。
旣到微塵,則不可分別;心心數法,乃至一念中,亦不可分別。是般若波羅蜜中,心、色二法破壞,推求不得堅實。以是義故,名般若波羅蜜。
또 이 반야바라밀에는 일체법의 내외(內外)와 대소(大小)를 사유하고 헤아리며 분별하고 추구(推求)할지라도, 이에 대하여 작은 티끌만큼의 견실(堅實)한 것을 얻지 못하며,
이미 작은 미진(微塵)에 이르면 분별할 수도 없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심수법에서 한 생각에 이르기까지도 분별할 수 없나니, 이 반야바라밀에서는 마음(心)과 물질(色)의 두 가지 법이 깨어지게 되므로, 아무리 추구하여도 견실한 것을 얻지 못하나니, 이러한 의(義, 이치)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復次,般若名慧,波羅蜜,到彼岸。彼岸名盡一切智慧邊。智慧名不可破壞相,不可破壞相卽是如、法性、實際,以其實故不可破壞。是三事攝入般若中故,名爲般若波羅蜜。
復次,般若波羅蜜,無有法與法有合有散,畢竟空故。“是般若無色、無形、無對,一相,所謂無相”,是義如先說。如是等種種因緣,故名般若義。
또한 반야는 혜(慧, 지혜)라 하고, 바라밀은 저 언덕에 이르르는 도피안(到彼岸)이라 하며,
저 언덕인 피안(彼岸)은 일체 지혜가 다하는 궁극의 지혜인 변지혜(邊智慧)라 하고,
지혜(智慧)는 깨뜨릴 수 없는 불가파괴상(不可破壞相)이라 하나니,
깨뜨릴 수 없는 불가파괴상(不可破壞相)이란, 곧 그것이 여(如)요 법성(法性)이며 실제(實際)이니,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여(如)요 법성(法性)이며 실제(實際), 이 세 가지의 삼사(三事)는 반야에 포함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또 반야바라밀에는 어떠한 법이 다른 법과 합하거나 흩어지거나 하지 않나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에 이 반야는 무색(無色)이고, 무형(無形)이며, 대할 수도 없는 무대(無對)한 일상(一相)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니,
이런 의(義, 이치)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으며,
이러한 갖가지 인연 때문에 반야의 이치인 반야의(般若義)라 하는 것이다.
今當說般若力,所謂般若能生一切智慧、禪定等諸法;能生一切樂說辯才;以般若力故演說一句,種種莊嚴窮劫不盡;
星宿日月不能照處,般若能照,能破邪見、無明黑闇故。魔若魔人、求聲聞辟支佛人、外道、惡人所不能壞。
何以故?菩薩行般若,此諸惡人於般若中皆不可得故。
이제는 반야력(般若力)에 대하여 설명하겠으니, 이른바 반야는 일체 지혜와 선정 등의 제법을 능히 내고, 온갖 요설변재(樂說辯才)를 능히 내며, 반야력(般若力) 때문에 하나의 구절만을 연설하여도 갖가지로 장엄하여서 겁(劫)이 다하도록 다하지 못하나니,
별과 해와 달이 비추지 못하는 곳을 반야는 능히 비추며, 삿된 사견과 무명의 흑암(黑闇)을 능히 깨뜨리기 때문에 악마와 악마의 사람이나, 성문과 벽지불을 구하는 사람이나, 외도나 악한 사람 등이 파괴할 수 없나니,
왜냐 하면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에는 이러한 모든 악인들을 반야 가운데에서는 모두를 얻지 못하는 불가득(不可得)이기 때문이다.
復次,若行者一心信受、諷誦,諸惡不能得便,何況正憶念、如說行!如是,須菩提!菩薩應行般若義。
般若義者,所謂無常義,苦、空、無我義,四諦智、盡智、無生智、法智、比智、世智、知他心智、如實智義故,應行般若。
是般若如大海有種種寶物,或大、或小,唯一是如意寶;般若波羅蜜亦有種種諸智慧寶 無常等四聖行、十智,唯有如實智如如意寶。
또한 만약 수행하는 행자가 일심으로 믿고 받아 지녀서 독송한다면, 모든 악한 것들이 편(便, 기회)를을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바르게 기억하고 말씀한 바 대로 행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반야의(般若義)를 행하여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야의(般若義)라 함이란, 이른바 무상하다는 이치와 괴롭고ㆍ공하고ㆍ무아(無我)의 이치와 사제의 지혜와
모든 번뇌를 끊고 사제의 이치를 알게 되는 무루지의 진지(盡智),
성문은 진지(盡智, kṣaya-jñāna. 4성제의 완성을 아는 지혜)와 지(智) · 견(見) · 명(明) · 각(覺) · 해(解) · 혜(慧) · 광(光) · 관(觀)의 무루지의 무생지(無生智),
욕계의 5중(五衆, 오온)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임을 알고 제법이 인연 화합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을 아는 법지(法智),
현재의 5수중(五受衆)이 무상(無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임을 아는 비지(比智),
범부는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인 가명(假名) 가운데에서 만 아는, 임시적 지혜인 세지(世智),
다른 중생의 마음과 그 마음에 속한 심수법(心數法)을 아는 타심지(他心智)와
그리고 일체법의 총상과 별상을 실답게 알아서 걸림이 없는 여실지(如實智)의 이치가 그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반야를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반야는 마치 큰 바다에는 갖가지의 크고 작은 보물이 있기는 하나, 오직 유일한 것으로는 여의보(如意寶)인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에도 역시 갖가지 모든 지혜의 보배로서 무상(無常) 등의 사성행(四聖行)과 10지(智)가 있으나 유일한 것으로는 저 여의보와도 같은 여실지(如實智)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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