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夢中不證品 第六十一之餘 卷七十七 卷七十五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61. 몽중부증품을 풀이함② 3

 

爾時,須菩提思惟籌量佛語已,白佛言:“世尊!菩薩如是行,實不行色等一切法。

何以故?是菩薩不得是法若行、行處、行者。”

그때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사유하고 헤아린 뒤에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의 이와 같은 행은 실로 물질(色) 등의 일체법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이러한 법을 행(行)함과 행하는 곳의 행처(行處)와 행하는 행자(行者)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世尊!若菩薩能如是行,一切人、天世閒無能降伏”者,世閒人皆著假名,是行者行實法,是故不能伏。世閒人著一切虛誑顚倒及虛誑果報,是菩薩於畢竟空中尚不著,何況餘法!如是,云何可降伏?

'天人阿修羅世閒'者,是三種善道中有智慧人。故說不能降伏。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일체의 인간과 천상의 세간에서는 항복시킬  있는 이가 없습니다”고 하였으니, 

세간인(世間人)들 모두는 임시로 붙인 가명(假名)에 집착하지만, 이 수행하는 행자는 진실한 실법(實法)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항복시킬 수가 없는 것이며,

세간인들은 일체의 허광되게 전도되어서 허광된 과보에 집착하지만, 이 보살은 필경공에서 조차도 오히려 집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밖의 다른 법이겠는가? 이와 같거늘 어떻게 항복시킬 수 있겠는가?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 세간'이라는 것은 바로  가지의 착한 갈래인 삼선도(三善道)이니, 이 중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항복시킬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復一切聲聞、辟支佛所不能及者,上三善道,據未得道人;此中說得道者不能及。

此中說不能及因緣,所謂菩薩入法位,一切魔、魔所使無能惱者。

是菩薩常行應薩婆若心,則近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不著一切法,常集一切助道法故。

또한 ‘일체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도 미칠  없는 바이다’고 함이란, 위의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의 삼선도(三善道)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요, 여기에서는 “도를 얻은 사람도 미칠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서는  미칠  없는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보살이 법위(法位)에 들면 일체의 악마와 악마의 부림을 받는 이로서 괴롭힐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보살은 항상 살바야에 상응한 마음의 응살바야심(應薩婆若心)을 행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졌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도를 돕는 일체의 조도법(助道法)을 쌓아 모으기 때문이다.


佛可其言而讚。佛欲以如是智慧爲他人說故,先讚菩薩自利益;

今爲利益他,分別福德果報故,問須菩提:“於汝意云何?閻浮提衆生盡得人身,如經廣說。

乃至應薩婆若心,出一切福田之上。”是中說因緣:“若菩薩能自行般若波羅蜜,亦能教化,

是人於一切福田能到其邊。”福田者,從須陁洹乃至佛。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말이 옳다고 찬탄하시면서 이와 같은 지혜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하시고자, 우선 보살의 자리(自利)를 찬탄하셨지만, 지금은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는 이타(利他) 복덕의 과보를 분별하기 위하여 수보리 존자에게 물으신 것이니,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염부제의 중생들이 모두  사람의 몸이 되었을 때, ……”라고 하셨으니, 자세한 말씀은 경에서와 같으며, 

나아가 “살바야와 상응한 마음은 일체 복전(福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니, 여기에서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만약 보살 스스로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한다면,  사람은 일체의 복전에서  변(邊, 끝)에 도달한다”고 하신 것이며,

복전이란 수다원(須陀洹)으로부터 부처님까지이다.


是菩薩能如所說般若波羅蜜履行,則得作佛。餘福德善法,離般若波羅蜜故皆盡,般若波羅蜜不可盡故。

言無有餘福德如菩薩摩訶薩力勢者,是中自說因緣:“菩薩行般若時,得諸法平等忍;得平等忍故,雖行空,亦能生四無量心。”四無量心中,大悲是大乘之本;見衆生就於死法,如囚受戮。

諸菩薩能生六波羅蜜等乃至一切種智,是故諸菩薩能生大悲。是故是人雖未得無上道,已是一切衆生之福田。

 보살이 말씀하신 바 그대로 반야바라밀을 능히 이행(履行)한다면 부처님이  수가 있으니,

 밖의 복덕과 착한법은 반야바라밀을 여의기 때문에 모두 다하는 개진(皆盡)이지만,  반야바라밀은 다할  없는 불가진(不可盡)이기 때문에 “그 밖의 복덕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며, 

‘보살마하살과 같은 세력’이라고 함은, 여기에서 직접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보살이 반야를 행할 때, 제법의 평등인(平等忍)을 얻나니, 평등인을 얻었기 때문에 비록 공을 행할지라도 역시무량심(無量心)을   있으며,

