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智度論 釋大如品 第五十四 卷七十二 卷七十一 

聖者龍樹菩薩造 용수 보살 지음.
後秦龜茲國三藏法師鳩摩羅什奉
 詔譯 후진 구자국 삼장법사 구마라집 소역  

54. 대여품(大如品) 풀이함 2

 

▶論. 問曰:若般若波羅蜜無不甚深,何以或時讚甚深?

▷논. 묻나니, 만약 반야바라밀이 매우 깊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때에만 ‘매우 깊다’고 찬탄하는 것입니까?


曰:般若波羅蜜中,或時分別諸法空,是淺;或時說“世閒法卽同涅槃”,是深。色等諸法卽是佛法,聽者聞說。心信佛語,自智慧不及故言“甚深”。譬如河水,有洄復深處、有淺處。

설하나니, 반야바라밀에서는 간혹법의 공(空) 분별하나니, 이것은 바로 얕은 찬(淺)의 것이요,

혹은 “세간법이  열반과 동일하다”고 설명하나니, 이것은 바로 깊은 심(深)인 것이다.

물질(色) 등의법이  부처님의법이니, 듣는 청자(聽者)들이 이렇게하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지만 스스로의 지혜로서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깊은 심심(甚深)이다’고 말하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를 때, 깊은 있고 얕은 곳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曰:諸天所讚法甚深,一切世閒所不能信,何用說爲?

묻나니, 모든 천자들이 찬탄한 법은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라서 일체 세간으로서는 믿을  있는 것이 아니거늘, 어떠한 필요로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答曰:一切有二種:一者、名字一切,二者、實一切。如此中說名字一切,以多不信故言“一切”。如此中說:“微妙寂滅,智者能知”,知者必有信,先信後知故。復次,是般若波羅蜜,惟佛能知。衆生聞所說而信者,此中不名爲信;智慧知已,名爲信。

답하나니, ‘일체(一切)’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름으로서의 일체명자(名字一切)요, 둘째는 진실로서의 실일체(實一切)이니,

여기에서는 이름으로서의 일체를 말하는 것으로, 대부분이 믿지 않기 때문에 ‘일체(一切)’라 하며, 

 가운데서는 “미묘한 적멸(寂滅)의 지혜가 있는 이만이   있다”고 하였으니, 지혜가 있는 지자(智者) 반드시 믿음이 있으니, 먼저 믿고  뒤에 알게 되는 선신후지(先信後知)이 때문이며, 

또한  반야바라밀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나니, 중생은 설하는 바를 듣고 믿는 신자(信者) 여기에서는 믿는 '신(信)'이라 말하지 않고, 지혜로써 알고  뒤에야 믿는 것을 '신(信)'이라 하였다.


問曰:若爾者,何以言“微妙,智者能知”?

묻나니,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 때문에 “미묘한 지혜의 있는 지자(智者)만이 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答曰:一切世閒無能遍盡知諸佛智者,寂滅,智者能知少分。如須陁洹於無上道得少分,所謂斷三結;如是諸道,展轉增多。若世閒都不信者,云何有諸道?以是故言“寂滅,智者能知”。

답하나니, 일체 세간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가 적멸(寂滅)하다는 것을 두루  아는 이가 없으며, 지혜 있는 지자만이 조금  뿐이니,

마치 수다원이 유신삼결(有身三結), 계금취결(戒禁取結), 의결(疑結)의 삼결(三結)을 끊어 낸 것과 같은 것은 위없는 무상도(無上道)에 대하여 작은 일부분을 얻은 것이니, 이와 같이 점차로 여러 도(道)를 더하여서 많아지는 것이며, 

만약 세간에서 전혀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든 도(道)가 있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적멸을 얻은 지혜 있는 지자는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阿耨多羅三藐三菩提卽是般若波羅蜜,但名字異, 在菩薩心中爲般若,在佛心中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中說“色等法卽是薩婆若,薩婆若卽是色等法。”此中說“色等法如、薩婆若如,無二無別”。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다만 이름만 다를 뿐이니,  

보살의 마음속에 있으면 반야라 하고, 부처님의 마음속에 있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것이며, 

여기에서는 “물질(色) 등의 법이  살바야요, 살바야가  물질(色) 등의 법이다”고 하며, 

“물질(色) 등의 법의 여(如)와 살바야의 여(如)는 둘이 아니고 다른것도 아닌 무이무별(無二無別)이다”고 하였다.


