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囑累品 第六十六 卷七十八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6. 촉루품(囑累品)을 풀이함 5
復次,有人見佛慇懃囑累,故言:“佛大事辦,猶尚尊重般若,是法必尊、必妙!”譬如大富長者命欲終時,以衆寶與兒,偏以如意寶珠慇懃囑累:“汝勿以此寶自無定色、質如虛空、微妙難識故而不守護!若失餘寶爲可,此寶不可失也!”
大富長者是佛,以般若波羅蜜囑累阿難:“汝好受持守護,無令忘失!”
또 어떤 사람은 부처님께서 은근히 부촉하시는 것을 본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큰 일을 마치셨다”고 하면서 오히려 반야를 존중하게 되며,
이 법이야말로 반드시 존귀하고 반드시 미묘하나니, 비유하자면, 마치 큰 부자인 장자(長者)가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여러 보물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특별히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은근히 부촉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이 보물이 일정한 빛깔과 바탕이 없고 허공과 같이 미묘하여 알기 어렵다 하여 수호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 밖의 다른 보배는 잃어도 괜찮지만 이 보배만은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과 같이,
큰 부자인 장자는 바로 부처님이시니, 반야바라밀을 아난에게 부촉하시면서 “그대는 잘 받아 지니면서 수호하며 망실(忘失)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除般若,雖有十二部經,盡皆忘失,其過尚少;若失般若一句,其過太多!何以故?是深般若法藏是十方三世諸佛母,能令人疾至佛道。如經中說“三世諸佛皆從般若得”,乃至“爲聲聞人說法”,其中皆是讚般若事。
반야바라밀을 제외하고 비록 12부경(部經, 12분교十二分敎) 전부를 다 잃어버리게 될지라도 그 허물이 오히려 적지만,
만약 반야의 한 구절이라도 잃어버리면 그 허물이 너무도 크나니,
왜냐하면 이 깊은 반야의 법장(法藏)은 바로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불도에 신속히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경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반야로부터 부처를 이루셨으며, 나아가 성문의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법을 설하셨다”고 한 것과 같이, 그 가운데에서는 모두 이 반야를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경의 십이부경= 계경(契經), 응송(應頌), 기별(記別) 또는 기별(記莂), 풍송(諷頌), 자설(自說), 인연(因緣) 또는 연기(緣起),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희법(希法), 비유(譬喩), 논의(論議)이며, 장아함, 칠지경, 잡아함, 본사경의 12부경이 있음.
問曰:說法令三千大千世界衆生盡得阿羅漢,云何不如以般若一句教菩薩?
묻나니, 법을 설하여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조리 아라한이 되게 하는 것이 어떻게 반야의 한 글귀를 보살에게 가르쳐 주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是事先雖答,今當更略說:是三千大千世界中衆生雖皆得阿羅漢,自度其身,不中作佛;若說般若一句,聞者得作佛故。如人種衆果樹,不如一人種一如意樹,能隨人所願,如意皆得。
답하나니, 이러함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대답하였지만, 지금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비록 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중생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을지라도 자기 스스로만을 제도하는 것이므로, 부처님이 되기에는 알맞지 않지만, 만약 반야의 한 글귀라도 말한다면 듣는 이가 부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들이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는다 해도 어느 한 사람이 한 그루의 여의수(如意樹)를 심어서 사람들의 소원에 따라 뜻대로 모두 얻게 하는 것보다는 못한 것과 같으며,
復次,爲聲聞說法中,無大慈悲心;大乘法中,一句雖少,有大慈悲。聲聞法中皆自爲身;大乘法中廣爲衆生。聲聞法中無欲廣知諸法心,但欲疾離老病死;大乘法中欲了了知一切法。聲聞法功德有限量;大乘法中欲盡諸功德,無有遺餘。如是等大小乘差別。譬如金剛雖小,能勝一切寶,不得言少故不如多。三千大千世界中阿羅漢福德,比般若一句教菩薩,一日乃至須臾,其福甚多!
또 성문을 위하여 설해진 법 가운데에는 대자대비심이 없지만,
대승법(大乘法) 가운데의 한 글귀는 비록 적을지라도 대자비가 있으며,
성문법 가운데에는 모두가 자기 스스로만을 위하는 것이지만,
대승법 가운데에서는 중생을 널리 위하고 있으며,
성문법 가운데에는 제법을 널리 알겠다는 마음이 없으며, 다만 노병사(老病死)만을 빨리 여의고자 할 뿐이지만,
대승법 가운데에서는 일체법을 분명히 알고자 하므로 성문법의 공덕은 유한량(有限量)이지만,
대승법 가운데는 모든 공덕을 남김없이 다하려 하나니, 대승ㆍ소승에는 이러한 등의 차별이 있다.