사무량심 중에서 대비(大悲)는 바로 대승(大乘)의 근본이니, 마치 중생이 죄수가 사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사법(死法)에 나아가는 것을 보면, 모든 보살이 육바라밀 등에서 일체종지까지를 내기 때문에, 모든 보살은 대비심을 내는 것이므로  사람은 아직 위없는 무상도를 얻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는 이미 일체 중생들의 복전이다”고 하신 것이며, 


是故言:“菩薩摩訶薩若欲不空食國中施者,當學般若波羅蜜。”

不空食名能報施主,能生道,能令施主之福無盡,乃至入涅槃。

若示衆生三乘道,爲衆生示一切智大明,亦欲拔出三界獄中四縛,欲令衆生得五眼,應常行般若波羅蜜相應念。

相應念者,卽是般若心。若行般若波羅蜜心;若有所說,但說般若波羅蜜。

그러한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만약 나라 안의 보시를 헛되이 먹지 않는 불공식(不空食) 한다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헛되이 먹지 않는, 불공식(不空食)’이란, 시주에게  갚는다는 것으로,  도(道)를 능히 내어 시주의 복이 그지없게 하고 나아가 열반에까지 들게 것이니, 

만약 중생에게승의 도를 보이고, 중생을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보이며, 또한 삼계(三界) 옥중(獄中)의  가지 속박인 탐욕박(貪欲縛) 진에박(瞋恚縛) 계취박(戒取縛) 아견박(我見縛)의 사박(四縛)에서 구출하고자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안(五眼)을 얻게 하고자 한다면, 항상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는 생각(念)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상응하는 생각의 상응념(相應念)’이란  반야의 마음이니,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마음으로, 말할 때에는 다만 반야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니,

 

佛勅弟子,若和合共住,常行二事,一者、賢聖默然,二者、說法。

“賢聖默然”者,是般若心;“說法”者,說般若波羅蜜。是人從般若心出,說般若波羅蜜;說般若波羅蜜已,還入般若中,不令餘心、餘語得入。晝夜常行,是不休不息。如是得先所說功德。

佛欲令是事明了,故說譬喩:“如貧人失大價寶,常念不離。

菩薩亦如是不離薩婆若心,常行般若波羅蜜,不休不息。”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기를, “만약 화합하여 함께 머무르면 항상  가지의 일을 행할 것이니, 

첫째는 현성은 잠자코 있는 묵연(默然)하여야 하고, 둘째는 법을 설하는 설법(說法)을 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성현으로서 잠자코 있는 현성묵연(賢聖默然)’이란, 바로 반야심(般若心)이요, 

‘법을 설하는 설법(說法)’이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이니, 이 사람은 반야심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을 설해내고, 반야바라밀을 설한 뒤에는 다시 반야 가운데에 들어가  밖의 다른 마음과 다른 말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밤낮으로 항상 이를 행하면서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게 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공덕을 얻게 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일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시고자 비유로 말씀하셨으니, “마치 가난한 사람이  값어치의 보배를 잃게 되면 언제나 생각하면서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살 역시 그와 같아서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지 않고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쉬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爾時,須菩提聞是事,白佛言:“世尊!若一切諸念空,云何菩薩不離薩婆若念?空中,菩薩不可得,薩婆若亦不可得。”

그때 수보리 존자가 이러함을 듣고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일체의 모든 생각이 공하다면, 보살이 어떻게 살바야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지요? 공한 가운데에서는 보살도 얻을  없고 살바야도 얻을  없습니다”고 하였으며, 


佛答:“若菩薩知一切法離自性,非聲聞、辟支佛所作,亦非佛所作,自從因緣出;諸法法相、如、實際常住世閒,卽是菩薩不離般若波羅蜜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만약 보살이, 일체법은 자성을 여의는 것이라서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스스로가 인연(因緣)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제법의 법상은 여(如)요 실제(實際)이니, 항상 세간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안다면, 그것이 곧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행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으며, 


佛自說因緣:“般若波羅蜜空故、離故,不增不減。”

須菩提聞是,復問佛:“若般若波羅蜜性空,云何菩薩與般若合得無上道?”