佛可諸天子意,更說因緣:“如名色等諸法眞實相。”譬如除宮殿及諸陋廬,如燒栴檀及雜木,其處虛空無異;色及薩婆若等諸法,求其實,皆是如。以是義故,佛初成道時,心樂嘿然,不樂說法 知甚深法,凡夫人難悟故。復次,是法無二故甚深,如虛空故甚深,如、法性等甚深故甚深。

부처님께서는 모든 천자들의 뜻을 옳다고 하시면서 다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물질(色) 등의법은 진실한 진실상(眞實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궁전과 누추한 집을 제거한 것과 같으며, 마치 전단나무와 잡목(雜木)을 모두 태워버린 것과 같아서, 그 곳은   허공과 다를  없으며, 물질(色)과 살바야 등의 제법의 진실을 구한다면, 그 모두가 한결같이 여여한 여(如)이다”고 하신 것이며,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처음 도를 이루신 성도(成道)하셨을 때, 마음으로는 잠자코 계시기를 좋아하신 심락묵연(心樂嘿然)하시면서 설법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나니, 매우 깊은 심심법(甚深法)을 범부들이 깨치기 어렵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며, 

또한  법은 둘이 아닌 무이(無二)이 때문에 매우 깊으며, 허공과 같기 때문에 매우 깊으며, 법성(法性) 등과 같이 깊은 것이기 때문에 매우 깊은 심심(甚深)한 것이다.


爾時,諸天子知是法無可取相,白佛言:“是所說法,一切世閒所不能信,是法不爲受色等法故說。”佛可其言:“若有菩薩爲受色等故行菩薩道,不能修般若波羅蜜等諸功德。”

그때 모든 천자들은  법은 취할  있는 상(相) 없음을 알고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말씀하신  법은 일체 세간에서는 믿을  없는 것이요,  법은 물질(色) 등의 법을 받지 않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을 옳다고 하시면서 “만약 어떤 보살이 물질(色) 등을 받기 위하여 보살도를 행한다면 반야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을 닦을  없다”고 하셨으며, 


須菩提白佛言:“世尊!是般若波羅蜜相,隨順一切法,無所障㝵。”何以故?於般若波羅蜜亦不著。說不障㝵因緣:“如虛空等故。”譬如壁中先有空相,小兒以橛釘之,力少故不入,大力者能入;行者亦如是,色等諸法中,自有如實相,智慧力少故,不能令空,大智者能知。是故說:“諸法無㝵,如虛空平等。”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의 상(相) 일체법에 수순(隨順)하면서도 장애가 없으니,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도 역시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으니, 

장애되지 않는 불장애인연(不障㝵因緣)은 마치 허공 등과 같다고 설하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마치 벽은  공상(空相)이라서 어린아이가 말뚝을 박으려 하여도 그 힘이 적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지만, 힘센 이가 박으면  들어가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행자 이와 같아서 물질(色) 등의법에는 스스로 여실한 여실상(如實相) 있어서, 지혜의 힘이 적으면 공하게  수가 없으나,  지혜가 있는 대지자(大智者)  알기 때문에 “제법은 장애가 없는 무애(無㝵)이며 마치 허공과 같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色等法不生,亦不可得,以是故名“不生”。非但色等不生,若不生法可得,則非畢竟空,非名無得。無住處亦如是

물질(色) 등의 법은 불생이며 또 얻을 수도 없는 불가득이기 때문에 '나지 않는 불생(不生)'이라 하는 것이며, 

비단 물질(色) 등만이 불생인 것이 아니니, 만약 불생법(不生法) 얻을 수가 있는 가득(可得)이라 한다면 곧 필경공(畢竟空)도 아니요, 얻을  없는 것이라 할 수 없나니, 머무르는 곳이 없는 무주처(無住處亦) 역시 그 같은 것이다.