비유하자면, 마치 금강(金剛)이 비록 작을지라도 일체의 보석보다 뛰어나므로 작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삼천대천세계 안의 아라한의 복덕이 많다 할지라도 반야의 한 글귀를 하루나 잠깐 동안이라도 보살에게 가르쳐서 그 복이 매우 많은 이보다는 못하다는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是人自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亦教人令得;自行六波羅蜜諸功德,亦爲人說。菩薩集二處功德,不得佛道,無有是處。”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 사람은 자기자신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도 얻게 하며, 자기 자신이 6바라밀의 모든 공덕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설하여 주나니,
보살이 이 두 가지의 공덕을 쌓았음에도 부처님의 불도를 얻지 못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爾時,佛欲明了是事故引證,亦欲證一切法空,不著是空法,但憐愍衆生故囑累。如阿閦佛、大衆、莊嚴不與眼作對,一切法不與眼作對亦如是。肉眼、天眼所見,皆是作法,虛誑不實。慧眼、法眼、佛眼,皆是無相無爲法,故不可見;若不可見,亦不可知。無作等亦如是。所見阿閦佛會,如幻、如夢;能如是觀諸法,是名菩薩行般若,名無所著。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러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증거를 이끌어 내셨으며, 또한 일체법이 공하다는 것을 증명하시고자 이 공한 공법에 집착하지도 않고 다만 중생을 가엾이 여기신 때문에 부촉하신 것일 뿐이다.
아촉불(阿閦佛) 대중의 장엄(莊嚴)은 눈의 대상이 되지 못하듯이 일체법이 눈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며,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으로 보는 것은 모두가 짓는 법이어서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혜안(慧眼)ㆍ법안(法眼)ㆍ불안(佛眼)은 모두가 무상(無相), 무위법(無爲法)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으니,
만일 볼 수 없다면 또한 알 수도 없는 것이니, 무작(無作) 또한 그와 같다.
대중이 보았던 아촉부처님의 불회(佛會)는 마치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제법을 관찰하는 것을 바로 “보살이 반야를 행한다”고 하며 “집착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아촉불(阿閦佛, Aksobhya-Tathāgata 악소브햐 - 타타가타)은 부동(不動)·무동(無動)·무노불(無怒佛)이라 번역하며,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부처이다.
옛적에 이 세계에서 동쪽으로 1천의 불국토를 지나 아비라타국(Abhirata: 阿比羅提)이 있고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주불(主佛)이 되었다. 아촉은 그 부처님께서 무진에(無瞋恚 성내지 않음)의 원을 발하고 수행을 완성하여 아비라타국에서 현재 설법을 하고 있는 부처님.- 미스터리 갤러리
佛所囑累亦無所著,但以大慈悲故讚是般若。一切法雖是不可思議相,而以利益衆生故讚歎,作是言:“阿難!如是學,爲學般若;若欲得一切諸波羅蜜,當學般若波羅蜜。”如是等,如經廣說。佛以無量讚般若:若佛智慧不可盡,般若功德亦不可盡。何以故?般若波羅蜜無量相故。名衆等言語章句、卷數有量,如『小品』、『放光』、『光讚』等般若波羅蜜經卷章句,有限有量;般若波羅蜜義無量。
부처님께서 부촉하신 것도 집착함이 없는 것으로, 다만 대자비 때문에 이 반야를 찬탄하실 뿐이다.
일체법은 비록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할지라도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찬탄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난아, 이와 같이 배우면 반야를 배우는 것이니, 만약 일체의 모든 바라밀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이러함은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바와 같으며,
부처님께서는 무량(無量)한 것으로써 반야를 찬탄하셨으니, 부처님의 지혜는 다할 수 없고 반야의 공덕 또한 다하지 않으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무량상(無量相)이기 때문이며,
이름의 명중(名衆) 등이나 언어(言語)와 장구(章句)와 권수(卷數)에는 한량이 있어서 '소품(小品)ㆍ방광(放光)ㆍ광찬(光讚)' 등과 같은 반야바라밀의 경전의 장구에는 분한이 있고 유량(有量)이지만, 반야바라밀의 이치(義)는 무량한 것이다.