부처님께서 직접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반야바라밀은 공하여 여의는 것이기 때문에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고 하신 것이며, 

수보리 존자가  말씀을 듣고 다시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약 반야바라밀의 성품이 공하다면, 어떻게 보살이 반야와 합하여서 위없는 무상도를 얻는 것입니까?”라 하였으니, 


佛隨須菩提語:“若菩薩與般若波羅蜜合,則不增不減;諸法如、法性、實際不增不減故,般若波羅蜜不增不減。”般若波羅蜜,卽是諸法如、法性、實際;如、法性、實際,卽是般若波羅蜜。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의 말에 따라 말씀하셨으니,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합한다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이니라.법의 여(如)ㆍ법성(法相)ㆍ실제(實際)는 부증불감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이 부증불감이나니, 

반야바라밀이  여ㆍ법성ㆍ실제요, 여ㆍ법성ㆍ실제가  반야바라밀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此中佛自說因緣:“如如等三法非一非異,般若亦如是。”

世閒法,非一卽是二,不異卽是一;般若波羅蜜則不爾。是故般若波羅蜜無量無邊。空、無相、無作故不增不減;若菩薩得是不增不減,則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若菩薩聞是事,通達無㝵、入佛智慧,雖未作佛,信力故於佛法中亦無疑,不怖、不畏。

所以者何?凡夫著我心故有畏,是菩薩我相斷故無所畏。當知是菩薩卽住阿鞞跋致地,亦能正行般若。

 가운데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여(如)ㆍ법성(法相)ㆍ실제(實際) 등의  가지법이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않는 것과 같이 반야 또한 그와 같다”고 하셨으며,

세간의 법에서는 하나가 아니면  둘이요, 다르지 않으면  하나이지만 반야바라밀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은 무량하고 무변하며,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기 때문에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부증불감인 것이다.

만약 보살이 이 부증불감(不增不減)을 얻는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 것이며,

만약 보살이 이러함을 듣고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면 부처님의지혜에 들어간 것이므로, 비록 아직 부처님이 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믿음의 신력(信力)으로 부처님의 불법 가운데에서 의심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겁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부는 '나'라는 아심(我心) 집착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지만, 이 보살은 나라는 아상(我相) 끊었기 때문에 두려워할 바가 없는 무소외(無所畏)이며, 그러므로  보살은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며, 또한 반야를 바르게 행하고 있다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須菩提聞是菩薩正行般若波羅蜜,是故問佛:“世尊!般若波羅蜜觀一切空、不牢固,是空相爲行般若不?”

佛言:“不也!”何以故?若空無有法,云何行般若?

수보리 존자는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바르게 행한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것은 공하여 견고하지 않다고 관찰하는데 이 공한 공상(空相)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만약 공하여 법이 없는 공무유법(空無有法)이라면 어떻게 반야를 행하겠는가?


“離是空,更有法行般若不?”

佛言:“不也!”何以故?若一切法空、無相、無作,云何離空更有法?是故說“不”。

“그러면  공을 여의고 다시 어떠한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니라. 왜냐하면 만약 일체법이 공(空), 무상(無相), 무작(無作)이라 어떻게 공을 여의고 다시 법이 있겠는가?라”고 하시는 까닭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須菩提聞空非行般若、離空非行般若,一切法皆攝在般若中,

今但問:“般若行般若不?”法不自行,應以異法行,是故言“不”。

수보리는 공이 반야를 행하는 것도 아니고, 공을 여의고 반야를 행하는 것도 아니며, 일체법은 모두가 반야에 포섭되어 있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서는 다만 “반야가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 뿐이니,

법이 스스로를 행하지 못하는 법불자행(法不自行)이니, 다른 법으로써만이 행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復問:“離般若,更有法行般若不?”

佛言:“不。”何以故?一切法攝在般若中,更無法行般若。

다시 묻기를 “반야를 여의고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일체법은 반야 가운데에 포섭되는 것이므로 따로 반야를 행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先來略問行般若者,今問名字因緣:“五衆行般若不?”

佛言:“不。”何以故?是五衆從虛誑和合因緣,不自在故,無住相,云何能行?

위에서는 간략하게 ‘반야를 행하는 것’을 물었지만, 여기에서는 명자(名字, 이름)의 인연으로 물으면서 “오중(五衆)이 반야를 행합니까?”라고 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중은 거짓으로부터 화합한 인연이라 자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주상(住相) 없거늘 어떻게 행할  있겠는가?


須菩提更問:“若菩薩假名字空不實故不行般若,今六波羅蜜等諸助道法行般若波羅蜜不?”

佛言:“不。”何以故?如五衆和合有故不能行,是諸法亦如是。

“色等法空相、不牢固,如、法相、法位、法住、實際,是法行般若不?”

佛答:“是法無爲法,不生不滅,常住自性故不行。”

수보리 존자가 다시 묻기를 “만약 보살이 임시로 붙인 가명자(假名字)는 공하여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반야를 행하지 않는것이라면, 지금의 6바라밀 등의 도를 돕는 모든 조도법(助道法)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그렇지 않느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왜냐하면 오중은 화합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행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모든 제법 또한 그와 같아서 물질(色) 등의 법은 공한 공상(空相)이라서 견고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묻기를 “여(如)ㆍ법상(法相)ㆍ법위(法位)ㆍ법주(法住)ㆍ실제(實際)의 법이 반야를 행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법은 무위(無爲)의 법이라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항상 자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불행(不行)이다”고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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