爾時,諸天子白佛言:“世尊!須菩提隨佛生。何以故?所知所說皆與空合。”

그때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니, 왜냐하면 아는 것과 설하는 것이 모두 공(空)과 더불어 일치하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復次,經說有三種子:一者、不隨順生,二者、隨順生,三者、勝生。

世人皆願二種子:隨順子,勝子。佛法中惟欲一種:隨順生,以無有勝佛故。

또한 경에서는 ‘세 종류 아들(子)이 있으니,

첫째는 수순하지 않고 출생한 불수순생(不隨順生)요, 

둘째는 수순하여 출생한 수순생(隨順生)이며, 

셋째는 뛰어나게 출생한 승생(勝生)이 있다’고 설하셨으니,

세간 사람들 모두는 수순하여서 출생한 수순생(隨順生) 뛰어나게 출생한 승생(勝生)의  가지를 원하지만,

부처님의 불법에서는 오직 수순하여 출생하는 수순생(隨順生),  가지만을 바랄 뿐이니, 부처님보다  뛰어난 이가 없기 때문이다.


佛子有五,皆從口生、法生:須陁洹乃至阿羅漢,入正位菩薩。辟支佛雖佛法中種因緣,無佛時自能得道,不得言從佛口生,因緣遠故。諸漏盡者,是隨順生。須菩提於漏盡中,常樂畢竟空,是隨順生。何以故?所行法不可破壞如虛空,佛法如是相,是名隨佛生。

불자(佛子)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모두 입으로부터 출생한 종구생(從口生)과 법으로부터 출생한 종법생(從法生)으로서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까지와 정위(正位)에 들어간 보살이며,

벽지불은 비록 부처님의 불법 가운데에 인연을 심었을지라도,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에 혼자 스스로 도를 얻었으므로 ‘부처님의 입(가르침)으로부터 출생한 종구생(從口生)’이라  수는 없으니, 인연이 멀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다한 누진자(漏盡者)라 바로 수순하여서 출생한 수순생(隨順生)이다. 

수보리 존자는 번뇌가 다한 누진자(漏盡者) 가운데에서 항상 필경공을 좋아하므로 그는 수순생(隨順生)이니, 왜냐하면 행하는법(行法)을 파괴할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불법은 이와 같은 상(相)이니, 이를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다”고 하는 것이다.


問曰:何以不說入法位菩薩隨順佛生?

묻나니, 무엇 때문에 법위(法位)에  보살을 부처님에 수순하여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라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答曰:有人言:漏未盡故不說,須菩提漏盡故說。

답하나니, 어떤 분은 말하기를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요, 

수보리 존자는 번뇌가 다하여 누진(漏盡)하였기 때문에 말한다”고 하며, 


有人言:入無餘涅槃者,是第一淸淨。阿羅漢末後身住有餘涅槃,近無餘涅槃門故說。

菩薩雖有深利智慧,往返生死中,是故不說。

 어떤 말하기를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가 바로 제일 청정한 이이니, 아라한의 마지막 몸은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무르고 있으되, 무여열반의 문에 가까웠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만,

보살은 비록 깊고 예리한 지혜가 있을지라도 생사(生死)는 가운데에서 오고 가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고 하며, 


有人言:般若有二種:一者、唯與大菩薩說,二者、三乘共說。共聲聞說中,須菩提是隨佛生;但與菩薩說時,不說須菩提隨佛生。何以故?法性生身大菩薩,是中無有結業生身,但有變化生身,滅三毒、出三界,教化衆生、淨佛世界故,住於世閒,此中都無一切聲聞人。佛大慈悲心,菩薩心亦爾,是名菩薩隨生;須菩提但取涅槃故,不說隨生。此經共二乘說。須菩提知般若波羅蜜甚深,法性生身菩薩力大。