阿難問:“般若波羅蜜云何無量?”佛答:“般若波羅蜜相自離。”,離故,從本已來不生不集,不生不集故不盡不滅。
아난이 묻기를 “반야바라밀은 어찌하여 무량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반야바라밀의 상(相)은 스스로 여읜 자리(自離)이니,
자리(自離)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생기지도 않는 불생(不生)이고, 쌓이지도 않는 불집(不集)이며,
불생(不生)불집(不集)이기 때문에 다하지도 않는 불진(不盡)이고 소멸하지도 않는 불멸(不滅)이다”고 하셨다.
此中佛自說因緣:“過去無量阿僧祇諸佛及弟子,用是般若波羅蜜照明十方,度無量衆生,皆共入無餘涅槃,般若波羅蜜故不盡;未來、現在亦如是。譬如有人欲盡虛空,虛空不可盡;般若波羅蜜等諸功德乃至一切種智亦如是,今不盡、已不盡、當不盡。”有人知過去不盡,謂未來、現在有盡,是故說“三世不可盡”。何以故?諸法本無生,云何當盡?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과거의 무량한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이 반야바라밀로써 시방을 환히 비추셨고,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모두가 함께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였으나, 반야바라밀은 본래 다하지 않은 불진(不盡)이나니, 미래와 현재 또한 그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이며,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허공을 다하고자 하여도 허공은 다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 내지는 일체종지도 그와 같아서, 지금도 다하지도 않고, 과거에도 다하지도 않았으며, 장차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과거는 다하지 않는 불진(不盡)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미래와 현재는 다함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삼세는 다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제법은 본래 생함이 없는 무생(無生)이거늘 어떻게 다함이 있겠는가!
佛知般若是眞無盡,爲名字語言句衆有盡故囑累。如人以香油甁囑累子弟,雖不惜甁,爲受持香油故;語言能持義亦如是,若失語言,則義不可得。
부처님께서 반야는 진실로 다함이 없는 무진(無盡)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과 언어와 장구 등은 다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부촉하신 것이니, 마치 사람이 향유(香油)가 든 병을 자제(子弟, 자녀)에게 부촉하는 것은 비록 병은 아끼지 않지만, 그 향유를 잘 받아 지닐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과 같이, 말의 언어(言語)의 이치를 지니는 것도 그와 같아서 만약 언어를 상실하게 되면 그 이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爾時,佛爲人信受般若故,出舌相覆面,告阿難:“我今於四衆中囑累汝般若,汝當爲衆生解說、顯示、分別,令易解。”所以現舌相者,世閒相法,舌能覆鼻,是不妄語相,何況覆面!”
그때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반야를 믿고 받게 하기 위하여 설상(舌相)을 내시어 얼굴을 덮으시고 아난에 말씀하시되 “나는 지금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중(四衆) 가운데서 그대에게 반야를 부촉하나니, 그대는 중생들을 위하여 해설하고 드러내 보이며 분별하면서 알기 쉽게 해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혀를 나타내신 까닭은 세간의 상법(相法)에 혀가 코를 덮을 수 있으면 거짓말을 하지 못할 상(相)이라 하나니, 하물며 얼굴을 덮을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是故佛示衆生 我從父母生身,有此舌相,欲以般若波羅蜜令汝信解;以汝等未得一切智,不能遍知,欲令汝等信故,非以神通力所現。佛於甚深妙法、智慧、禪定中猶尚不著,何況世閒八法、供養利故而作虛誑
!於一切法中,如鳥飛虛空,無所觸㝵,但以本願誓度衆生、大悲心憐愍一切故,以第一利般若波羅蜜慇懃囑累汝。
그러한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에게 보이시면서 “나는 부모에게서 몸을 받을 때부터 이러한 설상(舌相)을 지니고 있다. 반야바라밀을 그대들에게 믿고 이해하게 하려고 하나, 그대들이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하여 두루 알지 못하므로 그대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일부러 신통의 힘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니라.
부처님께서는 매우 깊은 묘법과 지혜ㆍ선정 가운데에서조차 오히려 집착하지 않으시거늘, 하물며 이득ㆍ손실ㆍ명예ㆍ불명예ㆍ칭찬ㆍ비난ㆍ고ㆍ낙의 세간팔법(世間八法)으로 공양과 이익 때문에 속임수를 쓰겠는가?