어떤 말하기를 “반야에는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살들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요, 둘째는승(三乘) 모두에게 설하는 것이니,

성문들과 함께하면서 설하실 때,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라 하시지만,

보살들만을 위하여 설할 때에는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라 설하지 않으시나니, 

왜냐하면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대보살 가운데에는 번뇌의 결사에 매여 태어나는 몸인, 결업생신(結業生身)이 없으나,  다만 변화로 태어나는 몸인, 변화생신(變化生身) 있을 뿐이므로, 탐진치의 3독(毒)을 없애고 삼계(三界)를 벗어나서 중생을 교화하여서 부처님의 불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세간에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하나,  가운데에는 성문인은 전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대자비심과 보살심 또한 그러하므로, 이를 보살을 수순하여 출생하는 보살수생(菩薩隨生)이라 하며, 

수보리 존자는 다만 열반만을 취하기 때문에 수순하여 출생하는 수생(隨生)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경은 이승에게 함께 설하고 있는 것이므로, 수보리 존자는 반야바라밀의 매우 깊음을 알고 있으므로 법성생신의 보살 만큼 힘이 크게 있는 것이다.


諸天雖讚,不應受,語諸天子言:“諸法如一相,所謂無相,是因緣故隨佛生,如不異故。”如經中說如:“如來如相不來不去,須菩提如相亦不來不去。”

비록 모든 하늘의 천자이 찬탄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모든 천자들이 다시 말하기를 “제법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은 일상(一相)이라서 이른바 무상(無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을 따라 출생하는 수불생(隨佛生)이니, 한결같은 여(如)와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기 때문입니다"고 하였으니, 

마치 경에서 설하시는 바와 같이, “마치 여래의 한결같이 여여한 여상(如相)은 오지도 가지도 않는 불래불거(不來不去)인 것과 같이 수보리 존자의 여상(如相) 역시 불래불거(不來不去)이다”고 하신 것과 같으며,


復次,如來如畢竟空,一切法如亦畢竟空。一切法如中攝須菩提如,是故須菩提用如來如故隨佛生。復次,如如來如無憶想分別、常住、如虛空,須菩提如亦如是。是故須菩提隨佛生。

또한 여래의 여(如)는 필경공이요, 일체법의 여(如) 또한 필경공이라, 일체법의 여(如)는 수보리 존자의 여(如)를 포함하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는 여래의 여(如)를 이용하여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이며, 

또한 여래의 여(如)는 허공과 같이 상주하는 것이며, 생각이나 분별이 없는 것과 같이 수보리 존자의 여(如)도 그와 같기 때문에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인 것이며, 

 

復次,如如來如得無㝵解脫故,一切法中無罣㝵;一切法如亦如是,於一切法中亦無罣㝵。如來如、一切法如,一如無異;須菩提如亦入一切法如故,是以隨佛生。

復次,諸法如相無作、無作者,如來如相亦如是;須菩提如,一切法如攝,故隨佛生。

또한 마치 여래의 한결같은 여(如)는 장애 없는 무애해탈(無礙解脫)을 얻기 때문에 일체법 가운데에서 거리낌과 장애의 괘애(罣㝵)가 없는 것과 같이, 일체법의 여(如) 역시도 그와 같이 일체법 가운데에서 괘애(罣㝵)가 없나니,

여래의 여(如)와 일체법의 여(如)는 동일한 일여(一如)이니 다름이 없는 무이(無異)인 것이다.

수보리 존자의 여(如) 또한 일체법의 여(如)에 들기 때문에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인 것이며, 

또한 제법의 여한 여상(如相)은 지음도 없는 무작(無作)이고, 짓는 이도 없는 무작자(無作者)이며, 여래의 여상(如相) 또한 그와 같나니, 수보리 존자의 여(如)는 일체법의 여(如)에 포섭되기 때문에 부처님을 따라 출생한 수불생(隨佛生)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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