일체법 가운데에서 마치 새가 허공을 날듯 걸릴 것이 없지만, 다만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본래의 서원과 대비의 대비심(大悲心)으로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이 제일가는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간절히 그대에게 부촉할 뿐이니라”고 하신 것이며,
復次,“阿難!是行深般若波羅蜜者,能入一切文字陁羅尼。”因一字卽入畢竟空,是名文字陁羅尼。如先陁羅尼中說。諸文字法皆因般若波羅蜜得;餘聞持等諸陁羅尼亦皆從學般若波羅蜜得。菩薩得諸陁羅尼已,得種種樂說辯才,無量阿僧祇劫,說一句義不可盡。是名三世諸佛眞法,更無異法。又復,阿難!般若是十方三世諸佛妙法。如一門城,四方來者,無異門入。
다시 ‘아난아,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는 일체 문자다라니(文字陀羅尼)에 들어가느니라’고 한 것은, 한 문자로 인하여 곧 필경공에 들어가는 것을 문자다라니라 하나니, 앞의 다라니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으며,
모든 문자의 법은 모두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얻어지며, 그 밖의 문지(聞持) 등 모든 다라니 역시도 모두 반야바라밀을 배우는 것에서 얻게 되며, 보살이 모든 다라니를 얻은 뒤에 갖가지의 요설변재(樂說辯才)를 얻어서 무량한 아승기겁 동안 한 글귀를 해설하여도 그 뜻을 다할 수 없나니, 이것을 바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진법(眞法)이라 하며 다시 다른 법은 없는 것이며,
다시 말씀하기를 “아난아, 반야는 바로 시방 3세 모든 부처님의 묘법(妙法)이라서 마치 문이 하나뿐인 성(城)과 같아서 사방에서 온 이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느니라.
阿難!我今爲汝了了說:‘若有人受持般若,非但受持我法,是人受持三世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
“阿難!是般若波羅蜜,我處處說,是行者足。”所以者何?菩薩得是般若,能行菩薩道。
“阿難!汝得是般若波羅蜜陁羅尼故,能持一切佛所說法。”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분명하게 말하노니, 만약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닌다면, 비단 나의 법을 받아 지닐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아 지닌 것이니라.
아난아, 나는 이 반야바라밀을 곳곳에서 ‘이것은 바로 수행하는 이의 발(足)이다’라고 말하였나니,
왜냐하면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보살의 길을 가기 때문이니라.
아난아, 그대는 이 반야바라밀의 다라니를 얻기 때문에 온갖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지닐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問曰:以聞持陁羅尼力故能持,何以言“得般若故,能持一切諸佛法”?
묻나니, 문지(聞持)다라니의 힘 때문에 지닐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반야를 얻은 까닭에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불법을 지닐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聞持陁羅尼,能持有數有量法,世閒亦有,如須尸摩外道亦得聞持陁羅尼;是人雖少時得,久則忘失。從般若得陁羅尼,廣受持諸法,終不忘失。以是爲差別。
답하나니, 문지다라니는 분수도 있고 한량이 있는 법으로서 세간에도 이러한 법이 있으니, 예컨대 수시마(須尸摩) 외도 같은 이도 문지다라니를 얻었으며, 이러한 사람은 비록 잠시 동안 얻기는 하나 오래되면 잃어버리지만, 반야바라밀로부터 다라니를 얻으면 제법을 널리 받아 지니면서 끝내 잃지 않나니, 이러함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問曰:般若便是波羅蜜。何以名爲陁羅尼?
묻나니, 반야는 그것이 곧 바라밀(波羅蜜)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라니라 하시는 것입니까?
答曰:諸法實相是般若,能種種利益,衆生愛念故,作種種名。如佛有十號等文字;般若波羅蜜亦如是:能到一切諸智慧邊,是名爲般若波羅蜜;菩薩行般若作佛已,變名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若在小乘心中,但名爲三十七品、三解脫門;若人欲得聞而不忘,在是人心中名爲陁羅尼。是故佛說如意珠譬喩,隨前物色變爲名。佛如是種種說般若大功德。
답하나니, 제법의 실상(實相)이 바로 반야이니, 갖가지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사랑하며 호념(護念)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마치 부처님에게 10호(號) 등의 문자(이름)가 있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으며,
일체의 모든 지혜의 끝에 이르게 되므로 이를 바로 반야바라밀이라 하고,
보살이 반야를 행하여 부처님이 되신 뒤에는 이름을 바꾸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며,
만약 소승(小乘)의 마음속에 있으면 다만 37 조도품이요,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 할 뿐이지만,
만약 사람이 얻어 듣고 잊지 않고자 한다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라니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여의주(如意珠)의 비유를 말씀하셨나니, 그것은 앞에 있는 물건의 빛깔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갖가지로 반야의 큰 공덕을 말씀하셨다.
大智度論卷第七十九 終 대지도론 79권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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